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리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제2부]
12 .서울 나들이의 첫 성과.
조사의 결과는 투자에 정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 뒤
주말은 물론 틈만 나면 서울의 유수한 도서관을 오가며 가능한
자료를 긁어모았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서울을 오가며 도서관을 뒤지는 양적인 노력을
되풀이 해가자 역시 땀의 결실은 보이기 시작했다.
질적으로 유용한 자료가 내 조사 노트의 페이지 수를 늘려갔다.
자료 조사를 통해서 먼저 밝혀 놓을 사실이 있었다.
기존의 모리 가설을 부정하는 롬보 참사관의 판단을
또 한 번 거꾸로 부정 할만한 고대 한국만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모리가 추정한대로 제주의 라이카들도 말들을 따라
진도로 올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해 줄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에서는 제주 라이카가 양을 돌보기 위해서만 목장에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한국에는 호랑이나 늑대보다도 더 고약한 야수들이 항상
말 목장 근처에 우글거렸었다.
이들 야수들로부터 말들을 지키기 위해서 충실한
개의 보호가 필요했다.
야수들은 물론 말 도둑질을 수지맞는 사업으로 알고 있었던
인간들을 말한다.
말이나 소는 옛날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가진
고가[高價]의 동산이었다.
말과 소는 빈곤한 농촌 가정의 비할 데 없이 값진
재산 목록 일호였다.
더구나 다른 장물과 달리 네 다리가 달려있어 도둑질해
가기도 쉬웠었다.
그러니 말이나 소도둑들이 발호 했었던 것이 당연했었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이들 말 도둑 떼가 너무 설쳐대서
말 기르기를 기피하는 백성들이 속출해서 그때만 해도
국가의 기간산업이라 할만한 말목축업이 타격을 입기도
했었다고 하고 있다.
이들 말이나 소도둑 떼를 붙잡으면 공범은 이마에
말 도둑이라는 문신을 새겨 줬고 주범은 즉시
교수형에 처했다는 사실은 말이나 소도둑들의 횡포가 얼마나
지독했었는지를 증명해준다고 할 것이다.
앞에서 곶이나 섬 등에 말 목장을 설치했었던 이유에 호랑이들의
극성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었는데 말 못할 이면에는 이런
도둑들의 존재도 계산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말 목장에 개라는 파수꾼은 필수적이라고
수긍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생각에 한동안 매달렸었다.
그러나 한참을 생각해보니 도둑쯤이야 개가 짖어주기만 해도 되니까
동네에서 구할 수 있는 잡견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모리가 말 한대로 제주도로부터 라이카가 따라 나올
이유가 없을 듯 했다.
이 점 나중을 위하여 미리 밝혀둔다.
어느 진돗개 블로그에서 퍼온 흑구 사진 . 미리 양해 못 구한 주인님께
감사드린다.
13. 순종 보존과 다량 이주.
긴 연구 끝에 일단 부정적으로 본 모리의 가설은 역시
부정적으로 결말이 났다.
아니 더 나아가 추측 수준의 기존 진돗개 조상설을 전적으로
무시하기로 했다.
그간 조사를 하면서 점점 확신이 더 얹어져 가는 진돗개 조상 찾기의
한 요소가 머리를 차지하고 들어와 나의 연구 방향에 새로운
방향 전환을 계속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 견종[犬種]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서 정착하는 데에는
수량적인 투입이 필요 하다는 원칙이었다.
이것은 어느날 박 선생으로 유년 시절 자기 마을의 양조장 집에서
길렀던 두 마리의 세파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얻은 신념이었다.
잡종 개만 있었던 그 마을에서 순종개의 피를 얻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들 개들을 양조장 주인이 알게 모르게 교배를
시켰던 결과 동네 전체에 수십 마리의 잡종 세파트가 퍼졌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흐르고 군복무를 마친 그가 인사차 고향에
찾아가 본바 그 세파트의 자손들의 흔적은 여기 저기 보였지만 양조장집은 물론이고 동네 어디에도 순종 세파트는 없더라는 이야기였다.
박 선생은 위의 자기 경험을 들려주면서 이런 이야기 했었다.
“ 맑은 물에 잉크 몇 방울을 떨어뜨려 보라고. 잉크 방울은 흔적도
없어 지고 단지 약간 흐려진 물이 잉크 방울이 더 해졌다는
것만 말해 줄 뿐일세.
잡견들의 바다에 그저 던져진 순종의 운명이 그런 걸세. ”
지금 생각해 봐도 무릎을 칠만큼의 명언이었고 이 말은 나의 진돗개
조상 찾기에 중요한 이정표를 제공해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의 논리로 기존 학설들이 말 한대로 몽골인 부대나
진도인 포로,그리고 제주도 목장에서 가져온 단지 몇 마리의
라이카들이 천년의 세월을 살아남아 진돗개들이 되었다는 것은
그 수량적[數量的]인 면에서 신빙성을 둘 수가 없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한국에 있는 수많은 세파드들이
구 한말 선교사들이 가져온 대 여섯 마리의
조상 개들로부터 퍼져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세파드가 한국에 인기 견종[犬種]으로 자리 잡기까지
외국으로부터 긴 세월 동안 많은 세파드가 한국으로 유입되어 와서
한국 정착을 도왔다.
앞서의 세파드의 예에서 보듯 어떤 견종이 타지역에 유입되어 자리를
잡기까지는 숫적으로 풍부한 유입이 있어야 한다,
즉 다시 말하면 순종 보존은 수적[數的]인 투입과 비례적인
관계에 있다.
수량적 투입은 또 장기간의 시간을 요하는 프로세스이기도 하다.
위의 사실들은 진도에 유입되어 진돗개의 조상이 된 라이카는 상당한
숫자였었고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 이 라이카를 공급해준 공급기지가
몽골이 아닌 진도 근처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런 곳은 몽골 인들이 살았던 제주도 밖에는 있을 수가 없다.
14.출륙[出陸]제주민들과 동행한 라이카.
위의 가설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그 무렵의 제주도가 몽골인이
다스렸던 몽골령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제주도에 온 라이카는 비록 소수였었는지 몰라도 그들을 제주도에서
기른 주인들이 애견 문화라면 지금도 세계가 알아주는 몽골인들임에
주목해야 한다.
몽골인들은 개를 말과 같이 평생을 한 식구로 사랑 하다가 죽으면
애도 속에 정중히 장사 지내준다.
그들에게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가 힘든
야만스러운 짓이다.
그 것이 오늘의 몽골에 마스티프니 라이카니 하는 순종개의 혈통이
왕성하게 보존된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몽골인들이 갖는 독특한 애견 문화의 분위기에서 숫자가
늘어난 제주도의 라이카들은 제주도를 진도에 라이카를 배출시킬 공급기지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되돌아본다면 기존 설들. 아니 기존 추측들은 어떤 과학적인
입증은커녕 논리적인 근거도 없이 진도와 몽골을 관련짓는
역사적 사건에 진돗개의 조상설을 억지 춘향이식의 바느질로 기워
맞춘 것에 지나지 않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롬보 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진돗개 관련 책자나
신문 또는 일반 잡지들에서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정설인양
심심치 않게 소개되는 위의 기존 설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주도에 관심을 집중하기로 했다.
조사의 포커스를 제주도로 맞추고 계속 서울의 유명 도서관들을
들락거려보니 나의 가설을 입증해줄 중요한 실마리들이 손에 잡혔다.
지정학적으로 과거 진도와 인근 강진은 제주 육지간의 사람과 물자가
부단히 거쳐 가는 길목격인 교역 항이었다.. 이곳이 갖는 교통의 가치는
고려 공민왕 때 제주도의 몽골 목부들이 일으킨 반란을 토벌한
최영의 부대 25,000명이 제주를 향해 발진한 곳이 이 곳 진도였음이
말해 준다.
제주도가 해방 후 미 군정청이 도[道]로 승격시키기까지 전라남도의
일부로서 같은 지역 생활권이었음은 제주와 진도의 지근성이 역사를 두고 이어져 왔음을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제주도와 진도 인근은 바다가 갈라놓았지만
동일 생활권이었다.
그런 만큼 제주 사람들의 내왕도 많았었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제주도 주민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육지로의 이주를 향한 노력은 우리가 제주 라이카의 진도 유입에 크게
참고 해야 할 사항이다.
역사는 살기 힘든 제주를 떠나 육지로 유랑을 떠난 제주민의
슬픈 이야기를
무수히 기록해놓고 있다.
그들 역사의 기록 중 하나를 소개해보자.
중종 35년 조선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 전라도 관찰사 윤개 [尹漑]가 아뢰기를,
‘’‘’‘’‘제주는 토질이 척박해서 백성들이 살기 싫어하여 이주해
나오는 자들이
많고 쇄환 돼 가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이어서 윤 은보등이 당상관등과 의논하여 아뢰기를,
’‘’‘’‘’‘제주의 세 고을은 주민들이 날로 유망하여 고을이 거의 빌 지경에
이르렀기에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육지로 이주해온 자들을
일체 쇄환하여 모두 원적에 환원 시키게 하였습니다. ‘
일제시대 먹고 살기 위하여 남부여대하고 만주로 떠난 민족유랑의 역사가 이미 훨씬 전의 남쪽 바다를 무대로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집단으로 육지로 이주해 살던 자취가 깊지 않은 나의 조사에서만도 내륙 깊숙한 곳인 전라도 고창의 흥덕이라던가, 평안도 선천에서
사나흘이나 걸리며 그 때에는 조선 땅인지 중국 땅인지 당국도 잘 알지
못하던 요동반도 밑의 해랑도 [海浪島]라는,아득히 머나먼 곳 등에서
발견되었음을 생각해보면 바다 건너 최단거리에
있는 진도 등의 가까운 전라도 해안에는 대단히 많은 제주도민의
이주자가 살았을 것이다,
[註: 객담 한마디.
제주도에는 이어도 또는 파랑도라는 유토피아 섬이 제주도와
중국 사이에 있다는 오래된 전설이 전해져 왔었다.
이 전설을 믿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군함을 보내 파랑도의
실체를 수색한 바 있었다.
해랑도(중국령)의 중국어 발음은 하이랑도이다.
파랑도와 비슷하다.무슨 연관이 없었을까?]
모리가 만약 고려와 조선의 대를 거쳐 반 천년 넘는 세월에 걸쳐 이렇게
남해안 일대에 이주해온 수많은 제주민을 따라서 제주 라이카가 진도로
왔을 가능성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감히 진도의 말 목장을 가지고 엉뚱한 추측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5.새로 나타난 테마 - 순종 보존.
수량적인 면에서 허점을 들어 낸 기존 학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주에
집중하기로 한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일단 조사의 또 다른 한 방향을
새롭게 잡았다.
그 것은 수량적인 투입이 있어야만 한 지역의 순종이 보존될 수 있다는
원칙을 발견한 것이 한 계기가 되었다.
더해서 인상 깊게 들었던 박 선생의 세파트 이야기는 나의 새로운
관심을 더욱 생생하게 부추겼다.
새로운 화두는 양적인 유입에 더해서 순종 보존을 위해서는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질적인 문제였다.
제주 라이카들이 수 백년의 세월을 두고 진도에 이주하여
진돗개의 조상이 되었다지만 진돗개라는 순종이 보존되게 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몇 달이 되던 어느 날, 나는
독특한 한 현상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한반도의 육지에서는 풍산개나 삽살개등 불과 두 세종의 순종만이
발견되었는데도 한국의 남해안 일대에서만 여러 종류의 순종 견들이
출현했었다.
이들에 대해서 더 깊이 들어 가기 앞서 이야기의 배경이 될 만한
좀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한국의 순종 견은 아주 드물었다.
순종 견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보존했으면 오늘날 진돗개나 풍산개와 같은 명견이 되었을
한국의 개들이 한반도 곳곳에서 그런 대로 명맥을 유지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길이 없다.
순종 보존의 이유가 없었고 또 따라서 순종 보존의
노력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 사례를 소개한다.
20 세기 초 미국에서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끈 “야성의 부름”이라는
베스트 셀러가 있었다.
개와 이리 사이에 탄생한 벅크라는 개를 주인공으로한 작품으로
얼래스카가 무대이다.
몇 년 전 이 작품이 영화화되어서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었다,
지금도 비디오 점에 가면 볼 수 있는 늑대 개라는 제목의
작품이 그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문학사에서 비중 있게 평가받는
잭 런던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러일 전쟁 때 종군 기자로서 한국 북쪽에 와서 러일 전쟁을
취재했었다
그가 남긴 종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1904년 평양 북쪽 순안을 지날 때 그가 본 것을 이렇게 기록했다.
‘ 한국의 개들은 꼭 개하고 이리를 섞어 놓은 것 같다.--------
대부분의 개들이 썰매를 끄는 크론다이크의 개와 마치 형제처럼
닮아있다,----그리고 허드슨 만에 사는 개와 비슷한 것도
있는데, 그러니까 크론다이크 개 보다 조금 더 크고 몸집이
더 있고 힘이 더 세며 털이 더 짧 았다. ’
다른 사람이라면 무심히 넘겨 버릴 이 짦은 글은 한국 동물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크론다이크는 얼래스카와 카나다와의 국경부근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19 세기 말 얼래스카 개척이 붐을 이룰 때 전초 기지가
되기도 한 곳이다.
이 주변의 개들은 한국의 애견가들이라면 알만한 허스키나 마라뮤트
같은 개들이었을 것이다.
이 개들은 매스컴에서도 자주 소개되는 썰매를 끄는 개들로서 삼각형의
귀와 말리거나 고추 선 꼬리가 특징인 북방 견들이다.
이런 진돗개들과 비슷한 개들이 불과 100년 전도 안 되는 시기에
한반도에 활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삽살개와 풍산개를 제외하고는 이런 개들은
어떤 흔적을 이 한반도 내에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 전해 내려오는
풍문이나 기록조차도 찾을 길이 없다.
순종을 중시하거나 보존하는 애견 감각이 우리 민족 문화의 티끌만한 구석에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 아쉬운 점은 내가 진돗개의 조상을 찾는 긴 세월 내내 통감하던 바였다.
한국 야생 동물기 저자 이 상오 씨는 그 이유를 한국인들의
식견[食犬] 문화 탓이라고 했다.
온대 지방에서 개를 식용으로 하는 몇 안 되는 민족중의 하나가 살던
한반도는 과거 애견 문화라는 것 또한 희박하기가 세계의 으뜸인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 지역인 한반도에서 태어난 개들의 운명은 거의 인간들에 의해서
식용을 위한 타살로 끝장이 나기 마련이었다.
한반도 견공들의 주된 운명이 식용일 바에야 개가 순종이건 잡종이건
그것은 기르는 인간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개의 우수한 혈통을 보존한 어떤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고
그 결과가 오늘날 한국을 순종 견 보유 빈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앞에 잠깐 언급한 바에서 제주도에 이입된 소수의 라이카가
식견 풍습과 거리가 먼 몽골인들의 애견 문화 속에 증식을 거듭해서
제주도를 라이카의 공급기지로 만들었음을 지적한 대목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여기에 예외적인 이변이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 한반도 본토의 사정이 이러 했었는데도
반도 남단 남해안 일대에서만은 다수의 순종 견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진돗개, 제주개, 완도개, 거제개, 해남개등등,순종 빈국인 한반도 면적의
수십, 아니 수 백분지 일밖에 안 되는 좁은 이 지역에서 이토록 많은
순종 개들이 출현했다는 것은 확실히 이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들 도서 지역에서의 순종견 보존 이유를
간단히 고립된 도서 지역 탓으로 돌리고 있다.
외부와의 왕래가 없었으니 이 지역의 재래종 개들이 다른 종의
개들과 피가 섞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순종이
잘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의심이 갔다.
무엇보다도 순종 견들이 살았던 이 들 섬들은 육지와 맞
닿듯 가까워 거의 육지라고 할만하다. ( 지금은 다리로 연결 되어있다)
그래서 섬이 갖는 고립성을 이 섬들과 엮어서
말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들 섬에 들어가 보면 섬이라고 느낄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경작을 위한 평지도 잘 발달되어 있다.
땅과 물의 물산도 풍부하여 인구도 많아
섬 안과 섬 밖의 교역도 활발하였다.
만약 섬의 고립성이 순종 보존의 이유가 된다면 왜 추자도니 흑산도니
하는 더 멀고 더 고립된 섬들에서는 순종 견의 자취가 안 보이느냐가
문제가 된다.
따라서 순종 보존의 이유를 섬의 고립성에서 찾는 것은 이들 섬들의
지리적 연구를 면밀히 해보지도 않은 안이한 태도라
아니 할 수가 없다.
16. 미스테리의 순종개들.
어쨌든 한반도에서도 이들 섬들에서만 순종 견들이 배출된 이유는
미스테리였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 미스테리한 현상을 풀어 보는 것이
제주 라이카가 진도에 와서 진돗개의 조상이 된 경로 확인에 한발 더
다가 갈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모르긴 해도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오면서 형성된 특유의 육감이
나를 이 방향으로 인도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자연스럽게 진돗개 조상 찾기라는 직접적인 과제 풀이보다
간접적인 풀이가 될 수있는 이 순종 보존의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어느 날 밤 그 사이 뜸했던 박 선생이 나의 집을 찾아 와서 영어로
써진 미국 동물 잡지의 기사를 내놓으며 번역을 부탁했다.
나도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젊었기에 아무래도
박 선생보다는 나았다.
며칠 뒤 힘들게 번역을 마친 그 기사를 그에게 넘겨주는 자리에서 나는
나의 조사에 새롭게 나타난 테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단순하게 받아 들였던 제주 라이카의 진도 이입의 경로가
말 목장 설치와 제주개의 이입에 따른 것이라는 기존의 추정이
산산이 깨어져 버린 사실과,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진돗개라는
순종이 보존되어온 이유와 남해안에서만 순종 개들이 다량 출현한
이유 등이 새로운 과제로 등장했음을 설명해주었다,
박 선생은 콧등을 열심히 문지르며 나의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들었다.
콧등을 문지르는 것은 그가 깊은 생각을 할 때 자주 하는 버릇이었다.
나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 말이 되는군. 그 것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진돗개 조상 찾기보다
더 중요한 일 이 될지도 모르겠구먼 !“
우리 둘은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결론은 비슷하게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박 선생은 순종 보존의 이유를 기존의 추정인 섬의 고립성에서
어떤 단서를 찾으려 했었고
나는 나대로 담백질의 공급원인 해산물이 이 지역에 풍부해서
개 도살을 구태여 담백질에 굶주린 육지 주민처럼 심하게 할
필요가없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놨지만 둘 다 마땅한
해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밤은 깊었고 우리는 미진한 생각을 머금고 헤어졌다,
며칠이 지난 오후.
모처럼 사무실 근무를 하게 된 나는 점심 뒤 나른하게 찾아오는
졸음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점차 스믈스믈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를 터지는 전화벨
소리가 잡아 챙겼다.
수화기를 통해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는 박 선생의 것이었다,
나의 졸음이 도망 갈 만큼 긴장된 어조였다.
“ 서 과장 ! 우리가 왜 남해안 일대에만 순종 개들이 잘
보존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결론을 못 얻고
헤어졌었지 ? ”
“ 네. 그랬지요.”
“ 내가 며칠 간 생각해보니까 말야, 한 가지 단서가 잡히더라구.”
“ 뭔데요 ? ”
나의 목소리도 긴장되기 시작했다.
“ 이들 남해안의 개들이 전부 사냥개들이란 말일세 !
진돗개도 그렇고 일정 초기까지 사냥개로 진돗개보다
훨씬 더 유명했었던 거제개도 사냥개란 말 일세 !”
박 선생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계속했다.
“ 남해안의 다른 개들, 다시 말하면 완도개나 해남개도 자네가
말한 대로 진돗개와 거의 비슷한 아류라면 말야,
이 것들도 사냥개들 이겠지”
완도개나 해남개가 진돗개와 비슷하다는 말은 내가 진송이를
데려 왔었던 진도여행 중에 차안에서 어느 노인 분에게 들은 말이었다.
“ 서 과장 !
이들 순종개의 사냥 능력이 크게 필요했던 사냥이
이 지역에서 유행했었고 그 덕분에 이들 개의 혈통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거야.
섬이니까 물,또는 어업과 관계 있는 리트리버나
뉴 파운드랜드와 같이 물 좋아하고 수영 잘하는 개가
탄생하지 않고 왜 섬과 별다른 관계가 없는 사냥개들이
나왔는가 하는 점에서 당신의 추리가 출발해야 한다고 ! ”
천만 뜻밖의 그 의견은 캄캄한 암흑을 훑은 번개의 섬광처럼 갑자기
나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한편으로는 하등 진돗개와 아무런 관계가 없던 박 선생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 기이하게도 생각 들었지만 나는 즉석에서
그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했다.
“ 맞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저도 사냥개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한번 연구를 해보겠습니다.” ‘
수화기를 놓은 나는 아까의 졸음이 말짱히 가신 머리로 새로 나타난
이 테마를 잡아들었다.
틈만 나면 진돗개 생각으로 지새던 나의 두뇌는 본능적으로
그간 축적된 정보를 검색해 들어갔다.
몇 초만에 박 선생의 말을 뒷받침하는 정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개를 데리고 짐승을 사냥하는 개사냥, 다른 이름으로 말하자면
넉 사냥이라 부르는 사냥이 그 미약한 명맥을 유지해온 곳은
현재 남해안에서도 순종 사냥개중 혈통이 끝까지 보존되어왔던 진도다.
물론 야간에 진돗개를 앞세우고 노루나 너구리를 잡는 밀렵 수준의
개사냥은 지금도 육지의 산간 지대에서 행해지고는 있다.
그러나 사냥개의 사육이나 사냥술이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축적된 곳은 오로지 진도뿐이다.
더해서 진도에 숱하게 전해 내려오는 개사냥의 흥미로운 일화들은
가히 진돗개 순종 보존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일이다.
진도에 내려오는 여러 일화 중에서도 좀 더 사냥 능력 높은 사냥개를
얻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적지 않았던 것 역시 박 선생의 가설을
입증 해주는 것이라 할 만 했다.
좋은 사냥개를 얻기 위한 노력은 결국 우수한 혈통의
순종 보존이라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더해서 개의 순종 보존에 사냥이 기여했던 사례가 비단 진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릿속의 검색이 밝혀냈다.
내가 사는 속초 인근에는 풍산개의 고향 개마 고원에서 피난 내려온
풍산 군 출신 실향민들이 소수나마 살고 있다.
나는 그들 중의 하나로서 수산업을 하는 최 사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해방 뒤 북한 땅에서는 최초로 조직되었던 반공 유격대인
개마고원 유격대의 일원이었다.
나는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한 80년대 중반 그와 만나서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는 고향인 개마고원에서 어린 시절부터 풍산개를
길러 왔던 사람이었다.
남한에서 풍산개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던 그 무렵에 나는 그로부터
풍산개에 관한 다량의 정보를 얻었었다.
풍산개의 외모가 우리가 생각하듯 진돗개와 같이 귀가 빳빳이 선
북방 개형이 아니라 90 퍼센트 가까이가 바둑이와 같이 귀가 꺾인
바둑이 형이라는 사실을 안 것도 이분에게서 이었다.
나는 녹이 슬어 가는 기억의 한구석에 박혀있는 그의 말을 출력해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 개마고원처럼 사냥꾼들이 많은 곳도 드물거야. 일정 시대처럼 엽총의
소지허가가 나기도 힘든 때였는데도 개마고원 부락마다
직업 포수들이 한 명씩은 꼭 있었거든. ”
그는 또한 많은 수의 포수들이 풍산개를 길렀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 풍산개를 범 잡는 개라고 하는데 그 건 허풍이 아니야.
나는 포수에게 총을 맞고 부상당한 표범을 물어 죽인 풍산개를
직접 본 일이 있지”
줄여서 말한다면 풍산개는 개마고원에서 행해졌던 대규모의 수렵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그 혈통이 보존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쯤의 정보라면 한국 순종개의 혈통 보존과 사냥과의 연관 관계를
입증해주는 또 다른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색 끝에 박 선생의 말이 맞는 말이라는
최종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가다가 돌출적으로 나타난
순종 보존에 관한 문제를 거의 다 푼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었다.
본래 계획대로 진돗개 조상 찾기의 또 다른 단서를 이 발견에서
얻어내야만 했다.
그 단서는 상상외로 하루도 안 되어서 발견되었다.
17.남해안 사냥개들의 공동 조상 제주 라이카.
그 날 밤 무겁게 찾아든 낮의 화두는 퇴근 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머리를 짓눌렀다.
남해안 개들이 사냥개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무슨 단서를 찾으려면
그 방면의 추가 정보가 필요했다.
이 궁리 저 궁리로 시달리던 나의 머리는 엉켜진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서 불을 켰다.
머리를 정리 할 겸, 나는 오래 간 만에 이 상오 씨가 썼던
한국 야생 동물기를 꺼내 들었다.
나는 박 선생 책을 복사해서 만든 이 책을 뒤척이며 남해안 일대의
순종 개들을 소개한 부분을 찾았다.
말했던 대로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출판물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 토종개와 관계된 희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책 말미에 10여 페이지 정도 간단히 소개한 그 내용은
너무도 간단해서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는 것이 흠이다
나는 행여나 하는 기분으로 그 부분을 열심히 뒤져봤지만 남해안의
개들이 한 사냥에 관한 아무런 소개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자정이 될 때까지 이 책의 여기저기를 뒤적이다가 헛된 노고임을
깨닫고 책을 덮었다.
다시 잠자리에 든 나는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그 순간.
감은 눈의 망막 위를 그 책의 한 구절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남해안의 대표적 개라는 제주개 거제개 진돗개 세 종류의 개에게서
한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
책은 제주개를 대형 개, 거제개를 중형 개, 진돗개를 소형 개로
분류했다고 앞에서 밝힌바 있다.
크기는 달랐지만 이들의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검은 라이카의 새끼들 중에 흰 강아지도 보인다.
다색 유견의 출산 습성이 진돗개와 꼭같다.
앞서 소개한대로 제주개는 이스트 라이카의 특징인 검은색이었고
첫댓글 긴 장문 ! 잘 읽었읍니다
좋은정보 입니다
저도 옛전에 여러번 읽은적이 있고 공감가는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