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박씨(龜山朴氏)와 의흥박씨(義興朴氏)의 유래
1. 龜山朴氏:
박천(朴蕆)은 신라조(新羅朝) 54대 경명왕(景明王)의 장자였던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沈)의 15세손으로서, 대제학 박광후(朴光厚)와 안동 김씨 찬성사 김영휘의 따님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자는 석보(碩輔)이다. 석보를 또 하나의 이름이라고 한 기록도 있다. 《박씨원류사보(朴氏原流史譜)》에 의하면, 고려조(高麗朝) 우왕(禑王) 당시 정국군(靖國君)에 봉해진 형 박위(朴威)와 함께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功)을 세우고 영의정에 올라 구산군(龜山君)에 봉해졌으며 의흥현을 비롯한 동북의 4개 면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고 하였다. 아우인 박번(朴蕃)은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다.
박천의 아들 박인해(朴仁海)는 안동판관(安東判官)을 지냈다. 첫째 손자인 박후의(朴厚義 朴原義라는 기록도 있음)는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손자인 박균무(朴均茂)와 박자무(朴自茂)는 부위(副尉)에 이르렀다. 선조조의 인목왕후(仁穆王后)와 효종조의 인선왕후(仁宣王后)는 박인해의 사위 윤종문의 외손이다. 박인해의 증손 박만룡(朴萬龍)은 공조좌랑을 지냈고, 박만룡의 아들 박간(朴艮)은 통정대부로 공조참의를 지냈다. 박간의 아우인 박진(朴震)은 공조판서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박경장(朴景章)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 수비에 공을 세워 한성부판관에 올랐다. 박경장의 자는 헌경(憲卿)이며 호는 회보(晦甫)이다. 박처화(朴處華), 박상소(朴尙素), 박상화(朴尙華), 박내삼(朴來三), 박내봉(朴來鳳), 박봉상(朴鳳祥) 등도 의병을 일으켜 이름을 날렸다. 박경장의 아우인 박경문(朴景文)은 선교랑(宣敎郞)으로 현감을 지냈다. 자가 공근(公謹), 호가 명계(明溪)인 박전(朴詮)은 성균관 생원이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업에만 힘써 문장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 밖에 첨정을 지내고 이등공신에 책록된 박봉상(朴鳳祥)과 효자 박문엄(朴文淹)이 유명했으며, 예조정랑을 지낸 박화덕(朴和德)은 경학(經學)에 능통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칭송을 받았다.
구한말에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박태영(朴泰泳)과 박관식(朴寬植) 부자가 있었으며, 한학자인 박두명(朴斗明), 박태간(朴泰幹), 박만환(朴晩煥), 박만창(朴晩彰)도 유명하다.
2. 義興朴氏:
[참고글]
의흥박씨(義興朴氏) 시조 박을규(朴乙規)는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世譜)》에 의하면 본성(本姓)이 왕씨(王氏)로 고려의 왕족으로 고려 말에 형 박갑규(朴甲規)는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자신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되자 화를 피하기 위하여 형은 중국으로 갔고, 아우인 박을규는 춘성(春城: 지금 단양의 한 고을) 거의동(車衣洞)에 숨었다가 태종 때 외가의 성인 박씨(朴氏)를 따랐다고 한다. 박을규의 제단비문(祭壇碑文)에도 이런 내용의 글이 씌어 있는데, ‘을규공은 신명(身命)과 후손보전을 위해 영춘(永春)의 거의동으로 낙향, 성을 의흥박씨로 창씨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을 의흥(義興)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였으나, 56년간의 중간 계대(繼代)가 실전되어 후손 박득서(朴得瑞)로부터 대를 이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득서의 아들 근(瑾)이 1455년(세조) 주부에 올라 좌익공신에 책록되었고, 충주판관을 거쳐 교하현감과 나주목사, 영암군수로 나갔으며, 그의 아들 지홍(之洪)은 성종때
어모장군으로 사과(司果)를 지냈다.
한편 충좌위부사직을 지낸 언성(彦誠)의 아들 승종(承宗)은 통덕랑으로 학문과 효성이 뛰어났으며, 임진왜란때는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흥박씨(義興朴氏)는 남한에 총 981가구,3,9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ttp://san114.tistory.com/2773
[카페지기의 의견]
구산(龜山)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중앙부에 위치한 군위군(軍威郡)에 있는 의흥(義興)의 예 지명이다.
구산박씨(龜山朴氏)중에 구산(龜山)으로 쓰는 파도 있고 의흥(義興)으로 쓰는 파도 있는데 구산(龜山)으로 쓰야지 의흥(義興)으로 쓰는것은 틀린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흥박씨(義興朴氏)는 고려의 왕족으로 시조 박을규 후손 박득서(朴得瑞) 로부터세를 이어온 후손들이 있기에 의흥(義興)으로 쓰는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여진다.
첫댓글 호적에는 의흥박으로 되어있고 대인관게에서는
구산박으로 말을하고 있다 잘못된것인데 왜 호적에 잘못된것을 고치려하지 않는지 방법이 없는걸까 않되는걸까 궁금합니다
선암산님 일단 선조들의 고향부터 확인하시고 돌림자도 확인해보세요.구산박가랑 의흥박가랑은 엄연히 다른 가문인데 의흥박가라는 명칭에 구산박가 의흥파가 서로 혼선이 생겨서 중복이 된듯합니다.세보가 길면 일단 구산박가일 확율이 높을듯합니다.구산박가는 70세손이 존재하고 의흥박가는 십여세손정도 일겁니다.
족보엔 내가 구산군 22세 호적에는 의흥박 이게 어떻게 된건지 왜이렇게 된건지 참....
구산박가는 현제 전국에 7천명수준이고 의흥박가는 4천명이 채안됩니다.존재자체를 위해서는 의흥박가쪽에서 좀 손해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