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한 레시피’를 가진 진화하는 가족
- 손현주, 『불량한 레시피』, 문학동네, 2011.
서 혜 지*
‘가족’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빠질래야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화두이다.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핵가족이라는 가족형태가 대부분 가족의 틀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런 핵가족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돈과 폭력 등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현실에 살고 있다. 그동안 가족안에서 부모는 자식의 탄생과 성장을 위한 책임을 지고, 또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를 다 하는 것이 인간이 생각해 낸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의 율법이며 당연한 일도 인식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가족구성원간의 정신적 분리는 위험 수위에 이르렀으며, 가족은 이기주의와 불평등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제1회 문학동네 청소년 문학상 수장작인 불량가족 레시피는 가족이 정서적 안정을 주는 보호처라는 신화는 해체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갈등 그로 인한 폭력으로 가족은 해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고등학교 1학년 ‘권여울’이라는 소녀의 입을 빌려 위태롭고 불량한 가족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방황하는 청소년의 정체성과 가족해체, 계급과 계층간의 불균형 등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작중화자인 고등학교 1학년 여울이는 도덕 수행평가를 위해 가족을 중심으로 자서전을 써야 하지만, 위태로운 가족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쓸 만큼 가족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이 없다. 일본에서 여학교까지 나왔지만 아들과 손주들 치닥거리에 골병든 여든 셋의 할머니, 채권추심 하청일을 하는 바람기 많고 때론 폭력적이기까지 한 아빠, 다발경화증으로 괄약근을 마음대로 조이지 못해 스물한 살에도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대학생 오빠, 표독스런 성격의 고3 수험생 언니, 이혼한 아내에게 남은 재산과 아이를 빼앗기고 주식에 올인하다 뇌경색이 된 쉰 가까운 삼촌까지 그야말로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불량한 레시피를 지닌 가족이다.
우리 가족은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이지만 알고 보면 핵가족 보다 더 삭막하다. 서로 원해서 대가족으로 지내는 게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남매들은 그저 적당한 거리를 두며 필요할 때만 가족처럼 군다. (… 중략 …) 도덕 꼴통의 말을 빌리면 가족 간의 유대도 경쟁력이라고 하던데, 우리 가족은 밥 먹기 위해 유대 관계를 맺고 경쟁력이라고 하던데, 우리 가족은 밥 먹기 위해 유대 관계를 맺고 집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뭉쳐사는 것 같다. 한마디로 돈으로 뭉치고 돈으로 흩어지는 위태로운 가족이다. (16쪽)
거기에 오빠와 언니, 나는 각기 엄마가 다른 핏줄이 반반씩 섞인 형제들로 고3 수험생인 언니는 여울이만 보면 욕을 해대며 할머니는 ‘송장 칠 나이에 똥걸레 빨게 한 년’이란 말을 퍼붓고 자식에게 망설임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있는 이 가족은 여울이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들일 뿐이다. 여울이의 말대로 ‘집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울이는 하루 빨리 가족을 벗어날 날만 고대하며 ‘완벽한 출가를 위한 지침서’ 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하지만 아직 여건이 되지 않아 ‘출가’를 할 수 없는 여울이에게 남과 다름없는 가족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는 ‘코스(코스튬플레이)’이다. 여울이는 마법에 걸린 ‘피오나 공주’ 처럼 깨어나고 싶지 않은 마법같은 ‘코스’를 하면서 그곳의 사람들에게서 소속감을 느끼고 해방감을 느낀다.
“저는 오늘 영화 <슈렉>의 주인공인 피오나 공주를 선택했어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피오나는 마법이 풀리는 순간 공주에서 아주 평범한 여자로 돌아가죠. 그 점이 다른 공주들과 달라서 매력을 느꼈어요. 마법이 풀리는 순간 오히려 피오나는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고단한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으니까요.”
여울이는 ‘코스’를 통해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안정되어 있지 않고 자신 을 지켜주지 못하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마법이 풀리지 않는 피오나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희망적인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여울이에게 모여 살기만 했지 이미 해체된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가족은 결국은 이제 가족이라서 같이 산다는 말도 하지 못하게 아주 해체 되고 만다. 가출하려고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여울이를 제치고, 오빠, 언니, 삼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을 떠나는 것이다. 고3인 언니가 그림을 배우러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하는 데 아빠는 화만 내고 말아 그길로 언니는 가출을 하고 삼촌 역시 일하는 돈도 주지 않고 자신이 돈 있을 때는 자기한테 들러붙고 싶어하더니 사람을 무시하냐며 결국 가출을 하고 만다. 21살에 기저귀를 차고 있는 오빠 역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를 떠나 가출을 감행한다. 채권추심일을 하던 아빠도 채권추심 정보 유출로 감옥에 가고 할머니와 여울이만 남는다. 지긋지긋하던 가족이 결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해체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보여준다. 언제라도 가족을 버리고 살기 편한 곳으로 갈 것 같던 할머니가 편하게 살 곳인 이모할머니를 따라 가지 않고 월세로 살던 40평 아파트를 떠나 여울이와 12평 임대주택에서 살기로 하면서 진정성이 있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보여준다. 가족들이 완전히 흩어지게 되자 ‘위태로운 가장’이 된 여울이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했던 가족들과 헤어지는 순간, 이제는 모든 게 홀가분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토록 떨쳐버리고 싶었던 가족이라는 둘레를 그리워하는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이제 나는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위태로운 가장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수염이 하얗게 뒤덮여서야 나올 아빠를, 나만 보면 욕쟁이로 변하는 저주받은 입을 가진 언니를, 기저귀를 차고 하얀 이를 드러내면 싱거운 웃음을 날리는 오빠를, 내게 가장 호의적인 뇌경색 삼촌을, 그리고 내 가슴속에서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춤을 추는 엄마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것이 고통이라 해도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이제야 말로 ‘돈’이 아닌 가족간의 의지로 만들어져 끈끈한 유대관계가 바탕이 된 가족을 이루어 나가리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위해 설렁탕을 사식으로 넣어주고, 쓰러진 할머니를 위해 흰죽을 쑤어주며, 가장이 된 여울이는 가족을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늘 불안한 오르내림을 거듭해야 하는 청소년의 속내를 비치는 것도 모자라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의 파괴를 겪어야 하는 세상의 속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손현주의 불량가족 레시피는 심드렁한 고1 여학생의 말투로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낄낄대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여울이는 여든 넘은 할매의 거친 욕설 뒤에 숨겨진 사랑과 서로 무관심하지만 보이지 않는 줄로 얽혀 있는 가족들의 관계 속에 큰다. 이들 가족은 서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욕만 일삼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따뜻한 온기가 있기도 하다. 자식이나 동생에게 폭력적인 아버지가 아프신 어머니를 위해 순대국을 사오기도 하며, 속만 섞이다가 가출한 자식은 홍삼엑기스를 사오고, 조카에게 용돈을 주기도 한다. 이미 해체된 가족이지만 한 가닥의 희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없이 위태로운 불량 가족이지만 이제 이 ‘가족의 진화’가 필요하다. 이렇듯 위태로운 가족은 여울이와 함께 진화하는 중이다.
2008년 국제 신춘 문예에 단편으로 등단에 2009년엔 문학사상사 신인상을 수상했고, 2010년에는 평사리문학대상과 제1회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까지 수상한 손현주의 진화 과정 또한 기대가 된다.
* 대전 출생, 충남대 문학박사 과정 수료, 문학평론가, akoako040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