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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강
이 대 영
▣ 길
마을 초입에서 장터로 이어지는 길은 여전했다. 버려진 동아줄 같이 마냥 늘어 지고 있는 그 길을 아무도 줍거나 굴곡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등하굣길에 초등학교 아이들의 조막손을 못이긴 미루나무 서너 그루가 논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긴 그림자를 붙들고 있었다. 마을 삼거리에서 장터로 연결되는 다리까지는 1.5Km 가량의 거리였는데 길의 중간쯤에는 소 거래에 사용되는 대형저울이 비치된 작은 창고가 있었다. 그 근방에는 사람과 가축의 오줌에 저려진 지린내가 진동을 하곤 했다. 장터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 건물은 마을 사람들이 막걸리로 탱탱하게 부어 오른 방광을 열어젖히기에 제격인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건물 주변에는 잡풀이 무성했으며 겨울을 제외하곤 하루살이들의 축제가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건물 네 귀퉁이는 크고 작은 낙서들로 채워져 있어 누구의 필적인지조차도 모를 크고 작은 언어의 묶음들이 뒤엉켜있었다. 건물 사방의 벽면은 언어로 엮어 놓은 넝쿨 숲이었다. 그 넝쿨의 몇 묶음은 내가 수놓은 것도 있었는데 분필로 쓴 것과 크레용으로 쓴 것이 있었다. 건물 외벽의 색깔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교실 한 켠에서 주워 온 백목으로 쓴 것이 나의 초범 행각이었다. 아니 썼다기보다는 가로로 길게 긋고 지나간 것이었다. 가뭄에 지친 실지렁이 형상의 선 위에는 어린 나의 심장이 콩당 콩당 파닥거리고 있었다. 그 곳에 낙서를 하다가 급우들의 눈에 띠는 날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있는 학급회의의 ‘착한 어린이 나쁜 어린이’ 추천시간에 나쁜 아이가 되어 적게는 일주일, 많게는 한 달 동안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곳에 낙서를 하기란 늘 누군가를 경계해야 하고 조심스런 일이었기에 개개인의 비밀 행위는 암묵적으로 이루어졌다. 나의 두 번째 낙서는 붉은색 크레용으로 이루어졌다. 백목으로 ‘지-익’ 그어놓은 예전의 필적은 나에게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필체 위에 간신히 그어진 무의미한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열 때마다 덜컹이며 책상 아래로 떨어지곤 하는 서랍을 뒤져 찾아 낸 붉은 색 크레용은 나의 심장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툇간 기둥의 대못에 찔려있던 직사각형의 신문지를 꺼내와 크레용을 둘둘 말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 때 나는 이미, 윤봉길 의사가 되어 있었다. 무서움도 잊은 채 더듬거려 찾아간 그 곳에는 장터에서 돌아오다 터뜨린 오줌줄기들이 어김없이 흩어져 있었다. 먼 곳에서 이미 꽉 찬 방광을 안고 누군가가 걸어오는 인기척도 들렸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빨강색 크레용에 힘을 가해 긁어 내렸다. 온몸에 전율이 일며 심장에 짜릿한 고통이 이어졌다. 큰 산처럼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자국소리에 놀라 나는 집을 향해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심혈을 기울여 대각선으로 훑어 내린 그 선명한 색깔은 빗줄기에 쓸려 퇴색할 때까지 오래 오래 나를 기쁘게 했다. 이튿날 등굣길에 바라 본 붉은 크레용의 흔적은 다른 어떤 낙서보다도 눈에 띠었다. 거기에는 어떤 스토리도 없었고 메시지도 없었지만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멘트벽에 마찰되던 그 촉감과 희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비단뱀이 장애물을 비켜가는 형상의 중간에 위치한 그 건물에서 오십 미터를 올라와야 내가 살던 마을 초입에 들어설 수 있었는데 그곳을 우리는 삼거리라 불렀다. 그곳에는 박서방네 내외와 아이들이 살고 있었고 마을사람들은 그곳을 ‘삼거리 주막집’이라 불렀다. 이곳에서부터 ‘새말’ 또는 ‘봉촌’이라 불리던 내가 태어나 성장한 마을이었다. 옛날에는 ‘도장골’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마을 너머에 있는 골짜기와 구분하여 이 명칭은 사라지고 있었다. 마을에 아카시아나무가 많았고, 살기가 어려운 마을이어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 하였으나, 마을에 새로 우물물이 나왔다고 한다. 물이 좋고 청수여서 마을 사람들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눌러 앉으며 사는 마을이라 새말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간혹 봉촌이라는 호칭으로도 불렀는데 부엉이가 많이 우는 마을이라 그렇게 명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겨울밤 우리 집의 뒷산에는 부엉이와 여우의 울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밭을 가운데에 두고 길이 갈라지는데 왼쪽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양씨 어르신 내외가 살고 있었다. 항상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백발을 한 양씨 내외는 그야말로 양반의 신분으로 살고 있었다. 집 앞에 넓은 포도나무를 둘러보는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바깥출입조차 하지 않는 어른들이었기에 그들의 생활은 어린 우리들에게 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밭을 끼고 돌아가다 보면 큰 바위가 나타나는데 마을에 큰 재앙이 있었을 때, 이 마을을 지나가던 고승이 갓을 벗어 바위 위에 놓고 떠난 후 그 재앙이 없어졌다는 갓바위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면 나는 으레 몸을 움츠리곤 했는데 그 큰 바위의 갈라진 틈에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나타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칠 미터 높이에 가로 오 미터의 폭으로 야산의 경사면에 박혀 있는 이 바위는 가운데가 갈라져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백발을 한 산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밤에 그 바위 근처에 가는 일을 꺼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삼거리를 지나 그 바위를 꼭 통과해야만 우리 집에 올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동행 하는 일이 아니면 밤에 그 곳을 지나가는 것을 피했다. 부득이하게 그 곳을 통과하게 될 사정이 생길라치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줄달음을 치곤했다. 바위를 지나자마자 야트막한 비탈길이 있어 두려움으로 콩당거리던 나의 심장은 벅찬 숨을 턱까지 밀어내곤 하는 곳 이었다.
바위 앞에는 삼백 년 가량 되었음직한 팽나무가 서 있었는데 내 또래의 아이들 두 명이 손을 잡고 나무 둥지를 껴안으면 손 목 하나가 남는 둘레였다. 느티나무 주변에는 약간의 공터가 있어서 농공시필기에는 사물놀이패와 마을사람들의 흥성거림으로 떠들썩하곤 했다. 뇌공(雷公)인 꽹과리, 우사(雨師)인 장구, 운사(雲師)인 북, 풍백(風伯)인 징, 즉 사신(四神)을 부르는 소리가 가난한 들판을 달려 나가 어린 우리들의 고막을 찢어놓곤 했다. 사물놀이 장단에 어우러진 마을사람들의 추임새가 마을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사마산에 부딪힌 지 삼 사초가 지나면 사신들의 여음이 마을로 돌아오곤 했다. 그것은 마치 사마산 밑에 살고 있는 째보가 처마 밑에서 흥얼거리곤 하던 여흥구와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팽나무와 바위 사이에는 삼십 년생 소나무 두 그루가 언덕 위에 버티고 서 있었는데 소나무의 그루터기는 손때로 닳고 닳아 윤기가 날 정도였다.
학교가 파한 후에 우리는 팽나무에 모여 주로 진놀이를 했다. 팽나무와 소나무를 각각 진지로 삼아 패를 가른 후 상대방의 진지를 점령하기 위한 놀이는 아주 진지했다. 아니, 놀이라기보다는 격렬한 전투였다. 한 편의 아이가 진에 손을 대고 있다가 진을 떠나면 다른 편에서 한 아이가 나와 그를 포로로 잡기위해 그를 쫒아 다녔다. 진을 나온 사람은 나중에 나온 사람에게 치이면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상황에 따라 차례차례 진에서 나와 쫒고 달아나는 장면이 긴박하게 전개되곤 했다. 먼저 진을 나온 사람이라도 자기편 진으로 가 손을 댄 후 나오면 그보다 먼저 진을 나온 상대편을 잡을 수 있어 아군과 상대방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알고 행동해야만 했다. 쫓기던 아이가 붙잡히면 포로가 되어 상대편 진지로 끌려가야 했으며, 포로를 자기 진영으로 데려가는 동안에는 아무리 쳐도 죽지 않는다는 규칙도 적용되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있는 자기편의 몸이나 손을 상대편 몰래 쳐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는데 포로를 구출하는 이는 동료들에게 영웅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편에서 보면 진지를 수호하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늘 진지 주변은 먼지와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상대편을 모두 포로로 삼거나 상대편 진을 손으로 쳐서 점령하면 이길 수 있었는데, 상대편 진을 손으로 치는 방법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나이가 가장 많은 형들이 진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조무래기인 우리들로서는 감히 진 가까이에 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주로 첫 번째 주자로 나아가 상대방의 약을 올리거나,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경합하다 초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주로 죽임을 당하는 장소는 묘지 주변이었는데, 팽나무와 소나무의 중간지점에 쌍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약간의 경사면인데다가 두 개의 봉분을 이용한 몇 가지의 책략들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어서 다른 어떤 장소보다도 사망자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봉분은 뭉개져서 윗부분은 황토가 벌겋게 드러나 있었지만 묘지 잔디가 넓게 자리하고 있어서 뒹굴고 넘어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나무만 남아있지 예전의 그 팽나무를 발견할 수는 없다. 팽나무 옆에는 안씨 아저씨가 살고 있었고 그의 셋째 딸 정원이가 우리 반 아이였다. 팽나무, 또는 바위에 제를 올릴 때면 정원이 아버지가 제수를 준비하곤 했는데, 그 이유는 정원이네 집이 마을의 공동 소유지였기 때문이다. ‘새말’이라 불리는 내가 살던 마을의 토지는 삼등분 할 수 있었다. 즉 마을의 맨 윗부분은 양씨네 토지가 대부분이었으며, 중앙의 마을 공동소유지에는 정원이네와 나의 작은 아버지 그리고 역시 같은 반 친구였던 택기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집뿐만 아니라 텃밭도 각각 일구고 있어서 어찌 보면 마을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 밑에 있는 대부분의 논은 기와집 양씨어르신네 소유였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이 양씨 어르신의 소작농이었으며 정원이 아버지는 양씨어르신의 마름 역할을 하고 있었다.
팽나무에서 5m쯤 올라오면 우측에 일제시대 때 공회당으로 사용했던 건물이 있는데 그 곳에는 마을 뿐 아니라 인근의 논산, 청양, 예산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노름꾼 광재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집과 뒷담을 트고 살고 있는 육군 헌병출신 오씨가 살고 있었다. 그 곳에서 십여 미터를 더 올라오면 작은 삼거리 갈래길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마을 우물터와 만날 수 있었으며, 삼거리의 좌측 모서리에 남서방이, 그리고 맞은편 우측에 우리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이라고도 할 수 없었지만, 우리 집의 후문을 지나면 옛날 고을 원님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강씨어르신이 살고 있었다. 성질이 강직하고 불같아 마을사람들은 그를 강꼴통이라고도 불렀다.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위세에 밀려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새말은 결국, 양씨와 강씨어르신의 양강 구도 속에 십 여 채의 가족들이 그들의 논을 소작하며 살고 있는 형국이었다.
꼴통어르신의 집에는 60여 평 남짓한 바깥마당이 있었는데 곡식을 타작하는 추수철을 제외하곤 그 곳을 우리는 마을 놀이터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마을 어른들을 따라 우리가 그를 꼴통이라고 부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성격이 종잡을 수 없다는데 있었다. 마당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하다가 그와 마주치면 우리들은 그의 안색을 먼저 살펴야 했다. 그의 얼굴이 술로 인해 벌겋게 달구어져 있으면 우리는 벗어 놓은 신발의 위치부터 확인해야 했다. 술이 취하지 않았을 때는 뒷짐을 지고 양반행세를 하며 몸가짐이며 어투를 매우 점잖게 했다. 그러나 공주 장날이나 장터에 장이 서는 날에 귀가 하는 그를 만나면 우리들은 멀찌감치 달아나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놀이를 하다보면 공이 사랑채 벽에 부딪히게 되고 하얗게 단장시킨 벽면에 공 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취한 날 길에서 붙잡힌 아이들은 공 자국을 낸 아이의 이름을 실토해야 했고, 이로 인해 우리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일곤 했다. 그러한 일들로 우리는 그를 꼴통영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꼴통영감네 뒷집에는 잔소리가 많기로 유명한 황씨아저씨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우리 육남매를 무척 귀여워하곤 했다. 황씨아저씨네 집 옆에는 우리 반 기집애인 옥희가 살고 있었다. 옥희네 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와 형님아우 하는 절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지만 나와 옥희는 다른 아이들처럼 쑥스러운 간격을 부단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옥희아버지는 먼 곳에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허리가 굽어 우리는 그를 땅만 바라보고 다닌다고 해서 일명 땅꾼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의 맨 꼭대기 집에는 폐병쟁이 고씨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칠십을 넘긴 고씨 할머니를 우리는 폐병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폐병을 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해수가 심해 마을 조무래기들은 그가 당연히 폐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집 근처에 가는 것을 꺼렸는데 그의 몰골도 몰골이었지만 그의 유일한 피붙이인 아들이 문둥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에서 삼십 미터 가량 산을 타고 올라가면 집으로 엮어 만든 움막이 있었는데 그 곳에 그의 아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참꽃이 피는 4월이나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그의 집 또는 움막 근처에 가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집 근처에 꼭 가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고씨 할머니의 집 뒤에는 수량이 오래된 모과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모과나무 근처에는 비단구렁이가 한 마리 살고 있었는데 날씨가 좋은 날이면 나무에 올라 나무에 몸을 칭칭 감고 일광욕을 즐기곤 했다. 비단구렁이는 묘하게도 수령이 오래된 모과나무의 색깔과 조화되어 사람의 눈에 잘 띠지를 않았다. 마을 아이들의 눈에도 잘 띠지 않는 비단구렁이는 그야말로 신비스러운 존재였기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지기도 했다. 비오는 날 구렁이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나무 사이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고씨할머니의 돌담을 돌아 모과나무를 지나면 갓바위골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갓바위가 바위전설과 어떠한 관계를 가졌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어느 고승이 바위 위에 갓을 올려놓고 간 동네가 그곳이기 때문에 갓바위골이라 불리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갓바위골에는 한학훈장이었던 이씨 아저씨가 살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나와 같은 반 친구인 상각이네 집이었다. 이씨아저씨와 상각이네 집 뒤쪽은 대나무 숲으로 울타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 대숲은 수많은 산새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했으며 우리들의 밤사냥터이기도 했다. 상각이네 집은 산길을 따라서 청양군과 예산군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산 너머에 가본 일이 없었으며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간간히 장구동, 나분동, 바닥골, 장금절, 중새터와 같은 지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곳은 삼거리 주막에서 우리 마을로 들어오지 않고 직진하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가장 가까운 동네는 용신동이었다. 지형이 용의 꼬리를 편 형국이라 용신동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지형이 술을 담글 때 사용하는 용수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했다. 용수의 형상에 들어가지 않은 지점에 무당이 굿당을 짓고 혼자 살고 있었으며 그 집을 지나면 우리 반 아이인 명종이와 순홍이가 살고 있었으나 그 마을에 간 적은 없었던 듯하다. 그 무당은 용신동 앞에 흐르는 용봉천을 건너 매일 새벽이면 미궐산의 산신당을 다닌다고 했다. 공수원 서쪽에는 미궐산이 있었는데 산 중턱에는 그 모양이 노인이 등을 구부리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노인석이라는 바위가 있었다. 무당은 그 곳에 산신당을 차려놓고 굿을 하거나 치성을 드린다고 했다. 무당이 아침에 치성을 드리려고 집을 나서면 미궐산에서 마중을 나온 호랑이가 무당을 노인석까지 안내한다는 풍문을 인근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호랑이가 무당 곁에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무당이 놀라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십 여 미터 떨어져서 그를 호신한다고 했다. 어린 우리들로서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무당이 우리의 곁을 지나갈라치면 외경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우리 집 대문 앞에는 마을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은 윗마을 사람들의 식수원이었으며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우리 집과 마주하고 있는 우물 뒤편에는 기남이네의 집이었는데 그는 나보다 세 살 아래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늘 우호적으로 대해야 했다. 기남이에게는 월남전에 가 있는 삼촌이 있었는데, 그가 부쳐준 각종 씨레이션은 동네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특히 ‘빠다’라고 칭해졌던 황금색의 버터는 가장 인기가 있었다. 큰 깡통에 담겨 있는 버터를 종지기에 얻어와 간장과 적절하게 섞어서 먹는 비빔밥은 그야말로 특식이었다. 특히 왜간장과의 조화는 찰떡궁합이어서 이 두 가지만으로도 성찬을 즐길 수 있었다. 통조림 캔보다 조금 큰 용기에 얻어 온 버터를 우리는 아껴서 한 달 동안 먹기도 했다.
윗마을이 우리 집 앞에 위치한 우물을 중심으로 정보교류가 이루어졌다면 아랫마을 또한 우물이 중요한 소통의 공간이었다. 아래 우물은 마을의 정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우물이 바로 ‘새말’이라는 마을의 명칭을 얻게 한 청수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하게 되지만 그 때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우물은 윗우물보다 수원이 깊어 두레박을 묶고 있는 끈의 길이만도 십여 미터가 넘었다. 우물 가까이에는 허씨 성을 가진 허대장이 살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장터에 대장간을 갖고 있어 그를 허대장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나보다 한 살 위인 용길이었고 한 명은 한 살 아래인 충길이었다. 장날이 서는 날이면 용길이와 충길이는 장터 대장간에 나가야 했는데 간혹 나는 그들이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허대장은 수시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양씨어르신네로 날라주는 일도 하고 있었다. 강씨어르신 집 안에는 그들만이 사용하는 우물이 따로 있었지만 양씨어르신의 집에는 우물이 없었다. 지관을 불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수원이 될 만한 곳을 여기 저기 파보았지만 양씨어르신 집 근처에는 우물을 만들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아랫마을 우물 가까이에 사는 허대장이 물 긷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된 것이었다. 허대장네 부엌입구에 놓여 있는 물지게는 늘 나에게 그 생김새로 인해 호기심을 같게 했다. 지게모양을 하고 있는 물지게는 일상 지게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등태에 긴 막대기를 가로대고 그 양 끝에 물통을 달 수 있도록 홈을 파고 질긴 끈을 이어 고리를 달았다. 그 고리는 당연히 허대장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물통은 대개 생철통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물을 가득 담으면 우리들이 감히 짊어질 엄두를 못내는 무게였지만 허대장은 균형을 잡으며 하루도 쉬지 않고 길어 날랐다. 겨울에는 길이 미끄러워 못할 짓이었지만 벌이가 변변치 않은 허대장으로서는 일손을 넘길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못하겠다는 말만 나오면 당장 양씨어르신네의 귀에 들어갈 것이며 이웃하고 있는 부길네가 이 일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대장네 집 옆에는 부길네가 살고 있었다. 허대장과 부길네 역시 대나무 숲을 집 뒷담으로 같이 쓰고 있었다. 부길네 집은 대나무 숲으로 울타리를 하고 있어 대낚시대나 연살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구하는 데 요긴한 집이었기에 나는 늘 그 집을 부러워했다. 우리 반 기집애인 부길이 아버지는 귀밑에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혹이 하나 있어서 우리는 그를 알아보기가 쉬웠다. 부길이 아버지는 꽹과리는 물론 태평소도 잘 불었는데 저녁때가 되면 그의 집에서 태평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오곤 했다. 그는 휘파람이나 나무껍질을 이용하여 피리소리도 잘 냈는데 우리에게 귀 밑에 있는 혹에서 나는 소리라 하여 우리는 그런 줄만 알고 있었다. 부길이 또한 아버지의 음악적 기질을 이어받았는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섬마을 선생님’과 같은 노래를 곧잘 부르곤 했다.
마을의 초입에 놓여 있는 삼거리에서 우리 집으로 오는 좌측 길이 아닌 우측으로 십 여 미터 가다보면 성숙이네 집이었다. 우리 반 기집애인 성숙이는 바로 두 살 아래인 성자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를 ‘코보’라 불렀다. 늘 그의 코 밑에는 누런 코가 매달려 있거나 콧물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 그를 코보라고 놀려댔으나 그의 버릇은 고쳐질 줄을 몰랐다. 나와 옥희, 정원이, 정일이, 부길이, 상각이는 결국 길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공간에서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나 자라고 있는 셈이었다.
마을에서 장터로 나가는 끝 지점에 작은 개울이 있었고 그 개울 위에는 굵은 통나무 다리가 있었다.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를 걸쳐놓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걸치고 빈 공간은 흙으로 채운 다리였다. 그 다리를 건너면 육일 장이 서는 장터를 중심으로 열다섯 가구가 살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 편에 부산이아저씨가 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와는 먼 친척 사이라 나는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새말에서 장터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곳 또한 막걸리를 주로 파는 주점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외상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 이곳이었으며 두 번째로 많은 곳은 마을 입구에 자리한 삼거리 주막집이었다. 신작로와 인접한데다가 도로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서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눈을 찡그려야 할 만큼 먼지가 많은 장소였지만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모였다. 두 평 남짓한 왼쪽 공간은 삼양라면이며, 계란, 라면땅, 건빵, 막기빵, 십리사탕 등을 팔았고 방이 딸린 오른쪽 공간은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막걸리 냄새가 진동하는 열 평 정도의 이 곳 중앙에는 벽돌을 쌓고 시멘트로 발라 만든 장탁모양의 고정식 술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술탁의 중앙은 숯불화로를 놓아 찌개를 끓일 수 있도록 둥근 홈이 패여 있었는데, 주로 장이서는 날이나 추운 겨울철에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나 두부와 콩나물을 넣은 술국이 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냄새는 지금도 구수한 감각으로 남아 있다.
부산네아저씨 주막에서 십 여 미터 위쪽으로 올라가면 연이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와 동갑내기인 그에게는 두 살 된 쌍둥이 딸이 있어서 쌍둥이 아빠라고도 불렸으며 아버지 친구들 사이에서는 ‘쌍따리’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어렸을 때 사고로 인해 한 쪽다리를 잃고 의족을 한 연이아저씨 근처에 가는 것이 무서웠지만 내 또래 아이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 주일 혹은 한 달에 한번 꼴로 그에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근에서 유일하게 석유가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등잔불 또는 호롱불에 넣을 석유를 사기 위해 우리는 소주 대두병을 두어 개씩 양 손에 들고 그 곳을 드나들어야 했으며 그의 의족을 힐끔힐끔 쳐다봐야 했다. 연이아저씨의 집 옆에는 우리가 ‘차부집’이라 불렀던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차부집할머니 역시 우리와 먼 친척이었는데 일찍 청상과부가 되어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집에는 우리 옆 반인 종현이가 살고 있었는데 우리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가 입양아인지를 모르고 지냈다. 용봉리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라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그가 얼마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다. 다만 집 근처 즉, 반곡동네를 에워싸고 있는 넓은 들에 많은 논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각종 계모임에서 계주역할을 하거나 돈놀이를 해서 급할 때는 우리도 그에게로 달려가 아쉬운 소리를 하곤 했다. 나는 종현이 어머니의 은빛치아가 유독 눈에 띠었는데 가끔씩 차표를 파는 책상 위에 놓인 유리병 속에서 꿈틀대는 세균들을 보기도 했다. 치통으로 고생하던 그가 거울 속에 비친 치균을 잡아 알콜이 들어 있는 유리병 속에 넣어놓은 것이라고 했는데 아주 작은 실지렁이 같던 생명체가 치균이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종현이는 통통한 체형에 평발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걸을 때에는 안짱다리형상으로 기우뚱거리곤 했다. 우리들 사이에는 가장 팔자가 좋은 놈으로 이야기되고 있었다. 더욱이 평발은 군대도 면제받는다는 이야기가 어른들 사이에 있었기에 우리는 부러운 눈으로 그의 발바닥을 쳐다보곤 했다.
차부집은 늘 사람들로 벅적거렸다. 아침에는 삼십 분 간격으로, 점심때면 정확하게 한 시간 간격으로 배차되어 있는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늘 차부집 근처에서 서성거려야 했기 때문이다. 차부집 측면에는 우리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 곳은 다리를 놓지 않아 돌다리를 건너야 했다. 돌다리는 검고 평평한 것으로 어른들이 용봉천에서 가져온 것으로 세 개를 같은 간격으로 놓은 것이었다. 차부집 건물의 우측 벽면 역시 각종 홍보물로 지저분했고 버스를 기다리거나 여정에서 돌아 와 꽉 찬 방광을 급하게 열어 헤친 흔적들로 지린내가 진동했다. 특히 흙벽에는 선거 때마다 붙여 놓은 각종 홍보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우리들은 그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방료를 하는 자에게는 천벌이 내린다는 둥, 누구와 누가 한 번 했다는 둥, 누구 자지가 까졌다는 둥, 거시기를 자른다는 둥하며 크레용으로 그려 놓은 큰 가위 옆에 자리하고 있는 각종 낙서들이 흥미를 끌곤 했다.
돌다리를 건너 올라오다 보면 장터와 우리 마을의 중간 지점 즉, 산 밑에 자리한 동네가 있었는데 그 곳을 우리는 ‘서촌’이라 불렀다. 세 가구로 구성된 이 마을을 새말이라 명명하지 않고 서촌이라 부른 이유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서촌마을의 산 밑에는 내칭이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르던 칠 순 내외가 살고 있었다. 무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이 집은 말 그대로 부랄 두 쪽 밖에는 없어 허드렛일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사는 집이었다. 어렷을 적에 내가 가장 싫어했던 사람을 한 명 뽑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칭이 할아버지를 지목할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 이십 리가량 산 속으로 들어가면 내칭이라는 산골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살다가 이사 왔다고 해서 그에게 부쳐진 호칭이었다. 그 집 내외는 숯골에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우리 집 밭일을 거들곤 했는데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발을 절며 지팡이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이가 내칭이 할아버지였다. 그의 옷에서는 항상 쾌쾌한 냄새가 났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파트 하수구에서 역류하는 썩은 냄새와 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를 가장 싫어했던 이유는 밭일을 할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그가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맛살을 찡그릴 때마다 할머니나 어머니는 나를 질책하셨기에 내칭이 할아버지 앞에서는 전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할아버지와는 먼 친척이었고 성정이 착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그를 경원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가 몇 번에 걸쳐 그의 더러운 행색에 대해 싫은 소리를 했지만 그가 워낙 몸에 물을 대거나 옷을 갈아입기를 싫어해서 어쩔 수 없다는 내칭이할머니의 변명을 여러 번 들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옷이 없어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은 것이고 어머니께서도 이를 알면서도 이야기를 하셨던 듯하다. 할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해서 입지 않는 당신의 옷을 내주어도 되었지만 자신이 쓰던 용품을 다른 사람이 쓰는 것을 싫어하는 결벽증이 있던 터라 그마져도 해결책이 되지 않았던 듯싶다. 내칭이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할머니는 쪽진 머리에 정갈한 모습을 하고 계셨다. 신병을 앓고 있는 아들과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남편을 봉양하던 그의 모습은 항상 나에게 호미를 들고 머리에 두건을 두른 모습으로 기억되곤 한다.
내칭이 할아버지의 집 밑에는 오빅이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권씨 성에 이름은 오백이었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그를 오빅이라고 호칭했다. 그는 늘 뒷짐을 지고 ‘에~헴' 하며 걸어가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십 미터 가는 동안 꼭 한 번씩 헛기침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이들이 몇몇 모여 있는 장소의 먼 발치에 그의 모습이 나타나기만 하면 모든 아이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오빅이 아저씨의 흉내를 내며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장난을 오빅이 아저씨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가 접근해도 모른 체 하며 노는 아이들을 향해 “에이, 못된 놈들! 어른 흉내를 내면 쓰나!” 하는 소리를 지르며 피식 웃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오빅이 아저씨 모르게 뒷짐을 지고 그의 뒤를 따라간다. 그러다가 그가 헛기침을 하면 같이 행동을 취하던 아이들은 그의 몸짓에 줄행랑을 놓곤 했다.
오빅이아저씨네 집에서 큰 밤나무를 두 그루 지나면 황씨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황씨와 우리 집 사이는 사돈지간이었다. 그리고 우리 이웃집 황씨아저씨와는 사촌 사이이기도 했다. 앞 치아가 툭 튀어 나온데다 아프리카의 흑인 입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황씨아저씨를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피는 못 속인다고 그의 아들들까지도 같은 치아 형상을 하고 있었고 그의 사촌들까지도 한결같은 입모양을 하고 있어서 동네사람들은 그들 일가를 ‘주둥아리 집안’이라고 하며 웃어대기 일쑤였다.
시골버스가 서는 장터의 공식 행정구역상의 명칭은 ‘공수원’이었다. 조선시대에 지나가던 행인들의 편리를 도모해 주던 공수원이라는 원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공수원을 중심으로 여 섯 개의 마을이 용봉리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육동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는 흥성스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 장터는 일차선 신작로를 건너야 되었다. 장이라고 칭하기가 어설픈 장터에는 양철지붕을 한 ㄷ자모양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중앙 건물에는 포목점, 약국, 떡집, 국밥집이 토박이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장이 서는 날에는 보부상들이 측면 건물에 자리를 펴고 장사를 하곤 했다. 보부상들은 시골에서 사용하는 생활용품들을 파는 박물장수가 대부분이었으며 풀빵, 고구마, 옥수수, 대바구니, 인삼장수, 옷장수 등이 자리를 바꾸어가며 자리를 펼쳐 장사를 하곤 했다. 허대장네 대장간은 장터에서 이십 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장간을 알고 있어서 상호를 붙이거나 홍보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 대장간 옆에는 국밥을 잘하기로 소문난 김천댁이 살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시영어머니이기도 했다. 시영 아들, 시영 딸이라는 호칭이 자녀가 없는 사람들이 다른 집 아이를 데려다가 기른 아들딸을 의미하는 수영아들, 수영딸의 충청도 방언임을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의 수명이 길지 않아 시영어머니를 삼아 수명을 늘려야 한다는 용신동 무당의 말을 듣고 할머니가 급히 선택한 사람이 김천댁이었다. 김천댁은 남편과 그를 고모라고 부르는 나보다 두어 살 위인 두 명의 사내아이를 양육하며 살고 있었다.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맺어진 수양어머니였지만 나는 그들 부부가 싫었다. 김천지방 특유의 사투리도 그랬지만 얼굴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우리 집안 분위기와는 사뭇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날에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반강제적으로 들른 국밥집에는 술 취한 사람들로 시끄러웠고 김천댁 역시 늘 술에 취해 있곤 했다. 백중기로 칭해지던 그의 남편 역시 쌈꾼이었는데 인근에서는 칼잡이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칼을 쓰는 장면이나 싸움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조직폭력배 또는 프로레슬러를 닮은 체형에 묵묵부답으로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어슬렁거리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다른 어른들에 비해 믿음직해 보였다. 김천댁은 고함을 잘 지르고 술꾼들을 제압하는 억척꾼으로 소문나 있었지만 백중기에게만은 꼼짝 못했다. 일설에는 백중기가 물건이 좋아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김천댁이 백중기의 폭력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육동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수원은 용봉리의 별칭으로 행정구역상으로 우성면에 속해 있었다. 우성면은 공주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동쪽은 의당면, 서쪽은 청양군, 남쪽은 공주시내, 북쪽은 정안, 사곡면과 접해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우정면과 성두면을 합쳐 1914년부터 우성면이라 칭해졌다고 한다. 원래 북쪽의 우성면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쌍수산성으로 갈 때에 소에게 물을 먹인 소 우물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이며, 남쪽 금강변의 성두면은 성터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내 고향이 인절미라든가 도로묵의 유래와 관련 있는 곳임을 안 것은 스무 살을 훨씬 넘긴 나이었다. 그리고 보리나 콩과 같은 밭작물과 쌀농사 외에 미나리와 한우가 특산물임을 안 것도 공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한 훨씬 뒤의 일이었다.
공수원에서 이백 미터 가량 내려가면 공주군과 청양군을 경계 짓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측에 용곤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동리에 들어서면 도정공장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정미소 또는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곳을 방앗간이라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방앗간 우측에 자리한 물레방아를 돌아가면 서 너 채의 맛배지붕을 한 초가집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산 밑에 이 년 동안 나를 지도해주시던 이장하 선생님이 살고 계셨다. 그의 남편은 장터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는데 항상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하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 바람둥이 같은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그도 같은 교육대학 출신이었지만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병역을 기피해서 선생질을 못하고 마누라에게 빌붙어 산다고 했다. 키가 작고 똥똥하며 크고 째진 눈을 가졌던 선생님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잘 생겼다는 생각을 했지만은 그의 남편이 말썽을 일으키는 일은 거의 없는 듯했다. 직업도 변변치 못한데다가 팔순 노모를 모시며 시골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마누라에 대한 인간의 예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용곤이를 지나면 새뜸마을이 있었고 그 곳을 지나면 여우고개가 있었다. 송암리에서 안심리로 통하는 이 고개는 여우가 자주 나타나 사람을 홀렸다는 이야기가 있어 여우고개로 불렸다. 예전에는 산적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안심리장터로 가는 장꾼들의 물품이나 돈을 빼앗았다고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고개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안심리’란 지명이 여우고개를 지나면 칠갑산까지 십리는 안심하고 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안심리라는 지명은 옛날 이곳에 안심사라는 절이 있어 그 절의 이름을 딴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안심리는 북쪽으로 두리봉이 병풍을 두른 듯이 솟아 있고 산줄기는 건지동 부락을 싸안은 듯 남쪽으로 뻗어있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마근동과 장터가 자리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우리 동네 앞으로 흐르는 용봉천, 어천이 우성면과 경계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본의천이 어천과 합류하여 흐르고 있었다.
안심리 장터로 가기 위해서 용봉리 사람들은 반드시 이 여우고개를 넘어야 했다. 어천이나 미당사람들은 거리가 멀어 장차(場車)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우리 마을에는 장차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5원하는 버스를 이용하거나 우마차 또는 발품을 팔아 장터에 나갔는데 주로 삼삼오오 떼를 지어 안심리 장터에 가곤 했다. 여느 고개나 마찬가지로 이 여우고개도 고개를 넘다가 넘어지면 십 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여우고개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리 험하거나 높은 고개는 아니었다. 그러나 혹여 넘어지면 십 년을 넘기지 못할까하는 걱정에서 쉬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넘곤 했다.
36번 국도는 안심리를 지나 정산, 청양으로 이어져 대전 홍성으로 갈라지는데 우리들은 그 곳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지나가는 버스의 앞 유리 행선지 안내판에 써 놓은 오천, 광천, 청양, 정산이라는 지명만은 외우고 다녔다. 어찌 보면 오천이 제일 먼 곳 이었지만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인 줄 알고 지냈다.
공수원 장터에서 뚝방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노라면 이십 여 채가 자리한 벌뜸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벌판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벌뜸’ 또는 ‘평동’이라고 불렀다. 주변에 논이 많아 주민들이 잘 살아야 할 자연환경이었지만 이들 역시 대부분 소작농들이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벌뜸을 지나면 큰 산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는 그 산을 ‘사마산’이라 불렀다. 해발 308.4m의 산이었지만 해와 달이 떠오르는 그 산은 용봉리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산 모양이 상어와 같아서, 또는 산봉우리에 철마가 있었다는, 혹은 죽은 말을 이곳에 묻었다는 이 사마산을 우리들 가운데 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사마산과 관련된 설화는 어른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사마산 정상에서 서남쪽으로 약 500m 지점에 호랑이 콧종박이라는 산이 있다. 꼭 호랑이 두상과 똑같고, 특히 호랑이 코와 같다고 해서 칭해지던 이름이다. 그 호랑이 등선을 타고 내려가면, 아랫 반곡에 서리미라는 곳이 있다. 즉 호랑이가 꼬리를 서리고 있다 하여 서리미라고 칭해졌다고 한다. 또한 호랑이 꼬리 윗부분의 등선을 뱀날이라고도 불렀다. 호랑이 등선이 뱀이 내려오는 모습과 같고 옛날에는 뱀날 끝에 뱀머리 모양의 삼각형으로 된 묘가 세 기 있었다. 그리고 그 묘의 자손이 큰 부자로 아랫반곡에 큰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집이 너무나 커서 집에서 서쪽으로 200m 지점에 대문이 있었고, 그 앞에 큰 쇳대를 채우고 거기에서 동북쪽 약 1㎞ 지점에 외양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 주인이 너무나 욕심이 많고 머슴들을 학대하여 머슴의 어린 아들이 참다못해 집을 나갔다 한다. 세월은 흘러 20여 년이 지나 머슴 아들이 찾아와 집주인에게 제가 20여 년 동안 깊은 산에 들어가 도를 닦으며 공부하고 왔는데, 묘 세 기 중 가운데 묘를 조금만 위로 옮기면 더 큰 부자가 되겠다고 전했다. 그러자 욕심 많은 부자는 곧 사람들을 시켜 묘를 파서 옮기기로 했고, 묘를 파기 시작하여 묘 봉분을 열자 묘안에 하얀 안개가 자욱하고 그 안에 큰 학 한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학이 큰 기와집을 지나 대문을 지나고 외양간을 지나 멀리 날아올랐다. 학이 날아가자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도 대문이 있던 곳을 대문안들이라 하고, 그 앞이 셋대들, 외양간이 있던 곳을 오양실이라고 한다. 지금도 집터에는 옛날의 기와장이 나오고 있다고는 하나 그 내막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마산 아래에는 반곡마을이 있었다. 마을 지형이 소반과 같다고 해서 반곡이라고 불렀다. 등성이가 마을을 반으로 나누어 윗반곡과 아랫반곡이 있었는데 오십 대 중반을 넘긴 째보가 아랫반곡에 살고 있었다. 구순구개열이나 언청이와 같은 다른 말도 있었으나 모든 이들은 그를 째보라고 불렀다. 입술갈림증이 아주 심해 보기에 흉했으나 이를 치료하는 방법이나 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조상이 묘를 잘못 썼거나 전생의 업보 때문이라고도 했다. 째보는 오양실에서 돼지를 사육하며 이웃들하고는 왕래를 끊고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도 그를 피하고 대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육이오 전쟁 때, 그가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마을 사람들에게 행한 악행 때문이었다. 반곡을 지나면 어천리가 나타나는데 마을 동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있고 그 지류가 마을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용봉천의 지류가 끝나는 지점이 바로 종천이며 종천이 고마나루에서 내려오는 금강과 합류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공수원 장터로부터 공주방향으로 2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신작로를 가운데 두고 위치한 범덕골은 마을에 복호형(伏虎形)의 명당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래서 호덕동이라고도 불렀지만 거의 ‘범덕골’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그 명당자리를 찾지 못했다하여 풍수지리가들이 주말이면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 초등학교를 지나 우성면사무소로 가기 위해서는 먹방이고개를 넘어야 했다. 마을에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또는 동네에 있는 먹방산에서 따온 이름으로 먹방이 또는 묵방리라고 불렀는데 마을사람들은 주로 ‘먹뱅이고개’라고 불렀다. 공수원에서 공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고개를 넘어야 했다. 먹뱅이고개와 연미산고개였다. 해발 이백 여 미터의 비교적 야트막한 고개였지만 눈이라도 올라치면 버스들이 올라가지 못해 헛바퀴를 돌리는 고개였다. 먹뱅이고개를 넘으면 벌뜸의 열 배가 넘는 우성면의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면사무소와 경찰서, 농협, 보건소, 대서방, 양조장, 우체국, 다방 등이 있어 인근에 있는 주민들의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나서는 공주행 버스의 차창 너머로나 볼 수 있는 장소였지 그 곳에 갈 일은 거의 없었다. 공주 장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금강교를 건너야 했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왼쪽에 공산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산성(公山城)은 금성동, 산성동, 옥룡동에 걸쳐 있는 산성으로 남으로 시가(市街)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금강(錦江)의 연안에 접해있는 해발 110m의 분지형 야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측에는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미나리꽝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곳을 지나면 바로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다. 그곳을 기점으로 천안, 대전, 논산으로 이어지는 교통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은 공주시장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이기도 했는데 이곳 터미널에서 하차하면 바로 산성시장의 먹자골목이 시작되었다. 골목 양쪽에는 빵집, 순대국밥집, 보신탕집이 줄줄이 이어졌으며 그 골목을 빠져 나오면 연이은 열 십자 길 형태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첫 번 째 통로는 주로 생선 장사들이 전을 벌렸고 교동으로 나아가는 다리 직전의 제민천 뚝방에는 가축시장이 형성됐다. 그 곳에는 주로 집에서 가지고 나온 닭과 토끼, 염소, 개 등이 놀란 눈으로 주변을 쳐다보거나 머리를 구석에 박고 세상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태를 보이곤 했다. 두 번 째 골목에는 주로 포목전이 들어섰는데 한복에서부터 월남치마에 이르기까지 각종 옷가게들이 비교적 깔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곳을 지나면 공주사거리와 인접한 마지막 골목이 나타난다. 그 곳에서는 각종 농산물이 거래되었고 농약을 파는 상점들이 서너 개 자리하고 있었다. 마지막 시장거리를 지나면 큰 도로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바로 공주에서 제일 큰 공주사거리였다. 그 사거리는 대전과 부여, 천안, 논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공암 방향으로 오백 미터 쯤 나아가면 큰 우시장이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자주 가곤 했었던 그 우시장 너머에 어떤 도시와 어 동네가 자리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며 무지(無知)하게 살았다.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