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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발길과 눈길 원문보기 글쓴이: 세병교여인 (박혜숙)
한강(漢江)은 압록강(鴨綠江)·두만강(豆滿江)·낙동강(洛東江)·대동강(大同江)·금강(錦江 )과 더불어 그 길이에 있어 우리나라 6대 하천의 하나이지만, 그 유역면적(流域面積)에 있어서는 으뜸으로 꼽히는 강이다.
더구나 한강은 그 지류인 남한강(南漢江)과 낙동강이 소백산맥(小白山脈)을 사이에 두고 약 40㎞의 연수육로(連水陸路)로 연결된다는 점에 비추어, 이 강은 한반도(韓半島) 종관수송로 (縱貫輸送路)의 중심축의 구실을 다하여 왔던 것이다. 이 사실은 겨레와 나라의 역사 전개의 시·공간적(視·空間的) 장(場) 가운데서 자리매김 되는 한강의 지정학적(地政學的)·전략적(戰略的) 위상을 새삼 눈여겨보게 만드는 대목이 된다.
그러므로 한강 유역일대의 역사와 문화가 유사(有史) 이래 오늘날까지 우리민족사 전개의 굽이굽이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남다름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또 이 점은 오늘날 고고학계(考古學界)와 역사학계의 노력에 힘입어 속속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한강 유역 일대에서는 선사시대 주민들이 남긴 문화의 발자취가 곳곳에서 발굴(發掘)·조사·보고되어지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사시대(先史時代)란 인류(人類)가 연모 곧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대체로 홍적세(洪績世)가 개시되는 250만 년 전부터 청동기문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시기로서, 대체로 문자기록이 없었던 시대를 지칭한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문화, 즉 선사문화(先史文化)는 그 연모의 자료와 제작방법에 따라 구석기문화에서 신석기문화로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50 ~ 60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이다. 이때는 지질학적으로는 제4기 홍적세로, 네 번의 빙하기(氷河期)와 세 번의 간빙기를 거치는 등 기후와 지형의 변화가 매우 심한 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타제석기(打製石器:뗀석기)를 사용하면서 수렵·채집경제(狩獵·採集經濟)를 바탕으로 한 ‘식량채집단계(food-gathering stage)'의 삶을 꾸려나갔던 것이다.
그 후 지구는 지금부터 1만 년 전부터 지질학적으로 충적세(沖積世)로 접어들면서, 기온의 상승과 함께 지금과 비슷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곧 이 시기에 들어와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해수면 역시 높아지고, 한반도(韓半島)와 일본열도(日本列島)는 격해·분리되었다. 또한 한반도의 식생(植生)은 낙엽활엽수림대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문화 즉 신석기 문화를 가꾸어 나가게 되었으니, 이 시기가 바로 신석기시대인 것이다.
신석기문화라 함은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농경(農耕)을 배경으로 전개된 문화를 말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농경보다는 토기(土器) 곧 질그릇이 먼저 제작되고, 마제석기(磨製石器) 혹은 간석기를 사용한 곳도 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한국·일본·시베리아(Siberia)이다.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시작되어, 지역적 특색을 지니면서 발전되었다. 그러나 농경의 시작은 현재까지의 연구성과를 감안할 때 기원전 2000년경 신석기시대 말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국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한 ‘식량생산단계(food-production stage)'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것은 기원전 12~10세기 이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이르러서인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遺蹟)의 수효는 약 150곳에 이른다. 이들은 한반도 전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고, 주로 대동강·한강 유역 및 그 인접도서(島嶼)를 포함한 서해안 지역, 두만강 유역을 포함한 동북 해안지역, 그리고 낙동강 유역을 포함한 남해안 지역 등 세 개 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아울러 이들 세 지역군 사이의 문화 양상(樣相)의 차별성 또한 적지 않다.
이 가운데 한강 유역의 유적은 서해안 도서지방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연결되는 하나의 큰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어, 기타 지역과의 문화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지표(指標) 유적 집중지역이다. 즉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즐문토기(櫛文土器) 또는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 형태나 문양(紋樣)에 있어서 다른 지역의 유물과 대비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지표 자료로 꼽히고 있다.
암사동은 광주산맥(廣州山脈) 줄기인 남한산을 배경으로 하여, 그 북안의 아차산과 마주하며, 한강 본류 남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넓은 모래사장과 강물이 흘러가는 속도가 비교적 완만하여 예부터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암사동유적은 행정구역 상 서울특별시 암사동 153 ~ 157 번지의 한강 하류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바, 이는 동경(東經) 127°10′북위(北緯) 37°33′에 해당된다. 이곳은 강 건너 북쪽으로는 워커힐과 사적(史蹟) 제234호 아차산성(阿且山城)이 바라보이는 한강 남안 모래사장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신석기 시대 대규모 취락(聚落) 유적지이다.
또 평상시 강변으로부터 700~800m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은 강변에 평행하여 동에서 서로 둑의 형상을 이루는 좁고 긴 하천충적대지 즉 자연제방인 바, 이곳을 경계로 강변과 그 반대편인 내지(內地)쪽으로 완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여름철의 집중호우로 인하여 하적토퇴적층이 두터운데, 이 유적도 바로 이러한 강변의 고운 사질토가 기반층을 이루는 좁고 긴 대지와 그 양 경사면에 수만 평의 유물포함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암사동 유적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퇴적층이 유실되어 지상에 유물 포함층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이 당시 대홍수로 인하여 한강변 모래언덕 지대가 심하게 패어져 수많은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노출되면서 그 유적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등전양책(藤田亮策)·횡산장삼랑 등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또 이곳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에 대한 연구 역시 간간히 행해져온 바 있었다.
암사동 유적은 신석기 시대 집터로서 제일먼저 알려진 곳이며,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은 집터가 발굴된 취락(聚落)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 유적지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에 따르며, 기원전 4000~3000년 경, 곧 지금부터 6000~5000년 전의 주거지 유적으로 추정된다.
암사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석기 시대 집들은 외형상 지붕과 벽채가 분리되지 않고, 서까래의 밑이 땅에 닿게 만든 움집 곧 수혈가옥(竪穴家屋)이었다.
즉 움집이란 일정한 넓이와 형태를 가진 구덩이를 파, 집바닥을 땅 밑에 두고, 구덩이 안은 별도의 벽체 시설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게 된 집을 일컫는다.
이 시기 움집터들은 대체로 해안가 구릉(丘陵)이나 큰 강변의 대지(臺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이런 집들은 직경 4~6m 크기의 원형이나 말각방형 곧 모를 죽인 방형의 구덩이를 깊이 50~100㎝ 판 다음 노지(爐址:화덕자리)등 내부시설을 마련하고, 지붕을 덮었다. 이 경우 움집은 기둥을 세우고, 긴 나무나 억새풀을 이용하여 그 위를 고깔 모양으로 덮어 씌워 지붕을 만들었다. 곧 이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한쪽 끝을 움 중앙에 모이게 하여 골격을 형성하였는데, 서까래 아래 사이에 잔나무 가지나 갈대·억새 등 풀을 이어 덮었던 것이다. 이런 움집은 그 바닥이 원형이면 원추형(圓錐形) 지붕이, 바닥이 방형이거나 장방형이었다면 양면으로 경사가 진 지붕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덩이 평면이 원형이나 타원형·장방형의 테두리를 둘러 집의 중앙에 설치하고, 보온(保溫)과 취사(炊事)에 사용하였다. 움집의 바닥은 아무런 시설이 없거나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것이었다. 움집의 출입시설이 확인된 것은 계단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움집 안에서는 풀이나 가죽 혹은 돗자리 같은 것을 깔고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집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한 개의 기둥을 세워 움 상부의 서까래를 받쳐주거나, 네 귀퉁이 가까이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 들보를 얽어 그 위에 서까래를 걸쳐주도록 하였다. 지붕 꼭대기에는 연기 구멍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울러 집의 출구에는 계단이나 경사를 만들거나, 사다리를 놓아 출입 시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 자연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 하에서, 인류는 구석기 시대의 저급한 수렵·채집경제라는 ‘식량채집단계(食糧採集段階:food gathering stage)'를 벗어나, 정착생활(定着生活)을 하면서, 원시농경과 목축(牧畜)에 의한 ’식량생산단계(食糧生産段階:food production stage)'로 접어들게 되었다. 또한 인류는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 만든 질그릇 곧 토기(土器)라는 새로운 조리(調理)와 저장 수단을 개발·활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토기의 출현은 신석기 시대를 구석기 시대와 구분하는 세계적·보편적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아울러 인류는 돌을 갈아서 보다 정교하게 만든 연모인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 인류학계는 이 신석기 시대가 인류문화 발전사의 혁명적인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하여 그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라 하여, 이런 사실을 ‘신석기혁명(新石器革命:Neolithic Revolution)'이라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농경(農耕)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들이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동시에 똑같이 발전한 것은 아님에 유의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 시대 농경의 적극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으나, 도토리 등 야생식용식물과 물고기·조개 등 수산식료의 조리와 저장에 편리한 토기의 제작·마제석기의 사용 및 정착생활이라는 신석기 시대 문화의 특성을 인류사적 차원에서 공유(共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신서기 문화란 최초로 토기가 출현한 시기부터 금속기(金屬器) 사용이전까지의 어로(漁撈)·수렵·채집의 생계경제(生計經濟:subsistence economy)를 바탕으로 전개·발전한 토기문화(土器文化)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다.
암사동 유적의 층위(層位) 구성은 제일 밑바닥이 수형주거지가 있는 밝은 갈색의 모래층이고, 그 위 두 번째 지층이 두께 30㎝ 쯤 되는 불모층(不毛層)이며, 세 번째 층이 즐문토기편과 무문토기편(無文土器片)이 섞여 나오는 회흑색 모래층이고, 네 번째 층이 백제문화층이었고, 맨 위 다섯 번째 층이 모래층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표토층이었다.
이 사실은 이 암사동 유적지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쳐 백제 시대로 이어지는 이 땅의 역사 흐름과 그 궤를 같이하며, 당시 주민들의 취락(聚落) 입지로서의 구실을 다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 암사동에서 움집들을 짓고 살았던 주민들은 오늘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들일까? 이 문제는 곧 신석기 문화의 뿌리와 주민의 성격을 밝히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종래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원류(源流)에 관한 여러 논의가 있어 왔다. 먼저 시베리아 전래설은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Siberia)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그곳의 신석기문화가 우랄(Ural) 지역을 매개로 멀리 북부유럽(Europe) 핀란드(Finland)의 ‘캄케라믹(kammkeramik)’과 우리의 즐문토기의 형태적 유사성에만 집착한 결과로서 비판받고 있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 고고학계가 즐문토기에 선행하는 원저무문토기(圓低無文土器)와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를 중심으로 하는 선즐문토기문화의 존재를 확인하게 됨에 따라, 그 입론의 근거를 잃었다. 오늘날 우리 학계는 즐문토기문화에 선행하는 선즐문토기문화의 존재에 주목, 그것과 유사한 그러나 중국 본토나 만주(滿洲) 지역의 신석기 문화와는 분별되는 토기문화가 우리나의 동북 해안지방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및 흑룡강(黑龍江) 유역 일대에서도 존재했음을 밝혀낸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베리아 및 흑룡강 유역 일대에서도 존재했던 문화의 담당주민은 시베리아의 선주민인 고아시아족(古Asia族:Palio-Asiatics)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 이들과 유사한 신석기문화를 향유한 바 있던 주민들 역시 고 아시아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 담당주민은 古Asia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한민족(韓民族) 형성의 주류를 이루는 Altai어족인 무문토기인(無文土器人) 즉 예맥(濊貊)에게 흡수·동화·통합되어 우리 민족 형성의 한 줄기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학계 일각에서는 우리 민족형성과정에서, 신석기 시대 즐문토기인과 청동기 시대 무문토기인 사이의 흡수·동화·통합과정에 있어서의 평화적 국면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어 눈길을 끈다. 곧 이 견해는 즐문토기문화에서 무문토기문화로의 이행과정에서 상호 간의 문화요소를 교환한 사실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자료가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그 예로서 즐문토기가 무문토기의 태토(胎土)인 모래·활석가루·석면을 자기의 태토로 채택한 점과 팽이형토기(기원전 7세기 이후 한반도 서북지방의 무문토기)의 구연부에 즐문토기식 사선(斜線) 무늬를 시문한 사실 및 경기도 양주(楊洲) 수석리(水石里) 집자리 유적에서 즐문무늬토기문화 전통의 냇돌을 이용한 석기들의 존재를 꼽고 있다.
따라서 이 견해는 이러한 문화교류가 반드시 평화적인 접촉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인구 사정·두 문화간에 존재하는 기본적 성격에 있어서의 차별성 등을 감안할 때, 두 문화계통 주민이 서로 생존경쟁을 위한 사투(死鬪)를 벌이지는 않은 듯하며, 두 주민간의 혼합·동화, 즉 가까운 지역에서의 평화적 공존(共存)에서 잡거(雜居)로, 그리고 잡거에서 혼혈·혼화(混血·混化)라는 과정을 밟아 무난히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시베리아 신석기문화 담당주민의 실체는 고아시아족이다. 이들은 분명히 우리 민족과는 이질적인 존재로서 역사 전개 면에서도 각기 상이한 여정을 밟게된다. 그러나 한국 신석기문화는 시간적으로 청동기 문화와 연결된다. 또 고아시아족의 언어는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문화 단계인 고구려(高句麗)의 언어에 남아 있기도 하다.
이런 점은 한국 신석기 문화가 청동기 문화와 단절적인 것이 아니며, 신석기 문화와 그 담당주민의 영향이 청동기 문화 단계에까지 일정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고아시아족 계열의 문화 요소는 우리 민족문화 형성과정에 하나의 잠류(潛流)하는 줄기로서 그 문화의 내용을 더욱 다양·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석기시대 암사동 주거지에서 살던 주민들은 고아시아족으로서, 비록 오늘 우리와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또 부분적으로 오늘의 우리 겨레 형성과정에 참여하였고, 아울러 우리가 누리는 민족 문화 가운데는 그들의 문화 역시 일부 녹아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가지는 의의는 오늘의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없는 신석기시대 사람들 삶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생활고고학 가운데서도 주거지 고고학 상의 주요 유적으로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것이다.
암사동 선사주거지 유적(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139-2번지 일대)은 1979년 7월 26일 사적(史蹟) 제267호로 지정되었고, 여러 차례의 유적지 발굴 조사 결과, 총 면적 78,133㎡(25,122평)의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런데 이 선사주거지는 서울시가 36억원을 투자하여 9차에 걸친 복원공사를 실시하여,‘암사동 선사유적공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공원은 유적관람공간과 원시생활전시관 그리고 휴식공간·주차장·편의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적관람공간은 9채의 신석기시대 움집이 복원(復原)되어 있고, 원시생활전시관은 집터를 발굴된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빗살무늬토기·돌연장·화덕자리 등도 제자리에 놓아 신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용 시민의 불편이 없도록 주차장·산책로 등 편의시설을 완비하여 1988년 8월 준공되었고, 현재 무료로 개방되고 있어 연인원 30만 명이 관람한 바 있다. 따라서 이곳은 개관 이후 인근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유치원에서 중·고교생에 이르기까지 단체 관람객들이 입장,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으로 구실을 다하고 있으며,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우리의 선사문화를 소개하는 관광명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원시생활전시관은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관은 지금으로부터 6000년전 신석기시대 움집터 8기와 저장구덩이 1기를 발굴 당시 실제 그대로 보존처리하여, 그 위에 전시관을 세우고,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형태는 사각추형이고, 규모는 총 면적 1,024㎡(310평)이다. 전시실의 중앙부에는 실제 발굴된 움집터를 경화처리하여 배치하였고, 주변에는 한강의 유적분포·연표·신석기 유적 분포도 등을 패널과 디오라마·출토유물과 함께 전시하여 당시 신석기인의 생활을 재현시켰으며, 우측 통로를 통하여 제2전시관으로 이동 가능토록 하였다.
제2전시관은 입구에는 영상실과 도입부 발굴모형 재현 등 구석기 문화부터 초기 청동기문화와 다른 지방·다른 나라의 선사문화를 비교할 수 있도록 모형·패널·디오라마 등으로 구성하였고, 특히 전시실 중앙 부분에는 움집 생활상을 절개하여 신석기인의 모습과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앞으로 유물의 교체 전시 등 기획전시를 통하여 선사주거지 전시관 기능을 확충할 계획이다. 전시관 규모는 총 면적 812.59㎡(246평)이며, 구조체는 집성목을 사용하여 자연감각적 미려함을 살렸으며, 지붕은 경사 슬라브에 산죽을 이어 원시적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 주거지 형태는 원형에서 말각방형, 타원형, 그리고 방형으로 바뀌었고, 말기에 이르러 장방형이 출현하였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황해도 지탑리 제1호가 정방형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대부분의 평면은 분명히 원형으로부터 시작된다. 전 세계적으로는 신석기시대에 원형 계통과 방형계통이 병존하고 있으나, 한반도에서는 원형계통이 압도적으로 많고, 신석기시대 후기에 장방형의 평면이 나타나기 시작하므로, 발생 전후의 시간차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암사동 유적에서 발견된 집자리는 신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수혈주거지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집자리들 가운데 단편적으로나마 그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은 대략 21기 정도이다.
이들의 평면구조를 보면, 원형(圓形)이 7개, 타원형(圓形)은 1개, 말각방형(抹角方形)이 11개, 장방형(長方形)은 2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사실을 보면, 평면 형태는 원형과 말각방형이 각각 7개와 11개로서, 이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주로 원형의 수혈(竪穴)이 발견되는데 비하여, 이 지역의 특징적인 형태로 말각방형의 비율이 많은 것은 아마 두 지방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차별성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방형 주거지 2개가 발견·보고된 바, 그 중 하나(72-5호)는 외곽의 평면이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장방형의 수혈 내부에 다시 원형형의 수혈을 판 형태로 지금까지 발견 예가 거의 없는 특이한 모습을 갖고 있어 새삼 눈길을 끈다.
수혈에는 각각 노지(爐址)가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돌로 시설한 것으로서 그 형태는 원형과 방형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노지(爐址)가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돌로 시설한 것으로서 그 형태는 원형과 방형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노지가 모두 중앙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점은 청동기시대 수혈의 평면이 대부분 장방형이며, 노지가 벽가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양 시기간의 문화적 차별성을 짐작케 해주는 사실이다.
곧 신석기시대의 후기에 이르면 수혈주거 안의 공간이 약간 더 넓어지고, 화덕자리는 한 쪽으로 치우쳐 설치되었다. 이는 이 움집 안에서의 생활이 다양화되어, 쉬고 잠자고 식사하는 기능 외에 다른 기능 즉 작업장 같은 장소가 마련되었던 것임을 추정케 한다. 그런데 암사동의 경우, 출입구가 마련되어 있는 주거지에서는 노지의 방향이 대게 남쪽을 향하고 있다.
주공(柱孔:기둥구멍)은 1기의 주거지 내에 상당수 나타나 있지만, 그것들 모두가 동시에 세워진 기둥자리라고 보지 않으며, 기둥을 교체해 나가면서 새로운 구멍을 파내었거나 주된 기둥을 보조해 주는 기둥자리였다. 대개 주공은 한 주거지 당 4개로서, 기둥은 네 모서리에 수직으로 올려지고, 그 위에 들보를 붙들어 매었다.
한국 신석기시대 문화가 그 유적의 분포상에 비추어 볼 때, 주로 대동강·한강 유역 및 그 인접 도서(島嶼)를 포함한 서해안 지역, 두만강 유역을 포함한 동북해안 지역, 그리고 낙동강 유역을 포함한 남해안 지역 등 세 개 지역 문화권으로 분별됨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중 서해안 지역에서 형성·발전된 신석기시대 토기를 서한첨저유형토기 혹은 서한토기라 지칭할 수 있다면,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되는 신석기 토기는 이런 서한토기의 한 전형(典型)을 보이고 있다.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곧 즐문토기(櫛文土器)이다. 이 토기의 기형은 직립연부(直立緣部) 즉 곧은 아가리에 첨저(尖底) 혹은 뾰족바닥의 바닥으로 이어지는 포탄형이 기본이다. 바탕흙은 주로 운모(雲母)가 혼입되었으나, 석면(石綿)·활석(滑石)이 혼입된 것도 있다. 기표면(器表面) 즉 그릇 표면은 이(齒)가 하나 또는 여러개로 된 시문구(施文具) 즉 무늬새기개, 곧 단치구(單齒具) 혹은 다치구로 긋거나 눌러서 새긴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구연부(口椽部) 또는 아가리 부분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平行密集斜短線文)·열점문(熱點文)·사격자문(斜格子文)이 주로 새겨졌으며, 기복부(器腹部) 또는 그릇 몸체는 주로 위아래 방향 또는 옆으로 놓여진 어골문(魚骨文)이 새겨졌다. 문양을 새길 기표면을 구연부 즉 아가리부분·기복부·저부(底部)의 세 부위로 구분하여 각각 서로 다른 무늬를 새긴 것이 가장 많고, 구연부와 기복부 이하를 구분하여 서로 다른 문양으로 새긴 것이 그 다음으로 많다. 구연부와 기복부 문양대 사이의 공간에 피상점선문·거이문·구획문·사격자문 등을 새긴 것도 있으며, 구연부에만 문양을 새긴 것도 있다.
암사동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구분계전시문형토(區分系全施文形土器)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색상(色傷)은 적갈색이 대부분이나, 황갈색·회갈색·회흑색도 일부 보인다. 이런 것들은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운 탓으로 불길이 고루 미치지 못하여 생긴 현상으로 추정된다. 우리학계 일각에서는 이렇게 암사동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특성을 갖는 토기를 총괄하여 서한첨저유형토기 혹은 서한토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 서한토기는 표면에 장식무늬가 아가리부분·몸체부분·바닥에 가까운 부분 등 각각의 몸체 부위에 따른 장식무늬의의 유무와 무늬의 조합(組合) 관계에 따라 3기(期)로 나뉘어진다. 곧 1기는 기원전 5000~3500년, 2기는 기원전 3500~2000년, 3기는 기원전 2000~1000년이다.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이외의 유물(遺物)로는 연석·연석봉·석촉·타제석부·마제석부·괭이·돌낫·보습·속이 빈 원통형(圓筒形) 토제(土製) 및 석제(石製) 어망추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마제석부는 미리 적당하게 평평한 역석을 골라 한쪽 끝을 갈아 합도를 만든 것이며, 크기는 10~14㎝ 내외이다. 석촉은 모두 점판암의 마제로서, 유경엽형도 있으나, 대부분은 소위 역자식이다. 평면 신발형의 석기인 돌보습은 국립중앙박물관측의 제4차 발굴시 4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여기서는 돌낫도 공반되었다. 또 10호 주거지에서는 어깨가 날 부분에 비해 좁은 형태의 굴지구인 괭이가 출토되었다.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