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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육의 여명 1>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김붕래
석조전이 덕수궁 경내의 건물. 배재. 이화. 정동교회도 보입니다
1. 언더우드와 연세대학
연세대학 언더우드 기념관(1926년 건축)과 동상
1885년 4월5일 아침, 마침 그날은 부활절이었습니다.
훗날 한국 교육과 선교 역사의 큰 기둥으로 기록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나란히 인천 제물포 부두에 상륙했습니다. 아직 미혼이던 언더우드 목사는 레이디 퍼스트라고 하여 아펜젤러 부인에게 한국 땅을 처음 디디는 영광을 양보했다는 이야기가 미담으로 전해집니다.
독신인 언더우드 목사는 무난히 서울로 입성할 수 있었으나, 아펜젤러 부부는 갑신정변(1884년)의 여파로 정국이 혼미하고 외국 여성에 대한 기피 등 조건이 좋지 못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요코하마에서 입국 허가를 기다리던 아펜젤러는 두 달 뒤인 6월 20일 한국 입국 허가를 받았는데, 이 때 일본에 있던 스크랜턴 대부인과 2대 제중원(광혜원) 원장을 지낸 헤론 선교사도 함께 오게 되어 개신교 목사들에 의한 교육과 의료 선교 시대의 막이 열렸습니다.
이 시기의 주역을 한 분 더 소개할 수 있으니, 한 해 전 1884년 외국인 공의(公醫) 신분으로 입국해 왕립병원격인 광혜원(제중원)을 운영하던 H. N. 알렌 선교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알렌 선교사는 갑신정변 당시 심한 부상을 입었던 민영익 우영사(右營使)의 생명을 구해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의사입니다. 지금의 재동 헌법재판소 터에서 최초의 신식 병원 광혜원(후일 고종이 제중원이란 편액 하사)을 운영했는데 후일에는 한국과 미국 공사관의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던 분입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 - 元杜尤) 목사는 서울에 도착하여 알렌이 개설한 광혜원에 근무하면서 한국어를 익혔습니다. 1886년에는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을 모아 고아원 겸 학교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현재의 경신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자신의 사랑방에 14인의 교인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던 것이 결실을 맺어 오늘날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장로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15년에는 종로 YMCA 건물 한편에 ‘경신학교 대학과정’을 설치한 것이 발전하여 현재의 연세대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30여 년 간 선교와 교육 사업에 전심하다가 58세를 일기로 타계한 언더우드 목사님의 유해는 마포구 한강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안장돼 있습니다. 조선을 유달리 사랑했던 그는 이름도 한국식으로 ‘원두우’라 불리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격무에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병원에서 별세했는데 마지막 말이 ‘거기에 묻히고 싶다.’라는 유언이었습니다. 양화진 묘역에는 함께 교육과 선교에 헌신하며, 시의(侍醫)로 명성황후의 건강을 돌보았던 아내 홀튼 여사. 3.1 운동 당시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상에 폭로하기도 했던 맏아들 원한경(H.H.언더우드) 전 연희전문 총장 내외,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자진 미군에 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과 휴전협정에 크게 공헌한 손자 원일한(H.G.언더우드) 박사도 같이 묻혀 있습니다. 영어보다 한국말이 먼저 나왔다는 원일한 박사에게 어디 원 씨냐고 물으면 ‘연세 원 씨’라 대답할 만큼 언더우드 일가는 연세대학교를 사랑하였습니다. 3대에 걸친 한국 사랑의 뜨거운 자취는 아버지 아들 손자가 나란히 잠든 마포 양화진 묘역에서 빛을 발하고, 신촌 연세대학 교정에 동상으로 우뚝하게 서 있습니다.
갑신정변 때 열세 곳이나 자상(刺傷)을 입은 민영익 우영사를 외과수술로 살려내는 등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선보였던 H. N. 알렌 선교사는 고종의 후원을 받아 1885년 광혜원(같은 해 제중원으로 개명)을 세웠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입니다. 이것을 모태로 제중원의학교가 생기고, 1904년에는 미국 부호 헨리 세버런스가 기탁한 설립 기금으로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에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세브란스의대의 전신입니다. 1957년에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가 합쳐져서 연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2.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1885년 6월에 재입국한 헨리.G.아펜젤러 목사는 덕수궁 옆 정동(貞洞) 언덕의 한옥 한 채를 7,250냥(568불)에 구입합니다. 방 두 개를 터 교실을 만들고 장차 의사가 되겠다는 이겸라 고영필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자신도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배재고교의 첫 출발입니다. 다음 해, 1886년에 고종은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사액(賜額)을 내리고 위탁 교육생도 10여명 의뢰하여 학교의 면모가 제대로 갖춰지게 됩니다.
1887년 학생이 67명으로 늘자 현재 정동 배재빌딩 자리에 있는 초가집 여러 채를 3천 냥에 매입하여 그 자리에 벽돌 양옥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벽돌로 지은 양관(洋館)입니다.
학생들은 아직 특정 교복은 없었고, 모두 갓 쓰고 긴 도포와 행전 차림에 장죽도 들고 다녔습니다. 1897년에 와서야 교복과 교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 외에 헐버트, 길모어, 노블 부처, 서재필, 윤치호 등이 교육을 담당했는데, 특히 헐버트가 쓴 <사민필지(士民必知)>는 세계의 지리와 문화를 한글로 소개하여 많은 지식인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서재필(徐載弼)은 1896년 5월 21일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세계정세·정치학 등의 특강을 하였는데 강의에 자극을 받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 단체가 조직되고 <협성회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주시경 등이 배재학당 출신이고. 나도향, 김팔봉, 김소월 등 많은 문인들이 배재에서 공부했습니다.
정동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보던 아펜젤러 목사는 1887년 근처 집 한 채를 사들여 예배당을 꾸렸는데 이것이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시발점입니다.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세워 교육과 선교활동에 매진하던 아펜젤러는 1902년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차 목포로 가다가 군산 선유도 근방에서 해난사고로 배가 침몰되는 바람에 45세를 일기로 수장되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 신교육이 밝아 오던 첫해, 1885년 11월 8일에 한국 최초의 서양인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바로 아펜젤러의 큰딸 앨리스 아펜젤러입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이 산바라지를 했다는 미담도 전해집니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미국에 가서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한국에 와 이화학당 교수로, 당장(학장)으로 있으면서 이화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신촌에 새 교사를 지어 교세를 확장시킨 영원한 이화인으로 존경 받고 있습니다. 1950년 뇌일혈로 쓰러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그녀의 묘비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묻혀 한국의 흙이 된 고 아펜젤러 선생의 묘‘라는 묘비명이 적혀 있습니다.
큰아들 헨리. D.아펜젤러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배재학당 4대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3.1 운동의 여파로 혹독해진 일제의 탄압에 맞서 배재의 도약과 중흥을 설계한 교육자입니다. 1953년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뉴욕 감리교 병원에서 임종한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한국으로 건너와 마포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 곁에는 수장되어 시체가 없는 아버지 아펜젤러 1세의 추모비가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추모비에는 1885년 4월 5일 이 땅을 처음 밟으면서 올린 기도의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 곳에 왔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3. 스크랜턴과 이화학당
1887년 당시의 이화학당 건물,사진 왼편에 학생들, 건물 중앙에 스크랜턴대부인
1895년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한 교육 선교사, 메리. F.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 달 먼저 와 있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정동(貞洞)에 거처를 마련하고 53세 늦은 나이에 여자아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시병원(施病源 - 정동병원)이란 진료소를 개설합니다. 이것이 ‘동대문 시병원 분원’,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발전해 후일 이화여대 의과대학이 됩니다. 1896년이 그 위대한 시발점입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시구문(중구 광희문) 밖에 버려진 아이를 치료해 교육하기도 하고, 학생의 안전을 약속한다는 서약서도 쓰며 학생을 모셔(?)오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교육을 시작했는데, 1887년 고종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사액을 내리고, 1889년 이경숙 선생이 스크랜턴 대부인의 비서 겸 수양딸이 되어 학교 경영에 참여하면서부터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고, 학생 대다수는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집안에 일이 생겨 본가로 갈 때는 기수(旗手 -정부에서 외국인 보호를 위해 파견한 무관)가 대동하여 학생을 보호하였다 합니다. 손탁 여사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손탁호텔’을 사들여 기숙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화여고 구내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앞에는 <손탁 호텔 터>란 표지석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손탁호텔’은 구한말 최고의 사교장으로 정가(政家)의 귀빈들이 모여 가배차(커피)를 마시기도 했던 유서 깊은 사교장이었습니다.
7, 8세의 어린 여자 아이가 이화학당에서 초등, 중등 과정을 공부하며 10여년을 보내면 당시 기준으로서는 과년한 처녀가 됩니다. 여기저기서 혼처가 나타날 때는 학당 교사가 신랑감을 엄선해서 시집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혼수도 학교서 책임을 졌는데 이불 요 두벌, 버선 6 켤레, 반짇고리 등 일체의 혼수를 당시 조선 풍습대로 해 주었습니다. 혼인날에는 얼굴에 꿀을 살짝 바르고 분을 입힌 후 연지곤지를 찍는 등 한국 풍습에 따라 신부화장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장식을 끝낸 신부는 족두리에 활옷을 입고 정동 예배당으로 가 아펜젤러 목사의 주례로 사모관대를 한 신랑과 대례를 올렸습니다. 1920년대에 오면 진선미의 덕목을 갖춘 서양식 메이퀸을 뽑는 미인 선발대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화여대의 중흥을 이끌었던 김활란 총장이 3번째 메이퀸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누님 유관순 열사가 이 학교 출신입니다. 김옥길 문교부장관, 이휘호 여사, 탤런트 윤여정, 강경화 외교부장관 등이 이화 졸업생입니다.
알렌의 제중원이나 스크랜턴의 시병원(施病院) 같은 서구식 병원이 생기기는 했으나 내외 습관이 강한 서울에는 여성들이 이용할 진료소가 없다는 윌리엄 스크랜턴 목사(스크랜턴 대부인의 아들)의 보고서를 접한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서는 1887년 여의사 하워드를 파견하여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이화여고 담장 밑에 <보구여관(保救女館, 普球?) 터>란 까만 표지석이 하나 세워져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여성을 위한 의료는 여성의 손으로’란 슬로건을 내 걸고 이화학당 학생 5인에게 의학교육을 시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1892년에는 독지가 볼드윈 여사의 이름을 딴 동대문 분원 ‘볼드윈 시약소’가 생기고, 1912년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름도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바뀌게 됩니다. 현재 이화여대부속병원의 시작입니다. 2008년 동대문 인근 성곽 복원사업으로 이대부속병원은 강서구 목동으로 옮겨 갔습니다. 보구여관의 교수였던 박에스터(김점동) 박사는 이화학당 4번째 입학생이자 한국 최초의 여의사입니다. 서양식 최초의 의사는 미국에서 공부한 서재필이고 두 번째는 일본에서 공부한 김익남입니다. 스크랜턴 여사의 자취는 이렇게 이화학당, 보구여관, 동대문 교회, 남대문 상동교회, 서대문 아현교회 등지에 역사와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1909년 77세를 일기로 영면한 대부인의 유해는 영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화강석 묘비에는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이 라 새겨 놓았습니다. 헬라어로 예수를 뜻하는 의 약자입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예수를 위해 예수처럼 살기를 원했던 예수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 아래는 이화여대 제자들의 헌사도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었으니 이는 1886년 5월 31일 매리. F.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 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마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근대 교육의 개척자 아펜젤러, 한국 선교의 아버지 언더우드, 여성 교육의 선구자 스크랜턴 대부인이 묻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지번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3번지입니다. 양화진(楊花津)은 군사, 물류, 교통을 위해 설치했던 ‘鎭’이 있던 자리라 하여 ‘楊花鎭’으로도 쓰입니다. 전철 2호선과 6호선,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와 한강 쪽으로 걸으면 아름다운 묘역이 나타납니다. 1890년 2대 제중원 원장을 지낸 존 헤론 박사가 전염성 이질로 타계하자 외국인이 묻힐 묘지가 필요하게 되고 마침내 고종이 현 묘원 부지 4천 평을 하사하여 묘역이 조성되었는데, 500여 기에 이르는 목사 선교사 군인들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묘역 안에는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등 개신교 20여개 교단 협의체가 공동으로 세운 초교파 교회로, 선교사 묘역의 묘지기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선교사 묘역과 나란히 ‘절두산 순교성지’도 이곳에 있습니다.
1866년 대원군 집정 시 ‘병인대박해’로 프랑스 선교사 9명과 함께 8,000 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순교 당했던 터에 추모 성당을 세우고 ‘절두산 순교지’라 칭하여 성역화한 곳입니다.
첫댓글 언더우드 3세 원일한 박사와 저녁을 같이 하는 모임에서 명함을 교환하게 되었는데,
내 명함을 받아든 원 박사 왈 " 우리는 종씨네요" 하면서 반갑게 인사.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 내 성 Underwood나 선생님 성 李나 둘 다 나무 밑에 있으니 종씨 아니겠습니까?"
훌륭한 종씨를 두셔서 부럽습니다.
부러운게 한두가진가? 교수님 얼굴이 조금 마르면 월남 할아버님과 비슷할듯도.
언더우드 일가에게
원주원씨 종친회에서 명예원씨로 추대를 했다고도 하네요.
일본 성도 松下 였던가? 언더우드의 뜻을 가진 성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