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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충무공 순국한 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98년11월19일(양력12월16일) 남해도 관음포 앞바다에서 전사하셨습니다. 백의종군로 순례단은 12월12일(수) 충무공 묘소를 참배해 추모제를 지낼 예정입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이 글을 쓰던 어제 명량 해역에서 충무공이 사용했었을 총통 3점을 발견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충무공이 최후의 결전을 위해 노량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거쳐 간 나로도에서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날입니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가호로 꼭 성공하기를 빕니다.
1. 전라도를 유린하라
정유년7월16일 칠천량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괴멸시킨 일본은 수륙 양면 작전을 마음 놓고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여 명의 일본군 전투서열을 재편성했다. 그들은 전주 함락을 목표로 7월말에 진격을 개시했다. 조선 땅에서 전라도는 임진년 이래 5년 동안 온전했다. 선조는 전라도로부터 항전의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히데요시는 전라도를 완전히 파괴하고 전멸시키라고 명했다. 이는 임진년의 명령과는 다른 잔혹한 명이었다. 히데요시는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죽은 자의 코를 베어 일본에 보내도록 했다. 군인의 코와 백성의 코를 가리지 않았다. 일본군 전투서열은 이러하다:
1. 좌군(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장수: 코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요시도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 16명, 병력 49,000. 해로로 전라도에 상륙하여 전주 공격
2. 수군(사령관: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장수 4명, 병력 7,200. 남해로 진군하는 좌군을 지원
3. 우군(사령관 모리 히데모토 毛利秀元) 장수: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등 7명, 병력 64,000. 경상도와 전라도 내륙을 관통하여 전주 공격
4. 예비군단(총사령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秋) 직할 10,000, 지원병 10,000. 부산 북방 68킬로 밀양으로 진군하여 좌우양군의 전주공격 상황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
당시 조명 연합군의 대비는 아래와 같다:
조선군 경상도 10,000, 전라도 1,500, 명군 양원은 남원에 3,000, 진우충은 전주에 2,000, 오유충은 충주에 4,000, 마귀麻貴는 서울에 수백 명, 도합 명군 1만 명. 연합군 전체 2만여 명.
남해안에 상륙한 일본 좌군은 8월16일 남원성의 군민 3,000명을 전멸시켰다. 명군 해생은 일본군 57,000을 보자 도주했다. 좌군은 8월20일 전주에 무혈입성했다. 명군 진우충은 싸우지 않고 도망했던 것이다. 다음날 내륙을 진군한 일본 우군도 전주에 입성했다. 열흘간 전주성과 주변 지역을 유린, 능욕, 약탈, 살육, 납치, 파괴한 좌우군은 서울을 목표로 진격했다. 패퇴한 조명연합군은 서울에 집결했는데 마귀 휘하에 8,800, 이원익 농민병 8,000이고, 평양에 명군 경리 양호가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2. 명은 전투를 피하다
9월7일 직산에서 히데모토의 선봉 구로다 나가마사 黑田長政 보병 3,000과 마귀麻貴의 선봉 해생解生의 기병 2,000이 충돌했다. 그 후 양군 주력이 합쳐져 전투를 했는데 명군은 전사 200, 왜군은 전사 29로 끝났다. 치열한 전투가 아니었다. 9월 중순에 양군은 휴전에 동의하여 직산-진천 선에서 대치했다.
한편 일본 수군은 도토 고코 藤堂高虎,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이 원균의 후임으로 다시 등장한 이순신 함대와 대치했다. 그 왜군은 9월16일, 명량에서 소규모 이순신 함대에 대패했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기세를 꺾고 명량 참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순신 일가를 몰살 시키는 특공작전을 계획했다. 직산에서 조명연합군과 대치 중이던 일본군은 정예의 칼잡이 50명을 선발했다.
3. 이순신 일가를 멸살시켜라
9월 하순, 아산 백암리에 잠입한 특공대는 이순신의 집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근처의 마을도 모두 분탕했다. 특공대는 산으로 피신한 조선 백성을 발견했다. 조선 청년들이 가족을 깊은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특공대를 저지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무기도 훈련도 없는 청년들은 살인 전문가에게 처절하게 당했다. 어머니와 어린 조카를 피신시킨 청년 면은 장가도 들기 전에 일본군에게 참살되었다. 이순신의 부인은 처참히 살해된 아들을 무릎 위에 안고 통곡하다 기절했다. 그 장면은 바로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죽어 내려진 예수를 무릎에 안고 비통해 하는 피에타였다.
이순신의 막내아들 면(21세)은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해(1576년)에 태어났다. 당시 32세의 이순신은 초임 장교로서 엄동설한 12월에 함경도 삼수갑산 동구비보 최전방으로 최초 발령 받았다. 솜바지를 입은 이순신은 춥고 배고픈 천리 길을 가면서 막내아들 면이 잘 자라기를 빌었었다.
9월16일 명량에서 크게 이긴 이순신은 아직도 수군의 형세가 외로워 진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9월17일 당사도(무안군 암태도 동편), 어의도(목포 서편), 19일 법성포(영광군), 20일 위도(영광군), 21일 고군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로 옮겼다.
4. 막내를 잃은 이순신은 복수를 맹세하다
이순신은 10월1일 선유도에서 “아산 고향이 적에게 불타 버렸다”는 공문을 받았다. 마음이 불안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 이순신은 다음날 일찍 아들 회를 배에 태워 고향으로 보내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보름 후, 소식이 왔다. 당시의 일기를 보자:
<<10월14일 맑다. (전략)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여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했음을 알았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중략)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후략)>>
사흘이 되었는데 슬픔은 더해갔다. 영내에서는 마음 놓고 통곡할 곳도 없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치 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낡은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목 놓아 울었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순신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하루 속히 나라의 치욕을 갚으라.” 6개월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순신은 밖으로 뛰어나와 영으로 달려갔다. 옥에 갇혀 있던 왜적 13명을 베었다. 왜적에 부역한 송언봉도 베었다. 상복을 입고 7일이 지났건만 비통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적에게 붙었던 윤해, 김언경을 베었다. 보름이 지나도 마음의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에 괴로웠다. 저녁나절에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 김신웅을 베었다. 선비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도 목 베었다. 열아홉을 베어도 나라의 치욕은 조금도 씻기지 않았다.
5.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잘 (준비해) 나아가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호부대설국욕 好赴大雪國辱 이순신은 오직 이 일념으로 나날을 수군 재건에 힘썼다. 치욕과 통한의 정유년이 저물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격려했다.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상제라 하여 방편을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했다. 사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다.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아가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고 했다. 예기에도 ‘원칙과 방편’이 있으니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짐작하여 소찬에 더하여 방편을 좇도록 하라.”
선조는 고기반찬을 하사했다.
무술년(1598)이 되었다. 명군은 전투하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었다. 적은 남도를 분탕하며 6개월간 흉년 든 조선을 약탈했으나 그들도 점점 헐벗고 굶는 날이 많아졌다. 명군도 분탕질을 했다. 그들도 먹을 것이 없었다. 조선 백성은 죽은 자의 살을 베어갔다.
2월18일, 이순신은 진을 목포 앞 보화도(무안군 이로면 고하도)에서 고금도(완도군 고금면 덕동리)로 옮겼다. 적은 울산에서 순천까지 해안선에 30여개의 견고한 성을 쌓고 누각이 높은 건물을 세우며 장기전에 대비했다. 내륙의 일본군은 조선 의병의 보급로 차단으로 굶어 죽게 되었다. 총사령관 히데이에, 히데모토, 요시나가 등의 장수가 병력을 데리고 철군했다. 조선에는 64,700명의 일본군이 남았다.
6. 반격
6월에 명이 대군을 증파했다. 쌍방의 병력이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수군 도독 진린도 수 백 척의 전선으로 19,000의 병력을 싣고 고금도의 이순신 진에 왔다. 조명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8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지만 조선의 일본군 장수들도 곧 알게 되었다. 9월20일 남해안까지 진격한 조명연합군은 왜성에서 항거하는 일본군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화해를 시도했다. 진린은 동의하고 이순신을 설득했다.
“적이 물러난다니 우리가 피를 흘릴 필요가 없지 않소? 그냥 가게 놓아둡시다.”
‘이자를 베어버릴까?’ 이순신은 침을 삼키고 분을 참았다. 이순신은 수륙양면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유정에게 보내 제의했다.
유정은 10월초에 작전을 승인했다. 이순신은 전선 150척, 협선 200척에 삼도 수군 13,000을 태우고 출항했다. 진린도 전선 100여 척으로 이순신 함대의 뒤를 따랐다. 수군은 광양만을 봉쇄했다. 그리고 유정의 지상군이 일본군을 바다로 몰아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유정은 오지 않았다.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유정의 출전을 지연시키는 계략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정은 고니시가 연이어 상납하는 전리품을 챙기고 있었다. 그는 10월10일 철수했다. 고니시는 유정의 압박을 피해 시간을 벌었지만 바다를 통해 나갈 수가 없다. 이순신 함대가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7. 고니시의 계략
유키나가는 진린을 이용하기로 계략을 꾸몄다. 진린에게 철군 협상 명목으로 사절을 보내어 온갖 잡다한 사항을 협의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 사이에 몰래 요시히로 義弘의 함대를 조금씩 바다 밖으로 내보내 이순신 함대를 뒤에서 공격하는 척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순신 함대를 외해로 유인하고 그 틈에 유키나가의 본대가 노량해협을 빠져나가겠다는 작전이다. 왜선은 왜구 倭寇의 ‘빼앗고 튀는 전술’에 적합하게 건조했으므로 조선 배 보다 가볍고 빠르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이 끝내 대응을 아니 하자 전과 없이 물러났다. 좌수영을 거쳐 10월 12일 나로도에 이르고, 고금도까지 물러났다. 수군은 계속 바다 위에 있을 수 없다. 격군이 쉬어야 하고 보급도 받아야 한다.
11월 8일 이순신은 도독부에 가서 진린을 만났다. ‘11월10일부터 일본군이 철수를 시작한다’는 첩보를 들었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작전을 합의했다. 연합함대는 11월 9일 고금도를 출항하여 나로도를 거쳐 11월 10일 여수 전라좌수영에 도착했다. 고니시는 광양만에서 육군을 배에 태워 노량으로 빠져나갈 계획이다.
“아들의 원수를 살려서 보낼 수 없다.”
이순신은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11월14일 고니시는 돼지 두 마리, 술 두통을 진린에게 바쳤다. 11월16일, 고니시는 말, 창, 칼을 또 바쳤다.
8. 하늘에 빌다
11월18일 18시, 경상도 쪽에서 수많은 전선이 남해도와 노량의 해협을 통과하려고 밀려온다는 첩보가 도착했다. 순천 광양만 예교 앞바다를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은 22시에 격군을 재촉해 함대를 동진시켰다. 노량을 막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24시, 이순신은 손을 씻고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차수약제 사칙무감 此讐若除 死則無憾”하고 하늘에 빌었다.
9. 칼에 새긴 소망을 이루다
진린은 이순신 함대의 뒤를 따랐다. 진린이 늑장을 부렸다기보다는 이순신이 서둘러 앞장을 섰다. 11월19일 02시, 이순신은 노량 해협에 이르렀다. 격군들은 8시간의 항해로 피로했다. 적선 500여척과 밤새워 싸우고 아침이 될 때까지 1대5의 비율로 계속 싸웠다. 어둠 속에 피아가 뒤섞였다. 이순신의 주위는 모두 적선이고 적선의 주위에는 고립된 조선 수군이 있었다. 혼전은 이순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전투다.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도 없다. 모든 곳에서 날아오고 모든 곳으로 날아갔다. 이순신은 원수를 보았고 원수도 이순신을 보았다. 송희립이 이순신을 방패로 가로 막은 것은 이순신이 더 이상 활을 들어 쏠 수 없게 된 다음이었다. 원수들의 시체가 피로 물든 바다를 덮었다. 일휘소탕 혈염산하 一揮掃蕩 血染山河, 이순신이 칼에 새긴 소망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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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저 세상에서 이 나라를 걱정하며 잠들어 계신 충무공의 묘소를 참배합시다. 처참한 모습으로 전사한 막내아들을 가슴에 안고 비탄으로 혼절한 장군의 부인을 묵상하며 순례합시다.
1. 일시: 2012.12.12(수) 10:10
2. 집합장소: 전철 온양온천역 1번 출구
3. 전철 시간표: 온양온천행 전철의 종점은 신창입니다.
서울역07:50--용산07:56--노량진07:59--영등포08:06--신도림08:09--구로08:10--
가산디지탈08:15--금정08:34--수원 08:52--오산09:10--평택09:29--천안09:50--온양10:07
. 4. 준비물: 방한복장, 여벌상의, 식수, 중식, 행동 간식5. 회비: 없음. 뒤풀이 비용은 각자 부담
6. 참가 자격: 제한 없음.
7. 도보 거리와 소요시간: 16km, 5시간
8. 일정
온양온천역(10:10)>민속박물관>곡교천둑방길>현충사 참배/중식(11:30-13:00)
>곡교천길>응봉면사무소>충무공묘소(추모제 15:30-16:30)
>버스로 이동>온양온천역 뒤풀이(17:00)>해산(18:00)
9. 기타: 참고자료 제공. 연락처: 금오랑(010-3160-2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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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성한, 시인과 사무라이. 2003
김영환, 이순신의 해전과 호남인의 애국정신. 2004
김훈, 칼의 노래. 2001
조중화, 바로잡은 임진왜란사. 1998
최두환, 새번역 난중일기. 1996
하우봉,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서의 임진전쟁.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