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밤입니다.
법석거리던 우리 집도 지금은 정적입니다.
점심 때 남은 밥에다가 누릉지까지 더하여 먹었더니 배가 말이 아닙니다.
배 꺼주려(부른 배 내려 앉히려) 좀 걸으려고 합니다.
아파트 사이의 달도 그런대로 볼만할 것 같습니다.
에이피티를 한 열바퀴 돌고 들어오려고 합니다.
지난 일요일(10월 2일), 하동 시외버스 정거장에서, 부산서 내려온 편과 접선, 바로 섬진강을 건넜습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화개, 구례 가는 길이 나란히 뻗어 있습니다.
지금 코스모스가 천지를 이루고 있지 않은 곳 한곳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라도 섬진강 길 이곳은 길섶에도 둔치에도 온통 코스모스 왕국입니다.
가도 가도 끊어지지 않는 코스모스 線입니다.
저기 코스모스 길끝의 산아래가 박경리 토지의 평사리 마을입니다.
화개, 화개장터의 화개를 전라도쪽에서 바라보면서 가고 있습니다.
숨느라고 숨어있던 다리가 내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들킨 다리' 입니다.
다리와 내가 숨박꼭질 하기로 '가위 바위 보' 했던 건 아닙니다.
다리 자기가 이겨서 숨고, 내가 져서 찾아 나선 건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커브를 도니 다리가 나타나는데, 다리를 본 순간, '숨은 다리'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겡상도 길에서만 보다가 절라도 길에서 보니 더 신선하네요.
저 다리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쌍계사, 칠불사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전설적인 빨치산 남부군 대장, 이현상이 총맞고 숨을 거둔 빗점골(토끼봉 아래)도 저길 따라 가면 있다고 합니다.
전 요새 지리산 그 슬픈 역사를 틈틈히 공부하고 있거든요.
빗점골 그곳에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왼편, 전라도 땅 또 다른 다리.
의미는 주기 나름이니까 내 마음대로 의미를 주어 봅니다.
이별의 다리? 만남의 다리?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다리의 이미지는 마리아 셸이라는 독일 배우가 나왔던 그 옛날 영화, '사랑과 죽음의 마지막 다리' 입니다.
차를 세워두고 저 다리로 걸어가, 왔다갔다 해보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왜? 그냥! 배가 고파서.
참 햇살편지님, 전에 내가 물어봤던 노래, "황혼의 다리에서" 하던 노래, 음원을 찾았습니다.
그 노래는 '방황'이었습니다.
'다리'거나 '황혼의 다리'일 줄로만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던, 슬픈 눈의 그 안성 남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면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알게 될 것 같지 않습니다.
화개를 거쳐 평사리로 들어오니 들판은 '황금들판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들판축제는 허수들의 축제입니다.
허수아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허수새댁, 허수연인, 허수할미, 허수에미 등 허수의 신분이 하도 다양해서 그냥 허수라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평사리 너른 들판이 온통 허수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저기 오른편에 보이는 두그루 소나무가 평사리 들판(무너미 들판이라고 함)의 표상입니다.
황금들판 축제와 토지 문학제는 함께 열립니다.
토지 문학관앞에 오니 토지 문학제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이 두 축제는 10월 14-15일에 열립니다.
이때 저는 다 익어가는 들깨도 벨겸 해서 내려가 저기서 배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영암 월출산 등반하기로 정해지는 바람에 토지문학관에서 어슬렁거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평사리서 동매리까지는 약 6K입니다.
전라도길 따라 구례로 가서 악양 평사리로 들어와 동매리로 오니 점심 때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장 집에 가니 알밤을 한 상자나 주었습니다.
움막으로 올라와 점심 겸해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물론 밥은, 쌀을 씻어 앉혀 스위치 꽃아 놓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밥 잘 되었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칭찬 들으니 기분 좋았습니다.
똑똑한 아이에게나 모자라는 어른에게 칭찬의 효과는 큽니다.
밥을 먹고 나니 배고픔이 사라졌습니다.
10월 2일 오전은 이렇게 갔습니다.
오후엔 땅 파고 고르고 돌 줍고 밤송이에 불 붙이고 했습니다.
노래, '방황'으로 가는 길
첫댓글 편암함 그 자체이군요. 그것이 제 자신의 지금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어른들께서 올해는 제가 많이 피곤할 거라며 서둘러 일산 도련님집으로 가셨습니다. 제 모습이 많이 힘들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어쨋거나 그 덕분에 이렇게 온 라인을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더불어 안성의 그 남자가 갑지기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사진을 보니 무설재의 추석 차례는 대형 스펙타클 와이드 스크린 다례네요. 그렇게 많은 분들이 추석에 모이는군요. 그 준비만 해도 엄청났겠습니다. 큰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큰 일이, 많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일이 따라다니는가 봅니다.
문주란의 굵고 구수한 음성을 다시 들었습니다, 저는 전라도에 대해서 전라도 땅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살고 있었는데 한하운을 만나면서 짙은 흙냄새 그 황토가 지니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월 따라 허수아비도 화려함의 극치로군요. 예전의 허수는 등이 굽고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어요, 어린 제가 그를 동정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허나 지금은 쌍쌍으로 무리로 축제처럼 들판을 주름잡네요~
sappho님, 세상에 그 노래가 '방황'이었지 뭡니까. 문주란일꺼라는 생각을 왜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번 주말에는 영공 월출산을 가기로 했는데 동매리 들려 들깨를 벤 후 구례쪽으로 나가서 영광으로 찾아들 생각입니다. 국도나 지방도 따라가는 전라도 길, 아름답고 또 아름다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