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정보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해당 항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 : 라마 9세 (상편)
푸미폰 아둔야뎃 |
|
|
태국 국왕 |
재위 |
1946. 6. 9. ~ 현 재 |
대관식 |
1950. 5. 5. |
전임자 |
아난타 마히돈 (라마 8세) |
계승예정자 |
마하 와치라롱꼰 |
재위기간 중
역대총리
|
|
|
배우자
|
시리낏 왕후 (1950. 4. 28. 결혼) |
자녀 |
우본랏 라차깐냐 전 공주
마하 와치라롱꼰 왕세자 시린톤 공주 쭐라폰 왈라일락 공주 |
|
|
부친 |
마히돈 아둔야뎃 |
모친 |
시나크린타 왕자비 |
생년월일 |
1927-12-05 |
종교 |
상좌부불교 |
|
푸미폰 아둔야뎃(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Bhumibol Adulyadej, 왕실공식표기: Phumiphon Adunyadet) 국왕은 1927년 12월 5일생으로, 현재 태국국왕으로 재위 중이다. 대중적으로는 "마하랏"(มหาราช, Maharaja: 대왕)이란 경칭으로 불리기도 하며, "라마 9세"(Rama IX)로도 불린다.
1946년 6월 9일 국왕에 등극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하는 국가원수인 동시에,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래 기간 재위하는 군주이기도 하다.(주1) 태국 국민들은 그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 그의 병세가 시장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주2)
푸미폰 국왕은 형식적으로는 입헌군주지만, 정치적으로 유혈사태나 혼돈이 있는 경우 여러 차례 정치적 개입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1960년대에 살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 정권과 2006-2008년도에 "입헌군주제 하의 민주개혁평의회"(Council for Democratic Reform under the Constitutional Monarch: CDRM) 군사정권을 포함하여 몇 차례 군사정권을 지지해주긴 했지만, 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가 즉위한 후로 15차례의 쿠테타와 16번의 헌법개정, 그리고 27명의 총리가 교체됐다.(주3)
푸미폰 국왕은 대중적으로 대단한 존경을 받으며, <헌법>에서도 "신성불가침성"을 인정받고 있다. <헌법>에도 들어있는 "왕실모독죄"(lèse majesté, 대역죄, 불경죄)는 원래 라마 7세(Rama VII) 시대에 군주와 개인의 투쟁이 끝난 후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푸미폰 국왕 자신은 이 조항을 들어 어느 누구도 고소하는 권리행사를 하지 않았지만, 이런 혐의가 있다고 비난을 받은 사람은 처형을 당할 수도 있다. 만일 유죄가 확정되면 최하 3년 내지 최장 15년의 징역에 처해진다. 푸미폰 국왕은 2005년도 탄생일 기념연설에서, 자신은 <왕실모독죄>를 그다지 심각하게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국왕도 흠이 있을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항은 여전히 종종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정치적 소요가 있을 때 정부나 개인, 혹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적을 비난할 때 사용하곤 한다.
|
1. 초기의 생애
(사진) 어머니와 형제들. 가운데 막내가 푸미폰 국왕.
☞ 확대사진 바로가기
푸미폰 국왕은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캠브리지에 있는 '마운트 아번 병원'(Mount Auburn Hospital)에서 1927년 12월 5일 출생했다.(주4) 그는 부친인 마히돈 아둔야뎃(มหิดลอดุลยเดช, Mahidol Adulyadej: 1892–1929) 왕자가 미국의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의학공부를 하던 시기이다. 그는 부친 마히돈 왕자와 모친인 시나크린타(ศรีนครินทรา, Srinagarindra: 1900-1995) 왕자비의 작은 아들이다. 그의 모친이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출생하자 태국에서는 "파워라웡터 파엉짜오 푸미폰 아둔야뎃"(พระวรวงศ์เธอ พระองค์เจ้า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Phra Worawongse Ther Phra Ong Chao Bhumibol Adulyadej)이란 호칭으로 소개되었다.
푸미폰 국왕이 태어나기 몇년 전에 그의 숙부이기도 한 빠차티뽁(ประชาธิปก, Prajadhipok, 라마 7세: 1893-1941) 국왕이 왕자와 평민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짜오파"(เจ้าฟ้า, Chao Fa)보다 한 단계 아래인 "파엉짜오"(พระองค์เจ้า, Phra Ong Chao) 칭호로 불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원래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형이나 누나들과 마찬가지로, 태국 왕실의 자녀들의 군호 중 가장 하급 칭호인 "멈짜오"(หม่อมเจ้า, Mom Chao)로 불렸을 것이다.(주5) 그의 이름 "푸미폰 아둔야뎃"은 "대지(大地)의 강인함, 비견할수 없는 권능"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주6)
(사진) 어머니와 함께. 우측 끝의 막내가 푸미폰 국왕.
부친인 마히돈 왕자가 "하버드대학"에서 공공보건 분야의 학위를 수료한 후 하자, 푸미폰 국왕의 일가족은 1928년에 태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방콕에 있는 우르술라회(Ursuline) 수녀회 운영의 "마터 다이 학교"(Mater Dei School: 성모학교)에서 잠시동안 공부했다. 이후 1933년 그의 어머니가 자녀들을 이끌고 스위스로 갔고, 그곳에서 로잔(Lausanne)에 위치한 사립학교인 "ENSR"(Ecole Nouvelle de la Suisse Romande)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935년 그의 형인 아난타 마히돈(อานันทมหิดล, Ananda Mahidol, 라마 8세:1925-1946)이 태국의 국왕에 등극했고, 푸미폰과 그의 누나 깔리야니 와타나(กัลยาณิวัฒนา, Galyani Vadhana: 1923-2008)는 왕실 자녀의 최고 칭호인 "짜오파"로 예우가 격상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아난타 마히돈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다. 푸미폰은 프랑스 문학과 라틴어 및 그리스어를 전공하여 고교졸업자격인 "문학전공 바칼로레아"(baccalauréat des lettres)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1945년 무렵에 "로잔대학교"(University of Lausanne)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가족들과 함께 태국으로 귀국했다.(주7)
2. 왕위계승과 결혼
1946년 6월 9일 그의 형인 아난타 마히돈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국왕으로 등극했다. 아난타 국왕은 "왕궁"(พระบรมมหาราชวัง, Phra Borom Maha Ratcha Wang: Grand Palace)의 "바롬피만 홀"(Baromphiman Hall)에 있던 침전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는데, 그 사망경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미궁으로 남아있다.(주8)(역주)
(사진) 푸미폰 국왕 부처의 결혼사진.
일단 왕위승계를 마친 푸미폰 국왕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고, 그의 백부인 랑싯 빠윤삭(รังสิตประยูรศักดิ์, Rangsit Prayurasakdi, Prince of Chainat: 1885-1951) 왕자가 섭정왕자(Prince Regent)로 봉해졌다. 푸미폰 국왕은 통치자라는 자신의 새로운 직위를 더욱 충실히 하기 위해 자신의 공부 분야를 정치학과 법학으로도 넓혔다.
스위스에서 학위를 준비하는 동안, 푸미폰 국왕은 파리를 자주 방문하곤 했다. 바로 현재의 왕후이자 자신의 종질인 시리낏(สิริกิติ์, Sirikit Kitiyakara: 1932년생) 멈라차웡(หม่อมราชวงศ์, Mom Rajawongse)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당시 그녀의 부친은 프랑스 주재 태국 대사였다.(주9) 당시 그는 21세였고 시리낏은 15세로, 이후 푸미폰 국왕은 정례적으로 파리의 대사 공관을 방문하곤 했다.
1948년 10월 4일, "피아트 500 토폴리노"(Fiat 500 Topolino) 승용차를 직접 몰고 제네바-로잔 간 도로를 달리던 푸미폰 국왕은, 로잔 외곽 10 km 지점에서 트럭의 뒤꽁무니를 추돌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그는 등을 다쳤고, 얼굴에 절단상이 생기면서 우측 안구를 제거해야만 했다.(주10)(주11)(주12) 이 사고의 결과로 이후 그는 의안을 착용하게 되었다.
푸미폰 국왕이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시리낏은 빈번하게 그의 병실을 방문했다. 그녀는 푸미폰 국왕의 모친을 만났고, 모친은 그녀에게 푸미폰 국왕이 그녀와 더욱 친해질 수 있도록 좀더 가까운 곳에서 공부해줄 것을 부탁했다. 푸미폰은 그녀를 위해 로잔의 기숙학교 "랑떼 리브"(Riante Rive)를 선택해주었다. 1949년 7월 19일부터 로잔에서의 은밀한 교제가 시작되었고, 1950년 4월 28일 푸미폰 국왕의 대관식을 바로 일주일 남겨놓은 시점에서 이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후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있다.
우본랏 라차깐냐 (อุบลรัตนราชกัญญา, Ubolratana Rajakanya) 공주. 1951년 4월 5일 로잔 출생.
마하 와치라롱꼰 (มหาวชิราลงกรณ, Maha Vajiralongkorn) 왕세자. 1952년 7월 28일생.
마하 짜끄리 시린톤 (สิรินธร, Maha Chakri Sirindhorn) 공주. 1955년 4월 2일생.
쭐라폰 왈라일락 (Chulabhorn Walailak) 공주. 1957년 7월 4일생. |
푸미폰 국왕의 손자 중 한사람인 품 젠센(ภูมิ เจนเซน, Bhumi Jensen)은 2004년 12월에 발생한 "인도양 지진"의 쓰나미 재해 때 사망하기도 했다. 그는 우본랏 공주의 아들이었다.(주13)
3. 대관식과 칭호
푸미폰 국왕은 1950년 5월 5일 방콕의 왕궁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는 대관식에서 "시암 백성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덕목으로 군림하겠노라"(เราจะครองแผ่นดินโดยธรรม เพื่อประโยชน์สุขแห่งมหาชนชาวสยาม)고 맹세했다.(주14) 푸미폰 국왕은 대관식에는 국가의 상징하는 백색 일산(日傘) 아래에 놓인 바하타빗(Bahadrabith) 옥좌가 설치되었고, 그곳에 그는 왕권의 상징인 레갈리아(royal regalia: 즉위식의 보기[寶器])와 각종 집기들을 지니고 등장했다.(주15)
(사진) 대관식에서의 푸미폰 국왕의 모습.
1950년의 대관식에서 그의 배우자도 "왕후"(สมเด็จพระบรมราชินีนาถ, Somdej Phra Boromarajininat)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하여 이 5월 5일이 태국에서는 "국왕즉위일"로 공휴일이 되고 있다. 푸미폰 국왕은 2006년 6월 9일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임을 기념하는 "즉위 6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주1)
푸미폰 국왕은 조모인 사왕 와타나(สว่างวัฒนา, Savang Vadhana: 1982-1955) 왕후가 사망하자,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왓 부원니웻 위한"(วัดบวรนิเวศวิหาร, Wat Bowonniwet Vihara) 사찰에서 15일간 단기 출가를 해 근신했다(1956. 10. 22.~1956. 11. 05).(주16) 이 기간 동안 시리낏 왕후가 섭정으로 봉해져 국사를 관장했다. 그녀는 훗날 이 때의 공로가 인정되어 "섭정왕후"(Queen Regent)로 추존되게 된다.
비록 푸미폰 국왕을 영어로 표기할 때 종종 "라마 9세"(Rama IX)란 칭호를 사용하긴 하지만, "라마"란 호칭은 태국어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 이름은 "라차깐 티 까우"(รัชกาลที่ 9, Ratchakal ti Kao: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제9대 재위")에 더욱 가깝게 사용된다. 태국인들이 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호칭은 "나이루웡"(ในหลวง, Nai Luang) 혹은 "파짜오 유후아"(พระเจ้าอยู่หัว, Phra Chao Yu Hua)로 두 단어 모두 "국왕" 혹은 "우리의 머리 위에 계시는 주군"이란 의미이다. 그는 또한 "짜오 치윗"(Chao Chiwit) 즉 "삶의 주군"이라고도 불린다.(주17)
푸미폰 국왕의 공식적인 칭호는 "파밧 솜뎃 파짜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j Phra Chao Yu Hua)인데, 법률 문서에서는 "파밧 솜뎃 파 빠라민톤 마하 푸미폰 아둔야뎃"(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รมินทรมหา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Phrabat Somdej Phra Paraminthara Maha Bhumibol Adulyadej)으로 표기한다. 그리고 영어식 표기는 "His Majesty King Bhumibol Adulyadej"(히즈 메저스티 킹 푸미폰 아둔야뎃)이다. 푸미폰 국왕은 서명을 할 때 "푸미폰 아둔야뎃 뻐.러."(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ป.ร., Bhumibol Adulyadej Por Ror)라고 쓰는데, 이는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R[ex].)이란 의미이다.
4. 태국 정치에 있어서의 위상
4.1. 피분송캄 시대
푸미폰 국왕 재위 초창기의 수년 동안은 빽 피분송캄(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Plaek Pibulsonggram, 피분송크람: 1897-1964) 장군이 이끄는 군사독재 정권의 시대여서, 푸미폰 국왕은 실질적 권력도 없었고 그저 의전적 지위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을 뿐이다.
1957년 8월 국회의원 총선이 끝난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살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 대장이 제2,500주년 불교축제에서 자행된 피분송캄 원수의 행동을 "불경죄"(국왕모독죄)에 해당한다며 몰아세우기 시작했다.(주18)(주19) 1957년 9월 16일, 피분송캄 원수는 푸미폰 국왕을 알현하여 자신의 정부를 지워해주길 호소했다.(주20) 하지만 푸미폰 국왕은 쿠테타를 피하려면 그가 사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피분송캄은 그 제의를 거절했다.
바로 그날 밤 살릿 타나랏 대장이 정권을 장악했고, 그후 2시간 뒤에 푸미폰 국왕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주21) 푸미폰 국왕은 어떤 타인의 연서도 없이 독자적으로 서명한 "국왕령"을 내려 살릿 타나랏 대장을 "수도방위군사령관"(Military Defender of the Capital)으로 임명했다. 이 국왕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주21)
“ |
반면 피분송캄 원수가 총리로서 이끈 정부는 국가행정에서 신뢰할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부여주었고, 공공질서도 유지하지 못했다. 이제 살릿 타나랏 원수가 지도하는 군부는 국가의 행정을 성공적으로 장악하고, 이미 "수도방위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짐은 살릿 타나랏 원수를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정식 임명하노라. 만 백성은 동요하지 말 것이며, 관직에 있는 자들은 살릿 타나랏 원수의 명을 받도록 하라. 이 칙령은 즉시 발효되어야만 할 것이다. 불기 2,500년(1957년) 9월 16일 선포하다. |
” |
(주18) Handley, Paul M. (2006). The King Never Smiles. Yale University Press. pp. 129–130, 136–137.
(주19) Thak Chaloemtiarana (1979). Thailand: The Politics of Despotic Paternalism. Social Science Association of Thailand. p.98.
(주20) Suwannathat-Pian, Kobkua (1995). Thailand's Durable Premier. Oxford University Press. p.30.
(주21) "The Royal Command on Imposition of the Martial Law throughout the Kingdom". The Government Gazette of Thailand 74 (76). 1957-09-16. |
4.2. 살릿 타나랏 집권기
살릿 타나릿 통치기에 군주제는 부활하기 시작했다. 당시 푸미폰 국왕은 공적인 행사들에 많이 모습을 보였고, 지방 도들을 순시하고, 건설공사 등도 시찰하며 후원했다. 살릿 정권에서 특정한 상황이 조성되자 쭐라롱꼰(จุฬาลงกรณ์, Chulalongkorn: 1853-1910) 국왕이 금지시켰던 관행인 국왕의 면전에서 무릎으로 기어서 이동하는 관습도 부활됐고, 왕실이 후원하는 불교종단인 탐마윳 종단(Thammayut Nikaya, 담마윳띠까 니까야)도 새롭게 활성화되었다. 또한 "짜오파야 강"(แม่น้ำเจ้าพระยา, Chao Phraya, 차오프라야)을 따라 사찰에 법의(法衣)를 공양하러 가는 "왕실선박행렬"(กระบวนพยุหยาตราชลมารค, Royal Barge Procession) 행사도, 절대왕정 종식 이후 처음으로 국왕이 직접 인솔하기도 했다.(주22)(주23) 한편 짜끄리 왕조(ราชวงศ์จักรี, Chakri dynasty: 1782-1949)의 고전적 시대에 폐지되었던 의례들도 다시금 복원되었는데, 왕실농경제(พิธีพืชมงคล, 피티 픗몽콘)와 같은 행사가 대표적이다.(주24)
1963년 12월 8일, 살릿 원수가 사망하자 전례가 없는 21일장이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관복으로 정장한 그의 유해에는 왕실의 5기둥 일산을 설치하여 햇빛을 가렸다. 오랜 기간 국왕자문위원을 지낸 파야 시위산 와차(Phraya Srivisarn Vacha)는 이후 어떤 총리도 살릿만큼 푸미폰 국왕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주25)
하지만 최근 연구자들은 푸미폰 국왕과 살릿 총리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보여준다. <왕은 절대로 웃지 않는다>(The King Never Smiles)의 저자 폴 핸들리(Paul Handley)는, 살릿을 푸미폰 국왕의 도구로 보았다. 반면 정치학자 탁 찰럼띠아라나(Thak Chaloemtiarana)는 살릿이 정치적 신용을 쌓기 위해 푸미폰 국왕을 이용했다고 보았다.(주26)(주27)
(주22) Evans, Dr. Grant; citing Christine Gray (1998). "The Politics of Ritual and Remembrance: Laos since 1975". Laosnet.org.
(주23) Evans, Dr. Grant (1998). The Politics of Ritual and Remembrance: Laos since 1975. University of Hawaii Press. pp.89–113.
(주24) Klinkajorn, Karin. "Creativity and Settings of Monuments and Sites in Thailand: Conflicts and Resolution" (PDF). 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
(주25) Thongthong Chandrangsu, A Constitutional Legal Aspect of the King's Prerogatives (M.A. thesis) Chulalongkorn University, 1986 , p.160.
(주26) ใจ อึ๊งภากรณ์, บทความ รศ.ใจ อึ๊งภากรณ์ วิจารณ์ : The King Never Smiles, 14 ธันวาคม 2549 (2005-12-14).
(주27) ทักษ์ เฉลิมเตียรณ, การเมืองระบบพ่อขุนอุปถัมภ์แบบเผด็จการ, สำนักพิมพ์มหาวิทยาลัยธรรมศาสตร์ 2525 (1981). |
4.3. 타넘 낏디카쫀 집권기
1963년 살릿 타나릿 총리가 사망한 바로 다음날, 타넘 낏띠카쫀(ถนอม กิตติขจร, Thanom Kittikachorn: 1911-2004) 원수가 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이후 10년간 살린 정부와 거의 동일한 정책을 펼쳤다. 푸미폰 국왕은 1970년대의 준 군사조직인 "빌리지 스카우트"(ลูกเสือชาวบ้าน, Village Scouts, 부락 스카우트)와 "붉은 들소"(กระทิงแดง, Krathing Daeng, Red Gaur)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준 인물이기도 했다.
1973년 10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다수의 친-민주주의 시위자들이 사망했을 때, 푸미폰 국왕은 "찟라다 궁전"(พระตำหนักจิตรลดารโหฐาน, Chitralada Palace)의 문을 열어 도망쳐온 시위자들을 수용했고, 학생 지도자들에게 연설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탐마삿 대학"(มหาวิทยาลัยธรรมศาสตร์, Thammasat University) 총장이었던 산냐 탐마삭(สัญญา ธรรมศักดิ์, Sanya Dharmasakti: 1907-2002)을 타넘을 대체하여 총리에 임명했다.
타넘은 미국과 싱가포르로 망명했다. 이후 연속으로 민간 정부가 이어졌다. 하지만 1976년 타넘이 은밀히 귀국하고, 그가 "왓 부원니웻"에 임명했던 한 승려가 새로운 정국혼란을 이끌었다.
4.4. 쁘렘 띠나술라논 집권기
연이은 혼란은 군사 쿠테타의 빌미가 되었다. 군사정부는 푸미폰 국왕에게 차기 총리 후보 3인의 명단을 제출하여 선택을 요청했다. 이들 3인은 국왕을 자문하는 "추밀원"(Privy Council)의 빠꼽 후따싱(Prakob Hutasingh) 부의장, 우파인 탐눈 티엔응언(Thamnoon Thien-ngern) 방콕시장, 그리고 보수적인 성향의 타닌 끄라이위시얀(ธานินทร์ กรัยวิเชียร, Thanin Kraivixien: 1927- ) 대법관이었다.(주28) 푸미폰 국왕은 타닌 대법관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해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타닌은 대단한 우파였고, 그에 반발해 학생운동가들이 밀림 속의 공산반군으로 들어가 합류했다.
1977년 10월 끄리양삭 처마논(เกรียงศักดิ์ ชมะนันทน์, Kriangsak Chomanan: 1917-2003) 대장이 이끄는 쿠테타가 발생해 타닌 정권을 전복시켰다. 1980년 끄리양삭 장군의 뒤를 이어 대중적 인기가 있던 육군사령관 쁘렘 띠나술라논(เปรม ติณสูลานนท์, Prem Tinsulanond) 대장이 총리가 되었다. 그는 훗날 국왕자문기구인 "추밀원"(Privy Council) 의장을 맡아 현재도 재직중인 바로 그 사람이다.
1981년 반군이 방콕을 접수하는 등 약간의 소요가 있었지만, 푸미폰 국왕은 1981년 쿠테타(일명-만우절 쿠테타)와 1985년 쿠테타에 대해서는 승인을 하지 않아 궁극적으로는 정부보다 왕실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 쿠테타들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은 푸미폰 국왕이 태국 사회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고, 다양한 정파와 군부 사이에서 불편부당한 판단을 내리던 중재자로서의 신뢰성도 훼손되어간다고 믿게 만들었다.(주29)(주30)(주31)
(주28) "His Gracious Majesty". The Nation. 2007-02-02.
(주29) Michael Schmicker, Asian Wall Street Journal, 1982-12-23.
(주30) สุลักษณ์ ศิวรักษ์, "ลอกคราบสังคมไทย", กรุงเทพฯ: หนังสือไทย, 2528 (1984).
(주31) Anonymous, "The Chakri Dynasty and Thai Politics, 1782–1982", cited in Handley, Paul M. (2006). The King Never Smiles. Yale University Press. p.298. |
4.5. 1992년의 소요
1992년 태국이 민주체제로 전환되는 데 푸미폰 국왕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91년 2월 23일 발생한 쿠테타는 태국을 다시금 군사정권 하에 돌려놓은 것이었다. 1992년 총선이 끝난 후 여당들은 쿠테타 지도자인 수찐다 까빠윤(สุจินดา คราประยูร, Suchinda Kraprayoon: 1933- ) 대장을 총리로 추대했다. 하지만 이 일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군인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군대와 경찰이 시위대와 충돌하면서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갔다. 군부 내에서도 분열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수도권 곳곳에서 폭력과 폭동이 번져나갔다.(주32)
(당시의 TV 화면) 1992년 검은 5월 학살 정국에서 중재에 나선 푸미폰 국왕(우). 수찐다 장군(중)과 짬렁 시므앙(좌)이 호출을 받았다.
내전의 공포가 휩쓰는 가운데, 푸미폰 국왕이 이 사태에 개입했다. 그는 수찐다 장군과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예비역 소장인 짬렁 시므앙(จำลอง ศรีเมือง, Chamlong Srimuang: 1935- )을 함께 소환했다. 이 장면은 TV로 중계되는 가운데, 국왕은 양측에 대해 평화로운 타결책을 찾도록 종용했다. 소요의 절정에서, 왕실의 관례에 따라 두 사람이 동시에 국왕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은 전국적으로 강력한 인상을 심어줬고, 곧이어 수찐다 장군의 사임이 이어졌다.
이 사건은 푸미폰 국왕이 정치적 갈등에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개입한 극소수의 사례에 속한다. 이 직후 즉시 총선이 실시되어 민간정부가 탄생했다.(주33)
4.6. 2005-2006 정치소요와 2006년 쿠테타
(1) 쿠테타의 배경
2006년 4월 총선 수주일 전, 야당인 "민주당"과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일명-노란셔츠)는 푸미폰 국왕에게 총리와 내각을 교체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달라고 청원했다. 이러한 국왕의 개입요청은 여론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푸미폰 국왕은 2006년 4월 26일 연설을 통해, "어명을 통해 임명한 총리가 비민주적이라 한다면, 과인의 부덕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라고 응답했다.(주34)
탁신 친나왓(ทักษิณ ชินวัตร, Thaksin Shinawatra: 1949- ) 총리는 야당이 불참한 4월 2일의 총선에서 승리를 선언한 직후 국왕을 독대했다. 몇시간 뒤 국영 TV에 등장한 탁신은 정치로부터 휴식하게 될 것이라 발표했다.
(사진: AP) 2008년 12월 2일 푸미폰 국왕이 연례 국가 사열식에서 전용 캐딜락을 타고 열병 중인 모습.
2006년 5월 손티 림텅꾼(สนธิ ลิ้มทองกุล, Sondhi Limthongkul) 소유의 신문 <푸짜깐 라이완>(ผู้จัดการรายวัน, Manager Daily)은 소위 "핀란드 음모"(Finland Plot)로 묘사한 일련의 기사들을 게제하여, 탁신과 이전의 "태국공산당" 당원들이 공모해 국왕을 쓰러뜨리고 국가관력을 잡으려 한다는 내용을 내보냈다. 하지만 이러한 음모를 입증할만한 증거들은 전혀 나오지 않았고, 탁신과 "타이락타이 당"(TRT)은 격렬하게 부인하고, 기사 작성자를 고발했다.
1997년에 제정된 국민의 헌법에서는 새로운 사법체계를 도입했다. 전통적인 체계에서는 제1심에서 "형사법원"(Criminal Courts)과 "민사법원"(Civil Courts)을 두고, 제2심에서는 "고등법원"(Appeals Court, 항소법원), 그리고 제3심인 "대법원"(Supreme Court)에서 재판이 종료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새로운 체계에서는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Court)와 "행정법원"(Administrative Court)이 추가되었다. 이 두 새로운 사법기관은 "대법원"으로부터 독립된 기관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체계에서는 파렴치한 정치인들이 동일한 사건을 여러 법원에다 소승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의 경우 "민사법원"과 "헌법재판소", 그리고 "행정법원"에서 동시에 진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푸미폰 국왕은 고위 법관들 앞에서 행한 TV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 사법부가 이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행동으로 나설 것을 요구했다.(주34) 2006년 5월 8일, "헌법재판소"는 4월 총선의 무효를 선고하고, 새로운 총선을 10월 16일에 실시한다고 결정했다.(주35) 얼마후 "형사법원"은 선거관리위원들에게 징역형을 언도했다.(주36)(주37)
2006년 7월 14일, 쁘렘 띠나술라논 추밀원 의장은 "쭐라쩜끌라오 왕립사관학교"(โรงเรียนนายร้อยพระจุลจอมเกล้า, Chulachomklao Royal Military Academy: CRMA) 졸업생들에게 연설하는 가운데, 군대는 정부가 아니라 국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주38)
7월 20일, 푸미폰 국왕은 2006년 10월 15일에 열릴 새로운 총선을 인준하는 국왕령에 서명했다. 국왕은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주문하는 전례없는 메모를 이 칙령에 적어넣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척추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주39)
(2) 쿠테타
9월 19일 군부가 무혈 쿠테타를 통해 탁신 정권을 전복시키고 방콕을 장악했다. 육군참모총장 손티 분냐랏낀(สนธิ บุญยรัตกลิน, Sonthi Boonyaratglin: 1946- ) 대장이 이끄는 군사정부는 최초 "입헌군주제 하의 민주개혁평의회"(Council for Democratic Reform under the Constitutional Monarchy: CDR)라 자칭하고, 실각한 탁신 총리 및 그 내각에 대해서는 왕실모독죄(lèse majesté) 등 여러 죄목으로 비난한 후 푸미폰 국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헌법을 대체하고, 10월 총선도 취소됐다.(주40)
수백명의 방콕 시민들이 쿠테타군 주둔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시위는 금지되고 시위자는 체포됐다. 9월 20일 푸미폰 국왕은 이 쿠테타를 승인하고, 공무원들에게 손티 장군의 명령을 받으라고 명했다.
(사진) 로이터통신 제공.
이 쿠테타에 있어서 푸미폰 국왕의 역할을 놓고, 태국의 분석가들 및 국제 언론들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 쿠테타에서 "제1 특수부대"가 출동명령을 하달받은 바로 그 시간에, 푸미폰 국왕은 쁘렘 띤술라논 의장을 비롯한 추밀원 위원들을 모아놓고 발언하는 중이었다.(주41) 군사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금지하면서 나름대로 쿠테타 이유를 설명하긴 했지만, 이 쿠테타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쁘렘 띤술라논 추밀원 의장이 바로 이 계획의 입안자라고 주장한다.
"쭐라롱꼰대학"(Chulalongkorn University)의 티띠난 퐁수티락(ฐิตินันท์ พงษ์สุทธิรักษ์, Thitinan Pongsudhirak: 정치학) 교수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쿠테타는 탁신 전 총리와 국왕 사이의 싸움에 다름아니다...... 그(국왕)는 거의 이 쿠테타를 함축적으로 승인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BBC의 동일 인터뷰에서 사회운동가 술락 시와락(สุลักษณ์ ศิวรักษ์, Sulak Sivaraksa) 씨는 "그(국왕)가 개입 안하고서는 이 쿠테타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술락 씨는 또한 "[국왕은] 매우 노련하다. 그는 결코 드러나게 개입하지 않는다. 만일 이 쿠테타가 잘못되면 손티가 모든 욕을 먹겠지만, 어찌되었든 국왕은 칭송만 받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주42) 2006년 9월 23일, 군사정권은 "만일 군주를 헐뜯는 보도를 내보내는 외국 기자가 있다면, 즉시로 보복을 하겠다"고 경고했다.(주43)
쁘렘 띤술라논 추밀원 의장은 이 쿠테타를 지지했다. 결국 군사정부는 추밀원 위원인 수라윳 쭐라논(สุรยุทธ์ จุลานนท์, Surayud Chulanont: 1943- ) 장군을 총리로 임명했다.
탁신 전 총리는 2009년 4월 20일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와 가진 회견에서, 푸미폰 국왕이 추밀원의 쁘렘 띤술라논 의장과 수라윳 쭐라논 장군을 통해 2006년 쿠테타 내용을 계획단계에서 보고받았다고 주장했다. 탁신 전 총리는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지도자인 판롭 삔마니(พัลลภ ปิ่นมณี, Pallop Pinmanee) 장군으로부터 그같은 보고에 관해 전해들었다고 밝혔다.(주44)(주45) 하지만 런던 주재 태국대사관은 이같은 주장은 부인했다.
(3) 쿠테타 이후
군사정권이 임명한 "헌법재판소"는 선거부정으로 고발된 탁신의 "타이락타이 당"(TRT)과 아피싯의 "민주당"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만일 유죄를 선고받으면, 태국에서 가장 큰 정당(TRT)과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민주당)은 각기 해산명령을 받고, 당직자들은 5년간 정치활동 금지를 당할 터였다.
선고공판까지의 수주일 동안 정치적 긴장이 고조됐다. 선고공판 약 일주일 전인 2007년 5월 24일, 푸미폰 국왕은 "중앙행정법원"(이 법원장이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겸직함)에서 드물게도 연설을 했다. 그는 법관들에게 연설했고 이는 그날밤 여러 TV 방송들을 통해 동시중계되었다. 그는 "여러분은 국가가 붕괴하는 것을 방지할 책임이 있습니다. 국가는 정당들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했다. 푸미폰 국왕의 이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고 해석도 구구하다. 어떤 이들은 이 발언이 판결을 함에 있어서 타협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보았다. 반면 다른 이들은 이 발언이 두 주요 정당을 해산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푸미폰 국왕은 서서 연설했지만, 목소리는 약하고 음색도 탁했다. 그는 사태의 시비곡절에 말려들지 않으려 주의했다. 국왕은 "나는 판단을 갖고 있지만, 말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판결방향이 어느쪽이든 국가를 위해 좋지 않고, 실수가 있게 될 것"이라 말했다.(주46)(주47)(주48) "헌법재판소"는 이후 판결을 통해 "민주당"에 대한 고발은 기각했지만, "타이락타이당"에 대해서는 해산을 명하고 그 당직자 100명에 대해 5년간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군사정권이 임명한 "제헌회의"(Constitution Drafting Assembly: CDA)는 광범위하게 비판받고 있던 헌법초안에 대한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국왕을 홍보활동에 이용하려 했다. 군사당국에 대해 상당한 반대가 존재하는 태국 북동부 지역에서는, 광고판에 "국왕을 사랑하라! 국왕을 돌보라! 국민투표에 참여하라!"는 벽보들이 나붙었다.(주49)
(4) 2008년 정치소요
새로운 헌법은 국민투표를 통과했고, 2007년 12월 총선이 새로 열렸다. 이전에 해산된 "타이락타이 당"(TRT) 소속원들이 대거 참여한 "국민의 힘 당"(People's Power Party: PPP)이 다수당이 되어 정부를 구성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민민주주의연대"(PAD)는 다시금 재조직하여, 결국 정부청사와 돈 므앙 공항, 그리고 수완나품 공항을 점거했다.
PAD는 국왕을 수호하러 나섰다고 주장했지만, 푸미폰 국왕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PAD 회원 한 사람이 사망하자, 시리낏 왕후가 그 장례식에 참석해 지켜보았다. 시린톤 공주는 미국의 한 기자회견에서 PAD가 국왕을 위해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 답했다.(주50)
이 소요사태에서 푸미폰 국왕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증가했는데, 특히 해외언론들 사이에서 두드러졌다.(주51)(주52)(주53)(주54)(주55)(주56)(주57) 태국의 한 학자는 "국왕이 보편적으로 숭배될 것이란 망상을 태국인들이 고수하기란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라 말했다.(주58)
(주50) The Economist, Fuelling the pyre, 2008-10-16.
(주51) ABC News, Thai power base useless in bridging social divide, 2008-11-28.
(주52) IHT, Thai protesters gird for a crackdown, 2008-11-28.
(주53) Reuters, Q+A-Thailand's intractable political crisis, 2008-11-27.
(주54) Asia Times, More turmoil in beleaguered Bangkok, 2008-11-25.
(주55) Reuters, Welcome to Bangkok airport - no passport needed, 2008-11-29.
(주56) The Australian, Embarrassed citizens plan retaliation, 2008-12-01.
(주57) MSNBC, THAILAND'S POLITICAL MAZE – A BEGINNERS GUIDE, 26 November 2008-11-26.
(주58) The Economist, A right royal mess, 2008-12-04. |
|
(사진) 2009년 12월 5일, 자신의 탄생일을 맞이하여 병석에서 나와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인 푸미폰 국왕. |
|
(사진) 푸미폰 국왕의 의전용 깃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