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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 평전> 2009/11/16 07:35 정운현
- 잘못 끼워진 첫 단추, ‘농고’ 진학 바로 아래 동생 종철씨 경성사범학교 교기 말년의 종국의 모습. 책상 위에 쌓인 것이 그가 손수 만든 친일파 인명카드임 그는 수준급 악기 연주자였다. 사진은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 종국이 자필로 그린 악보와 메모들 아내 연순과의 신혼초 집으로 손님들을 불러 잦치 도중 기타를 연주하는 종국
한편 여기서 꼭 눈여겨 볼 대목은 그의 졸업 후의 행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인문계, 그것도 명문고를 갈 성적은 됐었다. 그의 동생 종철은 앞에서 ‘형은 소학교 시절 부급장(부반장)을 지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해 수재들이 들어가는 경기중학에 충분히 추천받을 수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실제로 1, 2학년 땐 최 상위권에 들어 성적우수상을 받기도 했고, 4, 5학년 때 다소 부진했으나 마지막 6학년 때는 다시 이를 만회한 것으로 학적부에 나와 있다.
그러나 그가 진학한 학교는 경기중학이 아니라 경성공립농업학교(* 지금은 폐교된 서울농고의 전신) ‘수의축산과’였다. 그의 재능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진학임이 분명한데 여기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 궁금증을 동생 종철이 명쾌히 풀어줬다. 결론을 앞세우면 바로 부친의 사업실패 때문이었다. 이 잘못 끼운 단추 하나로 인해 이후 종국의 인생역정은 완전히 딴판이 되고 마는데 그의 부친은 이를 예상이나 했을까.
그의 부친이 친구 두 사람과 함께 종로2가에서 개업한 ‘불로제약’은 예상만큼 영업이 시원치 않았다. 고민 끝에 세 사람은 결국 1941년 이를 폐업키로 결정하고 자산 처리에 나섰다. 당시 불로제약은 세 곳에 부동산을 자산으로 가지고 있었다. 첫째, 회사 건물과 부지, 둘째, 월곡동 농지 3만평, 셋째 도봉동 땅 8만평 등이 그것이다.
당시 시세로 이들 세 곳의 부동산은 액수가 비슷했는데 그의 부친은 이 가운데서 도봉동 땅을 희망했고, 결국 이를 차지했다. 1942년 늦여름 그의 부친은 아내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이곳을 답사했다. 종철은 “그 때 돌아오는 길에 메뚜기를 잡아 꿰어온 기억이 선명하다”고 말했다. 이듬해(1943년) 11월 종철 ․ 종한이 재동학교에서 창동학교로 전학했다.
한편 그의 부친이 이곳 도봉리 땅을 희망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부친은 이 땅을 토대로 농촌청년교육과 천도교 포교를 해볼 작정이었다. 그리고는 농장의 이름을 ‘귀일(歸一)농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 이는 천도교의 모토인 동귀일체(同歸一體)에서 따온 것임) 그리고는 장남격인 종국을 ‘수석보좌관’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1942년 3월 종국이 재동소학교를 졸업하자 그의 부친은 그를 농업학교로 진학시켰다. 그로선 인생의 전환점이 된 ‘농고 진학’을 두고 동생 종철은 이렇게 회고했다.
“형은 농고 대신 인문계로 진학했으면 남들처럼 무난하게 관리나 회사원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형이 농고로 진학하면서 인생이 완전히 꼬였다. 해방이 안됐으면 형은 농고를 나와 ‘가나안농군학교’ 교장과 같은 사람이 됐을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농고 진학이 큰 문제가 된 것은 비단 장래의 진로 얘기만이 아니다. 그는 겁이 많고 소심해서 농고에서 실습하고 배우는 과목들을 제대로 소화 내지 적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봄철 모내기 실습 때의 일이다. 다른 학생들은 별 무리없이 줄을 맞춰 모를 심는데 비단 그에게만 문제가 생겼다. 바로 논의 거머리 때문이었다. 요즘은 농약 때문에 거머리가 거의 사라졌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내기 할 때 모 심는 사람 종아리에 붙어 피를 빠는 거머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종국은 거머리가 무서워 모 한줌 심고 한 쪽 다리 들어 거머리 붙었나 살펴보고 다시 모 한줌 심고 다른 쪽 다리를 들어 거머리 붙었나 살피곤 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간에는 ‘겁쟁이 바보’라고 놀림감이 되었고, 일본인 교사한테서도 ‘못난 놈’이라는 핀잔과 함께 꿀밤을 얻어맞곤 했다. 흔히 요샛말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셈이다. 그런 종국의 소심한 성격을 동생 종철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 가축 예방주사도 놓지 못한 소심한 성격
“어릴 때 개구리를 잡아 항문에 보릿대를 끼워 불면 개구리의 배가 풍선처럼 커졌다. 나는 더러 그런 장난을 하면서 자랐는데 형은 한 번도 그런 장난을 한 적이 없다. 도봉리에 살 때 집에 닭을 100여 마리 키웠었다. 더러 닭을 잡을 일이 생기면 형은 닭 모가지를 못 따서 늘 그 일은 내가 맡아서 하곤 했다. 형이 다닌 학과가 수의축산과다 보니 더러 말한테 주사를 놓는 일도 있었는데 형은 팔뚝만한 주사기에 질려 한 번도 말 주사를 놓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동물 수술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본다. 농고 시절은 형으로선 대단히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은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3남 정택도 동생 종철과 유사한 증언을 했다.
“천안 요산재 시절 아버지는 겁이 많아서 키우던 염소, 돼지에게 예방주사도 제대로 놓지 못했다”고 정택은 말했다. 한 사람의 고유한 성정이 세월이 지난다고 갑자기 어디로 가겠는가. 그는 농고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인지 이를 정확히 밝히길 꺼리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일자 미상) CBS 라디오의 ‘오늘을 생각하며’ 프로에서 그는 후배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대담을 가진 바 있다. 얘기 중에 임헌영이 “다니던 중학교가 어느 중학교였습니까?” 라고 묻자 “뭐 쪼그마한 데를 댕겼습니다. 허허!” 하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 경성공립농업학교는 이후 청량상고, 청량기공, 경기기공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대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립대 학적팀에 그의 학적을 조회했더니 해당년도 입학자 명부에는 이름이 있으나 이름 위에 붉은 줄이 쳐져 있다고 했다. 담당자는 중퇴자여서 그런 모양이라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해당년도 제적부를 보관돼 있지 않아 3년간 고통 속에 다닌 그의 농업학교 시절을 자세히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농고 생활을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뜻밖에 찾아온 8.15 해방이 그것이었다. 해방은 35년간 일제의 압제 하에서 고통 받던 조선인들에겐 더없이 큰 기쁨이었지만 그에겐 지옥 같던 농고를 탈출할 수 있었던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을 요량이었다. 해방 한 달 전인 1945년 7월 초급중학 3학년 과정을 수료한 그는 이후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해방을 맞아 세상은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그에겐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이다. 평소 독서광이었던 그는 도서관을 찾아 페스탈로치를 탐독하는 등 모종의 입시준비에 부산했다. 그리고는 두 달 뒤인 1945년 9월 경성공립사범학교(약칭 경성사범) 본과에 입학했다. (* 종철에 따르면, 당시 경성사범은 용산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형제는 경원선을 타고 통학을 했는데, 창동에서 같이 열차를 타면 종철은 청량리에 내려 학교(보성고)로 가고, 종국은 서빙고를 거쳐 용산에 내렸다고 한다.) 그는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경성사범은 1922년에 설립된 초등교원 양성기관으로,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최초의 관립 사범학교였다. 매년 졸업식에는 조선총독이 참석하였으며, 평상시에도 조선총독과 2인자인 정무총감이 시찰차 수시로 학교를 방문할 정도로 학교 위상이 높았다. 1929년 평양과 대구에 사범학교가 추가로 설립되기 이전에는 조선 내 유일한 관립 사범학교였으며, 이 무렵 조선인 학생수는 전체 학생수의 25% 정도였다. (* 김성학 ‘경성사범학교 학생 훈육의 성격’, 1999, 경희대 교육문제연구소)
- 해방, 경성사범 진학, 그리고 독서회 사건
농고를 탈출한 후 희망 속에 출항한 그의 ‘사범학교호’는 예상과 달리 순항하지 못했다. 그의 이력서에 따르면, 이듬해(1946년) 5월 ‘본과 제1학년 중퇴’로 나와 있다. 입학한 지 불과 9개월 만에 중도하차한 셈이다. 재주가 많은 반면 집념이 좀 부족하다는 평을 평소 받아온 그였지만 이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 남모를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이해가 가는 면도 없지 않다. 모처럼 생기발랄한 기분으로 들어간 사범학교에서 그가 뜻밖에 ‘복병’을 만난 것이다. 내용인 즉 이렇다. 다음은 종철이 들려준 얘기다.
평소 독서에 취미가 있던 그는 사범학교 입학 후 ‘독서회’에 가입했다. 처음엔 그냥 교양독서 같은 것을 하는 모임이려니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른바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공부모임’과 비슷한 형태였는데 상당히 강한 좌익 이념서클이었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가입한 그로선 적잖은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모임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그럼 잘가!’ 라는 인사가 아니라 ‘테러 협박’이었다. 독서회 회원들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을 하고 나왔다.
해방직후 남한사회에는 좌우익이 혼재한 가운데 지식인 사회 곳곳에 좌익세력이 침투해 있었다. 심지어 군 내부에도 좌익 세포조직이 거미줄처럼 질서정연하게 그물을 쳐놓고 있었다. 당시 초급장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좌익 조직의 간부를 지낸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 건으로 해서 박 전 대통령은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기도 했다.
독서회원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자 ‘겁쟁이’ 종국이 취한 태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다름 아닌 제2의 ‘등교 중단’이었다. 일단 신변의 위협은 피해보자는 속셈이었겠지만 이 일로 그는 다시는 경성사범 근처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그의 교사의 꿈은 이렇게 해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 경성사범은 현재 서울대 사범대로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의 경성사범 시절 학업성적이나 생활태도 등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대 사범대 측에 문의한 결과, 1945년, 1946년 졸업자의 경우 학적부가 남아 있으나 그처럼 중퇴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만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탁월한 재능을 한결같이 얘기했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고 다양한 재능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고려대 재학시절엔 ‘3천재’의 하나로 불린 적도 있다고 했다. 철학의 신일철, 어학의 민영빈, 그리고 사학의 임종국이 그들이다. 그가 타계한 지 한 달여 뒤인 지난 1989년 12월 중순 나는 천안 구성동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부인에게 문상을 한 뒤 나는 그의 집필실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두어 평 되는 방으로 들어서자 오른편으로 서가가 하나 있었다. 예의 낯익은 총독부 <관보> 같은 것들이 제본돼 있었다. 어림잡아 1천 권도 안돼 보이는 분량이었다. 그래서 다른 방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부인은 이게 남편이 소장했던 책의 전부라고 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대체 이 정도 분량의 자료를 가지고 그런 책들을 써냈단 말인가. 정말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창문 쪽으로는 작은 책상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3단 짜리 책꽂이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우리 또래가 중학교 때 영어단어를 외우기 위해 사용했던, 한 쪽 귀퉁이에 동그란 철제 링이 달린 ‘카드’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후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에 기초자료로 활용됐던 ‘인명카드’ 원본인 셈이다.
나는 샘플로 그 몇을 살펴보기로 했다. 먼저 아주 유명한 거물급 친일파 몇 명을 골라서 꺼내 보고 다음엔 손에 잡히는 몇을 꺼내 보았다. 거물급 친일파들을 빼고는 나머지는 모두 이름과 생몰연대, 대표적인 친일행적 한 둘 정도가 기록됐을 뿐 거의 빈칸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그는 신인가, 사람인가.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그런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의 여러 재능 가운데서 음악에 대한 재능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놀랍게도 그는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연주에 능했다. 천안 요산재 시절 어려운 형편에도 그는 기타, 첼로, 아코디언 등을 집에 가지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날은 막내아들 정택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기타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무릎에서 배운 솜씨가 늘어 정택이가 기타를 치면 그는 아코디언으로 아들의 연주를 받쳐주며 합주를 하기도 했다.
정택은 그런 인연으로 공군 군악대에서 테너 색소폰을 불다가 제대했다.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본 주변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다. 그리고 다들 놀라워했다고 한다. 천안 시절 5년여 그의 집에서 같이 살았던 막내여동생 경화(1946년생, 경기도 수원 거주)에 따르면, 클래식 기타는 수준급이었고, 첼로 역시 잘 했다고 한다. 다음은 경화의 증언.
“밤에 수연이(종국의 장녀)와 누워서 자려고 하면 오빠는 ‘Moon light Sonata’를 기타곡으로 편곡해서 마루에서 연주해 주셨다. 밤에 불을 끄면 달빛이 마루에 그득했는데 오빠는 기타로 월광소나타를 잘도 키셨고, 금지된 장난, 알함브라의 궁전 등이 주 레퍼토리였다. 또 첼로를 잘 해서 아르페치오 소나타도 하셨고, 랄로의 첼로 협주곡 등을 좋아하셨다. 상상의 백조며, 또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같이 들으며 그 악장이 나올 때면 ‘난 여기 이 부분이 좋아’하셨다”
경화는 언젠가 오빠가 사준 랄로의 첼로 협주곡과 아르페치오의 소나타 카세트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사후 경화는 그것을 들으며 오빠 생각에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수원 자택으로 방문했을 때 경화는 그 추억의 카세트 테입을 내게 보여주었다.
- 프로급 수준의 악기 연주실력…입상 경력도
종국은 악기연주는 물론 음악감상도 좋아했다. 특히 고전음악을 좋아했고. 랄로 차이코프스키 브람스 쇼팽의 음악을 좋아했다. 반면 오페라 아리아는 별로였다. 언젠가 경화가 나비부인의 ‘어떤 개인 날’을 들어보겠느냐고 하자 그는 ‘난 오~ 하는 것은 싫어’라고 하더라는 것. 평소 그가 좋아하는 음악은 잔잔하면서 속으로 속으로 접어들면서 결코 튀지 않는,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내면의 정열이 가득한 그런 음악이었다. 경화는 “랄로의 첼로협주곡에는 오빠의 성품이 들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경화는 종국오빠의 음악적 재능은 모친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보통학교 교사를 지낸 모친 역시 음악에 재능이 있었고, 학교에서 풍금을 쳤는데 그런 것이 은연중에 아들에게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의 연주솜씨는 거의 프로급 수준이었다. 수상경력도 있다. 경화가 대학을 다닐 때 즈음(1970년도로 추정됨)이었다. 하루는 모 방송사에서 주최한 클래식 기타 경연대회에서 2등상을 타왔다. (* MBC인 것 같다고 해서 <MBC 사사(社史)>를 뒤졌으나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경화가 “오빠 실력이면 1등을 할 텐데 왜 2등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다들 젊은 사람이고 나이든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 그리고 떨려서 실력발휘가 제대로 안되더라”며 머쓱해 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해서 웬만한 악보는 다 볼 줄 알았고, 편곡까지도 할 정도였다. 그가 남긴 유품 가운데는 이런저런 내용을 기록한 모트가 20여 권 되는데 그 가운데는 악보집도 여러 권 된다. 음악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그의 음악에 대한 이해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농고, 사범학교 ‘중퇴생’인 그가 대체 언제, 어떤 경위로 음악에 대해 이 정도의 재능을 쌓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역시 동생 종철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는데 계기는 ‘사범학교 중도하차’였다. 경성사범을 때려치우고 1년 가까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종국은 어느 날 모친에게 음악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일로 모친과 그 사이에는 불화가 돋아났다. 모친은 그가 농업학교를 다니다 중도에 그만둔 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남편이 장남한테는 맞지도 않는 농고에 보내 아들의 인생을 망치고 있다고 평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장남이 다시 경성사범에 들어가 선생을 하겠다고 하자 모친은 그마저도 그리 탐탁해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선생질은 농업학교 나와 농사를 짓는 것보다는 낫겠다, 즉 ‘차선’ 정도로 모친은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시 장남이 난데없이 음악을 하겠다고 하니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친은 내심 장남이 관료가 돼 벼슬을 하길 바랬던 것이다. 차남 종철이 상대(서울대)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도 모친은 차라리 법대 가서 고시 합격해 창녕군수가 됐으면 하는 바램을 밝힌 바 있다.
그는 끝내 모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3월 당시 서울 원서동 로터리에 있던 ‘서울음악전문학원’ 첼로과에 입학했다. (* 그의 자필 이력서에는 ‘서울음악전문학원’이라고 나와 있으나 동생 종철은 당시엔 ‘계정식음악학원’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 학원의 원장은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1904~1977)이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낸 서울음악전문학원은 어떤 곳이었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교보문고에 가서 한국음악사 코너를 살피기도 하고 인터넷을 뒤지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한국음악사 전문가인 노동은(중앙대 음대학장) 교수의 <‘경성음악전문학원은 어떤 곳이었나?>라는 논문을 찾아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앞머리의 ‘경성(京城)’과 ‘서울’이 다르긴 했지만 ‘경성’이 ‘서울’의 일제 때 이름이고 보면 그게 그거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가 그 논문을 복사해서 손에 든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요새 모 방송사 코미디 프로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코너인 ‘이건 아니잖아’ 말 그대로였다. 논문에 따르면, ‘경성음악전문학원’은 바이올린 연주가이자 작곡가로 활동한 김재훈이 1838년에 개교, 1942년에 폐교된 음악학교라는 것.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인 노동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계정식의 ‘서울음악전문학원’서 수학
노동은은 ‘서울음악전문학원’이라는 이름은 한국음악사를 전공한 자신도 처음 들어본다며 되레 지적 호기심을 나타났다. 노동은이 모른다면 내 궁금증을 풀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일단 해방 전후 한국음악계를 훑어보았다. 당시 음악계는 현제명 등 일제하 친일성향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일제 말기인 1943년 4월 경성대화숙 내에 경성음악연구원(대표 현제명, 교무 김성태)이 설립됐는데 시대적 상황으로 봐 이곳은 ‘음악보국’을 위한 전위단체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곳이 해방 후 다시 한국음악계의 주류가 되는 걸 보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서울대 음대 홈페이지에 따르면, 현제명은 해방이 되자 그 해 12월 문교부 전문학교령에 의거, 경성음악연구원을 ‘경성음악학교’로 재설립하고는 자신이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8월 22일 경성음악학교는 서울대 예술대학으로 승격, 개편됐고 초대 예술학부장에는 다시 현제명이 취임했다. 현제명 없는 한국음악계는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음악전문학원’이 등장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해 노동은은 “현제명 반대파들이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 종철에 따르면, 당시 종국은 우수한 음악적 재능으로 계정식 원장으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다.)
한편 종국은 음악공부에서도 ‘중퇴자’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입학한 지 10개월 만인 1947년 12월 서울음악전문학원 ‘제2학년 중퇴’로 끝내고 말았다. (* 10개월 다닌 걸 ‘2학년 중퇴’라고 한 걸 보면 이곳은 5개월 또는 6개월 단위를 한 학년으로 쳤던 모양이다. 음악학원에 다닐 당시 종국은 5촌 당고모의 신세를 많이 졌다. 당시 창신동에 살고 있던 그의 당고모는 연건동 네거리에서 식당을 하면서 종국을 많이 챙겨주었다) 중퇴 원인은 모친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장남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음악 한다고 돌아다니자 모친은 화가 난 나머지 “종국이 넌 큰아버지 양자나 가라”며 구박을 해댔다. 모친의 얘기가 허튼소리는 아니었다. 큰집에 후사가 없어 종국이 양자로 가기로 집안에선 얘기가 돼 있던 상황이었다.
종국은 모친의 얘기를 고깝게 들었던지 이내 음악학원을 그만두고 보따리를 챙겨 진주 큰집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다시 ‘무위도식’ 낭인생활이 시작됐다. 큰집으로선 팔자에 없는 아들이 생겼으니 일단 종국에게 잘해 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주생활도 여의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의 한 형제는 “큰아버지가 통도 크지 않고 자상하지도 않은데다 큰어머님이 친정만 챙겨 정을 붙이지 못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의 ‘큰집살이’는 1년여 만에 또다시 막을 내렸다. 그 즈음 사회적으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 군청, 경찰서 등 각 분야에서 신규채용이 붐을 이루고 있었다.
이 무렵 그의 가족들은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생활을 하다가 부친이 서울인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소재 땅을 매입, 1943년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시골생활이 시작됐다. 애초에 농군도 아닌데다 천도교 일에 관여하고 있던 부친은 일년 거의를 서울서 지내다가 늦가을이나 되면 나타나곤 했다. 그러다보니 농사일, 집안일은 모두 모친 몫이었다. 모친 역시 막내딸로 태어나 귀하게 자란데다 전직이 교사여서 농사일이 손에 익지도 않았다. 무능한 남편에, 그런 속에 장남은 뜻대로 자라주지 않고, 또 돌볼 자식은 여럿이니… 모친의 노고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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