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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이 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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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어허허!”
택시기사의 거침없는 입담과 웃음이 늦가을의 낙엽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손님이 자리에 앉자마자 편안함을 갖게 해주는 프로기사다운 노련함이 택시 곳곳에 배어 있었다. 한결 같이 성난 입술모양의 베란다를 달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택시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었다. 특별하게 우울한 하루도 아니었다. 그렇고 그런 하루. 집을 나와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명석동에 내려놓고 십 여 개의 신호 등을 받고 도착한 사무실,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마시고 시작한 직장생활은 전화를 받고 공문을 작성하다보면 무력한 중년의 오후가 된다.
“평생교육원이죠?”
“예,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수강과목이 여러 개 있나요?”
“예, 140여개 과정이 설강되어 있습니다. 어떤 과목을 수강하시려고요?”
“글쎄… 딱히 정해놓은 과목은 없구요… 뭐 들을 만한 것이 있나요?”
이렇게 이어가는 이름모를 아줌마와의 통화는 십중팔구 소득 없이 공공요금만 축내기 일쑤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주부들은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즉 일상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기획하기 마련인데 생활정보지들을 보고 일차적으로 문의하는 곳이 여성문화센터나 대학부설 평생교육원, 그리고 백화점 문화센터 등이다. 십 여 년 동안 남편과 아이들에게 매달렸던 생활들을 결혼 전의 의식으로 되돌려놓기에는 과거의 언어가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데요?”
“글쎄, 이것저것 한 번 알아 보려구요?”
“홈페이지나 홍보지를 안 보셨나요?”
“아직요… 뭐 취직이 잘 되는 교육과정은 없나요?”
이쯤 되면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목소리가 퉁명해지기 십상이다. 지난 학기 고객만족도의 직원친절도 조사에서 낮은 점수가 나와 문제가 제기된 것도 나의 이런 전화 태도가 한 몫 했음이 틀림없다.
“취직이 잘 되는 교육과정을 하나만 추천해주심 안돼요?”
“아~ 예! 아무래도 인기 있는 강좌는 노인복지사나 부동산과정이 아닌가 싶네요.”
“혹시 사회복지사과정은 없나요?”
“예, 없습니다!”
“그럼 과정을 마치면 취직은 시켜주나요?”
마치 무료한 시간을 메워 줄 상대자를 만나기라도 한 듯 한도 끝도 없는 전화가 지속된다.
그러다보면 아침에 거쳐 온 십 여 개의 신호등을 또다시 더듬어서 귀가해야 할 시간이 돌아온다.
법학과를 졸업한 후 판검사가 되기는커녕 7급 공무원이 되는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남들은 5년이면 승진을 하는데 나는 사주팔자가 더러운지 승진 직전에 안 아프던 콩팥이나 간까지 심통을 부렸다. 그러다보면 돈이나 직장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휴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 후 다섯 달 혹은 열 달 만에 직장에 복귀해서 보면 오장육부가 뒤집어진다. 저 뒤에 줄 서 있던 후배들이 승진을 하여 팀장으로 앉아 있고 나는 근무평점이 곤두박질 쳐 승진서열에서 밀려나 있다. 게다가 못난 성격 탓에 몇 년간 공들인 상사에게 벼락치듯 대들어 근평 점수를 하루아침에 깎아 먹는 것도 승진 시기이기 일쑤다. 이제는 이런 일이 한 번만 더 반복되면 인생이고 진급이고 더 기대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나마 변방의 한직에 남아 있는 것이 민주공화국에 사는 덕분인지도 모른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들면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일까?
인생 사십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나이라지만 거울에 비춰진 내 얼굴 어디에도 책임질만한 구석이라곤 없다.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이 정오의 시간에 변신을 시도도 하던데 나는 정오를 기다리기가 지겨워 일찌감치 점심을 먹으로 사무실을 나와 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인근에 홀로 즐길 수 있는 공원이 있어 식사 후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곳도 이제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밀회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눈총감이 되어 그리 오래 머물 수 있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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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있어 온 일인데도 오늘은 왠지 심사가 뒤틀렸다. 현관문을 들어와도 쳐다보는 이도, 반기는 가족도 없다. 마누라는 부엌에서 조리를 하고, 막내는 컴퓨터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고, 큰딸과 아들은 텔레비전에 눈을 박은 채 두 눈이 충혈 되어 있다.
‘에험! 에험!’ 하고 큰 기침을 두어 번 한 후에야 눈치 빠른 막내 녀석이 마지못해 인사를 한다. 마누라와 큰 녀석은 눈길 한 번 주더니 그 뿐이다. 항상 있어온 일이지만 오늘은 너무나 가벼운 가장의 존재성에 비애감을 느끼며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곤 내 가족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집을 빠져 나왔다.
저마다 약속되어 있거나 약속을 만들기 위해 행보를 재촉하는 사람들이 어둑해지는 골목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퇴근길이라 항시 아파트 정문 앞에서 지루하게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도 없었다. 1톤 트럭에 과일을 싣고 와 행상을 하는 거무튀튀한 피부를 하고 있는 부부와 그 옆에서 순대를 파는 남자가 장사를 준비 하는 중이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그 옆에 가방이나 양말 따위를 파는 보부상들이 똬리를 틀다 자정이 되면 수금한 돈을 계산하며 돌아갈 것이었다. 가끔씩 자나가는 길에 유심히 그들의 장사하는 양태를 살펴보아도 저렇게 팔아서 어떻게 생계를 꾸려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은 줄기차게 그 다음 날에도 동일한 장소에 두 발을 딛고 살아 있었다.
과일 노점상을 하는 부부는 과일의 신선도도 떨어지거니와 가격도 싸다는 느낌이 없어 아파트 사람들에게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장사를 할 때도 부부가 따로따로 떨어져서 행동하는 것이 별 재미없이 살아가는 듯 했다.
순대집 부부는 연구 대상이 됨직했다. 남자의 팔에는 언제 새긴 건지는 몰라도 조잡한 문신이 여러 개 있었다. 얼굴이 작고, 머리를 박박 밀어 잘 생긴 중국인을 연상하게 하는 괜찮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여러 행태로 보아 어렸을 때 소년원께나 드나들었던 잡범의 이력이 있을 듯 했고 그 부인은 옥바라지에 어지간히 고생을 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이면 술집에서 돈을 헤프게 쓰던가 아니면 바람을 피워 마누라에게 꼼짝 못하고 잡혀 사는 형세를 보여 안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과일상을 하는 부부들보다는 성교 횟수가 배는 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어-허~ 어허허!”
제법 차내에 구색을 갖춘 개인택시를 타자마자 운전사는 근질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실룩이고 있었다. 차내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최신 유행음악을 틀어 놓고 고가의 스피카까지 구비해놓고 있었다. 택시를 타면 대부분 그렇듯이 정치인들에 대해 온갖 욕을 퍼붓다가 지치면 먹고 사는 문제로, 다시 자기 자랑으로 화제가 옮겨지기 마련이다.
“요즘 운전자들 수준은 한 마디로 개판 오 분 전이지요! 내가 운전 한 지 올 해가 꼭 오십 년인데 옛날 기사들은 지금의 운전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우받는 인기 직업이었지요!”
나는 둔탁한 머리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운전경력이 오십 년이라면 이십 세부터 운전을 시작했더라도 어림잡아 그는 칠순의 노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의 나이가 칠십일 거라는 느낌은 갖지 않을 듯싶었다. 나는 그에게 갑자기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운전대를 오십 년 잡았다면 그가 일 년마다 경험한 한 편씩의 일화만 자료로 제공해주어도 오십 여 편의 소설작품은 넉넉히 쓸 수 있을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대단한 재담가였다.
“어-허~ 어허허!”
“그럼 기사님 연세가 칠십 가까이 되셨을 텐데, 오십 정도밖에는 안되어 보이십니다”
“어-허~ 어허허!, 욕심을 버리고 즐겁게 살면 젊은이도 다 그렇게 됩니다!”
신호등에 걸리자 차가 울컥하고 멈추어 섰다. 다른 택시 같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차를 멈춘 것으로 보아 그도 나와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운 듯했다. 때를 맞추어 빨강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가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어-허~ 어허허!, 조~오타! 좋아! 옛날 생각나는구만!”
“예전에는 기사님도 인기 좋으셨겠습니다!”
“어-허~어허허!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신호등이 들어오자 그는 오십 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새파란 언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열여덟에 강원도 산판에서 운전사 조수로 시작했지요. 미국산 지에무시 아시죠? 변강쇠처럼 힘 하나는 끝내줍니다! 미군놈들 지에무시 없었으면 2차 세계대전 때 산악전투에서 전부 굶어죽었거나 작살났을 겁니다. 제너러모터스에서 1844년에 제작한건데 지금도 산판에서 끄떡없이 굴러다니니 미국놈들이 얼마나 차를 잘 만드는 겁니까? 역시 등치가 크고 자지가 커야 튼튼한 물건을 만들어 낸다니까요! 바퀴가 여섯 개라 육발이라고 불렀는데, 엔진이 타이어보다 높이 달려있어서 개울물이니 진흙탕이니 맘대로 다닐 수 있었지요. 시속 120킬로 이상에 80도 경사도 짐을 가득 싣고 오를 수 있었다니까요!”
서서히 기사양반의 뻥튀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GMC차량은 최고속도 75㎢/h에 경사 40도 정도를 오를 수 있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차량에 대한 그의 이해도가 상당함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좋은 차를 아 그 정치하는 미친 자들이 다 없애려고 했었다니까요? 배고파 굶어 죽을 판이고 발이 부르터서 십 리길도 못 다니는 판인데 안전은 무엇이고 차 수명은 무슨 얼어 뒤틀린 그지망태기입니까! 안그렀습니까? 그래도 역시 박통은 박통이지요! 이 지에무시가 워낙 힘이 좋은 물건이라 오지산간도 다닐 수 있음을 알고 광산이나 산판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 아니겠습니까! 탁월한 정치가지요! 아 - 근데, 작은 아버지를 따라 운전수가 되고 싶어 산판에 들어갔는데 운전은 가르쳐 주지 않고 산판일만 석 달간 시키는 게 아니겠어요? 내 더러워서, 다시 집으로 돌아올까도 생각했는데 솔직히 산 움집에서 집에 가는 방법을 몰라 그냥 머물게 되었수다! 그러다가 논산훈련소로 끌려가서 고문과 칭호를 들으며 죽도록 고생하다 산판에서 지에무시 운전했다고 속여 수송대 운전병이 되었지요.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먹구 살고 있습니다!”
차는 어느덧 안꼴로 접어들고 있었다. 금요일이면 모이는 ‘꿈의 초막’에는 글쟁이들 몇몇이 해묵은 문장들을 들먹이고 있을 터였다. 나는 이 택시기사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저씨 오늘 일당 드릴테니까 저와 함께 막걸리 한 잔 하시죠?”
“어-허~ 어허허!”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일당’의 덫에 걸려들어 너털웃음으로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우리는 ‘꿈의 초막’ 뒷골목에 위치한 주막집으로 들어갔다. 증약막걸리를 파는 집이었다. 안꼴 토박이인 듯한 노동자 한 명이 술을 비우고 있을 뿐 다른 손님은 없어 마음이 편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까 건널목에서 본 아가씨 삼삼하게 생겼지요?” “글쎄, 전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붉고 짧은 치마를 입었던 아가씨 말씀이지요?”
나는 여자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인 듯 일부러 눈길을 주인에게로 돌렸다. 엉덩이가 솥뚜껑만한 여자는 나물을 무치는 지 기름병을 들어 붇고 있었다.
“어-허~ 어허허! 옛날 생각하면 참 행복합니다!”
막걸리잔이 두 순배 돌자 그의 얼굴에 칠순의 나이테가 드러나고 있었다. 작고 왜소한 키에 얼굴은 조막만하여 그리 인기 있던 시절도 없었을 듯한데 그는 계속해서 그가 가고 싶은 길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산판에서 내려와 홍천장으로 지에무시를 끌고 가는 날은 기분 끝내주는 날이었지요! 공주집이며 영춘옥, 양평집, 서울집 등 주막마다 한두 명씩 있던 색시들은 관공서 직원나부랭이보다도 땀냄새 나던 나를 브이아이피로 모셨다니까요? 아무튼 홍천장에 있던 주막집 색시들은 다 내가 한 번씩 품어 보았다면 믿으시겠수?”
나는 침을 꼴까닥 삼켰다. 점점 나는 그 앞에서 왜소해지고 있었다. 그는 산전판에서 떠돌던 보잘 것 없던 사람이 아니라 내 앞에 서 있는 경험 많은 큰 형이 되어 있었다.
“홍천장을 보고 산판으로 가다보면 신작로에서 손 흔드는 사람을 만나기 일쑤지요. 우리 세대에 지나가는 차에 손 안 들어 본 사람 없고 우마차나 차량을 안 얻어 타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겝니다! 웬만하면 다 태워주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쁜 아가씨들은 주로 앞자리로 태우지요. 근데 장날에는 워낙 촌사람들이 시골장을 보러 많이 나오니까 짐칸이 정원초과가 될 때도 있지요.”
그의 눈은 어느덧 GMC차량에 홍천장을 보고 가는 시골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있었다.
“하루는 짐칸에 사람을 가득 싣고 홍천장에서 돌아가는데 아가씨 세 명이 양 팔을 벌리고 태워 달라고 길 중앙으로 나와 난리를 치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 차를 세우고 인물을 쓰윽 살폈더니 얼굴이 북실북실하니 꼭 보름달 같은 처자가 한 명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두 명을 운전수석 옆으로 앉게 하고 북실북실한 처자는 의도적으로 왼쪽 무릎 위로 얹혀 타게 했지요. 처음에는 그 처자도 망설이는 것 같더니 자리가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내 무릎 위에 엉덩이를 걸치는 게 아니겠어요?”
이미 내 바지가랑이는 무언가가 팽팽하게 머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마누라 앞에서 몇 달 동안 몸부림쳐도 앉은 자세로 꿈쩍 않던 물건이었다.
“어-허~ 어허허! 부우연 살결에 몸이 탱탱한데다가 젖팅이는 얼마나 크던지 차가 흔들릴 때마다 사람 참 환장하겄더만요. 결혼도 안한 젊은 남녀가 몸이 부딪치니 미치겠더라니까요! 그 처자도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쌕-쌕 앓는 소리를 내더라고요! 포장도 안 된 산간 마을길이니 오죽 했겠어요! 그래 하나 둘 씩 사람들을 내려주고 그 처자가 내릴 즈음해서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했더니만 싫은 내색을 않더라구요! 그래서 차를 거꾸로 돌려 홍천장에 갈 때면 가끔씩 들리곤 하는 주막집으로 들어갔지요. 그리고는 뒷방으로 들어가 삼겹살을 취나물에 싸서 소주를 기울이니 세상 참 부러울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삼천궁녀 의자왕도 일만궁녀 진시황도 부러울 게 뭐 있겠수? 안 그렇습니까? 어-허, 어허허허!”
주막집 여자가 옥천에서 오후에 뜯어 온 거라며 취나물과 돌미나리를 내어 놓는다. 그리고는 나보고 인상이 너무 좋다며 옆 자리에 눌러 않을 기미를 보이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주인을 물리치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 그날 그 처자와 이불도 없는 방 안에서 한 몸이 되어 뒹굴었지요. 북실북실한게 허- 참!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자지가 뿔끈 불끈 슨다니까요? 일이 끝나고 자기를 잊지 말라던 축축한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 그 분하고 지금 같이 사시던 가요?”
“아니 그 때는 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어디쯤에 사는 처자인 것만을 알았지 연락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었지요. 한 번 찾아 간다는 것이 산판도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이런 저런 일로 해서 잊혀지게 되었지요.”
그는 운전기사라는 직업이 당시에는 최고의 인기 직종이었음을 두어 번 더 강조하더니 다시 막걸리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요즘 택시회사 내에서 노조조합장 선거가 있는데 초등학교도 안 나온 자가 당선이 유력할 정도로 운전기사 수준이 형편 무인지경이라는 탄식도 안주삼아 했다. 그러다가 신세대들의 무분별한 성생활을 이야기하다 중년의 문제로 화제를 옮겼다.
“젊은이, 사람마다 사주팔자라는 게 있잖수? 나는 재복은 없어도 여복은 있는 가보우! 지난 주에는 금산에서 나오는 길에 한 여자를 태웠잖겠수. 수더분하긴 해도 얼굴에 복이 붙었기에 시내로 나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처음에는 뾰로통해 있던 여자가 내 넉살에 긴장이 풀렸던지 나보고 술 한 잔 같이 할 수 없느냐고 하지 않겠어요? 이거 완전 땡 잡은 거잖수! 그래도 남자는 이럴 때 쉽게 마음을 열어서는 안 된다우! 그렇다고 여자의 기분을 거슬려서는 더욱 안 되지요. 이것이 바로 테크닉!, 우리말로 사교술이라는 건데, 그래서 대신 술값은 내가 낸다는 조건을 걸었지요! 그랬더니 여자도 기분이 째지는지 빙긋 웃더구만요!”
“그 여자가 술집 여자였던가요?”
이야기만 듣는 것이 무관심해 보일까봐 한 마디 던진 것이 의미 없는 문장이 되어 있었다.
“아따! 내 이야기를 마저 들어 보슈! 목척동 횟집에 들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이 바람이 나서 일주일 만에 집에 들른 날이 바로 택시를 타기 직전이었더랬어요. 그래 악다구니를 해 댔더니만 미안하다고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너 같은 여자하고 사는 것이 지겹다며 손찌검을 하더라는 거였어요! 그래 홧김에 집을 나와 무작정 차를 탄 것이 여기까지 왔다는 거에요? 그러더니 그 다음 말이 가관 아니겠어요? 자기도 오늘부터 맞바람을 피울 건데 자기하고 한 번 자 줄 수 없느냐는 거예요! 오-마이 갓! 해피! 해삐! 인생 이즈 오 마이 해삐 아니겠어요! 어-허~ 어허허!”
움츠렸던 내 하초에 다시 바람이 일고 있었다. 부러움과 허접함이 맞물리며 바람이 오래도록 속옷에 배어 있을 듯싶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달래서 보냈습니까?”
“예끼. 이 양반아! 그러면 천당에 못가지! 내 평생에 용돈에 일당까지 받으며 남의 예펜네 속옷을 벗겨 본 건 처음이었더랬수! 인생은 즐겁게 살면 다 복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어-허~ 어허허! 오늘도 즐겁게 일을 하다보니 형씨 같은 좋은 사람도 만나고 막걸리도 얻어 먹는거 아니겠수?”
그의 말대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공짜도 생기고 여자도 저절로 와서 가슴에 안기는 것일까? 그러타면 공짜로 술을 사고 공짜로 몸을 맡기는 이들의 마음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그러한 공황상태의 마음을 지켜보던 삶의 시간들은 우리에게 어떤 임대료를 지불하라고 요구를 할까?
몽롱한 가운데 나는 사량도 바닷가의 굴 양식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한 여인을 뒤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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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한 만남을 믿지 않는다. 다만 우연한 만남을 이어주는 몇몇 사건이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인정하는 바이다. 예를 들면 시내 유명한 건물에 불이 났을 때 그 곳으로 달려가 보면 불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한 두 명의 낯익은 얼굴들을 접하게 된다. 그것도 불길이 잡혀 주변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을 경우이다. 또한, 제주도 중문단지나 중국의 자금성 또는 일본의 교토 유적지를 돌아다니다보면 우연찮게 아는 사람들과 조우하게 된다. 그 만큼 지인들을 만날 확률이 높은 공간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연한 만남이 섬에서 있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남해의 섬마을에서 말이다.
3년 전에 부산에서 출판부 소속 전국 국․공립대학 실무자 회의가 있었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섬은 하나의 환상의 공간이며 바다와 인접한 도시는 낭만으로 연결되는 삶의 터전으로 인식된다. 특히 부산은 바다와 인접한 국내 최대의 도시이며 일본문화의 냄새가 풍기는 곳이기에 낭만과 고급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내가 부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국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종류의 생선들을 자갈치 시장에서 볼 수 있을뿐더러 그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국제시장의 고급스런 거리문화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또한, 광안리 해수욕장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횟집과 광안대교의 야경, 해운대의 백사장과 바다가 주는 낭만성, 낙동강 갈대숲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의 이국적 정취 등 많은 것들이 내 성정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날도 부산의 야경이 뿜어내는 환상적 분위기에 취해 나는 일행에서 이탈하여 달맞이동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청사포 비탈길에 서 있었다. 광안리와 해운대를 거쳐 비로소 이 곳에 와야 맑은 물을 볼 수 있다는 곳, 달맞이고개와 송정리 해수욕장의 명성에 가려 고개 아래에서 다소곳이 숨쉬며 살고 있는 이들이 바로 청사포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곳에 여러 개의 모텔이 들어서고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땅을 팔아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이 곳도 어설픈 관광문화권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시공의 변화에 따르는 환경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나는 부산에 올 때마다 이 곳에 들르곤 했다. 왜냐하면 청사포 어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장관이란 말로 형언하기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을로 접어드는 어귀에 서면 시퍼런 바다가 마치 금방이라도 머리위로 덮쳐올 듯한 위용과 생동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다의 지평선과 수평의 위치에서 또는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정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있었다. 바다가 육지 위에 떠 있어 시퍼런 바다가 언제라도 몸 위로 덮칠 것 같은 긴장감과 위용을 보여주는 장소였다. 바다가 바로 눈 위에서 꿈틀댄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청사포의 밤바다가 낮에 보았던 정경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마을의 초입에서 택시를 멈추게 했다. 양 방향으로 길게 드러누운 방파제와 두 개의 등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다는 낮에 보았던 위용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어둠으로 바위들은 이미 굳어져있었으며 길게 누운 모래를 건드리고 있는 파도소리만 들릴 뿐, 바다는 등대의 지시에 순응하여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경사진 마을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두어 번 넘어졌다. 알코올로 달아오른 육체가 해풍을 시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취해 있음이 분명했다. 마을 앞에는 한낮의 따가운 햇살에 지친 어선들이 쇠말뚝에 묶여 불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자정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아 있는 시각이라 몇몇 횟집에는 소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방죽 아래로 낚시를 즐기는 사람 몇이 석고상이 되어 찌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파제 위로 걸어 나가자 이내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흔들며 지나갔다. 더위를 식히려는 낚시꾼들만 보이지 밀회를 즐기거나 술을 마시고 있는 무리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쌓인 먼 바다를 바라보는 것에 시들해진 나는 방죽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발길을 돌리다가 나는 방죽 밑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대부분의 낚시꾼들은 젊은이 아니면 육순을 넘긴 사람이 대부분인데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찌에 갯지렁이를 꿰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화 상대를 찾던 나는 어느덧 방죽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시멘트 계단은 보기보다 가파랐다. 육십도 경사는 족히 되어 보였다. 칠팔 미터 길이의 시멘트계단을 나무늘보처럼 내려간 나는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낚시를 무척 좋아 하시나봐요?”
“무척은 아니지만 좋아합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부산사투리의 억양이 정겹게 들렸다. 릴낚시를 다루고, 차가운 바닷바람에 대비하여 점퍼까지 갖춰 입은 것이 초보자는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이들이 열심히 주워 담기를 반복하는 어망이 없었다. 잡은 물고기를 이리저리 살피고는 다시 바다에 놓아 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들은 두 서너 개씩 낚싯대를 드리우고 어망을 채우기 위해 동공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는 하나의 낚시로 충분히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니, 즐긴다기보다 그의 반복되고 있는 몸짓에서 외로움이 간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 한 발짝 비켜섰다. 그러자 불빛에 그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광대뼈가 굵은 선을 이루고, 얼굴이 올망졸망한 얼굴형이 성격 좋은 조선의 여인을 닮고 있었다. 두 팔로 안으면 가슴에 포옥 안길 것 같은 아담한 몸매와 이국적인 부산사투리에 나는 오늘의 인연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있었다.
부산의 명소와 바다의 아름다움, 그리고 부산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이미지에 대해 삼십여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인근 횟집에 들러 소주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큰 아이는 프로골퍼로 레저스포츠학과에 다니고 있으며 한 아이는 미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한다고 했다. 두 아이의 성격이 너무 달라 성격을 반반 나누어 가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으며, 신랑은 섬에서 양식업을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전공실습으로 자주 집을 비우고 서울 잠실지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내려온 타향이라 무척 심심하다고 했다. 그래서 낚시도 하고 집 근처에 있는 맥주집에서 아는 언니사장과 호프를 마시기도 하며 혼자 즐기는 방법을 익히는 중이라 했다.
나는 이 주일 후에 KTX 열차를 타고 부산을 찾았다. 천안에서 꼭 두 시간 삼십 분 거리였다.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만난 우리는 오 층 건물로 된 횟집에 자리를 하고 마주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몸부림을 치고 나서야 해운대에 위치한 모텔로 향할 수 있었다.
성에 대한 부끄러움은 군에 입대하기 전날이 극점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이 총각딱지를 떼어 준다며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의 한 여관에 술집 아가씨를 들여놓고 동숙하게 한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쑥스러움으로 아니면 인간적 연민으로 그 여자를 하루라도 편히 쉬게 하고 싶다는 온정에서 나는 그녀의 몸을 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튿날 옆방에서 같이 잔 친구에게 공짜로 돈을 벌었다며 지난밤의 비밀을 발설했을 때 그녀에 대한 이름 모를 분노와 배신, 그리고 수치감에 몸을 떨었던 기억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세월이 꽤나 흘렀다. 마음의 때가 시간 속에 쌓이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 성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장벽은 허물어진 것일까? 샤워를 하고 서로의 몸을 더듬고 허공에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가 아찔한 계곡으로 하강하는 육체의 경련을 감지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중년의 여인답게, 중년의 사내답게 우리는 격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몸을 탐한 뒤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행동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것이 좋은 감정으로부터 유로된 자연스런 몸짓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뜻밖의 만남이었다. 그녀와 맺어진 청사포에서의 인연이 남해의 섬 사량도로 이어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여름방학 때 총학생회 임원들을 인솔하여 이박 삼일 동안 사량도로 연수를 가게 되었다. 사량도는 상도와 하도, 수우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사 박문수가 고성군 하일면에 있는 문수암에서 이 섬을 바라보니 두 개의 섬이 짝짓기 직전의 뱀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량도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도상에서 본 사량도 어디에도 뱀의 형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가우치선착장에서 5시 10분발 막배를 타고 섬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숙박지로 예약해 놓은 통나무집 주인이 봉고차를 끌고 마중 나와 있었다. 남해 바다답지 않게 바닷물은 더러웠고 폐물들이 파도에 휩쓸려 마을 주변을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었다. 사량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는 옥녀봉의 자태도 보이지 않았다. 거무튀튀한 피부를 가진 섬사람들만이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내방객들을 요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사량초등학교 근방이었다. 옥루봉, 향봉, 가마봉 그리고 불모산을 등산하고 숙소로 돌아오던 차에 들른 주막집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은 만남을 가졌다. 그녀를 본 순간 옥루봉 바위 끝에 선 짜릿함이 온 몸으로 번지고 있음을 느꼈다. 부산에서 그녀를 본 이후 칠 년만의 해후였다. 처음에는 서로 멍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는 주인을 의식하여 애써 눈길을 외면했다.
나는 주인에게 급히 술값을 계산하고 주막집을 나와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도 망설임 없이 몇 가지의 생필품을 산 후 나의 뒤를 따라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적한 초등학교 잔디 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붉은 빛을 한 바닷게들이 수로의 이곳저곳으로 바쁘게 달렸다가는 멈추었다 이내 내달리곤 하였다. 그러나 그 곳도 마을사람들의 이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었고 학생들이 언제 축구공을 들고 나타날지 모르는 곳이었기에 결국 우리는 그 곳을 벗어나 대항 쪽으로 향했다. 해는 아직도 한 시간쯤 더 쏟아 낼 에너지의 위력을 보이며 머리 위에서 잘잘거리며 끓고 있었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면서도 그늘이 진 바위틈에 앉아서야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악수도 하고 얼굴도 뜯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햇볕에 얼굴이 그을리고 화장을 하지 않았을 뿐 예전의 애교와 미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불과 백여 미터 사이의 거리를 두고 지난밤에 각자 잠을 잤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는 멸치공장에도 학생들과 함께 둘러보기까지 했었다. 우리가 숙박을 했던 여주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의 시아버지는 이 곳의 대단한 유지이며 그의 아들 또한 서너 척의 큰 멸치어선을 보유하고 있는 이 섬의 부호였다.
나는 그녀의 숨소리에서 칠 년의 공백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처럼 우리가 부산에서 만났다면 그녀와 나는 부둥켜안고 모텔에 가서 그녀의 이마에 수 없이 뽀뽀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소 멋쩍게 거리를 두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두 아들을 유학 보낸 그녀는 남편을 따라 이 섬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간혹 통영에 있는 아파트에 들러 집을 정리하는 일을 빼곤 이 섬에서 그저 바다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노라 했다. 그는 이제 심심하거나 외롭지는 않다고 했다. 그의 등 뒤로 옥루봉이 솟아 있었다. 그녀는 어느덧 옥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아비가 되어 그를 탐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탐하려한다면 그는 먼저 저 옥루봉에 먼저 올라가 있을테니 울음을 내며 소처럼 기어오르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나를 짐승으로 생각하고 몸을 허락 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옥루봉의 전설 속 그 아비처럼 소처럼 기어오르는 것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소 울음을 내며 절벽을 기어오르면 그는 옥녀처럼 바다에 몸을 날려 떨어져 죽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7년 동안의 공백을 메우며 오랫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들 이야기이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와 같은 그저 평범하고 다소 진부한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들이었다.
대항으로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부산에서 만나 뜨겁게 포옹하며 느꼈던 욕정의 불덩이들이 자연 속으로 용해되는 짜릿한 아름다움이었다. 그 곳에 아름다운 섬이 있고 미소 짓고 있는 옥녀가 살아 있었다. 이미 그 섬은 외로운 섬이 아니었다. 뭍에서의 축축한 인연과 사랑으로 바다에 생성된 인공의 섬이었다. 그 섬 주변에는 그의 가족들도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섬을 오래도록 간직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섬으로 그 섬을 나두고 싶었다. 그러면 옥녀와 그의 아비가 환생하여 그 섬을 다시 건강하게 일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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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기사는 술에 취해 이미 제 길을 찾아 가고 없었다. 길이 있는 곳이면 그는 달려 갈 사람이었다. “어-허, 어-허허!”를 외치며 반복된 길을 걷다가 아승으로 향할 위인이었다. 그는 크고 작은 파고를 일으키는 일종의 물결이었다. 외로운 섬들에게 서슴지 않고 다가가 이리저리 흔들어 보다가 “어-허, 어-허허!”를 외치다 다른 섬을 향하여 다가가는 물살일 것이었다.
어둑해지는 거리 어디에도 섬은 보이지 않았다. 살며시 왔다가 돌아가는 물결도 없었으며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섬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어딘 가로 향해 있을 길들만 무성했다. 나는 내가 걸었던 그 길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 길은 기억의 섬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길이었다.
아파트 앞에 있던 상인들도 귀가하고 없었다. 지금쯤 순대집 부부는 오르가즘을 느낄 것이며 과일가게 부부도 각 방에서 자위를 하다 제풀에 꺾여 너부러질 시간이었다. 시장 어귀에는 순대에 순대를 채운 젊은이들 몇몇이 엇박자 걸음으로 흐트러진 언어들을 공중으로 날리고 있었다.
아파트 정문에서 십 구층 우리 집에 이르는 길을 가는 동안 나는 하나의 생명체도 만나지 못했다. 이천 세대가 사는 삶의 공간에서 산목숨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었다. 잠을 청하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프리미어리그 축구 또는 에로 영화에 빠져든 듯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으로 브라운관의 시퍼런 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파트의 불은 꺼져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현관의 자동문 도어가 잠기는 소리가 드르륵 하고 들렸다. 짧지만 큰 소리였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고 있었다. 모두가 나의 잠입을 편하게 허락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물결이 되어 있었고 가족들은 섬이 되어 있었다. 그 섬은 남해의 사량도에서 보았던 섬과 똑 같은 형상으로 놓여 있었다. 큰 섬 주위에 아주 작은 섬들 서넛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면서 그 섬들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뒤척이는 아내의 몸짓에 놀라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침대로 기어들었다. 대항의 저녁노을이 청사포의 바람을 담아 이불 밑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바람을 타고 그 노을로 빠져 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