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 즐길줄 모르면 불법 알기 어렵습니다 / 무진장스님 (조계사 한주)
부처님께서 도를 깨닫고 나서 깜짝 놀라셨어요. 그리고 크게 감동을 하셨지요. 도를 깨닫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알고 보니 일체 중생이 한명도 빠짐없이 본래 부처였다 이거예요. 그런데 왜 중생의 탈을 쓰고 있을까. 그 탈을 벗게 하려고 부처님께서 45년간 불철주야 법을 설하셨습니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으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법을,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오셨다 했습니다. 일체중생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보이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깨달음을 깨닫게 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깨달음에 들게 하고자 오셨다는 겁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지혜의 종교입니다. 불교를 오래 믿으면 중생 스스로가 지혜로워져서 부처님과 같아집니다.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판단이 명석해 지는 겁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나가는 명석함을 갖기 위해서, 판단력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을 따라 배우고자 정진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따르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믿어야 하고, 그 가르침을 행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부처님말씀이 쓰여진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고 마음을 닦는데 방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불성적인 자기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자신의 삶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중생심에 매몰되어 함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기에 늘 자기탐구에 힘써야 하지요. 남의 일에 관심 갖고 이러쿵 저러쿵 할 때가 아닙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보세요.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가장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보통사람에 미치지 못하거나 보통을 지나친 사람들이예요. ‘가장 평범하고 보통사람인’ 부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 앞에서 무엇을 빌고 있습니까? 부처님을 닮겠다는 건가요? 아파트에 당첨되기를, 남편의 승진을, 또는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붙기를 더 바라고 있지 않나요? 왜 절에 다닙니까? 우리의 정신세계를 정상화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라고 나는 말합니다. 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 법입니다. 불교에서 중도를 말하지요. 가운데 중(中), 길 도(道)를 쓰는데 이 중(中)자가 ‘맞을’ 중자입니다. ‘이치에 턱 들어맞는다’라는 뜻이지요. 화살을 쏘아 과녁에 맞으면 적중했다 하잖아요. 들어맞았다는 것이지요. 불교는 ‘비판주의적 종교’ 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없을 무(無)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없다는 소리가 아니지요. 아니라는 소리도 있다는 겁니다. <반야심경>의 무(無)는 전부가 비판입니다. 우리가 절을 하더라도 비판정신이 없으면 절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한번 절을 함으로써 아직은 멀었다 그 뜻입니다. 또한번 절하고 그것도 아니다, 한번더 절하고 그것도 아니다… 3천배를 했어요. 그러나 과연 그 가운데 진실된 절이 3번이나 있을까 말까 하다는 얘기예요. 금을 캐러 금광에 들어간 사람이 삽질을 하고는 홱 집어 던집니다. 왜 집어 던집니까? 이것은 아니다 라는 뜻이지요. 뭐가 아니냐, 금이 아니다 이거지요. 또한번 삽질을 하고는 홱 집어던지면, 그것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 그것도 아니다… 뭐가 아니냐, 열반에 이르기까지 계속 비판정신을 가지고 탐구하라는 뜻입니다. <유마경>에 곧은 마음을 쓰는 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의 성불시에 왜곡된 말을 하지 않는 중생은 내세에 극락을 간다고 했습니다. 또 깊고 깊은 마음속에 부처와 보살이 있다고 했고 보리심을 내면 극락에 태어난다 했습니다. 곧은 마음과 깊은 마음, 보리심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공덕을 구족하고 진실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바둑 하는 사람이 한 돌 한 돌 정성을 다해 신중하게 놓아가듯,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인가 생각하며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서양의 과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오늘날 세계는 크게 세가지 점에서 대량살상이 자행될 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쟁으로 핵무기가 터져 대량으로 죽거나, 공해에 의한 완만한 인류의 대량 살상이 올 수 있다 했습니다. 가치관 혼란에서 오는 정신적인 대량 살상도 이야기 했어요. 외부적인 환경의 오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오염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속에서 살고 있는가요. 정신적으로 황폐한 시대, 암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오염이 심각합니다. 시민정신은 갈수록 악화일로에 놓여있어요. 인성이 대단히 잔인해져 가고 있어요. 천박해져 갑니다. 시민의식은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공생의식인데, 천민의식은 세상사람 다 죽어도 나만 살고 싶다는 것이예요.이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할 일이 자기를 바로 볼 줄 아는 지혜를 기르는 일입니다. 남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볼 수 알아야 다른 것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의 조국을 보고, 그리고 국제사회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세계인, 세계인 하는데 세계인이라고 말로는 쉽지만 진실한 세계인이 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는 탐 진 치가 더욱더 극성을 부리기에 종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오늘의 혼탁한 사회를 정화해 나가야할 막중한 책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고가 편파적이고 격합니다. 자기만 최고로 알고 양보하거나 남을 살피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와글와글 끓는 뜨거운 가마솥 같아요.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세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어느 분야나 물질위주로 생각해 왔습니다. 탐욕스럽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관념이 21세기까지 이어져서는 안됩니다. 오늘의 시대를 해결하기 위해 서양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해 왔을까요. 그들은 존재론, 구조주의와 같은 사상들이 오늘의 시대를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존주의입니다. 그러한 존재론을 가지고 현대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중국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도에 근거했어요. 도가 오늘의 시대를 해결해 줄 것이다. 그러면 불교사상은 어떠한가요. 법, 즉 다르마에 의해서 극복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란 말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색(色)이란 것은 현상적 세계를 말하고, 공(空)이라 정신세계를 뜻합니다. 이 현상적 세계와 이상적 세계를 합친것이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어떠해야 할까요? 현상적이라는 말은 1차원의 세계입니다, 권세, 재물, 현상적인 이익 등… 거기에 매몰되면 현실주의자입니다. 정신적인 것은 2차원의 세계입니다. 고귀한 정신주의적인 태도지요, 그런데 극단적인 이상주의적 태도도 있어요. 이러한 사람들은 현실세계와 대화가 없어요. 자기만이 정당하고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련하게 보고, 망상•환상 주의에 빠지기가 쉬워요. 그렇다면 21세기 사회는 어떠해야 하느냐. 이 양자를 바라볼 수 있는 반야의 지혜가 나와야 됩니다. 반야의 지혜가 21세기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원리가 돼야 합니다. 이 3차원의 반야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조사록>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사람들이 하루종일 반야를 외워도 자성반야를 모르면, 밥을 말하고 있되 배고픈 것과 같다고 했어요. 입으로만 말하는 밥은 배부를 수가 없지요. 입으로만 진리를 말하면 만겁의 세월이 흘러도 견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반야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도록 우리 불자들로부터 열심히 수행정진해야 합니다. “마음이 어리석은즉 사바세계요, 마음을 깨달은즉 이상세계다. 마음이 삿된즉 사바세계요, 마음을 바로하니 이상세계다.” <열반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나는 것이지만, 스스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심성이 천박해 질 수도 있고 고귀해 질 수도 있습니다. 지혜롭게도 되고 마냥 어리석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우리의 심성에서 나옵니다. 천당 지옥이 우리들의 심성가운데 있어요. 극락이니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이 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면 늘 행복하고 안락할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가장 으뜸가는 태도는 물처럼 사는 거라고 말합니다. 물이라는 것은 대단히 유연합니다. 내가 서 있는 발바닥 밑 지하를 흐르고 있지만 그 물은 만물을 길러냅니다. 모든 생명은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가장 낮은 곳을 흐르지만 만물을 길러내는 물처럼 유연하면서 또 겸손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 입니다. 물은 생명을 길러내지만 내가 기른다 공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나는 불자 여러분들이 물처럼 겸손하며 포용력있게, 그리고 고요를 즐기는 사람으로, 마음을 잘 쓰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현대인들은 고요한 시간을 갖기 어려워요. 고요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불법도 알기 어렵습니다. 물이 고요할 때는 하늘의 달 그림자가 선명히 나타나지만 물이 흔들리면 달 그림자는 이그러져 보입니다. 마찬가지예요. 마음이 흔들리면 객관적인 것을 판단하는 지혜가 나올 수 없습니다. 마음이 고요할 때만 판단이 바로 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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