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가 신록의 옷으로 갈아입고 곡식이 쑥쑥 커가는 철이 왔다. 보리가 누르스름해지는 5월 말부터 6월까지는 우럭회가 가장 맛있는 때다. 수도권에서 가까운 충남의 당진•서산으로 미각 여행을 떠나보자. 당진에는 생동감 넘치는 포구가 즐비하고, 서산 지역에는 아늑한 어촌이 많다. 가는 곳마다 ‘맛의 천국’이니 남도의 봄이 부럽지 않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해대교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나들목이 송악 IC다. 여기서부터 농어촌기반공사의 휴양 단지가 있는 도비도까지 약 40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한진, 안섬, 성구미,장고항, 왜목 등 5개의 고만고만한 포구들을 스치게 된다. 송악 IC에서 4차선으로 뚫린 38번 국도를 따라 3분만 달리면 한진리에 이른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각 지방의 특산물이 몰려들어 북적이던 항구다. 그러나 이제는 옛 명성의 기억만 간직한 채 작은 어촌으로 남아 있다. 이곳 경치의 압권은 약 7킬로미터 길이의 서해대교 너머로 벌어지는 일출 광경이다. 두툼한 갯벌 위에 내리꽂히는 새벽 햇살도 기억하고픈 감동이다. 포구에는 쉴 만한 횟집들이 줄지어 있다. 다시 38번 국도로 나와, 현대제철 등 고대공단의 거대한 공장들에 눈길을 주며 10분쯤 달린다. 4차선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해 ‘성구미’ 이정표를 보고 산모롱이를 두어 번 돌아 꾸역꾸역 비좁은 동네 안으로 들어가면 간제미회(표준어는 홍어회이며 간재미회라고도 부른다)로 유명한 성구미 포구가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당진군 송산면 가곡리인데 ‘간제미회’ 덕분에 옛 지명이 훨씬 더 알려져 있다. 간제미는 간자미의 사투리이며 일부 지역에서는 갱개미라고도 한다. 성구미 포구는 워낙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횟집과 노점상, 관광객, 갈매기 들까지 합세해 주말이면 상당히 복잡하다. 시끌시끌, 바글바글,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가을 김장철이면 새우젓을 사러 온 사람들로 선창가는 발 디딜 틈이 없다. 반팔 입을 철이 오면 선창가의 모래밭까지 차량이 빼곡하다. 뻘건 고무통마다 우럭, 광어, 간제미 등의 횟감이 퍼덕이며 부두에 진을 치고 있는 아줌마들도 많다.
“차량이 바닷물에 잠기고 있으니 속히 차를 빼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도 심심찮게 들린다. 회를 먹다 말고 선창가 모래밭으로 뛰쳐나가 ‘반신욕을 하고 있던 차량’을 황급히 빼내는 광경도 드물지 않다. 성구미 인근의 석문방조제는 국내 최대의 둑으로 길이가 약 10.6 킬로미터다. 방조제를 지날 때 분뇨 냄새가 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풀밭에 사철 방목하는 양 떼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넓은 갈대밭과 호수를 감상하며 방조제를 통과하면 실치회로 소문난 장고항이 나온다. 실치는 뱅어의 새끼다. 뼈와 내장이 아직 생기지 않아 실처럼 보들보들해 실치라고 한다. 칼슘 등 무기질이 풍부하고 비린내가 거의 없는 담백한 횟감이다. 실치회는 장고항과 그 인근에서만 먹을 수 있다. 말간 실치에 깻잎, 당근, 양배추 등의 채소를 넣고 초장에 버무린 것이다.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 끼니 걱정을 해야 했던 가난한 어부들은 내장이 아직 생기지 않은 말간 뱅어 새끼를 그릇에 담아 고추장에 비벼서 후루룩 마시듯 먹었다고 한다. 실치회는 3~4월이 제철이고 늦어도 5월 중순 이전까지만 먹을 수 있다. 그 이후에는 뼈가 단단해져 뱅어포 만드는 데 쓰인다. 다 자란 뱅어에 시금치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인 맛깔스러운 실칫국 또한 5월에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실치회와 달리 간제미회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간제미회를 먹기에는 사람들로 번잡스러운 성구미보다 장고항이 낫다. 간제미는 바다로 약 30분간 배를 타고 나가 주로 낚시로 잡아온다. 싱싱한 간제미를 뼈째 썰어 채소 양념과 함께 새콤달콤하게 버무린 것이 ‘간제미회’다. 싱싱함과 알싸함, 달콤함이 절로 느껴지며 뼈가 물러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장고항 사람들은 최근 관광객을 더 불러 모으기 위해 마을 과 해안에서 공사를 벌이고 있다. 통통배의 엔진 소리와 바닷새 울음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해변의 뙈기밭에서 깨꽃이 피던 옛 정취가 사라지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깨끗한 바다와 해변, 수시로 잡아오는 별미는 일상에 지친 도시 나그네를 포근히 맞아줄 것이다. 장고항 인근에는 일출 마을로 소문난 ‘왜목마을’이 있다. 하지만 바다에서 해가 뜨는 것을 정작 볼 수 있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겨울이 아니면 ‘각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방값과 음식값이 무척 비싼 편이다. 고운 모래밭 해변을 감상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게 낫다. 대호방조제가 일직선으로 뻗다가 굽어지는 곳은 도비도이다. 이곳에는 농어촌기반공사가 운영하는 휴양 단지가 있다. 바닷물로 목욕을 하고 머드팩을 즐길 수 있는 대호암반해수탕과 횟집, 숙박동 외에 넓은 갯벌 체험장을 앞에 두고 있으니 가족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1 서산 해미 읍성의 정문인 진남문. 해미 읍성은 둘레가 1.5킬로미터에 이르는 평지 석성이다. 2 삼길포의 우럭회. 우럭은 회도 맛있지만 매운탕 또한 속을 확실하게 풀어주는 최고의 영양 별미다. 3 일년 내내 해산물이 넘쳐나는 성구미 포구. 서해대교 남단 송악 IC에서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다.
1.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간제미회.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더욱 맛있다.
생굴의 향미와 박속밀국낙지탕의 별미 대호방조제의 나머지 구간을 지나면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삼길포가 나온다. 이곳의 풍광은 무척 특이하다. 50척이 넘는 고만고만한 배들이 베트남 하롱베이처럼 바다에 떠 있다. 배를 띄워놓는 것은 군대의 5분 대기조처럼 ‘상시 출동 준비 완료’를 의미한다. 썰물 때 배가 해안에 얹힐 수도 있으니까 언제든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이 일대의 바다가 풍요로운 어장이라는 방증이다. 삼길포에 가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저렴하고 싱싱한 회 때문이다. 그중 우럭이 대표적이다. 우럭은 사철 잡히는 어종이지만 5~6월이 제철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는 철에 가장 많이 잡히고, 육질도 좋다. 선창가 양쪽에는 즉석에서 회를 떠주는 배들이 즐비하다. 마치 태국 방콕의 수상 시장을 연상케 한다. 일몰 무렵까지만 배에서 회를 사 먹을 수 있다. 뱃전에서 찰싹거리는 바닷물 소리를 들으며 맛보는 회 맛은 색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서산 갯마을의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서산시 대산읍에 속한 웅도가 있다. 해안선 둘레가 약 5킬로미터에 불과한 작은 섬, 웅도는 음식점이나 모텔이 전혀 없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다. 끝없이 펼쳐진 가로림만의 비옥한 갯벌에서 150여 명에 이르는 나이 든 주민들이 비옥한 갯벌을 터전으로 옹골찬 삶을 이어가고 있다. 웅도의 갯벌은 굴, 낙지, 바지락이 무진장 들어 있는 밭이다. 밀물과 햇볕을 번갈아 받아 영양 많고 쫄깃한 자연산 어리굴은 천혜의 별미라 할 수 있다. 굴을 숙성시킨 후 양념을 더한 간월도 굴젓과 달리 웅도의 굴젓은 갓 잡아온 생굴을 무쳐서 굴의 향미가 그대로 살아 있다. ‘박속밀국낙지탕’은 서산ㆍ태안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는 보양식이다. 박의 속살과 밀가루로 만든 면발, 세발낙지 등이 들어가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봄에 산란한 낙지는 밀이 익는 6월에 딱 먹기 좋은 세발낙지로 성장하기 때문에 이런 특색 있는 음식이 생겨난 듯하다. 웅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갯벌 속의 소달구지이다. 광활한 갯벌에서 소달구지 수십 대가 굴 따위를 싣고 들어오는 진풍경이 4~5년 전부터 언론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이곳의 대표적인 풍경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사진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인심 좋던 주민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디카로 찍는 거야 누가 뭐라겠어요? 먹고사는 일에 지장을 주니까 문제지요.” 마을에는 소달구지가 약 30대 있다. 그러나 3~4년 사이에 그 많던 바지락이 줄어들어 이제는 소달구지를 몰고 갯벌로 나가는 날도 한 달에 2~3회에 불과하다.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60세 이상 노인들처럼 바다도 시나브로 황폐해지고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황홀한 저녁노을 아래서도 꿈틀거리는 갯벌!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오랜 세월 이어온 삶의 방식이 묻어 있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광막한 갯벌과 가식 없는 사람들을 만나 활력을 재충전할 수 있는 웅도! 이곳에서의 하룻밤은 진정한 여행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1 ‘날 잡숴 줍쇼’하며 고무통에서 퍼덕이는 간제미. 어민들이 낚시로 갓 잡아 와 싱싱하다. 2 넓고 비옥한 웅도의 갯벌에서 한 어민이 낙지를 잡기 위해 뻘 위를 힘겹게 걷고 있다. 3 실치회는 실처럼 가는 뱅어 새끼들을 푸짐한 야채와 함께 비벼 먹는 장고항의 별미다. 대게 5월 초순까지 먹을 수 있다. 4 웅도 선착장의 이른 아침 풍경. 물이 적당히 빠지면 어민들은 바케스와 호미를 들고 굴 따위를 캐러 바다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