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위산 삼천 봉우리, 바다로 가서 섬위 되다 >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대우 승용차 시에로를 타고 3시간을 북동쪽으로 달려가 하롱베이에 닿았다. 중국의 절경 구이린을 1만배 정도 뻥튀기하면 얼추 비슷해진다는 다도해였다. 시에로는 프랑스 식민시대에 세운 하롱1호텔에서 멎었다. 나는 영화 ‘인도차이나’를 찍으며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가 머물렀던 208호실에 짐을 풀었다. 1960년대엔 호치민이 찾았던 방이다. 베란다 너머 바다에 3000개가 넘는 석회암 바위섬들이 수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서둘러 선창가로 가서 배에 오른다. 중국계 청년 선장 쭨이 반긴다. 1994년 유네스코가 세계의 자연유산으로 지정한 하롱베이였다. 배는 복잡한 선창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더니 둥실 녹색 수면을 거침없이 달린다.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떠나고 싶어. 행복으로부터 떠나고 싶어.” 영화 ‘인도차이나’에서 연인을 찾아 프랑스에서 하롱베이까지 날아온 여주인공 카미유는 그렇게 말했다. 카미유는 양어머니인 엘리안느(카트린느 드뇌브)의 연인을 몰래 사랑하던 여인이었다. 카미유는 베트남으로 전근 간 사랑을 찾아왔고, 엘리안느는 카미유를 찾아왔다. 카미유는 사랑을 만났지만 감독은 그녀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버렸다.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제껏 살아온 인생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하롱베이에 찾아감이 마땅하다. 마땅히 등산객을 맞아야 할 산들이 용비늘처럼 바다 위에 솟아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형 ‘산’과 가장 낮은 지형 ‘바다’의 만남. 별세계 속에서 나는 인생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선장 쭨의 콧노래를 들으며 나는 “왜 나는 이곳에 혼자 왔던고” 하고 탄식했다. 배는 가장 가까운 섬, 천궁동에 닻을 내렸다.
1993년 원숭이를 쫓던 어부가 발견한 종유동굴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어두운 입구를 들어가니―.
내 한국땅의 좋다는 종유굴은 다 가봤지만 이리 ‘천국’같은 동굴은 처음 보았다. 용왕의 아들과 베트남족 공주가 혼인을 한 곳이라 했다. 사자, 이무기, 표범같은 맹수나 말같은 짐승들이 모두 와서 혼례를 지켜봤다지. 원색적인 조명들은 굴 속을 온통 전설 속 존재들로 채워놓았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석회수를 할머니들이 받아 피부에 바른다. 그래, 회춘이다. 격동의 현대사를 견뎌낸 베트남 여인들의 회춘이다. 그럴싸하게 급조된 전설 앞에 나는 잠깐 얼이 빠졌다가 밖으로 나왔다.
천궁동을 돌아 남동쪽으로 나아가자 작은 만이 하나 나왔다. 점심시간이다. 이미 많은 배들이 그곳에 정박해 식사를 하고 있다. 소녀 하나가 배를 몰고 와 새우와 게가 가득한 비닐봉지를 내민다. 억세게 재수없는 놈들이다. 유네스코 보고서에 따르면 이 하롱베이에 사는 어류는 1000종이 넘고, 맹금류와 식물도 다양하다. 소녀는 1달러를 쥐고 멀어져 갔다. 물빛은 녹색이요, 섬은 잿빛 절벽에 진녹색 숲을 뒤집어썼다. 그 3000여 섬 가운데 1000여개에 이름이 붙어있다. 싸움닭섬, 코끼리섬, 개섬, 기타 등등. 이름이 없다 하여 자연이 어디 가는가. 도라 이름하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도가도비상도―로자). 수직으로 서서 아열대 꽃향기를 풍기고 있는 거대한 존재들이 바다에 떠 있다는, 그 멍멍한 비현실감만으로도 하롱베이 뱃놀이는 가치롭다. 배는 섬에서 섬으로, 그 뒤편 그림자로 서 있던 또 다른 섬에서 다른 섬으로 유유히 떠갔다. “왜 혼자 왔던고!” 선장 쭨은 반복되는 탄식을 알아듣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모른다. 배는 ‘숨은 동굴’섬에 닿았다. 또 다른 종유굴이다. 들어갈수록 절경이 숨어있다고 하는 곳이다. 다시 한번 나는 넋이 나가서 정신없이 굴 속을 헤맸다.
동굴에서 나오자 해가 저문다. 1960년대 이 곳을 찾은 소련 우주비행사 티톱을 기념한 티톱섬 꼭대기에 오르자 하롱베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섯 시간 동안 돌아다닌 게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섬 뒤에 섬이 있고, 그 섬들 사이에 또 섬이 있고, 섬들 사이에 수상마을이 떠 있다. 배가 떠가고 매들이 날다가 수면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비 하나가 하늘하늘 날아가는 하늘 위로 해가 기울었다. 어느덧 천지는 농담 달리한 거대한 수묵화로 변하고 있다. 선장 쭨이 돌아가자고 한다. 선선한 바람에 취해, 용들이 만든 대장엄에 취해 선착장으로 돌아왔고, 정신없이 방으로 기어들어와 잠에 빠졌다.
냉랭한 에어컨 바람에 잠에서 깼을 때, 꿈속에서 봤던 카트린느 드뇌브는 사라졌다. 용들도 사라졌다. 내가 나비가 됐던가. 그 나비가 용비늘 위에 앉아 잠들었던가. 그럼 지금 내가 나비의 꿈속에…! 그랬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섬 사이로 한유하며 나비를 찾아 헤맸지만 여지껏 하롱베이의 몽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개발몸살 앓는 ‘세계자연유산’
“통킹 만에 위치한 하롱베이는 크고 작은 섬 1600여개가 석회석 기둥처럼 솟아올라 장관을 이룬다. 그 깎아지른 듯한 절벽 탓에 대부분의 섬들은 무인도이며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았다. 아주 빼어난 미적 가치는 물론 생물학적인 관심도 집중되고 있다.”
유네스코는 1994년 위와 같은 이유로 15만㏊에 이르는 하롱베이 일대를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 높이가 작게는 5m , 크게는 200m에 이르는 섬들 1600여개는 대부분 석회석 지질이다. 그 섬들 가운데 많은 수가 종유굴을 가지고 있고, 베트남 정부는 주로 중국 자본을 들여와 종유굴을 속속 개발 중이다. 바다와 해풍에 침식을 거듭해 섬들은 모두 날카로운 수직 절벽 형태를 하고 있다. 어류 1000여종과 야생조류, 그리고 다양한 식물들이 살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하롱베이의 경제적 가치를 인식해 1990년대부터 집중적으로 하노이~하롱베이 교통로를 개발해왔다. 가이드 호아씨에 따르면 이 고속화도로는 “베트남에서 가장 좋은 도로”라 한다. 몇 년 전만해도 5∼6시간이 걸렸던 거리가 지금은 불과 2시간30분으로 단축됐다. 그 개발의 여파는 환경파괴로 연결된다. 하롱베이로 접근하면 도로 주위에 우뚝우뚝 서 있는 동일한 석회암 산들이 시멘트 원료를 제공하는 광산으로 변해 모조리 파헤쳐지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하롱베이 물결 위로 격동의 역사가…
아득한 옛날, 하롱베이에 외적이 침략해 왔을 때 하늘에서 용들이 내려왔다. 용들은 바다 위에 폭풍우를 쏟고, 격랑을 일으켜 그 외적들을 격퇴했다. 용들은 하늘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도 외적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바다 속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용들이 용틀임하면서 쏟아부은 천둥·번개, 그 몸부림이 하롱베이에 떠 있는 섬으로 변했다고 한다. 지질학자들은 섬들을 석회암 지질이 만든 지형이라고 설명하지만, 그 기괴한 형상들은 용들이 만든 게 틀림없다. 그래서 이름도 ‘하룡’, 용이 강림한 곳이다.
베트남의 역사는 외세와의 투쟁의 역사다. 하롱베이에 얽힌 전설과 역사 또한 베트남의 지난한 투쟁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롱베이에 있는 ‘숨은 동굴’은 베트남판 이순신 장군 격인 쩐후이다오 장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13세기 전 지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몽골군이 베트남을 침략했을 때, 침략군은 바로 이 하롱베이로 쳐들어왔다. 그때 이곳을 지키고 있던 쩐 장군은 ‘숨은 동굴’ 안에 군사를 숨겨놓고 때를 기다렸다. 섬들 사이에 있는 좁고 얕은 길목에 촘촘하게 말뚝을 박아 놓은 뒤 썰물 때 몽골군 배가 말뚝 위에 걸리자 이들을 섬멸했다. 숨은 동굴에는 2000여명이 은신할 수 있는 큰 공간이 있고, 곳곳에서 당시 사용했던 나무말뚝이 발견됐다.
수도 하노이에 있는 호안키엠 호수 또한 투쟁사의 일부분이다. 호안키엠은 환검, ‘칼을 돌려주다’라는 뜻이다. 역시 먼 옛날 외적이 침입해왔을 때 이 호수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와서 당시 왕에게 칼을 주며 물리치라고 했다고 한다. 왕은 그 보검으로 적을 격퇴했고, 전쟁이 끝난 뒤 거북이가 다시 나타나 칼을 돌려 받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호수 한가운데에 성웅 쩐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서 있다.
1964년 8월 4일 하롱베이가 있는 통킹 만에 미군이 함포사격을 개시하면서 베트남전쟁이 시작됐다. 전쟁 11년 동안 베트남은 2차세계대전 동안 퍼부은 양보다 많은 폭탄을 맞고도 결국 미국을 몰아냈다. 용의 전설과 거북이의 전설과 쩐 장군의 역사에 ‘천하무적’ 미국 격퇴라는 또 다른 신화가 보태졌다. ■ 조선일보
여행 길잡이 하롱베이 가는 길
▲가는 길:하롱베이는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승용차로 2시간30분 거리다. 원월드항공연합:캐세이패시픽을 이용하면 홍콩을 경유해 당일로 하노이까지 연결된다. 홍콩 첵랍콕공항에서 1시간 정도 체류하며 쇼핑을 즐기다가 하노이로 출발. 캐세이패시픽 (02)311-2780 인터넷 홈페이지 www.oneworldalliance.com에서 베트남 외에 지구상 대부분 지역을 체크할 수 있다.
▲베트남 실용정보 ①비자가 필요하다:신청 후 최대 1주일이면 비자가 나온다. 여권사진 1매와 여권 필요. 발급 소요 기간에 따라 4만~6만원. 베트남대사관 (02)738-2318. ②시차:한국보다 2시간 늦다. 한국의 낮 12시가 베트남은 오전 10시. ③화폐단위:‘동’. 1달러는 1만4500동 정도. 물가가 싸서 환전은 조금씩 해둔다. ④쇼핑:하노이공항은 면세점이 매우 작아 살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하롱베이나 하노이 시내 기념품가게에서 적절히 사두는 게 좋다. ⑤생수 ‘라비(La Vie)’:수돗물은 마시지 않는 게 좋다. 현지사람들도 ‘라비’라는 상표의 생수를 사 마신다. 가게에서 맥주나 음료를 시켜도 얼음은 띄우지 말 것.
▲인터넷으로 예약할 수 있는 하노이 여행사 ①신카페(Sinh cafe):사이공(지금의 호치민시)에서 미군을 상대로 여행알선을 하던 신이라는 사람이 만든 여행사. 패키지 예약은 물론 ‘오픈투어(Open tour)’라는 이름으로 자유여행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티켓 한 장으로 베트남 전역을 버스로 돌아다닐 수 있다.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 3박4일짜리 패키지는 최저 23달러부터 있다. 인터넷(www.sihncafevietnam.f2s.com)으로 일정을 상담해 견적을 뽑아 예약 가능. 공항 영접부터 출국 환송까지 전 일정이 가능하다. ②퀸카페1(Queen cafe1)도 마찬가지. www.queencafe.com.vn.
▲하노이 묵을 곳:여행사들이 몰려있는 항베(Hang Be)거리에 호텔들이 몰려있다. 카페, 식당, 기념품점들 천지. 가격도 저렴하다. 호안키엠 호수가 5분 거리.
▲하롱베이 추천 숙소:하롱1호텔(Halong1 Hotel). 호치민과 카트린 드뇌브 등 VIP들이 즐겨 찾는 고풍스러운 호텔. 208호 객실 전망이 좋다.
▲하롱베이 뱃놀이:1시간에 5달러선. 5달러를 더 지불하면 점심식사를 준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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