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테타 이후 최초로 치뤄진 선거에서 TRT를 계승한 정당이 승리하자, 탁신은 2008년 2월 28일 태국으로 돌아왔다.(주20) 하지만 2008년 여름 베이징 올림픽에 참석한 이후, 부정부패 관련 문제가 불거지자 귀국하지 않고 영국에 망명신청을 했다. 그해 10월 태국 대법원은 궐석재판을 통해, 이권개입 혐의를 인정하여 그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주21) 2008년 말, <아라비안 비지니스>(Arabian Business)는 단독 인터뷰를 실은 직후, 영국 정부가 탁신의 영국 내 자산 42억 달러를 동결시켰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 주장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않았다.(주22)
(사진: www.topnews.in) 탁신 부부의 모습. 이 부부는 현재 공식적인 이혼상태이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법률적 대응책으로서의 형식적 이혼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9년 4월, 탁신을 지지하는 붉은셔츠 운동(반독재 국가민주연합전선: UDD) 시위대가, 이전의 혐의들에 대해 탁신의 사면을 요구하며,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총리의 현 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주23) 2009년 4월 11일 태국 정부는, 탁신이 배후에서 이 시위를 촉발시켜 파타야(Pattaya)에서 개최예정이던 아세안정상회담을 취소시키고 이후의 폭동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그의 태국 여권을 말소시켰다.(주24)(주25)(주26) 탁신은 자신이 이 시위대에 대해 "정신적 지원"(moral support)을 했을 뿐이라며, 이러한 비판을 부인했다.(주27)
탁신은 1980년 퍼짜만 다마퐁(พจมาน ดามาพงศ์, Potjaman Damapong)과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인 판텅태 친나왓(พานทองแท้ ชินวัตร, Panthongtae Shinawatra)과 핀텅타(พิณทองทา), Pintongtha) 및 뻬텅딴(Peathongtarn) 등 2명의 딸을 두고 있다. 이들은 2008년에 이혼했다.(주28)
(주1) "Thaksin has Nicaraguan passport".Bangkok Post. 2009-4-16.
(주2) "Montenegro gives Thaksin a passport". Bangkok Post. 2009-5-13.
(주3) "Deposed Thai PM quits party role". CNN. 2006-10-3.
(주4) "Thailand's deposed PM divorces wife". Channel News Asia. 2008-11-15.
(주5) "Thaksin Shinawatra: The man who turned disaster into victory". BBC. 2005-2-7.
(주6) The World Bank, Thailand Economic Monitor, November 2005.
(주7) "Should Thaksin Stay?". Time. 2006-3-13.
(주8) NaRanong, Viroj, Na Ranong, Anchana, Universal Health Care Coverage: Impacts of the 30-Baht Health Care Scheme on the Rural Poor in Thailand, TDRI Quarterly Review, 2006년 9월호.
(주9) "Red light district reels as Thais embrace family values". Daily Telegraph. 2001-9-8.
(주10) Pongsudhirak Thitinan, "Victory places Thaksin at crossroads", Bangkok Post, 2005-2-9.
(주11) "Unprecedented 72% turnout for latest poll". The Nation. 2005-2-10.
(주12) Aurel Croissant and Daniel J. Pojar, Jr., Quo Vadis Thailand? Thai Politics after the 2005 Parliamentary Election, Strategic Insights, Volume IV, Issue 6 (June 2005).
(주13) BBC News, A fit and proper Premiership?.
(주14) The Star, Dreaded day dawns – despite lies and dark forces, 2006-4-2.
(주15) The Nation, Vandal's dad distraught, 2006-3-23.
(주16) BBC News, Thai party's disbandment solves little, 2007-6-1.
(주17) The Nation, Thaksin's assets frozen, 2007-6-12.
(주18) The Nation, Slighted Sawat resigns from AEC, 2006-10-2.
(주19) China Daily,Reports: Thailand's former PM Thaksin divorces, 2008-11-15.
(주20) CNN, Lawyer: Thaksin 'poised' to return, 2008-2-25.
(주21) New York Times, Thai Court Convicts Ex-Premier for Conflict in Land Deal, 2008-10-21.
(주22) Straits Times, Down to his last US$500m, 2008-12-26.
(주23) "Thaksin pitches 'all-out' fight". Bangkok Post. 2009-3-30.
(주24) "Thaksin's passport revoked, retains citizenship". Bangkok Post date=2009-4-15.
(주25) The Nation, Thai FM revoked Thaksin's diplomatic passport.
(주26) MCOT, Bt10 million BMA property damage from protest; religious rites to be held, 2009-4-16.
(주27) BBC, Thaksin on protests in Thailand, 2009-4-13.
(주28) "Thailand's deposed PM Thaksin divorces wife: spokesman". AFP. 2008-11-16. |
1. 출신배경
탁신의 증조부인 셍새쿠(Seng Sae Khu: 혹은 Khu Chun Seng[丘春盛])는 중국 광동성 메이쩌우(梅州, Meizhou)로부터 이민을 온 객가어(客家話, Hakka) 사용 화교였다. 그는 1860년대 시암(현 태국)으로 이주해와 1908년에 치앙마이(Chiang Mai)에 정착했다. 그의 장차이었던 치앙 새쿠(Chiang Sae Khu)는 1890년생으로 태국 여성인 셍 솜나(Saeng Somna)와 결혼했다. 치앙 새쿠의 장남인 삭(Sak)은 1938년부터 태국식 이름인 "친나왓"(Shinawatra: 만사태평의 의미)이란 이름을 사용했고, 이후 이 가문은 모두 친나왓을 성씨로 사용하게 되었다.
탁신의 아버지인 럿 친나왓(Lert Shinawatra)은 1919년 치앙마이에서 태어났고, 유인디 라밍웡(Yindi Ramingwong)과 결혼했다. 1968년 렛 친나왓은 치앙마이 도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고조부 셍새쿠는 세금경작(tax farming: 일종의 소작농법)을 통해 부를 이뤘다. 이후 이 가문은 "친나왓 실크"(Shinawatra Silks)를 설립했고, 그후 금융과 건설, 부동산개발 분야로 진출했다. 럿 친나왓은 커피숍 하나를 개업했고, 그 외 몇 종의 사업들을 겸했다. 또한 치앙마이 도, 산깜팽(สันกำแพง, San Kamphaeng) 군에서 오렌지와 꽃을 재배했다. 탁신이 태어날 무렵이면, 이미 이 가문이 치앙마이 지방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집안이 되어 있었다.
2. 생애 초기
탁신은 치앙마이 도, 산깜팽 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가 될 때까지 산깜펭(산깜팽, 산캄팽)의 마을에 거주했고, 이후 "몽포르 꼴레쥬"(Montfort College: 초,중,고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치앙마이 시내로 옮겼다. 그는 16세 때, 부친의 영화사업을 돕기도 했다.(주29)
3. 경찰경력
탁신은 "군사예비사관학교"(Armed Forces Academies Preparatory School: AFAPS) 10기생으로 입학해,(주30) 이후 "태국경찰 사관대학"(Thai Police Cadet Academy)에 입학했다. 1973년 졸업과 동시에 "왕립 태국경찰청"(Royal Thai Police Department)에 들어갔다. 1975년에는 미국 "이스턴 켄터키 대학"(Eastern Kentucky University)에서 형법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3년 후 텍사스 주 "샘 휴스턴 주립대학"(Sam Houston State University)에서 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태국으로 돌아온 이후 승진을 거듭해 1987년 경찰 중령으로 사직할 때까지, 그는 수도권 광역경찰청 총무국 내 정책기획부 부부장 직위에까지 올랐다. 1980년 그는 한 경찰 장성의 딸인 퍼짜만 다마퐁(พจมาน ดามาพงศ์, Potjaman Damapong)과 결혼했다.(주31)
4. 비지니스 경력
4.1. 초기 사업
탁신과 그의 아내는 탁신이 아직 경찰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 실크 샵과 영화관, 아파트용 빌딩 등 이미 몇 가지 사업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모든 사업은 실패했고, 5,000만 바트(15-20억원)의 부채만 남았다.
(사진: AP) 2008년 7월 31일, 부정부패 관련 선고공판에 도착하는 탁신 부부의 모습.
1982년 그는 "ICSI"란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의 경찰 관계망을 통해 정부 부처들에 컴퓨터들을 대여하는 리스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사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그 이후 손을 댄 보안회사(SOS)와 라디오 방송서비스(Bus Sound)는 실패했다.(주32)(주33) 1986년 4월, 그는 최초에는 컴퓨터를 대여해주는 일을 한 "어드밴스트 인포 서비스"(Advanced Info Service: AIS)를 창립했다.(주34)
1987년 그는 경찰을 사직했다. 이후 <반사이통>(บ้านทรายทอง, Baan Sai Thong)이란 제목의 영화 한편을 극장가에 배급했는데, 이 영화가 대성공을 거뒀다.(주35)(주36) 1988년 그는 미국의 "퍼시픽 텔레시스"(Pacific Telesis Group)와 합작으로 무선통신단말기(일명: 삐삐) 서비스 제공 및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도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회사설립을 위해 지분을 모두 처분했다.(주32)(주37)
1989년 탁신은 케이블 TV 방송국인 IBC를 창립했으나 적자를 보았고, 이 방송국은 후에 "짜른 폭판 그룹"(CP 그룹) 소유의 UTV로 합병됐다.(주32)(주38) 1989년 그는 데이타 네트워킹 서비스(data networking service) 회사인 "친나왓 데이타컴"(Shinawatra DataCom)을 설립했는데,(주32) 이 회사가 바로 현재 AIS와 TOT가 공동 소유하고 있는 "어드밴스트 데이타 네트워크"(Advanced Data Network)이다.(주39) 이후 설립된 탁신의 여러 사업체들은 후에 "친 코퍼레이션"(Shin Corp., 친 코프)로 통합된다.
4.2. 어드밴스트 인포 서비스 및 이후의 사업체들
1986년 4월 설립된 "어드밴스트 인포 서비스"(Advanced Info Service: AIS)는 처음에는 컴퓨터 대여사업으로 시작했다.(주34) 1990년 10월, 이 회사는 "TOT"(Telephone Organization of Thailand)로부터 20년간 독점 양허권을 부여받아 900 MHz 대역 휴대폰서비스를 시작했고, 후에는 GSM 900 주파수대역의 서비스도 운용했다.(주40) 이보다 1달 후에 "토탈 액세스 커뮤니케이션즈"(Total Access Communications)도 GSM 1800 주파수대역의 양허권을 획득함으로써, 태국의 휴대폰 붐은 막 시작되는 단계에 있었다.(주41) AIS는 빠르게 성장해 1991년 11월 "태국 증권거래소"(Stock Exchange of Thailand: SET)에 상장됐다. 이 회사는 1994년에 GSM 네트워크를 설립했고, 마침내 태국 내 최대 이동통신회사가 되었다.(주42)
"친나왓 컴퓨터 & 커뮤니케이션즈 그룹"(Shinawatra Computer and Communications Group)은 1987년에 창립해 1990년에 상장되었다. 탁신은 "친나왓 위성"(Shinawatra Satellite)도 설립하여, 이 회사가 4개의 "타이콤 통신위성"(Thaicom communications satellites)을 개발해 운용하고 있다.
1999년 친나왓 일가는 10억 바트(약 320억원)를 투자해, 방콕 바로 인근인 빠툼타니(ปทุมธานี, Pathum Thani) 도에 "친나왓 대학"(Shinawatra University)을 설립했다. 이 대학은 공학, 건축, 경영학 분야의 국제적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또한 "왕실재산관리국"(Crown Property Bureau, สำนักงานทรัพย์สินส่วน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 "네이션 멀티미디어 그룹"(Nation Multimedia Group, บริษัท เนชั่น มัลติมีเดีย กรุ๊ป จำกัด), "시암 상업은행"(Siam Commercial Bank: SCB)이 공동소유 중이던 "iTV"도 사들였다.(주43)(주44)
(주40) AIS corporate website, click on "About AIS", "Company profile", and then "1990".
(주41) DTAC, Milestones 2002-1990.
(주42) AIS corporate website, click on "About AIS", "Company profile", and then "1994".
(주43) Taming The Media: Allegations of political interference cast a cloud over Thaksin's incoming administration Asia Week Vol.27, No.6, 2001-2-16.
(주44) The Television Business, Democracy and The Army 1998년 12월. |
5. 정치활동
5.1. 정치입문
탁신은 1994년말 짬렁 시므앙(จำลอง ศรีเมือง, Chamlong Srimuang, 盧金河)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짬렁은 분추 로쫀사티얀(บุญชู โรจนเสถียร, Boonchu Rojanastien, 黃聞波)으로부터 "빨랑 다르마 당"(Palang Dharma Party: PDP) 당수 자리를 다시금 넘겨받은 직후였다.
이후 PDP 내각에서 친-분추 계열의 인물들이 제거되는 가운데, 1994년 12월 탁신은 "빠송 순시리"(Prasong Soonsiri)를 대체하며 외교부장관에 임명됐다.(주45)
1996년 짬렁 시므앙이 "그런 부패한 인물"을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한 데 대해 사죄한다고 발표한 직후, 탁신은 권력에서 배제됐다. 이어서 "손뽄꼰 4-01"(Sor Por Kor 4-01) 토지개혁 부정스캔달에 대한 책임을 지고 PDP가 정부구성에서 탈퇴했고, 이로써 추안 릭파이(ชวน หลีกภัย, Chuan Leekpai, 呂基文) 총리의 내각도 붕괴했다.
5.2. PDP 지도자 및 반한 내각 부총리
추안 내각의 마지막 며칠동안 PDP 내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 강력한 비난을 받은 짬렁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탁신을 PDP 지도자로 지명했다. 탁신은 최초로 헌법재판을 위한 선거에 임했지만 패했다.
이후 탁신은 반한 실빠-아차(บรรหาร ศิลปอาชา, Banharn Silpa-Archa, 馬德祥) 총리의 내각에 참여했고, 방콕 교통 담당 부총리에 임명됐다. 1996년 5월 PDP 소속의 장관 4인은 [국회의원직은 유지하면서] 반한 내각의 장관직을 사퇴했다. 이러한 행동은 내각재구성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켰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탁신의 움직임이 1996년 6월 방콕 시장선거에서 짬렁 시므앙이 선거를 통해 정치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던 행동이었다고 주장한다.(주46) 하지만 짬렁은 선거에서 패했고, 무소속의 빗칫 랏따꾼(Bhichit Rattakul)이 방콕시장으로 당선됐다. 짬렁은 --- 자신의 "사원" 파 및 탁신 지지층이 있는 --- PDP의 아성 방콕에서 패함으로써, PDP에 힘을 보태주지 못했다. 선거패배 직후 짬렁은 다시금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탁신과 PDP는 1996년 8월 반한 내각에서 탈퇴했다. 이후 확실한 토론도 없이, PDP는 반한 정부를 공격하는 증거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1996년 9월, 결국 반한 내각은 사퇴했다.
탁신은 이어질 1996년 11월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PDP 지도자로만 남아있을 것이라 발표했다. 하지만 단 1석을 얻는 데 그치며 치명적 패배를 맛봤다. 그리고 곧 모든 당지도부가 사퇴하며 당은 파열하고 말았다.
5.3. 차왈릿 총리 내각에서의 부총리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화가 급격하게 평가절하되는 "아시아금융위기"(Asian Financial Crisis)가 발생한 후, 탁신은 8월 15일에 차왈릿 용짜이윳(ชวลิต ยงใจยุทธ, Chavalit Yongchaiyudh) 총리 내각의 부총리를 맡게 된다. 하지만 11월 14일 차왈릿 총리가 사퇴하면서, 탁신 역시 단 3개월간만 이 직무를 수행했다.
(사진: 태국 TV5) 현재 아비싯 웻자지와 내각의 부총리를 맡고 있는 수텝 트억수반 의원. 아피싯 내각의 "실질적 총리"라고도 불리는 민주당 실세이다.
1997년 9월 27일 비방전이 오가는 가운데, "민주당"의 수텝 트억수반(Suthep Thaugsuban)은 탁신이 바트화 흐름에 관한 정부 내 정보를 이용해 이익을 취했다고 폭로했다.(주47) 하지만, 이후 "민주당" 내각이 출범했음에도 이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탁신은 2001년 총리로 취임할 때까지 워싱턴시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사모펀드 "칼라일 그룹"(Carlyle Group)의 "아시아 자문위원"으로 일했다.(주48)
5.4. TRT와 2001년 총선
1998년 탁신은 솜낏 짜뚜시삐딱(สมคิด จาตุศรีพิทักษ์, Somkid Jatusripitak, 曾汉光), 그리고 PDP 동지인 수다랏 께유라판(สุดารัตน์ เกยุราพันธ์, Sudarat Keyuraphan, 여) 및 뿌라차이 삐음솜분(Purachai Piumsombun),(주49) 그리고 여타 19인의 동지들과 함께 "타이락타이 당"(ไทยรักไทย, TRT: 태국을 사랑하는 태국)을 창당했다. 종종 솜낏의 영향이라고도 불리는 대중주의적 성향을 바탕으로, TRT는 의료혜택, 농민들을 위한 3년간 부채상환 유예, 태국의 모든 농촌마을(리)에 대한 100만 바트(약 3천만원) 발전기금 지급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2000년 11월 추안 릭파이(ชวน หลีกภัย) 내각이 해산하고, 1997년 채택된 헌법 하에서 치뤄지는 최초의 선거인 2001년 1월 선거에서, TRT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선거에 대해 태국 역사상 가장 부정이 없고 열린 선거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주50) TRT는 이전의 어느 정당도 획득하지 못했던 248석을 차지했고, 내각구성 요건에서 단 3석만 부족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신은 연립정부 구성을 선택하여 결과를 알 수 없는 결선투표 방식을 피해나갔다. 당시 연립정권에 참여한 정당들에는 "찻타이 당"(พรรคชาติไทย Phak Chat Thai: 태국민족당, 41석), "신열망당"(New Aspiration Party, 36석) 같은 중형정당은 물론, 군소정당인 "세리탐당"(Seritham Party, 14석)도 포함되어 있었다.(주51)
(주49) MSU alumni, friends, honored for outstanding achievements: Purachai Piumsombun of Bangkok, Thailand, 2004-10-14.
(주50) Robert B. Albritton and Thawilwadee Bureekul, Developing Democracy under a New Constitution in Thailand, National Taiwan University and Academia Sinica Asian Barometer Project Office Working Paper Series No.28, 2004.
(주51) Aurel Croissant and Jörn Dosch, Old Wine in New Bottlenecks? Elections in Thailand under the 1997 Constitution. Leeds East Asia Papers no.63 (Leeds: University of Leeds, 2001), p.16. |
첫댓글 크메르의세계에서 "노란 셔츠" 이어 "붉은 셔츠"가 나왔는데요. 이 두 단체간의 정치적 관계는 어떠 합니까?
아직 우리 카페가 태국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하지 않아서 정교하게는 말씀을 못드리겠습니다. 일단 이 셔츠들은 말하자면 태국 내 정치의 일종의 시민운동연합 같은 것입니다. 각각의 안에도 여러 세력이 융합되어 있어서 하나의 단체라기보다는 연합체의 성격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이 태국 정치의 대표적인 2가지 성향을 대변합니다. 가령 "노란셔츠"(민주국민연맹: PAD)는 전통적인 태국사회의 보수파를 대변하여, (1)푸미폰 국왕에 대한 존경과 충성, (2)군부 및 경찰 세력을 지지(군부 쿠테타 환영), (3)태국 민족주의(태국민족 우월주의) 옹호... 뭐 이런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붉은셔츠"(UDD)는 부의 재분배 등에서 사회적 평등을 보다 중시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등 다소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두 셔츠 운동들은 결국 자신들의 성과물을 어느 정권을 탄생시키느냐에 목적을 두어, 일단 원하는 주장이 있어서 거리로 나섰다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부가 구성되면 다시 철수하는 형태를 띠어서, 결국 제도 정치권 내의 정당들과 불가분한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가령 "붉은 셔츠"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분배를 강조했던 탁신 정권을 지지하여, 탁신의 정당(현재 명칭: 프어 타이)이 정권을 잡았을 때 대규모 시위를 멈춘바 있습니다.
그런데 다소 진보적인 이 "붉은 셔츠"들이 지지한 탁신이 또 태국은 물론이고 동남아에서도 한가락 하는 전통적인 재벌집안 출신이라, 외형적으로도 좀 언발란스했지만, 결국 "노란셔츠" 쪽에서 대규모 시위로 공격하고, 뒤이어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탁신이 물러났지만, 이후 친-탁신 정당이 선거에서 다시 정권을 잡게 되고 탁신은 돌아왔었습니다. 의원내각제니까 일단 내각이 해산하면 다시 선거를 치뤄야겠죠... 이때 쿠테타가 형식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마무리된 것인 셈인데, 여기에는 푸미폰 국왕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정황으로 보면 탁신은 국왕을 옹립하는 입헌군주제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 같고, 이에 푸미폰 국왕은 탁신을 몰아내는 데 동의한 셈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보수-진보 대결구도에 친왕당-공화 대결구도도 또 겹쳐있습니다. 그런데 다소 진보적인 "붉은 셔츠"가 선명하면 문제가 안 되는데, 탁신도 결국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어서 .. 태국 정치는 참 확연한 경계와 전선이 형성이 안 되어, 어찌보면 이제는 이념보다도 그냥 "노랑"이냐 "빨강"이냐하는 색깔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된 것처럼도 보입니다... 하여간 친-탁신 정부가 구성되자 다시금 노란셔츠들이 봉기했고, 결국 탁신의 부정부패가 공개되면서 다시 정권을 잃었던 것이죠. 그게 방콕공항 점거사태인데...
그 과정에서 현재의 젊은 총리 아피싯이 민주당을 이끌면서, 노란 셔츠들의 지지를 업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후 금년 봄에는 붉은 셔츠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아세안 회의도 중단되고 모 그랬지만, 하여간 현재도 아비싯 정부가 이끌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본질적으로 이 셔츠들은 정당이 아니라 시민운동연합 같은 재야세력이므로, 웬만한 선에서 타협하는 제도권 정당들보다는 결국 극단적 명분이라든가 이런 걸 더욱 강하게 밀고나감으로써 존재감을 획득하는 성향이 있고, 그 안에는 급진적 과격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최근에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 시위라든가 이런 걸 보면,
아비싯 총리의 민주당이 친-노랑셔츠적 정권입에도 불구하고, 노랑셔츠들은 더 많은 걸 주장하고 있는 것이죠.. 캄보디아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자세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또 최근에는 푸미폰 국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니 노랑셔츠들은 친-노랑 정권인 민주당을 넘어서는 가치, 즉 푸미폰 국왕에 대한 충성 이런걸 필요할 때 들고 나올수도 있고... 국왕에 관한 사항은 주권이나 역사 문제와도 관련이 있으니.. 쁘레아위히어 사원 문제로 집중될 수도 있죠... 하여간 쁘레아위히어 대문에 태국측으로서도 좀 전향적이고 실용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하다가도, 국내의 이런 여론 세력으로 인해 발목이 잡히게 되고...
그러면 캄보디아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지는 형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최근 훈 센 총리가 태국 야당인 프어 타이와 연대를 강화하고 탁신 총리 망명처를 제공하겠다 이런 건, 이런 난국에 빠진 아비싯 정부를 좀 더 흔들어서 실리도 좀 취하고, 태국 정부의 힘을 좀 배놓겠다 이런 생각도 있는 것 아닐가 싶네여....
하여간 허의철학님이 이 문제를 제기해주셨으니, 미뤄두고 있었습니다만, 태국에 관한 몇몇 아티클을 좀 심도있게 다시 준비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래서 공부란 참 끝이 없네요.. 결국 캄보디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태국과 베트남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