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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
석문방조제의 하루 빛 햇살
변 재 열*
넉넉한 하루를 위해
도심을 떠난 사람들
배 낚시 둑 낚시
갯바람에
망둥이도 낚고 전어도 낚는
즐거운 휴일
물고기 뜸하면
알몸으로 조깅하는
둑길
건강 지킴이에
잡힘과 놓침
멀고 가까움
쉽게 이어지고 끊기는 하루.
여기가 충청도라 했던가?
수평선 너머는 경기도라고
석문방조제는 둑길을 만들고 있다.
방조제 하루의 햇살은
나눔과 사랑
보듬과 화해의 불꽃으로
일상을 책임지고 있다.
왜목마을에 석양이 지면
둥근 햇살 등에 업은
만선 깃발이
아낙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주민
산업단지도 그랬다.
주택단지도 그랬다.
수몰지구도 그랬다.
단지든 지구든 모두 다 그랬다.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필연으로 생각해야 했다.
목적 있는 일을 하기위해선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
땅이야 좁던 넓던
생각이야 작던 크던
고향을 버려야 한다.
낙향을 하면 그대로가
고향이었던 시절
그 때가 그립다.
돈이야 많던 적던
명예야 높던 낮던
눈을 감아도 선한 풍경들
단지가 들어서고
지구가 갖춰지면서
왠지 썰렁한 가슴
쥐어뜯어도 온기를 느낄 수 없다.
추억의 풍경 속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었을 하고 있을까?
고향 사랑은 어디에 두고
울음을 토하고 있을까?
산정에 올라
00 단지와 ☓☓지구를 바라보면서
내 꿈을 접고 있다.
유선각儒仙閣에 올라
노령산맥 끝자락
유달산 내려놓고
기암괴석 개골산
다도해 낙조대
유선각에 오른다.
올올이 수놓은 남도천사의 섬
목포는 항구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바람으로 깃발 날려
땅에는 루미나리
바다엔 별빛.
밥상마다 풍요의 물결
알싸한 흑산도 홍탁삼합
목숨을 담보하는 세발낙지
속 풀이 만점 연포탕
바다의 신사 민어회
밥도둑 꽃게무침
남도일색 미감이라.
지도 위엔 국도일호선
출발과 도착을 알리고
이훈동 정원의 섬광 야인시대
영산강 물줄기처럼
갓바위 항구도시
유달산 색스폰 소리가
시민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유선각은
유달산의 정기를 모아
시민의 숨통을 열어주고 있다.
* 충남 공주 출생, 호-海峰/巢鶴, ≪현대문학≫(1981)에 시로 등단, 시집으로 『겨울바다』, 『보이지 않는 江』, 『멀리서 가까이서』, 바람꽃 향기』, 『빈 잔의 메아리』, 『만리포 바람소리』, 『진홍빛 꽃잎』,『「가슴 비우기 혹은 채우기』, 충남도문화상, 대전문학상, 한성기문학상 황조근정훈장 수상, 현재 대전시인협회장, 대전지방검찰청형사조정위원, 국제PEN클럽한국본부남북교류위원
신원사
류 재 봉*
눈 내리는 날 신원사에 갔다.
큰 은행나무 두 그루 절문 앞에
수북히 옷 벗어 놓고 그 마른 어깨위로
고요를 몰아 내리던 눈발
눈이 파란 선승들은 두문불출
오래인지 추녀 깊게 내려서던 산그림자.
퍼붓던 눈발 잠시 멈추자
동자승 몇이 돌참에 나와
하늘을 내다본다.
하늘은 이내 강물처럼 열리고
문설주에 앉았던 눈송이들
제풀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진다.
혼자 뒷뜨락에 내려 서성거리다
선방 앞에 이르니 햇빛 고여
맑은 고무신 몇 켤레
오래 동안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눈물 쏟아져
먼 산 따라 소리 없이 물러 나왔다.
부뚜막, 그 성전을 그리며
들기름을 윤기 있게 바른
가마솥 뚜껑은 상투처럼 보였다.
높은 지위인 듯싶었다.
퉁퉁한 솥전은
힘센 장사의 패기
까만 아궁이 이마
한 채의 집을 짊어진 장사
제사를 드리는 날
하루 세 번 정갈한 물로 입쌀을 씻어
차분히 들어앉히고
조용히 불을 지폈지.
힘을 쓸 때 마다
장사는 큰 울음을 울었다.
지축이 울리도록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울었다.
그를 진정시키고
제물의 온전한 숙성을 위하여
그의 머리를 몇 번이고 때려
온화한 헌물로 숙이게 했지.
봉헌의 조용한 불 앞에서
결국은 속죄하고 잠잠했지.
가을
봄부터 찰찰 대던 강물이
돌아서야 할 때를 생각한다.
수많은 꽃들이 빠져
차갑고 예리한 별로 떠서
벌레의 울음으로 칼을 가는 여울
이제는 어차피
황제의 관이 빛나는 영토
부끄럽고 수줍음이 모두
꽃이 되는 계절.
가랑비가
더욱 초라한 나그네의
갈 길을 가두는
마음의 사막.
신이 차려 준 열매
떠오르는 기억
안식되지 못한
서성이는 방의 집이다.
* 충남 부여 출생, 공주 교육대, 충남대 교육대학원 수료, ≪시대문학≫ 신인상(1989), 대전시인협회 시인상(2009) 수상,
시집으로 시간의 매듭(1992), 저녁을 위한 알레그로(1996), 여행자의 지도(2006), 오늘 나는 빈 집이다(2009) 등
이 있음. (현)내동중학교 교장. modeun95@hanmail.net.
겨울바다
김 명 동*
어디쯤에서
그대는 봄의 길목위에
무언의 침묵으로
시린 마음을 전하려고 하십니까?
날마다 밀려오는
멍든 파도가
잔잔한 모래사장에 모래톱을 만들고
작은 섬에서 불을 밝히던 불빛
물새의 발자욱으로
악보 같은 겨울의 유언을 남기고 돌아갑니다.
가을손님
산은 그곳에 있는데
내가 간다
화려한 옷 입고
화장한 얼굴로 마중하는
가을 산을 만나려 간다
수십년 비바람을 잡수신
늙은 노송의 춤사위가 애처로움으로
호수에 반영으로 누워있는 아쉬움
늪을 두드리는
잎새의 추락이 진동으로 느껴지면
계절의 그리움 덩어리
터져 버릴 것 같아
골 파인 내마음 내려놓으려
가을 산을 담으려간다
* 경북 상주 출생, 시집 어느 바보의 작은 가슴(1990), 고향은 저만치(1992), 꿈속에 별 달(1993), 그대를 사랑하는 이
유(2002), 그리움의 마당에는 당신이 주인입니다(2006), 동구문화상, 예총회장상, 인터넷문학상 등 수상, 현 글빛문학회장,
대전동구문학회장, kimydo812@hanmail.net
동토의 나목
김 효 태*
동화 속 설화가 피는
엄동설한 속에
집시의 민초들이
흐느낀다.
갈비뼈만 남은 동태
앙상한 가슴마다
깃털 같은 옷을 벗고
망원의 고목처럼
시린 댓바람 벗 삼아
하늘과 바다를 노니는
짧은 한숨 토해버린
내밀한 그리움
님의 비파소리
한잔 술에
타는 곡조
눈 속을 녹이는
복수초의 꿈
함박웃음 터트린다.
낙화
소슬한 비바람소리에
서러움이 북받쳐
달빛 유영하는
호수에 선혈 토해
고하는 마음의 씨앗 결별
꽃잎은 하롱하롱
손짓을 저으며
내 사랑 쉼터에
영혼을 두고
촛불처럼 꺼져가는
분분한 낙화
아- 그리움이여,
청춘도 가고
꽃마차 속에
인생도 구름처럼 흘러간다.
* 월간 ≪시사문단≫ 시 등단, 시집 당신의 마음을 누군가 보고 있다.
단풍, 그리고
송은애*
나뭇잎 붉어짐은 길 떠나는 열차와 같다.
아니, 갱년기 맞은 나의 얼굴 같다.
때가되면
내 어미는 단풍잎 바라보며
한숨짓고
길 떠나는 철새에게
당신 살점 하나 물려 보낸다.
고향 떠나는 열차에게서
서러움을 느끼듯
고향 떠난 어미 몸에서
恨날 떨어져 나갈 아비의 흔적
단풍열차 같이 아름다운 추억보다
열차에 恨맺혀 청산과부된
어미의 한숨소리가
갱년기 달아 오른
나의 얼굴과 단풍잎으로 비껴온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허공에 떠가듯
아비의 죽음이 보여준
그 굴곡 속에 다가온 붉은 현상은
피바다... 그리고
어미의 눈물 속에 그려진 너의 피 빛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내장산 입구 우화정(羽花丁)
그리고 내장사
그 아름다운 풍광에서
어미가 그려진 건
늘 버팀목으로 서 있어준
어미의 품이 그리움으로 솟아났기에
돌아오는 길이 더욱더
붉게 물들었다
대청湖를 품다
분명 가을이었다.
호수는 중후한 느낌으로 잔잔했다
그곳에 빨려들 듯 은빛햇살을 머금으며
하지만
갈증 느낀 호수는 버얼건 갈비뼈를 드러내며
악마의 눈물을 기다리는지 하늘을 우롱하고 있다.
구름 사이를 비껴선 나무들과 가을빛
외로움이 일어나는지 물속을 헤매이다
참지 못한 호수의 여신 용솟음 치고
방황하며 햇살을 꺼집어낸다
맑은 가슴 드러내며
산천을 품는 호수
구름 위를 거닐 듯한
저 당당한 침엽수의 절개가
물들어가는 앞산에게
보내는 유혹의 손길에
나목이 되어 흐느적거린다.
아직은 나목이 될 수 없다고
영원히 버텨야한다고 작은 몸부림치는
나목이 되어가는 나무들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침엽수들의 아우성이
호수를 감화 시켰나보다
모두를 다시 품었다
나 이대로 솟대가 되어
하늘도 품고
나목도 품고
세상도 품으리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엔
담지 못했던 거리의 풍경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가로수와
느끼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이 섞여
세상 빛 그려낸다.
신명난 화가처럼 퍼포먼스를 한다.
감
계절 끄트머리에 매달린
지난여름의 열정처럼
당신은 천둥 번개를 담고서
미련 남은 가지에 남아 있다.
희열을 느끼며
내 가슴속 하나 남은 소망
그 간절한 소원이 당신을 있게 한다.
늦은 가을 무서리 내리고
까치밥으로 사라진다 해도
빛바랜 감 잎 바라보며
오는 햇살로 잉태하는
또 다른 탄생을 부르고 있다
* 茶軒, 시집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이름없는 들꽃 이야기, 다래순 먹는 여자, 관저동 연가,
술 예찬 꽃 예찬하면서 茶 한 잔, 인연, sea5610@hanmail.net
가을의 향기
김 근 수*
태양의 거름은
감미로워
노란 잎 눈망울 속에
많은 사랑을 놓아둡니다.
이 가을의 잔에도
향기로운 레몬의
사랑을 채우려 합니다.
갈대를 스치는 바람은
아름다운 달빛을 받으며
나를 꼬옥 끌어안습니다.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나의 생각은
가을의 향기가 납니다.
가을추억
가을이 오는 소리
내 마음 한 줌의 그리움으로
가을날을 태운다.
지난 긴 여름이 지나고
사랑의 발자국들이
그리움이란 이름표로
내 가슴에 찾아들 제
가을밤에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이내 맘
해 뜨는 아침이면
영롱한 이슬 빛으로 피어나리라
가을이 오는 길목
연지곤지 미소 짓는
허수아비 되어
가을추억으로 되살아난다
가을이 오는 소리
내 마음 한 줌의
그리움으로 가을날을 태운다.
서해 야생화 공원에서
옛 연인의 부활을 꿈꾸며
망각의 바다를 걸었지
동백의 열매에서 추억을 만나고
작은 풀꽃에서 그리움 하나
싹 틔워
종이로 만든 배에 띄워 보냈지.
야생화의 거울 속에서
소년의 미소를 발견하고
저 멀리 유년의 바다를 바라보면
초롱초롱한 나의 눈빛은
액체가 되어 어디론가 흘러가고 말겠지.
* 계간 <문학세상> 신인상, 시집 유천동 블루스(2008), 금강축제 금강문학상,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powerg@choi.com, www.gp1004.com
산닭
최 광 임*
조류든 포유류든 계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영예와 상징의 시대를 지나 뻐꾸기에게 몰수당한 울음
더 이상 시간이 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사실은 너무 높이 날기를 꿈꾸던 조상들
그만 옥황상제님 발바닥 아래
허공까지 닥 닥 긁어댄 대역죄의 내력으로
수형생활 중에 있는 것인지도 몰라
피아골에서 날으는 산닭 숯불구이를 먹던 날에도
나는 것과 날지 못하는 것들 사이
뚱뚱한 씨암탉과 백 미터는 거뜬히 난다는
산닭 사이에 대하여 생각했던 것인데
최시인 좋아진 걸 보니 시인이기를 포기한 게로구만
안분자족 씨암탉이 되었던 것인데
딱 꿩만 하다는 산닭, 밤에나 잡아야 한다는 그 닭들
갈매기보다 더 멀리 날았다는 족보도 없는 조상의 꿈
전생의 힘으로 푸드득 푸드득 겨울 산을 뒤틀며
산꿩처럼 날아가 여영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는 산닭들
그날로부터 그들에게는
다시금 써야할 역사가 생겼기 때문일 것인데
문득 산산조각 발목 베이고 꿩처럼 울었던가 어쨌던가
순수에 대한 보고서
겨울 한 철 내 집에 짐승 한 마리 살았어요 그는 머언 바다에서 왔다고도 하고 산골짜기 깊은 응달에서 왔다고도 했어요 그와 내가 처음 소통한 언어는 눈물이었어요 그에게서 파도 냄새가 나기도 했으며 골짜기 굽이쳐 흐르던 물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어요 나는 그에게 산짐승生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그의 언어는 눈물뿐이었으니까요 해빙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동안 봄은 멀리 있는 듯했지만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여전히 격렬과 온유의 극점을 오가는 그를 나는 산짐승이라 불러주기만 하면 되었어요
어느 날은 소파에 앉아 유심히 그를 관찰하기도 해요 야생에서 왔다는 것 말고는 처음부터 언어가 다른 우리였지만 볕 좋은 창가랄지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아 조곤이 바라보노라면 햇살의 아이 서넛 낳고 싶어지기도 해요 그러나 대화법을 모르는 그는 장식장이나 에어컨 뒤 음습한 곳으로 숨어들기도 해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타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심하게 흔들리는 눈빛과 입에서는 상한 비린내가 진동해요 어느 사이 봄은 창 가까이 오고 있었던가 봐요 그의 외출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더 이상 그의 눈물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그가 드나들던 음습한 구멍에선 황사바람만 들이치고 있기도 없기도 한 그에 대하여 무심해지는 날들이 가고 있었어요
* 전북 부안 변산 출생, 2002년《시문학》등단, 시집『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창신대 문창과 겸임교수, cmjk21@naver.com.
손등
고 영 민*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어떤 미동(微動)으로 꽃은 피었느니
곡진하게
피었다 졌느니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마음이 불러
둥근 알뿌리를 인 채
듣는
저녁 빗소리
키스
햇살이 바뀌었다
어디까지 여름이었고 어디서부터 가을이었을까
모르게 가고 모르게 오는 그늘
바뀌는 것들
애인의 마음처럼
느낌으로 알아지는 것
우리의 여름은 저만치에 있다
키스도
하늘도 더 멀어졌다
더운 숨을 거둬가듯, 안색이 바뀌듯
친한 얼굴들이 달라졌다
네가 멀리 있어 자꾸만 먼 곳을 보게 되는
아무리 밖을 쳐다보아도 보이지 않아 안을 보게 되는
있다가도 없는
없다가도 있는
숨겨놓고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다가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가을이 와서 가을이라고 쓴다
숨을 고르고,
추억이라고 읽는다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창과 졸업, ≪문학사상≫(2002) 등단, 시집으로 악어, 공손한 손이 있음.
흔적
김 영 탁*
대웅전 마룻바닥에 누워서 본 하늘은
문이 열린 만큼 들어왔다
하늘을 본다고 하늘 전부를 말 할 수는
없었다
나무는 푸른 잎으로
하늘에 단청을 낳고 있다
양떼구름이 단청 속에 들어가
풀을 뜯고 있다
잠깐, 유난한 매미소리와 뻐꾸기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나뭇가지 끝이 조용했다
뭔가 지나갔다
아마 천사일 것이다
바람이 지나갔다
다시, 숲에 사는 벌레와 새들의,
소리의 향연이
시작된다
다시, 문이 열린 만큼 하늘을 바라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로웠다
평화라고
되뇌어 보았던 이런 것들이
복받쳐 헤프게 눈물이
날 뻔했다.
푸른 잎 하나가
푸른 잎 하나 눈 시릴 때가 있다
푸른 잎은 햇살을 타고 날아가
유리창 하나 푸르게 하길 바란다
멀면서 가까워지는 바람 소리가 유리에게
들어와 스스로 갇힌다 갇혀서 자유로운 소리는
푸르게 살아 움직이며 눈을 뜬다
잎으로부터 뻗어 있는 길들을 믿을 수 없구나
그 길 위엔 바퀴가 굴러가고 바퀴 위에 내가
누워 있지만 바퀴는 바퀴의 의지로만 굴러간다
그러나 전혀 바퀴에서 내릴 기미가 없는 나
푸른 잎 하나가 내 이마를 스쳐갈 때
푸른 잎 하나 눈이 시릴 때
잎의 始原을 그려본다
지나온 모든 길 위에 내가 있었다
* ≪시안≫(1998)으로 등단, 시집 새 소리에 몸이 절로 먼 산 보고 인사하네, tibet21@hanmail.net.
남해, 노도에서
곽 경 효*
바다는 날마다
절벽을 기어오른다
일어서면 일어설수록
떨어지는 자리 더욱 깊다
다 버리고 홀로 서는 일이
이토록 지독한 말씀이라니
한때는 빛이었다가
혹은 목숨을 건 혁명이었다가
지금은 맨살을 찢어대는 통증이다
천길 벼랑 아래 떨어져
상한 가슴을 핥고 있는
한 마리 짐승이다
오랫동안 품속에 두었던 말
물과 함께 흘러간다
남몰래 제 가슴팍을 씻으며
꼿꼿이 일어서는
섬
*노도: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
바람의 언덕
정처를 알 수 없는 바람이
온몸을 흔들고 지나간다
사자의 이빨처럼
고양이의 눈빛처럼
들어오고 나가는 길을 알 수가 없다
너는 언제나 그렇게 지나간다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바람의 속살
다시는 흔들리지 마
무심코 흘려버린 말이
스윽 가슴을 베고 간다
나는 지금
깊은 어둠의 한 가운데서
상한 몸을 핥고 있다
생각은 언제나 밖을 떠돌고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슬픔이
내 눈썹을 적시고 있다
또 바람이 분다
저 언덕에
상처 입은 짐승 한 마리 울고 있다
누가 자꾸 마음을 방목하는가
* 전북 무주 출생, ≪시와 시학≫(2005) 등단
물고기와의 뜨거운 하룻밤
김 륭*
나는 아무래도 눈물 한 토막을 전생에 두고 온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펄쩍, 어항 속을 뛰쳐나와 바닥을 팔딱거리는 금붕어에게 눈이 멀 까닭이 없다 화장을 지우는 당신 입안 깊숙이 나는 아직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달의 속곳이라도 훔쳐 입은 듯 달달해진 그림자 밑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바람이 발라낸 가시나무의 살이 만져지는 밤, 당신의 무릎 사이 깨진 어항 하나로 떠오른 나는 아무래도 눈물에 길을 가로막힌 것 같다
내일쯤 눈꺼풀을 잘라내기로 했다 푸드덕 머리를 열고 날아오르는 새들보다 먼저 태양을 필사한 금붕어 배를 갈라야겠다 스르륵 바지부터 벗어던지는 혓바닥이 너무 뜨겁다
그러니까 내게 눈물이란 까마득히 밑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솟구치다 딱, 두 눈을 마주친 물고기의 전생이다 사랑에 빠질 때마다 둥둥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 죽은 연어가 떠오른다 내 몸은 아무래도 영혼을 헛디뎠다
사랑해, 라고 속삭이는 당신의 거짓말로 살기엔
가시가 너무 많다
비늘
당신은 옷을 벗고 있는 중이고 나는 휘둥그레 뜬 눈을 당신의 배꼽에 매달고 있는 중이다 단추의 기원이다 당신과 나를 위해 세상이 잠시 눈을 감아주는 순간이 있다
물고기가 잘라버린 혀를 하늘에서 만진 적이 있다. 늙은 오리 한 마리 뒤뚱뒤뚱 엉덩이를 노란 물주전자처럼 앉힌 자리, 팬지꽃 코사지 장식이 달린 당신의 드레스가 물비늘로 촘촘해지는 동안 나는 당신의 등 뒤에서 달을 꺼낸다. 사랑에 빠졌다는 말의 아슬아슬하고 불온한 촉감, 뿌리가 썩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숨을 팔딱거리며 부패의 각을 세운 거다. 슬쩍 그림자를 벗어던진 새떼들 아니, 바람에 꿰인 생선구이 한 접시 까맣게
까맣게 떠가는 하늘 한 귀퉁이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빈곳을 떠오른 것이다.
길이 뒤엉킨 거미 뱃속에 걸린 날개를 만지작거리듯 침대 밑으로 벗어던진 당신 드레스와 내 줄무늬 양복은 애당초 단추가 달려있지 않았던 거다. 둥둥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몸을 바짝, 잡아당기고 있던 죽음의 각질
그러니까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서로의 몸을 물처럼 통과하는 죽음을 여러 번 목격했다는 것이다. 희번덕거리기 시작하는 한밤의 갈증, 제 그림자를 물에 적시지 않는 물고기들에게 비늘은 옷이 아니라 단추다.
세상의 모든 눈이 반짝, 나와 당신의 급소를 꿰고 있다.
* 경남 진주 출생, 조선대학교 외국어대학 중국어과 졸업, 불교문학 신인상(1988), 제1회 월하지역문학상(2005),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2007),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2007), 한국문화예술위 창작기금 수혜(2007),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2009), kluung@hanmail.net
평일의 극장
박 서 영*
십 년 동안 사귀었는데 아무 것도 손에 넣지 못했다
얼음처럼 녹고 흘러내리고 지나간 마음들
눈송이처럼 사라져버린 대화對話
잡으려고 한 적 없으니 사라진 건 당연하다
때때로 내가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꾼다
내 손이 스카프처럼 그대의 목을 조를 수도 있으리라
관람객 없는 평일의 극장에서 잠깐 졸았을 때
지나가버린 것은 청춘
남은 것은 패배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깜박하는 사이 시체들이 골짜기에 버려지고
깜박하는 사이 꽃밭이 태어나는 평일의 극장 안
프라하와 아우슈비츠, 박쥐와 마더
맨 뒤 구석자리가 나의 영토일 것
그곳에서 예의를 버리고 그대의 입술에 키스한다
가장 나중까지 남아서
누군가 나를 들어내 버릴 때까지
냄비 속의 장례
감자탕 집 냄비 속에서 뼈와 살이 결별 한다
나는 마지막 유골이 나올 때까지
뼈에 붙은 살을 발라 먹었다
티베트의 검은 새처럼 주둥이 속에 살을 우겨넣었다
그의 생이 목이 걸리면
걸쭉한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화장이든 조장이든
식당은 장례식처럼 분주했다
누군가 살을 발라내고
누군가 불을 피웠고 관을 날랐다
국자 하나가 연꽃처럼 냄비 속에서 피어났다
어디로든 운반되어져야 할 관처럼 냄비가 떠다녔다
냄새를 맡은 바람이
뼈를 잘게 부수기 위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우린 어디로 갈 거냐고 묻지 않고 헤어졌다
뭉클하고 따뜻한 냄새의 흔적
모두들 그걸 좇아 발걸음을 옮겼으리라
추운 날 몸속의 뼈를 달그락거리면서
희미한 조등 아래를 지나갔다
샛별이 밤하늘의 배꼽처럼 빛나고 있다
오늘도 무사히!
* 경남 고성 출생, ≪현대시학≫(1995) 으로 등단.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변압기
전 건 호*
주렁주렁 매달린 식구들 부양하다
몸살을 앓던 그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거미줄같이 매달린
아파트 공장이 순식간에 절망에 휩싸였다
파르르 떨던 가로등이 나가고
밥솥이 끓다 말고
청국장은 식어버렸다
집집마다 터지던 웃음꽃 멈춰 버렸다
사람들 그제서야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검은 피 흥건하게 흘리는 그녀를 위해
비상등 켠 구급차 달려와
심장을 수술하는 동안
집집마다 촛불이 켜졌다
무관심하던 사람들까지
소생을 빌며 간절히 기도했다
누가 저 지경이 되게 방치했냐고
서로를 탓하며 분개했다
그녀 간신히 소생하자
이내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녀가 관심을 받아본 건
그날 그 순간뿐
오늘도 상처난 몸으로
허공에 매달려 신음하는데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
검침원
대문 좀 열어주세요
당신을 검침하러 왔거든요
얼마나 피 뜨거운지
에돌아온 길의 경사가 어떠한지
엉성한 거푸집에서 삼킨 음식과 한숨도 점검합니다
환희 가득한 시절 은밀한 속삭임
천당과 지옥 넘나들던 순간
계량기에 다 기록되어 있어요
생의 고비마다 쿵쿵 뛰던 심장박동
무모하게 역주행한 흔적도 점검합니다
과부하 걸린 생 까치발 뛰던 순간
다 검침해 청구할 겁니다
당신 생 저울질 한다는 거
물론 완강히 거부하실 거예요
인정할 수 없다고
쓴 게 없다고 도리질 하겠죠
하지만 소용없어요
블랙박스 속 당신 지나온 길
선명하게 기록된 걸
난들 어쩌겠어요
* 충북 영동 출생. ≪시와 정신≫(2006)으로 등단. demang815@hanmail.net
다단계 피라미드 사업을 추천합니다
최 금 진*
다단계라는 말 속에 길게 나있는 계단을 올라가요
계단의 끝엔 피라미드 꼭대기가 보이고, 달이 보이고
피라미드 안에는
평생 황금만 생각하며 눈 깜박이는 미라들이
달고 시원한 어둠을 훔쳐 먹어요
서울로 가요
서울 남산에 뜬 달은 커다란 은쟁반
누군가 쟁반에 한가득 은덩이를 썰어 내온다고 생각해봐요
지방엔 먹고 살 것이 많지 않으니까
겨울엔 종일 팬티를 입고 앉아 혼자 화투를 치고
화투에서 땡을 잡은 사람을 생각하며 웃는 연습을 해요
발가락이 가려운 오후엔 방바닥이라도 후벼 파요
파라오의 황금덩어리라도 발견되었으면 좋겠어요
꿈이 없으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요
누런 양은냄비에 끓여온 누런 라면을 먹을 때
황금을 씹으면 이렇게 쫄깃쫄깃할까요
苦盡甘來의 수많은 계단을 혼자 걸어간 친구는
대여섯 냥짜리 금 별이라도 목에 걸었을까요
지하 셋방에 거처를 두고
반쯤은 미라가 됐을지도 모를
꽁꽁 언 친구의 손이 돈 뭉치처럼 움켜쥔 희망
친구여, 제발 텅빈 손바닥은 펴 보이지 말아요
피라미드 다단계, 그 높은 계단을 향해 걸어가보면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의 고위급 애칭이라도
메달처럼 목에 걸게 될지도 몰라요
기차를 타요, 미라 같은 사람들이 한 끼 밥도 못 먹고
꿈의 광맥을 캐고 있는 서울의 지하 셋방
고생 끝에 낙이 온다잖아요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잖아요
어서 가요, 세상 꼭대기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요
달을 보다
귀신새가 어둠 속에서 휘익, 휙, 난을 치는 소리
난촉 끝에 매달린 베옷 입은 노인들이
허, 명당일세 그려, 달 속에 올라가 눕는 소리
엄마도 그런가? 자다가 문득 눈을 떠 쉽게 다시 잠들지 못하고?
너도 벌써 그러니?
사십이 되니까
고등학교, 대학교 때 자취하느라 밥 굶고 다닌 공복의 허기가
이렇게 결국 다시 헛헛할 줄이야
그때 헤어진 첫사랑이 이렇게 많은 내상이었을 줄이야
귀신새 휘파람 소리가 창문에 새어들고
등짝이 쉽게 안 떨어진다
허, 어젯밤에 누웠던 바닥이 등에 한 몸처럼 딱 달라붙어 있다
엄마도 그런가? 자고나면 몸이 천근만근인가?
그럼, 그렇지, 너도 벌써 그러니?
자고 일어나면 고향을 자꾸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 같은 꿈
할머니가 나를 한참 보다가 눈물 훔치던 일이 떠오른다
여기까지 너를 업어 주었으니까 혼자 걸어 가거라,
나는 몸을 질질 끌고 거실로 나가 커다란 달을 몸으로 끌어당긴다
빛이 숭숭 새어나가는 베옷
엄마도 그런가? 나처럼 자꾸 몸이 추운가?
나이 사십 먹은 몸에 이제 겨우 대여섯 살짜리 애가 들어앉아서
오슬오슬 떨리는 손으로 달빛을 끌어다 덮고 있다
휘익, 휙, 휘파람 불던 귀신새 소리도 딱 그쳤다
* 충북 제천 출생, ≪창작과 비평≫(2001) 제1회 신인시인상, 오장환 문학상 수상, 시집 새들의 역사(2007)
그림자놀이
이 성 렬*
식구들과 여행을 갈 때마다 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집으로 전화를 걸곤 했다. 러시안 룰레트에서 힌트를 얻은 이 놀이에 나는 온 귀의 신경을 팽팽히 곤두세우며 집중했지만, 게임의 규칙을 알지 못하여 번번이 실패하였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신호는 민물장어처럼 귓바퀴를 빠져나갔을 뿐.
놀이의 비밀을 알아낸 것은 엉망으로 취한 대명콘도 지하상가에서였다. 신호음이 아니라 밑에 깔린 미세한 잡음이 모르스부호로 말하고 있음을. 무작위한 전자들의 움직임이 <적어도, 지금, 여기에>라고 속삭임을 분명히 들었고, 철학책을 뒤져가며 해독하는데 8개월이 걸렸다.
두 번째는 쿄토 금각사 근처 여관에서 <캪슐, 즐거움, 말미잘>이라는 단어들이 흘러나왔는데, 1년 반 후에 대전 술집에서 옆에 앉은 미대 아르바이트생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다음에는 진화론의 대가인 스티븐 굴드 교수의 책에서나 읽은 듯한 <우연히, 直立猿人, 치질, 도도새>라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 은밀한 놀이는 그러나 제주 중문단지에서 송화기 구멍 사이로 내 음산한 목소리가 <출구, 덧없음, 不在>라고 내뱉었을 때, 목덜미에 돋은 소름과 함께 끝이 났다.
각설탕
그 성채의 설계자는 바벨탑을 염두에 두지는 않은 듯하여, 천국을 향해 층층이 쌓아올리는 공법 대신, 허공에 중심을 띄우고 사방으로 방을 무한히 복제해 나갔다.
모든 색상을 반사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성곽의 입구는 보이지 않으며, 순백으로 탈색된 자에게만 열린다. 회색 심장을 가진 고독한 소설가가 성채 주변을 맴돌다가 절망한 적이 있다.
스스로 성을 떠난 주민은 한 명도 없었는데, 그것은 달디단 벽 때문. 아름다운 여름날, 외벽에는 물방울이 맺히는데, 눈을 가린 꽃의 요정들이 발코니로 삼아 소야곡을 부르기도 한다.
어디에도 거울이 없어, 만년에 비극적인 사상을 품은 화가는 조소하는 자화상을 순전히 상상으로 그렸다.
미로 깊숙한 곳, 안개의 방은 간혹 누군가의 통곡의 벽이 되는데, 그 내력을 기록하는 일은 금지되어 불순한 호흡을 멈추는 울트라스위트 가스실에서 누군가 내지른 비명은 즉시 소음으로 처리되었다.
서재를 빠져나온 철학자가 방황한 후, 생각하는 자세의 미이라로 백 년 만에 복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그곳, 일생동안 말없이 망원경을 들여다본 천문대장은 Sagittarius B2*에서 고당분의 벽돌들을 감지했는데, 머지않아 그 성운에 주민이 출현할 것임을 예측한 후 다시 입을 닫았다.
*Sagittarius B2 성운에서 당糖 분자가 발견됨 (Astrophysical Journal, 2008/9/20).
* 서울 출생. ≪서정시학≫(2002) 등단. 시집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비밀요원. leee424@hanmail.net
립스틱의 발달사
서 안 나*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보석을 갈아 눈과 입에 발랐다립스틱의 기원이 되었다고대인들은 빛나는 눈과 입술로 별에 닿고 싶어 했다,라고 나는 단정한다그러므로 날개는 별에서 태어난다그러므로 내 눈과 입술에별이 뜨고 날개가 돋는다, 란 논법엔 오류가 없다클레오파트라는 딱정벌레와 개미 몸을 짓이겨입술을 칠했다클레오파트라의 입술에 굶주린 곤충들이 날아들었다여인의 입술을 위해 쉽게 목숨을 버렸다그러므로 죽음 속에서 립스틱은 빛난다,는 문장도 용서될 수 있다
당신이 별을 바라볼 때 애잔해지는 이유는죽음을 넘어선 욕망의 얼굴과잠시 마주쳤기 때문이다욕망은 순결한 육체를 천천히 날아올라별 들 사이에서 별이 되는 것이다그러므로당신은 아침마다 당신의 입술에 날개를 그려 넣는 것이다입술을 칠하며 별을 건너는 것이다
당신이, 반짝인다
개기일식
한 입술이 한 입술과 겹쳐진다, 물뱀처럼 캄캄하다, 한 남자의 입술이 한 여자의 캄캄한 사랑을 누르고 있다
맞은편의, 불붙는, 더듬거리는, 건너가는, 멈추는, 걸어가다 멈추는, 뼈를 감춘, 입술만 남은, 내가 잡지 못하는, 뒤돌아서는, 등 뒤에서 깨무는, 피처럼 붉은, 당신이란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 아름다운 여자는 조금씩 사라졌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위해 눈과 코를 지우고
형용사처럼 혀를 버리는 것
사라지는 여자의 눈썹이 서늘하다
어느 쪽이 슬픔의 정면인지
하루가 백년 같은 뜨거운 이마
당신과 내가 삼켜버린 낡은 입술들,
한 입술과 한 입술이 쌓인다,
고요하다 입술들은,
울음과 울음이 겹쳐진다,
캄캄하다
* 제주 출생, ≪문학과 비평≫(1990) 겨울호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한양대, 홍익대,
협성대 출강, anna2121@naver.com
위독
김 왕 노*
위독은 거대한 짐승입니다.
위독한 사이 철학자가 되기도 하고 울부짖는 얼굴이 되기도 합니다.
숨겼던 진실을 각혈하듯 게워내기도 합니다.
위독한 자는 심연에 가라앉은 고래가 되어 잠들지 않는 뇌로 우주를 명상하기도 합니다. 위독하다는 소식이 짐승 한 마리로 먼 길을 밤새워 왔을 때 나는 날 간 같은 영혼을 던져주려 했습니다.
살 몇 근 거뜬히 베어주려 했습니다.
일생에 몇 번 위독이란 짐승이 되었을 때
스스로의 살점을 녹여 생의 뼈마디가 드러나게 한답니다.
무엇을 지탱하기 위해 살가죽을 밀며 드러나는 뼈마디들인지
죄마저 끝까지 버티게 해주는 뼈마디의 의도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결국 죽음 속으로 무너져갔으면서도 왜 쉬 삭아 내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관속의 어둠을 견디는 뼈인지
후략의 말 뒤에 무엇을 덧보태고 싶은지 스스로 묻기도 한답니다.
멀리서 그대 위독이란 짐승이 되어 누워있습니다.
그대에게서 철철 쏟아져 내리는 마지막 말들이 자귀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미루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창밖의 계절은 독 오른 듯 푸르다는데
그대 이제 이승의 살점 다 갉아먹고 뼈만 앙상해진 위독이란 짐승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다 말라가 피골이 상접한 짐승
그러나 지금은 본성이 살아나 밤하늘을 향해 우우 울부짖는
지상의 마지막 순결한 한 마리 짐승
나마저 화답해 우우 우는 밤이 산맥을 넘어 강을 건너
저렇게 성큼성큼 옵니다.
꿈의 체인점
산다는 것이 따분하거나
눈물나면
신종사업을 원하거나
안전하고 탄탄한 사업을 원한다면
이곳으로 오라
봄이면 바람에 휘날리는 배꽃
아침이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새떼
홍건히 고여 냇물처럼 흘러가는 푸른 달빛 사이
몇 백년 묵은 소나무 숲 사이
꿈의 체인점이 있다
방안에 흑백 TV 한 대
나무 기러기 한 쌍
송사리 떼가 헤엄치는 작은 어항
고만고만하게 모여
손때 붇고 길들여지며 먼지를 덮어쓰기도 하지만
걸레질할 때마다 당당해지는 그들
방문 왈칵 열고 들어오는
텃밭의 파꽃냄새 미치도록 진동하는
조그만 꿈의 체인점이 있다
이곳에 오면
사랑이 샘물처럼 퐁퐁 솟는 꿈의 체인점이 있다
이곳에 오면
신속히 수선되거나 갈아 끼워지는 당신의 꿈
새살이 돋아나는 당신의 꿈
꿈속 가득 들어찬 바람도 피고름도 말끔히 짜준다
푸드득 날아오르는 잿빛 비둘기
패랭이꽃 언덕도 가꾸어 준다
이 근처에 오면
거친 꿈의 면을 손질하는
톱밥도 휘날린다
일이 밀린 목재소처럼
밤새 불이 켜져 있기도 한다
주문을 하며
숲속으로 드나드는 족제비처럼 신속히 배달도 나간다
휴전선을 국경선을 넘어 배달도 나간다
우리의 사업은 세계적으로 번창해야 하니까
앞으로 전망이 좋으니까
비도 바람도 무릅쓰고 배달 나간다
당신이 이곳에 와 별을 원하면
당신의 녹슨 하늘을 닦아
지금도 생생한 오리온좌를 큰곰자리를
견우와 직녀성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이 깨어진 술병처럼 날이 서
누군가의 발바닥을 찌르거나
헌 비닐봉지처럼 이리저리 뒹굴 때
당신의 불면 속으로
질 좋은 석탄 같은 잠을 화석 같은 잠을
수십 삽 퍼넣어줄 것이다
화력 좋은 꿈에 불도 당겨줄 것이다
이제 이 꿈의 체인점으로 오라
정 바쁘시다면 당신의 집 가까이서 찾아보라
당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다
분명 당신의 집 근처에서
꿈의 체인점은 성업중일 것이다.
* 경북 포항 출생, 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6인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2002), 말달리자 아버지(2006),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2003), 제7회 박인환 문학상(2006), 제3회 지리산 문학상(2008) 수상, 글발 동인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김 승 기*
당신이 지나고 있네
풀잎을 밟으시면 풀잎 소리로
대밭을 밟으시면 댓잎 소리로...
저기 당신이 지나고 있네
그 언젠가 당신이 나를 지나가실 때
으스러지게 당신을 껴안았더니
너무나도 어지럽던 그 밤
끝내 긴 울음으로 당신을 배워
당신이, 내 여름을 지나가시면
까끌까끌한 볏잎 소리로
내 가을을 지나가시면
누런 벌판의 그 술렁거림으로
눈감고 가만히
당신이 지나가시는 소리
오늘은 내 창을 흔들어 지나가시기에
온 등(燈) 밝혀 가난한 밤을 맞으니
내 가슴, 당신 지나가는 소리
당신 가슴, 내 지나가는 소리
철로처럼
둘이서.
나란히.
어쩌다
메아리가 그리울 때면
잠시, 옆을 바라면 된다
그때마다 반갑게
달려와 주는 미소.
간간이, 그들을 덮치며
삶이란 기다란 기차가
밝은 창을 달고 지나가고
둘은 서로
지그시 손을 잡고
자신의 등에 힘을 준다.
한참을
그렇게, 그렇게
가다가는
정말로 지친다 싶으면
그들은 간이역을 찾아든다
추워진 가슴을 풀어
갈증의 거리를 둥글게 끌어안고
뜨겁게, 뜨겁게
하나가 된다.
아침이면 다시 잉태된
말간 평행선 하나
서로에 기대지 않는
성숙한 바라봄은
자신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인 듯
둘이서,
죽 뻗어간 그 뒷모습이
환하다.
* 경기 화성 출생, ≪리토피아≫(2003)로 등단,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
kimsnpc@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