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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미술갤러리 원문보기 글쓴이: 5060
1788. 1. 22 런던~1824. 4. 19 그리스 메솔롱기온. 영국의 낭만파 시인, 풍자가.
바이런, Richard Westall이 그린 초상화(1813)
시 작품과 특이한 개성으로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대표작으로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 Childe Harold's Pilgrimage〉(1812~18) 과 〈돈 주안 Don Juan〉(1819~24)이 있다.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열병과 출혈로 죽었다.
초기 생애와 여행
바이런은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휘어 있었다. 어린시절 어머니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가서 적은 수입으로 세를 얻어 살았다. 절름발이라는 사실에 매우 민감했던 소년시절에 애버딘 그래머 스쿨에 다녔다. 조숙해 9세 때 벌써 유모 메이 그레이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과 먼 친척인 메리 더프와 마가렛 파커에 대해 머리 속에서 그려낸 사랑 때문에 여성에 대해 모순된 태도를 갖게 되었다.
10세 때 '부도덕한' 큰아버지 바이런 경의 칭호와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어머니는 자신에 차서 잉글랜드로 데리고 갔다. 바이런은 오래전에 헨리 8세가 바이런 집안에 준 뉴스테드 저택의 유령이 나올 것 같은 홀과 넓은 정원을 좋아해서 어머니와 함께 폐허가 된 그곳에서 한동안 살았다. 노팅엄에서 개인교습을 받았으며, 라벤더라는 돌팔이의사로부터 다리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의 변호사 존 한슨은 바이런이 메이 그레이의 나쁜 영향과 엉터리 치료사 라벤더, 어머니의 변덕스러운 성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 또 그는 바이런을 런던으로 데리고 가서 유명한 의사가 지시한 특수한 교정기를 쓰게 했으며 1799년 가을 덜위치에 있는 학교에 보내주었다.
1801년 해로 스쿨에 입학해 그곳의 소년들과 친해지면서 학교에 낭만적인 애착을 갖게 되었다. 그들과의 우정을 통해 성적(性的)으로 이중적인 경향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점은 뒷날 케임브리지나 그리스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1803년 여름을 어머니와 함께 노팅엄 근교의 사우스웰에서 보냈지만 곧 뉴스테드로 달아나 차가인(借家人)인 그레이 경과 함께 지내면서 그레이 경의 먼 친척인 메리 초워스에게 구애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절름발이 소년'에 대해 싫증을 느끼자 우울한 시를 써 슬픔에 빠져들었는데 이 시에서 그녀는 이상화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1학기를 보낸 뒤, 런던에서 방탕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많은 빚을 졌다. 1806년 여름에 사우스웰로 돌아와 초기시를 책으로 묶어서 11월에 〈덧없는 시편들 Fugitive Pieces〉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자비(自費)로 인쇄했다. 이듬해 6월에는 처음으로 시집 〈게으른 나날 Hours of Idleness〉이 출판되어 정식으로 선보였다. 트리니티로 돌아와 존 캠 하브하우스와 밀접한 교류를 하게 되면서 진보적인 휘그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08년초 런던에서 '관능의 심연'에 빠져 건강을 해쳤다. 1809년 1월에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익명으로 풍자시 〈잉글랜드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 English Bards and Scotch Reviewers〉를 출판했다. 그뒤 하브하우스와 긴 여행길에 올랐다. 배로 리스본에 가서 스페인을 횡단해 지브롤터를 지나 몰타까지 갔다. 그곳에서는 어떤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 때문에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뒤 두 사람은 그리스의 프레베자에 와서 내륙여행을 시작해 자니나(요아니나)로 갔으며 알리 파샤를 방문하기 위해 알바니아의 테펠레네에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자니나에서 자전적인 시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을 쓰기 시작해 아테네까지 여행할 동안 계속 썼다.
그들이 하숙한 집 과부의 딸 테레사 마크리를 바이런은 '아테네의 처녀'라고 찬미했다. 1810년 3월 하브하우스와 함께 스미르나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에 갔으며, 헬레스폰트 어귀에서 바람이 자서 배가 더이상 갈 수 없자 트로이의 옛터를 방문하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레안드로스를 흉내내 해협을 헤엄쳐서 건넜다. 바이런이 그리스에서 지내면서 받은 인상은 오래도록 남았다. 그는 햇빛과 그리스인들의 도량을 즐겼다.
1811년 7월 14일 런던에 도착했으나 뉴스테드의 어머니 곁에 가기 전 8월 1일 어머니가 죽었다. 1812년 2월 27일 상원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으며, 3월초에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이 존 머리에 의해 출판되어 순식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이 시는 이국땅을 생생하면서도 시적으로 그려낸 데다가 프랑스 혁명이 끝난 뒤 나폴레옹 통치기간 동안의 우울함과 환멸을 표출했다. 당시 문학으로서는 처음으로 솔직하게 낭만적인 이상과 현실세계 사이의 불균형을 표현했다.
바이런은 휘그파 모임에서 명사 취급을 받았으며, 이 절름발이 미남 시인은 정열적인 캐롤라인 램 부인, 중년의 옥스퍼드 부인, 이복누이인 오거스타 리, 프랜시스 웹스터 부인 등과 사귀었다. 연애로 인한 흥분과 묘한 죄책감과 기쁨이 이무렵에 쓴 동방의 이야기에 반영되어 있다. 결혼해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1814년 9월에 앤 이사벨라(안나벨라) 밀뱅크에게 청혼했고, 1815년 1월 2일 결혼했다.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닌 신혼여행을 마치고 3월에 런던에 정착했다. 뉴스테드를 파는 문제가 지연되어 재정적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곧 집이 압류되었고 자신의 출판업자인 존 머리의 집으로 피신했다. 오거스타 리가 찾아오자, 빚과 안나벨라의 신경과민 때문에 화난 바이런은 술김에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과거 죄에 대해 암시하기도 했다.
12월 10일 아내가 딸 오거스타 에이다를 낳았으나 다음해 1월에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간 뒤 그에게 돌아오지 않겠다고 알렸다. 그녀가 이렇게 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소문만 무성했는데 주로 바이런과 오거스타 리의 관계에 관심이 모아졌다. 소문이 커지자 바이런은 법적으로 이혼을 하고 외국으로 간 뒤 영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외국 생활
워털루 전투지를 방문한 뒤 스위스에 갔다. 제네바 근처의 빌라 디오다티에서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그의 아내이자 윌리엄 고드윈의 딸인 메리, 고드윈이 2번째 결혼으로 얻은 의붓딸 클레어 클레어먼트와 사귀었는데, 클레어먼트는 영국을 떠나기 전 바이런과 특별한 사이였다고 넌지시 말한 적이 있다. 셸리와 함께 보트로 호수 입구까지 간 것을 소재로 해 〈시용의 죄수 Prisoner of Chillon〉를 썼으며 디오다티에서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을 완성했다. 여름이 다 갈 무렵 셸리 일행은 영국으로 갔는데 클레어먼트는 바이런의 사생아인 딸(1817. 1. 12 출생, 이름을 알레그라라고 바이런이 지어줌)을 데리고 갔다. 하브하우스와 함께 한 베른 오버란트 산맥 여행은 〈맨프레드 Manfred〉의 배경이 되었다. 이 작품은 파우스트적인 시극으로서 내면에 깔린 죄책감과 회한, 인간은 "반은 먼지요 반은 신이며, 가라앉을 수도 비상할 수도 없다"라는 구절에 담겨 있다시피 낭만주의 정신의 좌절을 표현했다.
10월 5일 바이런은 하브하우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는 베네치아 포목상의 집에 묵었는데, 검은 눈을 가진 안주인 마리안나 세거티와 사랑에 빠졌다. 산라자로 수도원에서 아르메니아어를 공부했으며, 가끔 그 지방의 문학모임에도 참석했다. 5월에 로마에서 하브하우스와 만나 유적을 돌면서 인상적인 부분은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 제4편에 기록했다. 브렌타 강변의 라미라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이탈리아의 풍습을 신나게 풍자한 〈베포 Beppo〉를 썼다. 이곳에서 빵 제조업자의 아내 마르가리타 코그니를 만났다. 그녀는 베네치아까지 그를 따라와 결국 마리안나 세거티를 물리치고 그의 사랑을 받았다. 1818년 여름 동안 자신의 경험과 직접 관련된 사실적인 풍자시 〈돈 주안〉의 제1편을 완성했다. 클레어는 사생아 알레그라를 그가 양육하라고 보냈으며 계속 충고를
해 귀찮게 했다. 뉴스테드 저택이 팔려서 마침내 대부분의 빚을 갚고 적은 수입도 얻게 되었다.
1818년에 셸리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살이 찌고 머리는 길며 백발로 변해 나이보다 늙어보였으며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 1819년 4월에 테레사 구이치올리 백작부인을 우연히 만나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19세 때 나이가 거의 3배나 많은 남자와 결혼한 테레사를 만나자 며칠 만에 사랑에 빠졌다. 바이런은 라벤나까지 쫓아갔으며 그들은 베네치아에 돌아와 남편이 데리러 올 때까지 함께 지냈다. 바이런은 테레사의 시종 자격으로 1820년 1월에 다시 라벤나에 갔다. 여기에서 테레사의 아버지, 오빠와 친해져서 그들의 소개로 비밀혁명단체인 카르보나리당에 들어갔으며 이탈리아인의 생활을 어느 때보다 가깝게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카르보나리당에 무기를 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호품을 주었다. 이때가 일생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인 시기였다. 〈단테의 예언 The Prophecy of Dante〉과 〈돈 주안〉의 3편(canto), 시극(詩劇) 〈마리노 팔리에로 Marino Faliero〉·〈사르다나팔로스 왕 Sardanapalus〉·〈포스카리 The Two Foscari〉·〈카인 Cain〉 등은 모두 1821년에 출판되었으며, 시인 로버트 사우디를 풍자한 〈심판의 계시 The Vision of Judgment〉를 썼다.
그러나 반란이 실패하여 테레사의 아버지와 오빠가 추방되고 남편과 헤어진 테레사도 그들을 따라 가버리자 바이런은 어쩔 수 없이 피사로 와서 셸리가 빌려준 아르노 강변의 카사랑프란치에서 살게 되었다. 1821년 11월 1일 그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딸 알레그라를 라벤나 근교의 수녀원에서 교육받도록 맡기고 왔는데 그녀는 이듬해 4월 20일에 죽었다. 테레사의 아버지와 오빠가 피사에서 임시 피신처를 마련하고 있어서 바이런은 매일 그녀를 방문했고, 그해 초여름에 그들이 레그혼에 가버리자 바이런도 셸리가 사는 레리치 만 가까이에 별장을 빌려놓았다.
레그혼에서는 시인 리 헌트가 셸리와 바이런의 새 잡지 참여를 권유하기 위해 영국에서 찾아와 7월 1일 바이런과 만났다. 헌트와 그의 가족은 피사에 있는 바이런의 집 아래층에 머물게 되었고 바이런과 테레사도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토스카나에서 쫓겨난 뒤에 피사로 돌아왔다. 7월 8일 셸리가 물에 빠져 죽자 헌트는 바이런에게 완전히 의지했고, 바이런은 그의 여행비와 아파트 얻을 돈을 빌려주었다. 헌트는 좋은 친구였지만 그의 아내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아이가 6명이나 되어서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9월말 바이런은 테레사의 가족이 피신해 그가 살 큰 집을 마련해놓은 제노바의 교외로 이사했다. 셸리의 부인 메리는 헌트가(家)와 함께 살 집을 그 근처에 따로 얻었다. 헌트의 형제 존이 런던에서 간행한 새 잡지 〈리버럴 The Liberal〉의 첫호에 〈심판의 계시〉를 기고했다(1822. 10. 15).
바이런은 잡지에 대한 관심이 식었으나 헌트를 계속 도왔고 〈리버럴〉에 원고를 보냈다. 출판업자인 존 머리와 다툰 뒤에는 〈돈 주안〉의 제6~16편과 〈청동시대 The Age of Bronze〉·〈섬 The Island〉 등 후기작품도 존 헌트에게 주었다. 테레사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쉬면서 조국에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열망하던 중, 1823년 4월에 런던의 그리스 위원회로부터 투르크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돕는 요원으로서 활동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바이런은 7월 16일 전세배를 타고 제노바를 떠나 8월 2일 이오니아 제도의 케팔로니아 섬에 도착해 메타사타에 자리잡았다. 그는 그리스 군함을 마련하려고 4,000파운드를 보냈으며 12월 29일에 서부 그리스 부대의 지도자인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 왕자와 합류하려고 메솔롱기온으로 갔다.
그는 투르크가 장악한 레판토 요새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우는 데 매우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포병대에 발사전문가를 고용하고, 그리스에서 가장 용감한 솔리옷 병사들을 직접 통솔했으며 비용도 댔다. 또한 파당을 화해시켜 그리스 서부와 동부를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824년 2월 15일 심한 병과 통상적인 사혈(瀉血)요법에 의해 몸이 약해진 데다가 솔리옷군이 일으킨 반란을 통해 그들의 탐욕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스를 위한 열정이 줄지는 않았지만 좀더 현실적으로 문제를 보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케팔로니아에서 데려온 시종이며 마지막 고통에 찬 시를 써서 보내기도 한 그리스 소년 루카스 찰란드리트사노스와 가끔 불화가 생겨 정신적인 고통을 느꼈다. 그는 살로나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계획을 세웠으나 열병에 걸렸고 의사가 고집한 사혈요법으로 병이 더 악화되어 곧 죽었다. 그리스 전체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그는 사사로운 욕심없이 한 나라를 구하고자 애쓴 자의 상징이자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시체는 영국으로 옮겨졌으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의 안치가 거부되어 뉴스테드 근처에 있는 집안 납골당에 묻혔다. 묘하게도 145년 뒤인 1969년에 그를 기념하는 비가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세워졌다.
L. A. Marchand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바이런
(해설) 인간 바이런과 시인 바이런
1
1850년대에 출간된 『영문학사』에서 프랑스 비평가 텐 Hippolyte Taine은 바이런의 동시대 영국시인 워즈워스, 셸리, 콜리지, 키츠 등에게는 몇 페이지씩만 할애해 주고 기다란 장 하나를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1788-1824)에게 바쳤다. 그리고 〈바이런이야말로 동시대 시인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고 영국적인 예술가였으며, 너무 위대하고 너무 영국적이어서 나머지 동시대 시인이 모두 힘을 합쳐도 바이런만큼 영국과 그의 시대를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라고까지 했다.
바이런이 유럽 정신에 끼친 영향을 오늘날 냉정하게 평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괴테, 스탕달,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한결같이 바이런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영향의 크기를 짐작할 수는 있다. 러셀 Bertrand Russel이 「서양철학사」에서 칸트에게처럼 그에게 하나의 장(章)을 부여한 것도 같은 영국인끼리의 애정만이 아닌 정신사적인 평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이런이 자기 시대에 준 가장 큰 것은 시보다도 <바이런적 인물 Byronic hero>이다. 그 인물은 그의 시와 극 도처에 나타난다. 특히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두드러지게 그것을 보여준다. 우울하며 동시에 정열적이고, 아프게 참회하면서 동시에 후회 없이 죄를 저지르는 <바이런적 인물>은 시대의 분위기를 이루고 니체의 <초인>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온다고 할 수 있다.
2
바이런은 1788년 1월 22일 런던에서 귀족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격렬하고 방탕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았다. 할아버지는 <악천후(惡天候) 잭 Foul-Weather Jack>이라는 별명을 지닌 해군 제독이었고, 큰아버지는 술 취한 김에 친척을 죽인 <악당 바이런>이었다. 아버지는 <미친놈 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두 차례의 결혼에서 얻은 아내들의 재산을 탕진하는데 급급했다. 그의 어머니는 허영심이 많고 격정적이며 히스테리가 있는 여자로 스코틀랜드 왕가의 피를 갖고 있었다. 이 두 핏줄의 만남이 바이런 성격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줄 것이다.
<미친놈 잭> 바이런은 외아들 조지가 태어나자마자 아내를 버렸다. 어머니는 조지를 데리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본가로 갔다. 열 살 났을 때 큰아버지 <악당 바이런>이 죽고 그는 남작 칭호와 뉴스테드의 커다란 영지를 물려받았다. 홀어머니 아래서 자란 아이가 흔히 그렇듯이 그는 멋대로 자랐다. 해로 고등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지만 그가 얻은 것은 교육보다는 독서할 기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약간 절름거리는 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의식이 강했다. 매리 채워스와의 첫사랑이 절름대는 발로 깨지자 상처는 더 깊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 대가로 승마, 보트, 수영, 권투, 펜싱, 사격 등 여러 면에서 동료들에 앞섰다.
그에게서 시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흘러나왔다. 열아홉 살 때 그는 첫 시집 『게으름의 시간 Hours of Idleness』을 출간했다. 《에든버러 리뷰》가 혹평을 하자 그는 「영국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라는 풍자시를 써서 응수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그는 유럽 대륙 여행을 떠났다. 당시 영국의 상류층 청년들에게 대륙 여행은 하나의 정상적인 성장 교육 요건이었다. 워즈워스를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도 대륙 여행을 했고 그것이 그들에게 끼친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는 포르투갈, 스페인, 몰타, 알바니아, 그리스를 편력했고 중동지방까지 돌아보았다. 2년간의 모험에 찬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 2부를 출판했다. 그 시집은 곧 인정을 받아, 바이런 자신이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이 시집은 런던을 휩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자 그대로 유럽을 뒤흔들었다.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자유, 반항,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 자연에의 몰입, 동료 인간들을 향한 사랑 등 당시 싹이 트기 시작했던 유럽 낭만주의가 갈구하던 것 모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文名)과 더불어 런던 사교계의 총아로 등장한 바이런은 곧 숱한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그의 시집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대부분은 이때 그가 사랑하고 배반하고 또 배반당한 여자들이다. 그는 밀뱅크와 결혼함으로써 스캔들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편의를 위한 결혼이 오래 지속될 리 없었다. 계속되는 남편의 연애행각에 견디지 못한 아내는 결혼한 지 일 년 후 딸 에이다를 데리고 그를 떠났던 것이다. 이 별거에는 배다른 누이와의 근친 관계까지 관련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그러자 런던 사회 전체가 들고 일어나 바이런을 매도하게 된다. 지금 돌이켜볼 때 그가 매도당한 것은 반드시 애정행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상원(上院)의 전신인 당시 귀족원에서 그가 자유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옹호하고 보수주의를 공격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는 낌새도 아주 강하게 보인다.
비판이 더욱 가열되자 그는 1816년 4월 25일 다시 되돌아오지 않기로 작정하고 영국을 떠났다. 후에 그는 당시의 사태를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요약했다. <나에 대한 세평이 옳다면 내가 영국에 맞지 않는 인간이고, 틀리다면 영국이 나에 맞지 않는 나라였다. >그가 명성과 수치와 더불어 영국을 떠났을 때 나이는 아직 스물여덟 살에 불과했다.
그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3, 4부의 무대가 되는 곳을 여행했다. 라인 강을 따라 스위스로 갔고 후에는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6년간 이탈리아에 사는 동안 그는 사는 데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육체적인 쾌락에도 싫증나고 시작(詩作) 자체에도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 정치적인 문제들이 그의 정력을 빼앗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정치에서 실패한 그는 터키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 사람들의 독립투쟁에 뛰어들 장소를 발견했다.
1823년 7월 4일 그는 제노바 항에 가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출발했다. 그에게 사단 하나가 맡겨졌으나 그 사단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미솔롱기에서 얻은 열병으로 서른여섯 살의 짧은 생애가 먼저 끝났던 것이다.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직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열병 때문인지, 아니면 형편없는 의사가 치료한다고 뽑은 피 때문인지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수상태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전진! 전진! 나를 따르라. 겁내지 말라!」였다고 전해지며, 그것은 실로 바이런다운 마지막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3
오늘날 바이런의 시를 읽을 때 반드시 좋은 점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압축되지 않은 부분을 지닌 시가 많고 정교한 이미지나 비유의 매력을 갖고 있는 시는 찾기가 힘들다. 그것은 그의 대표작인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나 『돈 주언(돈 주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아직도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시가 삶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것도 감추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태도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큰 힘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시를 시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위트 wit일 것이다. 위트가 그의 정열과 결합되어 그의 작품에 탄력을 주는 것이다.
그 위트가 다른 낭만주의 시인들과는 달리 그를 신고전주의 정신으로 이끌어갔고, 그 결과 『돈 주언』이라는 전대미문의 운문소설이 태어났다. 그 작품은 현대문명의 대(大)비판서이기도 하지만 위트가 책읽기의 즐거움을 대부분 만들어준다.
지금 보면 약간 감상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애정시는 그 나름대로 솔직함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와 「우리 헤어지던 날」같은 시는, 오늘날까지도 신선함을 잃지 않은 작품이다.
애정시까지 포함해서 바이런의 시는 바이런 그 사람과 분리되어 읽혀져서는 감동을 잃을 위험이 있다. 솔직하고 정열적이며, 인간 옹호를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아낌없이 버릴 수 있었던 인간 바이런, 그의 자유를 위한 정열은 「시옹 성(城)」같은 소네트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그 바이런이 시 곳곳에서 숨쉬고 있는 숨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늘날에 와서 다시 바이런이나 셸리가 재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마도 시 이해의 방향이 시를 시인에게서 격리시키는 방향에서 다시 함께 보려는 경향으로 바뀐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이런에 대한 평가가 다시 높아진 데는 그의 시가 다른 낭만주의 시인과 달리 자의식(自意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의식은 그를 가장 <현대적인> 낭만주의자로 보이게도 한다. 그리고 그 의식은 <바이런적인 아이러니>로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다.
출처: 황동규(서울대 영문과 교수) 씨가 번역한 「순례」(세계시인선 47, 바이런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