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드러움은 닫힌 문도 연다는데
변 재 열*
봄 판
흙살 넘어가는
농부의 밭갈이를 본다.
흙더미가 퇴비를 업어치기하며
한판 씨름을 한다.
매년 공들여 넣은 퇴비 덕분일까?
부드러워진 흙발
손에 쥐었다 펴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원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속성
씨앗을 넣으면
숲 속의 나무를 닮았는가?
제 갈 길에 뿌리를 내리고
푸른 하늘 저리로 눈도장을 찍는
새순의 신고식을 예비한다.
부드러움을 먹고 자란
새순 같은 내 아이들
뛰고 달리는 씩씩한 기상만 봐도
미래의 밝음을 엿볼 수 있다.
부드러운 흙살에서
청정한 작물이 자라나듯
부드러운 심성을 키우면
아이의 희망을 예고할 수 있지 않은가?
부드러움은 닫힌 문도 연다는데.
꿈의 씨앗
따뜻한 봄날
호박씨를 심었다.
연두색 어린잎이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후
알몸에 씨앗을 품었다.
난세의 역사에도
생명은 자라
꿈의 결실을 생각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일을
먹으면 싸야하듯
배운 대로 가르치는
나약한 인생
세월 속에서 만들어야했다.
한 개의 호박씨를 심어
여러 개의 호박씨를 거두듯
나의 모든 배움이
나의 큰 가르침이었는가를 생각한다.
꿈의 씨앗은
가슴에서 싹이 트고
마음에서 영근다는 것을.
초례청에 기러기 앉다.
눈발을 제치고
삭풍을 삼키고
어미의 정성을 다한 후
고공을 맴돌다가
초례청에 박제로 앉다.
엄동의 시련을 미워하지 않고
여정의 아픔을 슬퍼하지 않고
이 좋은 날을 위해
약속의 발길을 다짐했다.
어려운 지난날이 있었기에
헤어질 줄 모르고
한평생 동고동락 기약하리니
축복하여 주소서
보살펴주소서
초례청에 기러기 모셨으니
선남선녀 기러기처럼 살리라
설레는 오늘처럼 하리라
기러기에 맹세한 사랑의 언약
헛되지 않게 살리라.
* 충남 공주 출생, 호-海峰/巢鶴, ≪현대문학≫(1981)에 시로 등단, 시집으로 겨울바다, 보이지 않는 江, 멀리서 가까이서, 바람꽃 향기, 빈 잔의 메아리, 만리포 바람소리, 진홍빛 꽃잎, 「가슴 비우기 혹은 채우기」, 충남도문화상, 대전문학상, 한성기문학상 황조근정훈장 수상, 현재 대전시인협회장, 대전지방검찰청형사조정위원, 국제PEN클럽한국본부남북교류위원
노루귀
김 명 동*
겨우내
숨어 잠자다
고개 내민 그대 모습
울렁이는 가슴으로도
다 느낄 수 없는,
그것은
앙증맞은
보랏빛 그대 모습이
내 마음에 박혀와
뽑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금소리
이리도
청아한
민족의 소리
영롱한 아침이슬처럼
맑고 고운 소리
저리도
단아한 겨레의 숨결
입술 떨리는 진동
하늘을 울리는 저 대금 소리가
천년 너머 그 소리
신들린 손끝 마디마디에서
퉁겨지는 열 두 줄
혼이 담긴 음률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
그대의 귓전을 두드리며 요동을 친다
무 아 --
그 속을 헤엄치는 소리는
미지의 공간을 뚫고
그대 가슴을 후벼 파며
미래의 화음 속으로 끌어당긴다.
* 경북 상주 출생, 시집 『어느 바보의 작은 가슴(1990)』, 『고향은 저만치(1992)』, 『꿈속에 별 달(1993)』,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2002)』, 『그리움의 마당에는 당신이 주인입니다(2006)』, 동구문화상, 예총회장상, 인터넷문학상 등 수상, 현 글빛문학회장, 대전동구문학회장, kimydo812@hanmail.net
꽃샘추위
오 소 림*
사랑이었노라고
지독한 사랑이라고
가슴을 쪼개는 아픔
짝사랑이었노라고
아무려나 남모르게
꽃눈을 더듬는 손이
잎눈을 덮고
어루만지며 눈을 뜨네.
봄비
신명난 꽹과리 소리는 아니었어.
꿈속에서 듣고 있던
꽃들의 비명
떨어져야 비로소 눈물이라고
어느 가슴 아프게 해야 사랑이라고
세상 속에 이별은
꼭 믿어야 하는 슬픔이라고
누구나 젖을 수 있어 사랑이라고
소곤소곤 귓속말.
화병에 꽂힌 꽃
꺾이는 순간
슬프게도 꽃이 아니었어요.
위로하는 무희의 흔이었어요.
꽃병에 꽂히는 순간
나는 이미 꽃이 아니었어요
전생을 믿는 미소였어요.
* 경기도 용인 출생, ≪문예사조≫ 소설, <문학세계> 시 신인상 당선. 소설집 『걸인 여자』,『떠있는 섬』,
시집 『태양 눈 찌른 장미』, 『석류』, 『섬 하나 만들기』 등
각질(角質)
손 중 하*
나에게는 분명 출생의 비밀이 있다
어머니는 산에서 토실토실한 알밤을 앞치마 가득 담고
귀가 하는 태몽을 꾸고 나를 출산 했다 하셨다
첫 아이라고 태어난 것이 비시비실 사람구실도 못할 것 같은 아들
한쪽밖에 없는 어머니 젖꼭지 탓만은 아니었으리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치면 아버지는 천수답에 물을 가두기 위해
냉천골 다랭이논으로 달려 가셨고 가는 길에
개천으로 흐르는 물을 보며 날숨을 토해 내셨다
내게 어느 날부터 겨드랑이에 털이 생기고
몸 곳곳에 각질 같은 비늘이 돋기 시작했다
벗겨도 벗겨도 다시 돋아나는 비늘
산골의 메마른 거친 땅을 밀어 내며
내 몸에 자꾸 비늘이 돋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비늘, 연어를 따라 회천할 수 있을지
내일은 DNA 검사라도 해 봐야겠다.
* 충남 금산 출생, (전) 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낡은 것들에 대한 단상(斷想)
송 은 애*
태초 이어진 저 끈들을
차마 놓을 수는 없었기에
질기게도 붙들고 있는 형상이란
양수 덜 빠진 갓난아이 얼굴을 하고
햇살과 뒤엉켜
형체도 일그러져 있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모습들은
유통기한 지나버린 상의 한 벌과
닳아빠진 바지 깃에 걸려
몇 번을 자빠진 모습
구두코에 걸려
세상을 거꾸로 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되는가
잡힐 것 같아
애써 본 일도 몇 번이었나
차라리 이대로 이 자리에
주저앉아
사라져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리지도 못하고
버릴 수도 없는 이 꼴로
흐른 세월을
어찌 돌릴 수 있겠는가
말해보라
한땐 세월도 먹고 세상도 잡았었는데
세월마저
거꾸로 흐르는
요즘 세상에
동백꽃
내 몸 하나 떨어져
봄이 온다면
기꺼이
전신으로 낙화하리다.
홀로 선 가슴 이대로
봄비는 허기지게 내리는데
난 그대로 당신을 맞이할 수밖에
분명 그랬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했기에
달아오른 가슴 보일 수 없다고
속내를 보이는 건 추한일이라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환영들을
이쯤에서 내려 놓아야한다 했다.
분명 그랬다.
이제 한계에 부딪혀 버릴 수도
영원히 안을 수 없다 했다.
순간의 행복을 위해 안고 있다면
커다란 오해를 불러 올 일들을
나 어찌 모른다 하겠나
분명 그랬다.
그대로 버리면 버리는 대로
안으면 안긴 채로 영원히 묻고
나 이대로 홀로 간다 했다.
* 茶軒, 시집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이름없는 들꽃 이야기, 다래순 먹는 여자, 관저동 연가, 술 예찬 꽃 예찬하면서 茶 한 잔, 인연, sea5610@hanmail.net
눈물의 배후
최 광 임*
한 계절에 닿고자하는 새는 몸피를 줄인다
허공의 심장을 관통하여 가기 위함이다
그때 베란다의 늦은 칸나꽃송이
쇠북처럼 매달려 있기도 하는데
그대여 울음의 눈동자를 토끼눈으로 여기지는 마시라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고목일수록
어린잎들 틔워내는 혼신의 힘은 매운 것이니
지루한 가뭄 끝 입술의 심혈관이 터진 꽃무릇 같은 것이니
턱을 치켜세운 식욕 왕성한 새끼들에게
공갈빵이나 뜯어 먹게 하는 무색한 시절을 두고
부엌으로 달려가 양푼에 밥을 비빈다
어떻게든 허방으로 떠밀리지 않기 위하여
뙤약볕 같은 고추장 비빔밥을 쑤셔 넣어 보신 적 있는가
막무가내로 뒤집어지는 매운 밥의 본능이
한 세월로 건너가는 새가 되는 것일 뿐,
천둥벌거숭이 나는 이 새벽 가슴 골짜기에서 솟구치는
눈물의 거룩한 밥을 짓고 국을 끓일 것이니
그대여 울음의 배후에 대하여 숙고하지 마시라
삶이 풍장 아닌 다음에야 칸나꽃 피고지고 또 필 것이므로
먼동 트기 전 세상 한 복판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내 발굽에 편자나 박아주시라
애인아 놀자
장맛비 주춤한 사이로 저녁이 온다
낮동안 빗속에 갇혀있던 개구쟁이 두엇
고샅으로 나와 고립된 정적을 흔든다
애 인 아 노 올 자
호방한 소리로 공중을 흔들고 다니는 뻐꾸기처럼
턱을 아래로 당기고 배 힘을 꽈악 준 사내아이 소리
애인아는 대답이 없다, 보송보송 흰 빨래 같은
거리와 거미줄 위 물방울의 정적을 가르는 애인아
그 흔한 까치조차 깍깍거리지 않는
저물녘, 쿵 쿵 태초의 소리다
그러고 보니 장맛비 잠시 개인 薄明의 거리에서
애인이라 불러도 흠 되지 않을 사람
만나고 싶은 시간이다 겹겹이 빗나가는 눈빛과
죄 없이 목소리 낮추거나 높여야 하는 시간 말고
어스름을 휘어잡고 흔드는 스스럼없는 누구
자꾸만 빠진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예 인 아 노 올 자
* 전북 부안 출생.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현재, 《시와 경계》편집장. 창신대 겸임교수.
봄 각시
김 근 수*
겨울철새
이별노래하며 떠난지 오래,
살랑살랑 기지개 펴는 꽃바람
꽃망울의 가지 미소 짓는다.
한설을 인내한
동토를 애무하는 아지랑이
마침내 솟아나는
산고의 대지가 푸르다.
봄 각시
탱탱한 분홍저고리
부끄러움 잡아타고
산들에 수줍게 피어나는 푸른 생기
순결의 봄이 무르익어 간다.
유천동 불루스 10
하나 둘 밤의 꽃이 피고
어디서 만났던가
너무나 사랑에 익숙한 꽃잎
타오르는 하얀 장미
연지가 흐려지도록
언어가 없는 가락을 연주하며
유천동 허공에 비단 그물을 짠다.
꽃피는 꿈 사랑의 환각이
구름 속에 피어난다면
눈물로 이룩된 진주
먼 훗날 연기로 사라질까
슬픔과 사랑의 고뇌로
파랗게 멍든 가슴은
오늘도 싸늘한 새벽달을 밟는다.
*계간 <문학세상> 신인상, 시집 『유천동 블루스』(2008), 금강축제 금강문학상,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powerg@choi.com, www.gp1004.com
참새의 눈
송 영 현*
참새 잡기란 마치 꼭꼭 숨어버린 유년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도 결국은 허탕을 치기 일쑤고,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는 도리어 공습을 당하기도 한다 삽살개의 꼬리질은 무심하고 흙담벽은 잘 말라서 견고한데 저린 다리의 한계를 직감하는 참새는 눈길도 안주고…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깃털에 묻어나는 생의 나이테를 그라서 왜 떨어버리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도 참새는 날아간다 털지 못하고, 털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져서 일까, 또 다시 되돌아와선 변죽을 울리고 기어이 나이테 하나를 더 그려내고 만다 어디까지일까,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더 넓은 세상을 끌어안기는 쉽지만 견디기는 더더욱 어려운 법인데, 바깥의 유혹은 끝이 없고……, 그래도 참새가 나는 까닭은 그 조그마한 눈망울에 담긴 세상이 너무나 또렷해서 아직은 잡힐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 속으로
막 그친 소나기에 씻긴 세상이 다가오면
사슴처럼 오다 만 그 여름의 포도밭에도
내 설레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이른 아침 안개처럼 펼쳐 질 것이다
어느 새 훌쩍 지나가 버린 시절이 그리워
투명한 시계를 거꾸로 달아놓고
그 여름날의 기억들을 세워놓다 보면
갈 길이 눈앞에 머무는데,
까닭 없이 왔다가는 소나기라면
넘기려는 책장에 숨소리 불어넣을까,
구겨진 맥주 캔처럼 여름이 간다
시원하게 재생될 꿈을 꾸며,
* 대전 출생, 2001년 <정신과 표현>, 2004년 <대전일보>로 등단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김 혜 경*
속으로
잘 밀어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울컥 기어올라 가쁘게 숨 쉬는
그 인연이 아리다
눈 안에 흥건히 고여
이제 대놓고
기어 나오기를 보챈다
그래,
봄볕에 얼굴 가리던
꽃대궁도
시간 한자락 보태고 나면
이별인데
시간의 명약을 삼키며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추억이 레테의 강을 건너는 날까지
차라리, 오래 보듬으며 느끼리라
* 경북 대구 출생,≪상상의 힘≫(2009) 신인상,시인, lovekim14@hanmail.net
초대시
빈 집
김 명 리*
어스름 녘이면 한담이라도 나누는지 늙은네 서넛 거기 웅크리고들 앉았다 두런거리며 담배들을 맛있게 돌려 태우는 모습을 본 듯도 하였다
한결같이 물빛만 오롯이 짙은 낡은 입성들을 하고 있었는데 물방울이 뼈에 맺혔다 하느니 솔찮게 풀어졌다 하느니
한 걸음 다가가면 한 마장 흩어지던 그 소리, 반짝이는 번석류 열매 같은 그 실루엣들
내키지 않더라도 공손하게 목례라도 드릴 걸 그랬다 저 저녁의 인사들 어느새 안 보이니 내 조바심조차 때로는 아득하고 때로는 섬뜩해진다
오오 어서 나를 데려 가다오/아직은 지상의 시간을 더 견디게 해 다오
산그늘에 핏빛 서리는 시월 어스름, 시간의 망막에도 물이 괴는지 흩날리는 나뭇잎 냄새마다 빈 집 한 채 기우뚱 들어차고 있다
제비꽃 꽃잎 속
퇴락한 절집의 돌계단에 오래 웅크리고
돌의 틈서리를 비집고 올라 온
보랏빛 제비꽃 꽃잎 속을 헤아려본다
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어리를
쉽사리 부서뜨리지는 못 했으니
제비꽃 꽃잎 속처럼 나 벌거벗은 채
천둥치는 빗속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내 몸을 휩싸는 폭죽 같은 봄의 무게여
내가 부둥켜안고 뒹구는 이것들이
혹여라도 구름 그림자라고는 말하지 말아라
네가 울 때, 너는 네 안의 수분을 다하여 울었으니
숨 타는 꽃잎 속 흐드러진 암향이여
우리 이대로 반공중半空中에 더 납작 엎드리자
휘몰아치는 봄의 무게에
대적광전 기우뚱한 추녀 또한 뱃고동 소리로 운다
*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시집 『물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등
눈곱
김 수 우*
한 남자가 생선횟집 수족관을 들여다보고 있다
중얼거린다
위협적인 언사와 달래는 어투
물고기가 자신을 수족관처럼 바라본다고 화를 내는 그는
수족관을 몰래 그리워하는 중이리라
버려졌지만 스스로 버린 거라 믿어버린,
한세월 맨땅을 지고온 남루
그는 잉여가 된 건
내가 그를 기억하지 않은 까닭이다
비딱히 걸린 가방마저 반쯤 열려 헐렁한 속을 드러내었다
다 쏟아질듯 위태롭지만
다행히 주인의 빈속처럼
비딱한 가방 안은 은밀하고 까마득하다
보이지 않는 도시가 그에게서 매일 붕괴되고 있으니
물고기에게 시비 거는 그의 눈곱은
삐걱이는 난간의 무게
하얀 거품으로 밀려왔다
빠른 속도로 모래톱을 빠져나가는, 늙수그레한 시간을 본다
결코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자기장 밖을 떠도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잉여의 눈곱, 눈곱들
어린 돌마에게
널 잊어도 될까 네 까만 눈동자를 잊고 살아도 될까
라다크 고원의 작은 공사장, 아비 등에 업혀와
깨진 문턱에서 아장거리는 네 맨발을 하얗게 잊어버려도 될까
카메라 렌즈 망연히 바라보던
너의 검은 우주
먼지 덮어쓴, 그 깊은 직시를 아침마다 걷고 오늘도 걸었다
병든 어미가 기다리는 하루
제 발등 내리밟는 세상, 한 마리 까마귀로 데리고 놀다
외려 제 뒤꿈치로 꾹, 꾹, 밟고 가는 두 살배기
어디선가 꽃 피고
어디선가 새가 울 거라는 너무 당연한 예언처럼
너는 자라고
내가 부르는 내 이름 같은 눈망울
한참 잊었다가도
도저히 잃을 수 없는 보랏빛 발톱에 소스라친다
그 전율이 내 최초의 울음과 닮았던가
알미늄 셔터가 닫힌 지하도, 노숙자 발등을 피하다가
너를 그리워해도 될까 이렇게, 오, 돌마
* 부산 출생. 1995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시집 『길의길』,『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붉은 사하라』. 사진에세이집『하늘이 보이는 쪽창』,『지붕 밑 푸른 바다』,『아름다운 자연 가족』. 산문집『씨앗을 지키는 새』『백년어』. 2005년 부산작가상 수상. 현재 부산 원도심서 인문학 북카페 <백년어서원> 운영.
늙은 여자 면도사
고 성 만*
뚱뚱한
자루를 연상시키지만
절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그녀는
이발소 의자에 손님을 뉘어놓은 후
칼을 들고 다가온다 나는 가끔
살살 모공 어루만지며 터럭을 깎는
그녀의 섬세한 손길에서
어머니를 느낀다
밥솥 안 뜨겁게 달궈진 수건으로
얼굴 덮인 상태로 둥둥
바람에 나뭇잎 흘러가듯 그렇게
강변 마을에 도착했는데
커다란 가죽부대 같은 몸 어디쯤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것인가
조리 잘 된 음식 냄새 또는
숙성된 누룩 비슷한 체취를 맡으며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 아무리
잠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해도
그녀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나의 감각은 파르르
쑤욱 들어가는 저수지의 찌처럼
절정을 인내하지 못하고
허우적, 허공에
허우적거린다
마른장마
푸른 잉크 번지는 하늘
사발로 소주를 따라 마신 후 통마늘 안주 까 잡수곤 주막에 나서 비는 오지 않고 잔뜩 흐린 저녁 어스름 바락바락 악 쓰는 소리 들리면 니 애비다 나가봐라 할머니의 재촉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는데 낯모르는 사내가 아버지의 머리를 바닥에 짓찧으면서 퍼붓던 욕, 재취자식 이 후랴들놈아!
모로 처박혀서 다가오지 말라고 손사래 치는 아버지를 볼 때 차라리 내겐 오랑캐의 피가 흘렀다
나날이 바싹 여위어 결코 달콤하지 않은 삶의 쓸개를 핥고 점점 뜨거워지는 불 바퀴 속 번제의 시간을 준비하는 것인가 나도 누군가와 드잡이를 하다가 목줄 잡힌 채 지긋 깨문 이빨 사이 바람이 새듯 나직하게 씹어뱉고 싶은 말, 늬기미씨벌!
그런 날 고구려 여자 화희와 한나라 여자 치희가 머리카락 휘어잡은 싸움 한판처럼 더욱 진하게 피워 올리는 치자 향기
하늘의 깊이를 재어보았다
* 전북 부안 출생.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슬픔을 사육하다』
진부에서 한 철
우 대 식*
진부에 눈이 오나요
7번 국도로 가는 마음들은,
해변의 눈발들은,
진부에서 시작하나요
진부에서 사람들은
등불을 내려놓나요
칠흑,
빛나는 어둠이 진부의 밤하늘인가요
진부에서 부는 덜컹거리는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나요
젖다가 얼다가
한 곳을 응시할 수밖에 없는 눈동자를
진부는 아파하시나요
영(嶺)을 넘어
온몸에 힘을 뺀 채
해변을 날아오르는 사람의 꿈을
진부는 바라보시나요
진부에 눈이 쌓이나요
큰 소리로 무너지나요
마방馬房
차마고도로 가겠다
호수 곁으로 난 길, 멀고 먼 하늘에 걸린
쓸쓸하고 날이 선 낮달 하나
한번은
차마고도를 걷는 마방으로 살겠다
수염에 고드름을 단 채
허공의 길을 걷겠다
야크 목에 달린 종소리처럼
하나의 파문이 되어
눈속을 헤치겠다
거대하고 깜깜한 산을 마주하고
지상에 불을 지펴
두 개 빛나는 눈동자로 경(經)을 읊겠다
화톳불에 붉은 손을 내밀고
잠을 청하겠다
끝도 없는 잠 속에서
뚝,
한 방울 눈물을 남긴 채
지상으로부터
사라지겠다
*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단검』.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
침묵의 벽
강 영 은*
세상의 가장 낡은 귀퉁이라도 되는 듯
지팡이를 내려놓은 노인과
웅크린 몸을 잠 속에 묻은 개가
쇠사슬로 빗장 걸린 門 에 등을 기대고 있다
그들은 지금 벌어지지 않는 입술과
깊이 모를 눈동자로
서로의 벽을 고스란히 끌어안는 중이다
손은 없고 가슴만 있는,
눈은 없고 눈물만 있는 벽의 힘으로
면벽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관계여,
방금 지팡이를 내려놓은 노인의 입으로
더 이상 짖을 수 없는 개의 입으로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門의 입으로
말하건대,
나에게도
부수고 싶지 않은 벽이 있다
등이 허물어 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
바람의 금지구역
바람의 행보는 벼랑을 넘으면서 시작 된다 관계의 사이에 서식하는, 사랑 합니다, 사랑 합시다, 라는 종결형 어미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처럼
행간에 머리를 들이민 바람의 눈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장은 마른 풀 쓸리는 벌판, 수백만 마리의 새떼가 날아가는 장면은 그 다음에 목격 된다
고도 높은 울음이 통과할 때마다 피기를 반복하는 북북서의 허공을 바람은 꽃으로 이해한다 사타구니를 오므렸다 펴는 바람의 편집증에 대하여 여러 번 죽어 본 새들은 안다
허공은 날개가 넘어야할 겹겹 벼랑이라는 것을,
서녘 하늘에 붉은 꽃 반죽이 번진다 허공에서 베어 나온 꽃물이라고, 당신은 바람의 은유를 고집 한다 내가 잠시 벼랑 너머를 바라본 건 그때였을 것이다
금지된 허공을 넘은 새들의 무덤이 벼랑 끝에 걸려 있다 바람은 벼랑을 끝내 읽지 못 한다
* 제주 출생.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녹색 비단구렁이』외
킬힐 Kill Heel
고 경 숙*
구두굽은 대지의 통점을 자극한다
기진한 발바닥으로
쿡쿡 찌르고 다니던 그날은
봉두난발 핏발 선 대지를 갈아엎고
한 웅큼 씨앗이라도 뿌려야 할 지
세상을 타진하는 의식이었다
갇혀있는 것이 어디 두 발 뿐인가
사발통문에 이름 올린 하늘도 땅도 이미 한통속
입 꾹 다문 채 비를 뿌리지 않고
익사를 꿈꾸는 논바닥은 신기루를 보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자꾸 미끄러지는 세상 지탱하느라
온 발가락에 청춘을 건다
아프지 마라 진화중이다
뼈가 변형되고 발목이 접혀지는 것
우러르고 싶은 욕망보단 험한 세상
널부러진 똥무더기를 피하려는 것이다
굳이 더 진술하라면
언젠간 대지의 혈관을 찾아 피를 터뜨릴
12센티 흉기를 소지하고 다닐 요량이라는 것
어쩌면 그 전에 내가 먼저 나동그라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그땐 우리의 내통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두자
菊花池*
화선지에 살짝 낚싯대를 드리워
농담濃淡을 조절해보세요
저녁이 느리게 번져와요
바람이 대숲을 건드려 붓질을 하면
한 송이 국화로 피는 수상좌대
목뼈가 저리도록
물속에 코를 빠뜨리고 있는 저 남자
먹물방울로 맺힙니다
고개 돌려 술 한 잔 건넬
벗 하나 없는 저녁,
고인 저수지의 울음은 슬픈 여자를 닮았어요
국화꽃잎 하나씩 떼어내 물에 떨궈요
갈기갈기 부숴지는 물을 보세요
물고기로 化한 꽃잎의 기억들이 요동치네요
조사釣師들은 원래 곁눈질을 안 하지만
수작 부리는 건 결코 아니지만,
저 남자, 월척은 그른 것 같네요
어둠이 저수지에 덧칠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동침하는 꽃방엔
국화향 가득 물안개로 피어오르는걸요.
* 서울 출생. 2001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 시집 『모텔 캘리포니아』, 달의 뒤편』. 수주문학상 우수상,
두레문학상 수상. 현재 수주문학상 운영위원, 부천 예총 기획위원. 부천문화원 편집위원, 다시올문학 편집위원.
* 강화도 강화읍 국화리에 있는 저수지
장 외場外
박 일 만*
성능을 가늠 못할 시력들이 더듬는다
그들 모두는 바람든 가슴을 가졌다
허기로 다가온 손이 잔을 채우자
출렁대며 전등 빛이 알몸으로 잠수한다
사내들은 세상 고샅에서 닳아 온
지문을 찍어대며 태생을 잠시 잊는다
가슴 부딪치는 혼돈 끝 무렵
목을 꺾고 밤별을 무수히 담아
신산한 일상과 섞어 마신다
사내들 몸속을 파고드는 말간 전율
삶의 언저리에서 자주 굴절되던 의지를 세우려고
한낮을 달려온 몸 외려 비틀댄다
새벽을 수혈 받기엔 이른 밤부터 몇 번인가
금가는 아찔함을 맛봐야 하고, 왁자하게 세척도 하고
삶의 지론이 주섬주섬 피어나는 공간 속에서
비워지는 노동에 고단함만 지불 받는다
밤을 지새보지 않고서야 어찌 불빛이 스러져 가는
근본을 알 수 있겠는가
화려한 등장 끝에 마음 거두는 전등들
멱살 쥔 악다구니들도 헐렁해지는 자정 넘어 가면서
몇 방울의 불티까지 기울이는 술잔
속내를 비우자 주위에는 난장판만 남는다
포장 밖으로 튕겨져 나온 사내들 등 너머로
새벽이 비척비척 밝아오고 있다
모퉁이에서 피다, 지다
검정 칠을 하고도 희게 웃는 사내
목발 세워 둔 한 쪽 발을 길게 밖으로 걸쳤다
희망을 켜 놓은 듯 백열등 밝혀 둔 좁은 공간
피곤한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기는 저녁 무렵
골목은 늘 객관적이다
바닥까지 검정물든 손을 탁,탁 치며, 이제 그만 해야죠
그만둬야죠,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초로의 사내
십 수 년인 듯 굵어진 손마디가 고집스럽다
내 구두는 이제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어둡다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거죽으로 찌그러져,
능동적이지 못한 내 성품을 비웃듯 손 빠른 사내
해진 일상을 기우고 봉긋한 광택을 생산 한다
허리춤을 꾸욱 찌르고 견고한 실로 혈관을 심고
벌겋게 온몸을 지지고 닦아 환하게 빛을 복사해 낸다
속내를 보이진 않지만 손에 친친 광목을 감으며 말하겠지
자, 다시 한 번 가면을 쓰고 살아 보세요
그래도 세상은 적당히 가리면 살만 하잖아요
구석에 앉아 왁스에 취해 밖을 바라본다
이 거리에서 오래오래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과 나
그만 둬야지, 이제 정말 쉬어야지 하면서도
끝끝내 꽃피고 싶은 무화과나무 척박하게 웃는 거리 모퉁이
천천히 천천히 아주 객관적으로 어두워 간다
* 전북 장수 출생. 2005년 《현대시》로 등단.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 수료. 현재 경기도청 근무.
달이 건진 여자
김 명 은*
하늘에 둥근 달이 매달려 있다
여자가 달을 캐러 물속으로 들어간다 눈 밑에 그늘이 졌다
거기서 내려와, 거기에 왜 있어, 내려오라구!
그녀에겐 혀가 없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살과 피가 녹아 없어진
빈 조개껍데기, 납작 엎드려서 기어가는 물살
하늘이 내려와 어두운 밤에 등을 내건다 등불이 비친 다리 위로
남자가 간다 다리 밑에서 물살을 찢는 바다
남자가
물의 살을 벌리고 젖은 여자를 끌어낸다
여자를 받쳐 물바닥에, 여자와 물바닥 아래로 들어간 남자는
얼굴이 묻히고 가지런히 다리를 뻗고
어둠 속에서 이렇게
젖은 것들은 세상 끝까지 젖어 있을 것이다
나무를 심다
한 쪽 발바닥에 온 힘을 싣고
그가 삽질을 한다
황량한 곳이야 나무랑 꽃을 심어야 되겠어,
한 삽 한 삽 흙을 떠낼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
뚝, 뚝, 떨어진 땀방울이 젖혀진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넓고 닳은 삽날이 늑골에 부딪친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나의 마음이란 것이
한 사람에게 두 무릎을 내주고
그 사람을 밀고 들어가서
꿰뚫고 멈추지 못하고 더 흘러가야 하는 일
작고 여문 씨앗 하나 손아귀에 잡힐 것인지
그가 심은 나무에다 물을 쏟아붓는다
쉼 없고 쓸쓸하고 그러나 멈추지 못하는
남자다운 환한 노동
그가 온몸에 젖은 땀을 옷깃으로 닦는다
* 전남 해남 출생. 2008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빈터'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