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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역사 제2장
태국의 초기역사
The Early History of Thailand
태국의 초기역사로 알려진 것은 반 치양(บ้านเชียง, Ban Chiang)에서 발견된 주요한 고고학 유적지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공예품들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하지만, 최소 기원전 3,600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 시기 최초 정주민들은 청동기를 사용하고 벼를 경작하면서, 그것을 원동력으로 사회정치적 제도들을 형성했다.
이후 태국민족(Thais: 타이족)이 이 지역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이 지역에는 말레이인(Malay), 몬족(Mon), 크메르족(Khmer)의 문명이 번성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태국 남부지방까지 확장되었던 스리위자야(Srivijaya, 스리비자야) 왕조, 태국 중부의 드와라와띠(Dvaravati, 드바라바티) 왕조, 그리고 앙코르(Angkor)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크메르 제국이 있다.
이 지역에 들어오게 되는 "태국민족"(Thai, 타이족, 시암족)은 보다 광의의 "따이 민족군"(Tai, 泰)의 한 분파이다. 광의의 따이족에는 라오족(Lao), 버어마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는 샨족(Shan), 중국 광시성에 사는 장족(Zhuang, 壯族), 베트남 북부의 토족(Thổ)과 눙족(Nùng)도 포함된다. 중국 남부에서 동남아시아로의 이주는 --- 아마도 주로 라오스 북부를 거쳐 ---- 기원후 1,000년 동안에 발생한 일이다.
기원후 1,000년 동안, 태국민족은 "므앙"(เมือง, muang)이라 불리는 작은 정체들로 느슨하게 조직화되었다. 이들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보다 발전된 문화권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즉 동쪽에는 크메르 문화권이 존재했고, 서쪽의 인도로부터는 힌두(Hindu) 문화를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타이족은 힌두교를 수용했고,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의 종교적 관습에도 그 영향이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는 태국어 사용권으로 버어마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고, 이후 가장 주도적인 종교로 자리잡게 된다. 현재 태국에서 신봉되는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는 13세기에 스리랑카 전법단이 들어오면서 전래된 것이다.
<퐁사와단 으아>(Phongsawadannuea, 북방연대기)는 바로 이 시대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이 책의 최초 편집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 내용은 서기 500년경부터 11세기 무렵까지를 다루고 있다. 현존하는 형태는 초기 라따나꼬신(Ratanakosin) 시대에 편집된 것이다.
참고문헌
- Charles Higham. Prehistoric Thailand. |
태국 역사의 형성기
Initial states of Thailand
10세기에 중국 운남성에서부터 따이족(Tai)이 남하하기 전에도,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정령신앙을 가진 다양한 토착 공동체들이 살고 있었고, 그 역사는 50만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에 태국 람빵(ลำปาง, Lampang) 도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화석은 "람빵인"(Lampang man)으로 명명되었는데, 그 연대가 홍적세(洪積世, Pleistocene) 시기인 100만-50만년 전으로 소급되고 있다.(인용각주 필요)
역사가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거주했던 다양한 오스트로아시아어계(Austro-Asiatic) 그룹들이 현재 태평양 도서부에 살고있는 민족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란 데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태국만(타이만, Gulf of Thailand), 말레이반도(Malay Peninsula), 말레이군도(Malay Archipelago)를 따라 흩어져 있고, 군도들의 연안부 뿐만 아니라 보다 멀리 떨어진 섬들에도 살고 있다.(주1) 이 항해자들은 상당히 진보된 항해술을 갖고 있었고, 일부는 뉴질랜드, 하와이, 마다가스카르까지도 이동했다.
태국의 선사시대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정주지는 로 알려진 것은 반 치양(บ้านเชียง, Ban Chiang)에서 발견된 고고학 유적지들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공예품들이 최소 기원전 3,600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 시기 최초 정주민들은 청동기를 사용하고 벼를 경작했다.
(주1) O.W. Wolters, Early Indonesian Commerce: A study of the origins of Srivijaya (Cornell University Press, 1974), pp.129-158. |
1. 토착국가 이론
많이들 제시되는 중국 남부로부터의 태국민족 이동설과 달리, 일부 학자들은 토착국가설(Indigenous States theory)을 고수하기도 한다. 이 이론은, 수많은 토착 소국들이 외래의 정치, 문화적 영향력을 흡수한 후,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해나갔다고 설명한다.(주2)
이 학설은 태국 초기역사에 관한 이전 연구들이 그 기원과 존재에 대해 단순히 인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선입견을 가짐으로써, 관점의 제한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인도의 영향은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의 광활한 영토를 포괄하면서 통일국가가 되었던 태국의 초기국가에 대해 매우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보여지는 한다.(주3) 더욱이 이러한 통일국가론은 이 초기국가의 백성들 모두가 몬족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주4)
하지만 토착국가설은 이러한 초기국가론이 이미 이 지역에 --- 비록 개별적이든 보다 발전된 형태로든, 여러 다양한 --- 고유한 정치적, 문화적 체계를 가지고 존재하던 토착적 인구집단이 있었다는 점을 무시하는 것이라 말한다.(주5) 이 이론은 이 집단들이 집단 간에 상호 교류도 했고, 인도문화가 도래하기 전에 이미 공통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주2) O.W. Wolters, History, Culture, and Region in Southeast Asian Perspectives (Singapore, 1982), pp.4-8, 9-12.
(주3) Justin Van Leur, Indonesian Trade and Society : Essays in Asian Social and Economic History (The Hague, 1955).
(주4) George Coedes, Bulletin de la commission archeologique de l’Indochine (1911).
(주5) Srisakra Vallibhotama, Southeast Asia in the 9th the 14th centuries (Singapore 1986), pp.229-238. |
2. 태국의 초기국가
"수와르나부미"(Suvarnabhumi, 태국어: 수완나품, 중국어: Chinlin(주6)) 지역이나 푸난왕조(Funan)(주7)는 남지나해와 인도양 사이의 해상활동을 통해 경제, 문화적 힘의 축적이 가능했던, 해안에 위치한 중심적 공동체들이 발전하면서 형성됐다.(주8) 이들은 신기술과 공예품들을 동남아시아 각지로 전파시켰다. 이러한 국가들은 이후 국가들로 발전할 인구밀집지역에 영향을 준 주요한 원동력이었다.
푸난과 수와르나부미 지역은 해상활동을 통해 말레이군도 지역들과 접촉했고, 2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시대에 교역 및 문화활동의 연안 중심지 역할을 했다. 중국의 사료를 보면 수와르나부미와 푸난 외에도, 이 시기에 툰순(Tun-Sun), 탄탄(Tan-Tan), 판판(Pan-Pan)과 같은 국호가 등장하고,(주9) 조금 더 후대에는 치투(Chi-Tu), 랑지아슈(Lang-Jia-Shu), 토로포티(To-Lo-Po-Ti), 로후(Lo-Hu)와 같은 국호들도 등장한다.(주10) 이러한 기록은 일부 고고학적 발견과도 관련이 있다. 로마제 등잔과 빅토리오(Victorius) 황제 시대의 동전, 앗체(atche)의 구슬, 에나멜 칠이 된 구슬 등이 이 지역들에서 발견됐다.(주11)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 동양과 서양 사이에 교역 고리가 있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주12)
(주6) Jean Boisselier, The recent discovery at Nakorn Pathom.
(주7) George Coedes, Indianized States, p.22.
(주8) Paul Wheatle, The Golden Khersonese 1966, p.24.
(주9) Wang Gung wu, “The Nanhai Trade; a Study of the Early History of Chinese Trade in the South China Sea” JMBRAS, p.54.
(주10) O.W. Wolters, “Chen-Li-Fu, A State on the Gulf of Siam at the beginning of the 13th century” JSS XLVIII, Pt.II (November 1960), pp.1-35.
(주11) George Coedes, “The Excavations at Pong Tuk and their import!!ance for the history of Siam” JSS, 21, 3 (1928), pp.195-209.
(주12) Paul Wheatle, The Golden Khersonese 1966, p.15, note 2, p.288. |
3. 남해의 제국
6세기 무렵에 항해자들은 말라카 해협(Straits of Malacca)을 통해 계절풍을 이용하면 극동으로 보다 지름길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주13) 이 발견은 태국만에 위치해 있던 세력에게, 이미 여러 주요항구들과 교역활동을 하고 있던 경쟁세력인 자바해(Java Sea)의 해상세력과 집적 부딪치도록 만들어주었다. 이 무렵에 이르러 수와르나부미 지역의 중요도는 감소하고, 말레이반도와 말레이군도, 그리고 "남해의 제국"(Empire of the South Sea)의 중요도가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수마트라(Sumatra)와 자바(Java)는 물론이고 스리랑카(Sri Lanka)까지도 포함했다. 바로 이 섬들과 육지들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상이 해양국가였던 스리위자야(Srivijaya, 스리비자야) 왕조의 상업적,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주14)
초기 해안국가들은 물리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했고, 내륙으로도 확장되면서 보다 다양한 문화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들 역시 이미 독자적인 역사적, 문화적 발전과정을 거쳐온 것이었다. 이들의 찬란한 국력은 짜오 프라야(เจ้าพระยา, Chao Phraya, 짜오파야) 강 유역에까지 이르게 된다. "남해의 제국"이 한번은 본토를 정복했다는 증거도 존재한다. 스리위자야의 조공국 중 하나였던 땀브라링가(Tambralinga)가 903년에 라워(Lavo, 라보), 즉 드와라와띠(Dvaravati, 드바라바티)를 침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료들에는 하리분자야(Haribhunjaya, 하리푼차이)의 왕들과, 땀브라링가의 바까랏(Bakaraj: 드라바까[Drabaka]), 우자지따차끄라와릇(Ujajitachakravard), 자와까 라자(Javaka Raja) 같은 왕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한편 중국 송나라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961년에 체리우예(Che-Li-Wu-Ye) 국왕의 명을 받아 산포시(San-Fo-Shih)가 중국 황실에 조공을 바치러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사절단은 국호를 시안로구아(Xian-Lo-Gua)라고 보고했다 한다.
(주13) O.W. Wolters, Early Indonesian Commerce, pp.154-155.
(주14) Friedrich Hirth and W.W. Rockhill (translators), CHAU-JU-KUA: His work on the Chinese and Arab Trade in the twelfth and thirteenth Centuries, entitled chu-fan-chi (Cheng-Wen Publishing Company, 1967), pp.31-32. |
4. 경 제
신기술이 수입되고 초기 태국 국가가 성장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다. 또한 기존의 황소 대신 물소(Water Buffalo)를 농경에 투입하였다.(주15) 이러한 방법은 논농사에 아주 잘 맞아들었다. 그리하여 쌀 생산량이 증대되면서 공동체 발전에 물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이들은 지역 내 모든 다른 소국들을 압도할 정치경제적 힘을 획득할 정도로, 벼농사에 기반한 자신들의 경제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6세기 이래로 말라카 해협(Strait of Malacca)을 통한 국제교역에 우선순위를 두긴 했지만, 버어마 남부의 해안 도시들에서 태국 중부의 항구도시까지 가는 육상운송로 역시 선호되어, 이러한 경향은 라따나꼬신 시대(Rattanakosin era: 짜끄리 왕조, 1782-1932)까지도 이어졌다. 잉여 쌀 교역과 함께, 수코타이(Sukhothai) 왕국, 아유타야(Ayudhya) 왕국, 라따나꼬신 왕조는 말라카 해협과 더불어 말레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교역루트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주15) An Outline History of China, (Foreign Language Press, Peking, 1958). |
5. 인 구
태국 왕국의 인구가 증가한 것은 문화적 전통과 생활양식에 분명한 영향을 준 인구이동 및 변화의 결과였다. 따라서 "타이"(Thai), "사마"(Sama), "사얌"(Sayam), "시암"(Siam) 등으로 불리는 집단은 원-말라유인(Proto Malayu), 몬족(Mon), 크메르족(Khmer), 참족(Champa, 짬족)과 같은 토착민족들은 물론이고, 인도로부터의 이민까지도 뒤섞인 정체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집단의 구성에는 해안민족들과 일부 항해자들, 화교 및 여타 소수민족들도 포함된다. 태국민족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대단한 다양성"(The great variety)에 있다.
(지도) 다양한 따이족의 분포도
북부 따이족 Northern Tai 중부 따이족 Central Tai 남서 따이족 Southwestern Tai
태국 사회와 문화는 그 국가가 지배한 영토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집단적으로 "따이족"(Tai peoples)이라 말하면, 이는 중국 남부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한 인종적 집단을 의미한다. 또한 이 분포는 동서로는 중국의 하이난(Hainan, 海南) 섬에서 인도 동부에 이르고, 남북으로는 중국의 사천성(Sichuan, 四川)에서 현재의 태국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모두 따이어족(Tai languages)에 속하는 말을 사용하며, 송깐(สงกรานต์, Songkran, 송크란: 태국 설날)과 같은 주요한 명절과 전통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한번도 통일국가를 수립한 일이 없지만, "시암"(Siam) 민족이라는 다소 모호한 관념을 공유하고 있는데, 거주지역에 따라 "샨"(Shan, , 掸 : 샨족)이나 "아쌈"(Assam, অসম Ôxôm: 인도 북동부)과 같이 다소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이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따이"(Tai)로 여기고 있다. 태국어(Thai)로는 보다 많은 집단들이 "따이"로 분류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조사된 것만으로도 29개 인종 및 언어집단들이 태국어로 "따이"라고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대충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라오스의 라오족과 태국 동북부의 거주자들
태국의 북부타이족(란나[Lanna] 또는 타이유안[Thai Yuan])
태국의 타이족("타이너이" 혹은 "작은 따이")
버어마의 샨족("타이야이" 혹은 "큰 타이")
중국의 장족(Zhuang, 壯族)
중국의 포이족(Buyei, 布依族)
중국과 라오스의 "타이르"(=다이족=태족, 傣 族)
중국, 라오스, 태국, 베트남의 눙족(Nùng)
라오스와 베트남의 따이담(검은 다이)
따이뎅(붉은 따이)
따이카오(흰 따이)
현재 베트남 북부에 살고 있는 따이돔(Tai Dom)
중국 운남성의 다양한 소수부족들 |
6. 사 회
초기 태국사회에서 기본적인 사회적 구분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형성기 역사시대에 급격한 정치제도적 변화를 겪게 된다. 족장이 이끌던 지배구조는 인도식 모델의 "신왕"(神王) 개념으로 변화한다.(주16) 왕과 왕족들이 관료적 특권계급을 형성하고 모든 경제권과 정치적 권력을 차지했다. 그 다음으로는 국왕을 보필해 국정을 보좌하는 고위관료들로 구성된 상류층이 있었다. 또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지역공동체의 수장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일반 대중들이 위치했다. 이들 중 다수는 평민이거나 노예였다. 이러한 위계질서 속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신분부다 상위자나 하위자에 대해 명확한 권리와 책임을 지고 있었다. 평민들 몇 가지 집단으로 분류됐다. 모든 평민은 상급계층의 어느 한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모든 노예들은 상류층 개인 혹은 가족의 재산으로 분류됐다.(주17) 평민 중 가장 많은 수의 집단은 농민이었고, 국가가 내륙 및 해양의 교역로를 통해 발전해나가자 도시민과 상인들도 출현했다. 이 지역(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중심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의 다양성을 통해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주16) Pelliot, “Le Fou-nan”, pp.265-266.
(주17) Skinner, Chinese society in Thailand, p.96. |
7. 종 교
초기 태국국가는 성장을 해나가며 서서히 샤머니즘(Shamanism) 문화에서 불교문화로 변모해갔다. 초기 태국사회에서 불교는 핵심적인 신앙이었고, 이 지역의 다양한 생활양식과 신념들과 결합하며 통합되어 나갔다. 또한 정치제도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불교 신앙은 국가와 민중이 모두 인정했다. 불교는 지배계급에도 중요한 영향을 주어, 왕이 단순히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이념적 설파를 통해 그 영토와 복속민들에게 올바른 진리를 전파할 "법왕"(Dharmikaraja)의 의무를 갖게끔 하였다.(주18)
승려들은 속인들의 필요에 부응한 종교적 의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속인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고, 때로는 불교의 교설도 교육했다. 바라문들(brahmins: 힌두 사제)들은 궁내의 여러 의식들을 집전하면서 왕실과 직접적 관계를 이어나갔고, 비록 일부는 정치적 실력자에게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대부분의 은둔수행자와 탁발수행자들은 깊은 숲속을 수행처로 삼았다.
초기 태국사회에서 발전된 불교는 지역 내 불교사회 및 불교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고, 후대의 태국 왕국이 불교국가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지게 된다.
(주18) E. Sarkisyanz, Buddhist Backgrounds of the Burmese Revolution, (The Hague/Martinus Nijhof, 1965) pp.33-67. |
(역자의 말) 본격적인 "태국사"라 할 수 있는 수코타이 왕국 이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은 고대 및 초기 왕국들을 공부해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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