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나는 여인(1971)-남미랑
이별도 서러운데 꽃은 왜 피나
이별도 서러운데 새는 왜 우나
비를 맞으며 걷는 발길
내 마음도 구슬퍼
정을 주고 정을 받고 사랑했는데
돌아서는 내 마음은 너무 쓰라려
추억 속에 흐느끼며 떠나는 여인
*이별도 서러운데 새는 왜 우나
이별도 서러운데 바람은 부나
비를 맞으며 걷는 발길
내 마음도 외로워
가는 정도 오는 정도 서로 아쉬워
헤어지는 발길 따라 비는 왜 오나
아쉬움에 흐느끼며 떠나는 여인.
정주희:작사 / 작곡
청령포에서
무엇인가 나는 - 김명숙
기어간다 하찮다고 말하여지는
비가 내리는 한낮
아스팔트길을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지렁이가 기어간다
그냥두면 질주하는 차량에
덜미를 잡혀 죽움으로 이끌릴 것이다
모르고, 아니 어쩌면 그것을
각오하고 하는 일인지도 모르지
그는 길을 따라
제 살 데를 향해 쉬지않고 움직이다
그곳은 위험하다고
방향이 틀렸다고 가르쳐 주고 싶다
그러나 하찮은 벌레 하나쯤이야
그를 비웃으며
그냥 지나쳐 온다
지나쳐 오면서 이 뜨거움
나는 무엇인가
더 많은 그들의 삶이
상처투성이인 세상을 치유하여 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인 것을
하찮다고 비웃으며
보이지 않는 어둠의 길로
헐떡이며 이끌려 가는
책갈피속의 잠-김명숙 시집 -p16-
제1부
총 설
한말 영·호남 지역 의병 전쟁과 의병장
1. 영남 지역의 의병전쟁
2. 호남 지역의 의병전쟁
3. 영·호남 의병의 특성과 의의
이황룡(李黃龍, 1886~1910)은 전북 순창 사람이다. 그는 소금과 누룩을 판매하는 상인이었
으나, 조국이 망국적 상황에 처하자 분연히 의병에 투신하였다. 1908년 8월에 양윤숙(楊允淑)
의병장과 그 휘하에서 활동하던 중군장 최산흥(崔山興)의 의진에 가담한 뒤 2∼3개월 동안 순
창군 일대에서 항일전을 펼쳤다. 같은 해 8월에는 순창과 임실의 경계인 갈치에서 순창주재소
소속 박경홍(朴京弘)과 조우, 김희중(金希仲)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그를 사살한 뒤 체포되었
다. 1910년 1월 1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
고 같은 해 3월 3일에 대구공소원과 4월 14일에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순국하였다11.2)
이복근(李復根, 1879~1910)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박사화(朴士化)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
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박사화는 1908년 2월에 심남일(沈南一) 의진에 참가하여 중군장으
로 활약한 이후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여 같은 해 10월에 전남 능주에서 일군과 교전하는
등 1909년 가을까지 전남 나주·영산포·영암 등지에서 1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일 항전
을 계속하였다. 이복근은 박사화 의진에 소속되어 1909년 6월에 나주군 욱곡면 방축동에서 일
본 헌병과 보조원 4명을 기습 공격하여 헌병 1명을 부상시키고 보조원 1명을 사살하는 등 전공
을 세웠다. 또한 7월에는 영암군 종남면 화수동에서 친일 동장 김치수(金致水)를 처단하였으
며, 지도군 압해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2월 19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소위 폭동, 살인 등으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이 해
3월 29일에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됨으로써 4월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11.3)
이원오(李元吾, 1877~1910)는 충남 공주 사람이다. 이원오는 1908년 음력 10월에 조경환
의진에 들어가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전남 광산·함평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좌익장으로 활
약하였다. 이후 1908년에 의병장으로 추대된 조경환은 그 해 4월에 전해산 의진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이원오는 1909년 1월에 조경환 의병장이 일
본군과 교전 중 전사한 후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다가 같은 해 음력 6월 12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1910년 2월 24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4월 22일에 기각, 형
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114)
112)
113)
114)
판결문(1910. 1 . 12.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1910. 3. 3. 대구공소원 : 1910. 4. 14,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773~775·877~879쪽.
판결문(1910. 2. 19. 대구공소원).
판결문(1910. 2. 24. 대구공소원 : 1910. 4. 22,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정원국(鄭元局, 1876~1909)은 1909년 1월 1일에서 2일에 걸쳐 전북 전주군 구이동면 및
임실군 상신면 관내에서 부하 4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김선문(金善文) 외 6명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한 후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듬해 2월 24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
서 소위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그해 4월 24일에 대구공소원, 5월 14일
에 대심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115)
황준성(黃俊聖, 1879~1910)은 전북 진안 사람이다. 구 한국군 참령(參領) 출신으로 일제
의 강제에 의해서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대하여 항쟁하다가 체포되었다. 내란죄 명목으로
그 해 12월 25일에 평리원(平理院)에서 유배형 10년을 선고받고 전라남도 완도에서 유배 생
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일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강성택(姜成宅)과 1909년 6월에 유배지
를 탈출, 강성택 휘하의 의병과 함께 총으로 무장하고 완도·해남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
는 그 해 7월에 추공엽(秋珙燁)·황두일(黃斗一)의 의병 부대와 합류, 대장으로 추대되어 강
성택·추공엽 등을 부장으로 임명하고 휘하의 의병 150여 명으로 부대를 정비하였다. 완도
에서 4개 리의 이장을 소집하여 의병 자금을 모집하고, 해남에서 일진회원과 일본 헌병의 밀
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대둔사(大屯寺)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야습을 받아 의
병 부대가 해체되자 숨어 지내다가 1909년 12월에 붙잡혔다. 1910년 2월 26일에 광주지방법
원 목포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3월 19일에 대구공소원에서, 4월 2일에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116)
양진여(梁振汝, 1862~1910)는 전라남도 광주 출신이다. 의병장 양상기(梁相基)의 아버지
로 주막업을 하였다. 1908년 음력 7월 20일 무렵 구한국 군인 출신인 아들과 함께 광주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박성일(朴聖日)·김익지(金益之)
등으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1908년 11월 중순에 광주의 대치산에
서 일본 수비대와 혈전을 전개하였다. 11월 24일에는 다른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추월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09년에는 부하 100명을 이끌고 강판렬(姜判烈) 부대 및 전
해산(全海山)의 의병 부대 270명과 더불어 장성·담양을 습격하고, 뒤이어 일본군의 본거지
115)
116)
판결문(1910. 2. 24.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1910. 4. 24. 대구공소원, 1910. 5. 14. 대심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575∼579쪽.
판결문(1910. 2. 26.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 : 1910. 3. 19. 대구공소원 : 1910. 4. 22.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인 광주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 대병력이 배치되어 계획을 중단하였다. 그 해 10월에
그는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체포되고 말았다. 1910년
3월 5일에 소위 ‘내란죄’로 대구복심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4월 8일에
기각되어 5월 30일에 순국하였다.117)
이중백(李仲伯, 1878~1910)은 전남 장성 사람이다. 1907년 이래 기삼연(奇參衍) 의진, 박
도경(朴道京) 의진 등에 소속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중백은
기삼연 의병장의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여 종사(從事)의 직임을 맡아 대일 항쟁을 전개하
였다. 1908년 초에 기삼연 의병장이 체포되어 순국하자 박도경 의병장의 휘하에서 대일 항
전을 계속하였다. 이중백은 박도경 의진 소속의 100여 군사들과 함께 전북 고창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리고 1908년 8월에는 김여회(金汝會) 의병장의 의진
에 소속되어 제4초 십장을 맡아 전남 장성, 전북 순창 등지에서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는 1909년에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독자적으로 소규모의 의진을 편성하고 밀고자를 처단
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5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소위 ‘폭동, 살인’ 등으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4월 14일에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었고 이 해 5월에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118)
이강산(李江山, 1874~1910)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함평에서 박
치일·정인술·박장봉·서성학·양창국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김태원(金泰元) 휘하
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4월에 의병장 김태원이 순국한 뒤 심남일 부대에서 부장으로 활동
하였다. 1909년 8월에 함평·영광 각 지역에서 접전한 뒤 나주의 헌병분파소 및 구례의 파
견대 소속 헌병보조원과 밀정인 이판안(李判安)·김정태(金正泰)·최치도(崔致道)·박복남
(朴福男) 등이 이양삼(李良三)의 주막에 모여 있는 것을 탐지하였다. 이들은 평소에 의병 활
동을 방해해 오던 인물들이었다. 이강산은 함께 동행하였던 박치일·정인술·박장봉·서성
학 등에게 작전을 지시하여 이판안·김정태·최치도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박복남을 산중으
로 연행하여 살해하였다. 그 후 그는 의병을 해산하고 귀순하였다가 밀정을 살인한 일로 체
포되었다. 1909년 12월 25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죄[謀殺罪]’로 교수형
117)
118)
판결문(1910. 3. 5. 대구공소원 : 1910. 4. 13.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94~895쪽.
판결문(1910. 3. 5. 대구공소원 : 1910. 4. 14.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19~821·890~891쪽.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이 선고되어 항소하였으나 1910년 3월 8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
에 항소하였으나 4월 27일에 역시 기각되었다. 1910년 6월 6일에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와 함께 활동한 박치일(朴致一)·
정인술(鄭寅述)·박장봉(朴章奉)·서성학(徐成學)·양창국(梁昌國) 등도 그와 함께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119)
양윤숙(楊允淑, 1875~1910)은 전북 순창 출신이다. 1906년에 최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의
병을 일으키자 호응하여 참가하였으나 남원 전투에서 최익현이 체포되어 실패하자 귀가, 은신
하였다. 1907년의 군대 해산 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08년에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의
뒷산인 회문산(回文山)에서 ‘의격문(義檄文)’을 발표하고 의병을 봉기하였다. 자신이 도총독(都
總督)이 되었으며, 중군장에 최산흥(崔山興), 후군장에 이국찬(李國贊), 좌선봉에 최화(崔華),
향관(餉官)에 서기협(徐基俠), 우선봉에 임순호(任恂鎬), 교련관에 한자선(韓自善)을 임명하였
다. 그는 1908년 음력 8월에 향관(餉官) 서기협으로 하여금 부하 22명을 인솔하여 순창군 무림
면 화암리에서 일본군 순창수비대 및 헌병대와 교전하게 하여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음력 9
월에는 중군 최산흥이 40여 명을 인솔하고 구림면 국화촌에서 남원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다시 1909년 음력 정월에는 후군장 이국찬(李國贊)이 12명의 병력으로 서면 죽전리의 순창수
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고, 음력 2월에는 교련관 한자선(韓自善)이 병력 30명을 인솔하고 회
문산 기슭 산내리에서 순창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다. 또 1908년 11월에는 최산흥이 60명
의 병력으로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의 일본군 기병대가 사용하는 민가를 습격하여 소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가을에 일본군의 소위 호남의병대토벌로 거점을 상실하고 은신하였다
가 12월 23일에 김제군 월산면 봉월리에서 ‘피노리수비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9일
에 광주지법 전주지청에서 ‘내란·방화’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120)
김선여(金善汝, 1875~1910)는 전북 순창 사람이다. 1908년 4월에 신보현(申甫鉉) 의진에 투
신하여 좌익장 및 선봉장으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9년 3월에 신보현 의진에서 독립하여 전
라북도 순창군 백방산에서 김재화(金在化)·김응선(金應先) 등 의병 40여 명을 모집하여 같은
해 11월까지 총기 30여 자루와 칼 3개를 휴대하고 순창, 담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
119)
120)
판결문(1910. 3. 8. 대구공소원 : 1910. 4. 27.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845~849쪽.
판결문(1910. 3. 9.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67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88~889쪽
는 일본군과의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의병 활동을 빙자하여 금품을 약탈하고 악행
을 일삼은 자들을 총살·처단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09년 6월 27일에 신보현의 부
하인 유종여(柳鍾汝)가 부하인 김여회(金汝會)를 살해하고 각지에서 금품을 탈취하고 부녀
를 강간하였음을 알고 부하 40명을 동원하여 순창군 상치등면 구산리에서 그를 체포하여 처
형하였다. 또한 7월 7일에는 유종여와 함께 강도와 부녀 강간의 행위를 한 정삼차(鄭三次)라
는 자를 체포하여 사살하여 의병의 대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활동으로 체포되어
1910년 3월 17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폭동·살인’죄로 교수형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0
년 4월 21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이에 다시 상고하였으나 5월 19일에 고등법원에
서 최종 기각됨에 따라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121)
손덕오(孫德五, 1867∼1910)는 전남 보성 출신이다. 목수직에 종사하다가, 1908년 2월 무
렵에 안규홍(安圭洪)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휘하에서 도포장(都砲將)·좌우포장(左右砲將)·
좌우익장(左右翼將) 등을 차례로 맡았다. 그는 1908년 4월에 안규홍의 지시를 받고 염인서
(廉仁瑞) 등 동료 의병 30여 명과 함께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는 의병대장 강용언(姜龍彦)을
총살하였다. 이후 안규홍을 의병장에 추대하여 주민의 생존권 보호에 역점을 둔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9월에는 염인서·정기찬(鄭奇贊) 등과 함께 순천 낙서면 상고리로 가
서 일진회원 이용서(李用西)를 체포, 처형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안규홍 의병대원으로 일본
군경의 통치 기구나 숙소, 재무서 등을 공격하였으며, 일본인과 일진회원, 세금영수원 등을
처단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9월 말에 일본군의 대규모 호남의병 학살 작전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듬해인 1910년 3월 29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6월 2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
원에 항소하였으나 6월 21일에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염인서도 함께 체포되어 모두 교수형
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122)
정기찬(鄭奇贊, 1880~1910)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08년 2월 무렵에 안규홍(安圭洪)이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호응하여 그 휘하에서 포군십장·월군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08년
5월 초순에 안규홍의 지시를 받고 일진회원 염영화(廉永化)가 의병 활동을 일본 관헌에게 밀
121)
122)
판결문(1910. 4. 21. 대구공소원 : 1910. 5. 19,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783~785쪽.
판결문(1910. 6. 2. 대구공소원 : 1910. 6. 21.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840~842쪽 ; 홍영기,
「안규홍의병의 조직과 그 활동」, 『한국학보』 49, 1987.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고한 혐의를 확인하고 보성 법화촌에서 총살하였다. 같은 해 9월에도 역시 손덕오와 함께 순
천 낙서면 상고리로 가서 양민으로부터 재물을 탈취하던 일진회원 이용서(李用西)를 체포,
참살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9월 말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10년 3월 29일
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6월 2일에 대구
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6월 21일에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123)
양상기(梁相基, 1883~1910)는 전남 광주 출신으로 의병장 양진여(梁振汝)의 아들이다. 양
상기는 한국 진위대(鎭衛隊) 병사 출신으로 1907년 8월의 군대 해산으로 광주(光州) 경찰서
에 근무하게 되었으나 부친 양진여가 의병장으로 항쟁하고 있었으므로 파면되었다. 그는 의
병에 투신하여 1909년 2월 9일에 30명의 병력으로 담양군 우산면 신기리 거주 안판구로부
터 군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같은 날 다른 일부는 창평군 지곡리 거주 김 아무개[金某]를 비롯
한 동민으로부터 군자금을 거출하였다. 1909년 2월 26일에도 동복군 외남면 동천동에서 다
시 군자금을 거출하였으며, 같은 달에 담양군 서기 한응길을 체포하고 군자금을 제공케 하였다.
그는 1909년 4월에 담양군 정면 덕곡리 전투에서 패전하여 체포되었고, 1910년에 대구형무
소에서 소위 ‘내란·폭동’ 등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124)
유병기(劉秉淇, 1883~1910)는 전남 구례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서 송병선(宋秉璿)의 문하
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 봄에 백낙구(白樂九) 등과 함께 함평군 나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나산을 거점으로 담양·영광·장성·창평·광주·동복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특
히 창평 전투에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1907년 9월 중순에 흥덕군 사진포에 사는 일본
인 가옥 3동을 소각하였으며, 11월에도 함평 읍내의 일본인 가옥 3동도 소각하였다. 12월에
는 동복 신평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3명을 사살하였다. 또 1908년 2월 2일에 창평군 무등
촌에서 교전하여 일본군 여러 명을 사살하고, 쌍안경 1개·단총 1개·군도 1자루를 노획하였
다. 2월 21일에는 장성군 남이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나 본인도 오른쪽
팔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3월 14일에는 영광군 봉산면에서 접전하여 일본군 기병 중위 수가
이(管井) 외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3월에는 또 나주군 용진산(龍津山)에서 격전을 벌여 큰
123)
124)
판결문(1910. 6. 2. 대구공소원 : 1910. 6. 21.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3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40~842쪽 ;
홍영기, 앞의 논문.
판결문(1910. 5. 17. 대구공소원 : 1910. 6. 16.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484·532·538쪽.
타격을 입혔다. 4월 중순에는 순창 산막에서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접전 중에 후군장
백낙구가 전사하였다. 5월 30일에 창평 용흥사(龍興寺)에서 접전하였으나 크게 참패하였다.
이때 기포장 조기영이 전사하고, 유병기는 왼쪽 팔과 왼편 복부에 다시 총상을 입었다. 총상
을 입은 후 치료에 힘쓰다가 후에 다시 양상기(梁相基) 의진의 참모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양상기와의 견해 차이로 의진을 탈퇴하였다. 그 후 재거를 꾀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910년 3월 29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17
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910년 6월 16일에 기각되
고 그대로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125)
양윤택(楊允澤, 1876~1947)은 전북 순창 출신이다. 1908년 7월에 순창군 호계면에서 화
승총 1자루를 의병장인 형 양윤숙(楊允淑)에게 공급하는 한편 일본 수비대, 경찰서, 헌병 등
의 의병 토벌 작전 및 동태에 관한 정보를 의진에게 통보하여 의병 활동을 도와주었다. 1909
년 12월 3일에 양윤숙이 일본 헌병대에 잡혔을 때 함께 체포되어 1910년 6월 20일에 광주지
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년에 처해졌다. 항소하였으나 대구공소원에서 7월 19일에 형
이 그대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126)
임하중(林夏仲, 1869~1910)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농민 출신으로 1908년 3월 무렵에
안규홍(安圭洪)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의병 부대에서 도십장(都什長)·운량관(運糧官)
등을 맡아 의병장 안규홍과 함께 1909년 8월 무렵까지 보성·장흥·동복·순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3월에는 보성군 봉동에 살던 일진회원 박봉조(朴鳳朝)를 잡아 곤봉으
로 주살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선봉장 임창모(林昌模)와 함께 장흥군 회령면 정리에
거주하던 문남서(文南瑞)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남한폭도 대토벌 작
전’이 벌어지던 기간인 1909년 9월 18일에 부하 30여명과 함께 보성에서 체포되었다. 1910
년 3월 30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동 및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
하였으나 같은 해 6월 9일에 대구공소원에서, 6월 27일에는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순국
하고 말았다.127)
125)
126)
127)
판결문(1910. 5. 17. 대구공소원 : 1910. 6. 16 고등법원)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965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85~887쪽.
판결문(1910. 6. 20.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 : 1910. 7. 19.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87~888쪽.
판결문(1910. 6. 9. 대구공소원 : 1910. 6. 27.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875~877쪽 ; 독립유공자호남
유족회,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전수용(全垂鏞, 1879~1910)은 전북 임실 출신이다. 본명은 기홍(基洪)이고, 수용은 그의
자이며, 호는 해산(海山)이다. 1878년에 전라북도 임실군 남면 국화촌 호전동(菊花村 狐田
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서와 역사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잘하
였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전수용은 그해 겨울 이석용(李錫庸)
과 같이 전북 남원에서 기병하였다. 그는 김태원 사후 오성술(吳聖述)과 연합하여 나주 도림
에 주둔하였다가, 사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8년 6월에는 정원집(鄭元執) 의
병진을 받아들여 진용을 확장하였다. 그해 7월 29일에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첫 전투는 영광 불갑산 전투였다. 7월 25일에 삽시간에 일본군에
게 포위당하자, 선봉장이 천보총을 쏘아 두어 명을 사살하고 곧이어 선치에서 매복하였다가
적을 유인하여 기마병들을 죽이고 무기를 포획하였다. 한편 일진회를 경계하여 변영서(邊永
瑞)·박기춘(朴基春) 등 일진회원을 총살시켰다. 그러나 순종의 의병 해산령과 함께 1909년
4월에 영광 오동, 덕흥 전투에서 잇따라 패한 뒤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후 남원에 은신하다
가 조두환의 밀고로 그해 12월에 체포되었으며, 이듬해인 1910년 7월 9일에 교수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128)
김치홍(金致洪, 1880~1910)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1908년 10월에 심남일(沈南一) 의병진
에 가담하여 기군장(起軍將)에 선임되어 영광·능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1월에는
박민홍(朴民洪) 의병 부대의 제1초 십장(什長)에 임명되어 총기 15자루를 갖추고 부하 30여
명을 인솔하여 나주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같은 해 4월에는 박사화
(朴士化) 부대의 제1초 십장에 임명되어 무장한 부하 26명을 거느리고 영암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영산포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1910년 6월 13일
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3일에 대구공소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사형을 당해 순국하였다.129)
장인초(張仁初, 1877∼1910)는 전라남도 화순의 목수 출신이다. 1909년 2월 무렵에 안규
홍(安圭洪) 의병 부대의 선봉장이 되어 의병 80∼90명과 함께 보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28)
129)
판결문(1910. 7. 9. 대구공소원 : 1910. 8. 20.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913~916쪽.
판결문(1910. 7. 23.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12~813쪽.
그는 안규홍의 지시를 받아 염인서(廉仁瑞)·염군명(廉君明)·임하중(林夏中) 등과 함께 양
민의 재물을 탈취한 보성군 봉동에 거주하는 박봉조를 처단하였으며, 민가에 은닉된 총기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9년 음력 5월 말에는 심남일(沈南一) 의병 부대의 선봉장으로
옮겨가 의병 100여 명과 함께 장흥·강진·보성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
벌작전’ 기간인 9월에 붙잡혔다. 1910년 6월 28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폭동 및 강도·살인’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8월 20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
했으나 9월 15일에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130)
이세창(李世昌, 1882~1910)은 전남 장흥군 장서면의 농민 출신이다. 그는 1908년 음력 9
월 11일부터 심남일 의병에 들어가 장흥과 영광, 보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8년 음
력 11월 무렵에 장흥의 장서면 공전영수원 문내현이 징수를 가혹하게 함에 살해를 기도하였
다. 1909년 음력 3월 6일에는 장흥의 장동면장 겸 공전(公錢)영수원인 정창현이 징수를 가
혹하게 하고 그 아들 정한익이 일본어를 연구함에 살해하였다. 그는 또한 중군장 안찬재 등
수십 명의 의병과 함께 1909년 음력 3월 2일에 장동면 우치리에서 안덕삼 집에 들어가 엽전
300냥을 수합하였다. 같은 해 음력 4월 21일 무렵에는 강무경 등 40여명의 의병과 함께 보
성군 노동면 봉화촌의 박선경 집에서 엽전 30냥 등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그는 이로 인해 체
포되어 1910년 5월 24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9월 6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순국하였다.131)
김응백(金應伯, 1870~1910)은 전남 광양 사람이다. 황영문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시
작하였다. 1908년 8월 5일에 황영문 의병장의 지휘 아래 의병 150여 명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
하고 광양군 진하면 망덕리에 들어가 그 마을에 거주하는 일본인 이시다(石田耕作)와 수미노
(角野仁平)의 집을 포위하고 수미노 및 그의 가족 4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가옥에 석
유를 뿌리고 방화하여 소각시켰다. 같은 해 7, 8월 무렵 그는 같은 면 진목정 안윤석(安潤錫)으
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동지 강치선(姜致善)·고운서(高雲西) 외 2명과
함께 1908년 12월부터 1910년 1월까지 같은 군 진상면 비촌 황병욱(黃炳郁) 집에서 군자금을 징
130)
131)
판결문(1910. 8. 20. 대구공소원 : 1910. 9. 15.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98~900쪽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2004.
판결문(1910. 9. 6.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850~853쪽.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수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10년 10월 26일에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
고 항소하였으나, 11월 22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1.32)
국호남(鞠湖南, 1881~1912)은 전북 흥덕군 동일면 출신의 농민이다.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9년 3월 7일에 흥덕군 북면 사포의 일본인 히라이(平井德藏) 집을 습격하여
가족을 죽이고 가옥을 소각하였다. 5월 30일에는 고부군 거마면의 일본인 오모리(大森
五郞吉) 집을 습격하여 13년식 보병총 3자루 외 6점을 탈취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
어 광주감옥 군산분감에 구금 중이던 1910년 10월 26일에 탈출하였으나 다시 체포되었
다. 1910년 11월 30일에 광주지방재판소 군산지부에서 궐석재판으로 교수형을 선고되
었고, 1912년 4월 2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항소하였으나 5월
28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상고하였으나 6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
어 순국하였다.133)
김선중(金善仲, 1885~1912)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박사과(朴士果) 의진에 가담하여 전남 영
암·나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1909년 음력 5월 무렵 박사과 의병장의 지휘 아래 전남
나주군 방추목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접전하였다. 이 때 헌병보조원 1명을 사살하는 등 항일 무
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12년 1월 16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을 받고 상
고하였으나, 같은 해 2월 13일에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1.34)
김필수(金必洙, 1875~1913)는 전북 김제 출신이다. 1908년 음력 9월부터 1912년 12월까지
전북 진안·장수·임실 등지에서 이석용(李錫庸) 의진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석용 부대의 일
원으로 1908년 음력 9월 6일에 여운서(呂云西)와 함께 일본 헌병의 밀정 김관일(金寬日)을
처단하였고, 1911년 4월 14일에는 이석용 외 4명과 함께 김제군 일서면(一西面)의 공전영수
원(公錢領收員) 이돈일(李敦逸)로부터 징수한 세금 64원을 모금하였다. 1912년 2월 2일에는
송판구(宋判九)·조영국(趙永國)·김순보(金順甫) 외 5명과 함께 장수군 수서면 매암리 이
상일(李相一)로부터 군자금 28원을 모금하였다. 같은 날 장수군 진전면 호병동 최은상(崔殷
132)
133)
134)
판결문(1910. 11. 22.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794쪽.
판결문(1910. 11. 30. 광주지방재판소 군산지부 : 1912. 4. 24.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129.1 5. 28. 대구복심법원 : 1912. 6. 28. 고등법원).
판결문(1912. 1. 18. 대구공소원 : 1912. 2. 13.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935~936쪽.
相)으로부터도 군자금 13원 30전과 백목면 3필을 모집하였다. 김필수를 비롯한 박보국(朴甫
局)·정남쇠(丁南釗)·홍윤무(洪允武)·박동환(朴東煥)·이남용(李南用)·김상신(金相臣)·
한일성(韓日成)은 이석용과 함께 1912년 11월 22일 밤에 장수군 진전면사무소를 기습하여 공
전영수원·면서기·전 면장 등으로부터 세금 33원 72전, 면비 50원 44전, 개인 돈 28원 82
전, 휴대용 금고 2개를 모집(募集)하였다. 이후로도 김필수는 이석용의 지휘 하에 박보국(朴
甫局)·이남용(李南用)·한일성(韓日成) 등과 함께 1912년 12월 17일에 임실군 남면 야당리
의 공전영수원 강정수(姜正秀)로부터 군수품을 모집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1913년 2월 22
일에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김필수는 소위 ‘강도 살인’죄로 교수형을, 박보국·정남
쇠·홍윤무·박동환·이남용·김상신·한일성은 10년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3월 19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받았다. 김필수는 5월 26일에 대구감옥에서 순국
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김필수와 홍윤무·박보국·박동환·김상신에게 건
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135)
이석용(李錫庸, 1878~1914)은 전북 임실 출신이다. 그는 1907년 8월의 군대 해산 직
후에 일본의 죄 10가지를 들어 격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9월 12일에 마이산 남쪽기슭
의 용암 위에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고 의진을 편성하였다. 그는 부대를 ‘창의동맹단’이
라 명명하고, 전해산을 참모에, 선봉에는 포군 출신이 박만화(朴萬華), 중군에 여운서(呂
雲瑞)등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명하였다. 9월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일본군에게 총
상을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양총·비단·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
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
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에는 화
암리 후방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용
담·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로도 11월 14일에는 성수산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에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
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다. 다시 1908년 3월 5일에는 진안 시동, 3월 14일에 마근현, 3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월 17일에 수류산, 3월 27일에 관촌역, 그리고 4월 30일에 가수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
전하였다. 한편 그는 밀정과 세금영수원, 한인 순사 등을 처단하는 활동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행해진 일본군에 의한 호남의병 대학살전이 전개되자 잠시 의진을 해산
하고 잠적하였다. 1910년의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잃은 뒤에도 일왕을 주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1912년에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던 중에 1912년 임실의 성
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1914년 2월 7일에 광주지법 전주지청에서 ‘강도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항소하였으나 4월 16일에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 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
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136)
136) 판결문(1914. 2. 7.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1914. 3. 6. 대구복심법원 : 1914. 4. 16.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0 ;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 강길원, 「한말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항일투쟁」, 『원광사학』 2, 1982.
이상으로 이 책에 판결문을 수록한 의병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표로 살펴보면
다음 【표2】와 같다.
【표 2】 중·후기의 호남 의병장 현황
번호 이름 출신지 형량 판결일 의병장 활동지역 관리번호 포 상
1 김동신 대전 종신유 1908.08.15 김동신 정읍 940 독립장
2 정영진 화순 유5년 1908.11.25 고광순 곡성 454 애국장
3 임사유 익산 유10년 1908.11.27
이홍일
이기협
함열 454 애족장
4 조정인 나주 교수형 1908.11.28 김태원 나주, 함평, 장성 691 독립장
5 여규호 임실 교수형
1909.03.05
1909.04.27 이석용 장수, 진안, 임실 1707 애국장
1909.05.21
6 지춘경 김제
종신 1909.03.05
조성팔 임피 1707 -
징10년
1909.05.01
1909.05.24
7 임세묵 순창
교수형
1909.05.07
김성구
구례, 곡성
남원, 순천
1708
애국장
8 공성찬 구례 1909.06.22 애국장
9 임기서 남원
징15년
1909.08.17 애족장
10 임기숙 남원 1909.09.07 애족장
11 유지명 고산 교수형 1909.06.05 유지명
진안, 용담
(완주)고산
456 독립장
12 이운선 함평 유7년 1910.06.05
김태원
조경환
광주 693 -
13 이용이 무주
징7년 1909.06.09
문태서
전상진
진안, 무주 1707
애족장
14 명경안 진안 애족장
15 김형주 순천
교수형 1909.06.17
김형주 순창, 태인 1712 애국장
종신
1910.04.02
1910.05.12
16 박동식 용담 교수형
1909.06.04
문태서
진안, 장수,
무주, 함양
1707 -
1909.07.17
17 정홍기 옥구 징15년 1909.07.19 유지명 전주, 진안 1707 애국장
18 오성현 장성 징10년 1909.07.29
기삼연
유종여
김영박
장성 693 -
19 김맹도리 남원 징7년 1909.10.08 양문찬 남원 1708 애국장
20 김진화 담양 징7년 1909.10.08
김동신
정일국
구례, 담양 1708 애국장
21 정일국 남원 교수형 1909.10.08 정일국
남원, 고부
순창, 구례
1708 애국장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34 이강산 함평
교수형
1910.03.08
김태원 함평, 영광
695
독립장
35 박치일 화순 애국장
36 정인술 함평 애국장
37 박장봉 함평
1910.04.27 462
애족장
38 서성학 함평 애국장
39 양창국 광주 애국장
40 양윤숙 순창 교수형 1910.03.09 양윤숙 순창, 임실 1713 독립장
41 김선여 순창 교수형
1910.04.21
신보현 순창, 정읍, 장성
695
독립장
1910.05.19 462
42 손덕오 보성
교수형
1910.06.02
안계홍 보성, 순천, 장흥
695 독립장
43 염인서 보성 독립장
44 정기찬 보성 1910.06.21 462 독립장
번호 이름 출신지 형량 판결일 의병장 활동지역 관리번호 포 상
22 박도경 고창 교수형
1909.12.03
1910.01.18 기삼연 영광, 장성 1713 독립장
1910.02.22
23 정낙중 함평 교수형 1909.12.07 김태원 영광,영암,무안 694 애국장
24 김공삼 고창 교수형
1909.12.08
기삼연
부안, 고창
담양, 장성
1910.01.27 1713 애국장
1910.03.02
25 김영백 장성 교수형
1909.12.20
김영백
장성, 정읍
흥덕
1910.03.05 1712 독립장
1910.04.07
26 최산흥 순창 교수형
1909.12.27 이경천
이석용
양윤숙
순창, 임실
1712
1910.03.03
695
1910.04.08 462
27 이황룡 순창 교수형
1910.01.12
양윤숙
최산흥
1910.03.03 순창, 임실 1712 독립장
1910.04.14
28 이복근 영암 교수형 1910.02.19 박사화 나주, 영암 695 애국장
29 이원오 공주 교수형
1910.02.24
조경환 광주
695
애국장
1910.04.22 462
30 정원국 전주 교수형
1910.02.24
1910.04.24 정원국 전주, 임실 1707 애국장
1910.05.14
31 황준성 진안 교수형
1910.02.26 강성택
추기엽
황두일
1910.03.19 완도, 해남 2023 독립장
1910.04.22
32 양진여 광주 교수형
1910.03.05
양진여 광주
695
독립장
1910.04.13 462
33 이중백 장성 교수형
1910.03.05 기삼연
박찬경
김여회
장성, 고창
695
애국장
총 설
34 이강산 함평
교수형
1910.03.08
김태원 함평, 영광
695
독립장
35 박치일 화순 애국장
36 정인술 함평 애국장
37 박장봉 함평
1910.04.27 462
애족장
38 서성학 함평 애국장
39 양창국 광주 애국장
40 양윤숙 순창 교수형 1910.03.09 양윤숙 순창, 임실 1713 독립장
41 김선여 순창 교수형
1910.04.21
신보현 순창, 정읍, 장성
695
독립장
1910.05.19 462
42 손덕오 보성
교수형
1910.06.02
안계홍 보성, 순천, 장흥
695 독립장
43 염인서 보성 독립장
44 정기찬 보성 1910.06.21 462 독립장
45 양상기 광주
교수형
1910.05.17
김태원 (담양)창평
695 애국장
46 유병기 구례 1910.06.16 462 독립장
47 양윤택 순창 징1년
1910.06.20
양윤숙 순창 1712 애족장
1910.07.19
48 임하중 보성 교수형
1910.06.09
안계홍 보성, 장흥
696
독립장
1910.06.27 462
49 전수용 임실 교수형
1910.07.09 이석용
조경환
함평, 영광
696
대통령장
1910.08.20 463
50 김치홍 영암 교수형 1910.07.23
심남일
박민홍
박사화
영암, 나주 696 독립장
51 장인초 화순 교수형
1910.08.20 안계홍
심남일
보성
696
독립장
1910.09.15 463
52 이세창 장흥 교수형 1910.09.06 심남일 장흥, 보성 696 애국장
53 김응백 광양 교수형 1910.11.22 황영문 광양 696 독립장
54 국호남 장성 교수형
1910.11.30
흥덕, 고부, 영광 1719 -
1912.04.24
1912.05.28
1912.06.28
55 김선중 영암 교수형
1912.01.16 박사화
김태원
나주
700
애국장
1912.02.13 466
56 김필수 김제 교수형
1913.02.22 이석용
진안
장수
임실
1723
애국장
57 박보국 임실
징10년
애국장
58 정남쇠 임실 -
59 홍윤무 임실 애국장
60 박동환 남원 애국장
61 이남용 임실 -
62 김상신 임실 애국장
63 한일성 임실 -
64 이석용 임실 사형
1914.02.07
1914.03.06 이석용 임실, 남원, 장수 1725 독립장
1914.04.1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3. 영·호남 의병의 특성과 의의
전기의병기 영남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예안·봉화·의성·영양·
청송 등 경북 북부 지역인 안동문화권이 중심이었다. 경상남도는 진주의병이 대표적이다.
안동 지역에서의 의병은 제천에서 내려온 유인석 의진의 소모장인 서상렬 의병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태봉 전투를 치르는 등 활동이 컸다. 그러나 태봉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패퇴하
고 더욱이 안동 시가지가 불태워지는 피해를 입었다. 노응규가 지휘한 진주의병은 진주성을
점령하고 대구에서 파견한 관군을 격파하고 김해로 진출하여 일본군 수비대와의 전투를 치
르는 등 활약하였다. 그러나 진주의병은 정부에서 파견한 이겸제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성을
빼앗기고 해산되었다.
한편, 전기의병기 호남 의병은 장성과 나주 지역에서 일어났다.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은
고향인 장성에서 기삼연·고광순 등과 거의하였다. 나주부에서도 기우만의 통문을 받고 향
리들이 중심이 되어 나주향교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이학상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기우만은
나주의병의 초청에 의병을 이끌고 나주로 들어가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나주의병은
관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고 말았다.
중기의병은 일제의 침략이 한층 강화된 어려운 조건 위에서 전개되었다. 1904년 이후 서
울에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러일 전쟁을 명목으로 일본군 정예 부대가 주둔
하였다. 의병의 활동이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의병에 투신하는 것은 곧 목
숨을 내건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전기의병에 참여했던 상당수가 재기하였으니 이들에 대한
민족사적 평가는 마땅하다. 중기의병은 전기의병에 비하여 더욱 투쟁적이었다. 중기의병은
전기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는 지역성과 학통성, 혈연성을 어느 정도 극복해 가는 경향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경향은 의병에 참여하는 신분층이 저변으로 확대된 사실과 연관된다. 중기
의병 단계에서는 전술상의 변화도 점차 나타난다. 의병들은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상호
연합 전선의 구축을 시도하였다.
중기의병기 대표적인 호남 의병으로는 태인의병과 쌍산의소가 있다. 최익현의 태인의병은
열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 을사조약 늑결의 부당함과 일제의 침략상을 성토하면서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였다. 일본 정부에 항의 서한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태인의병은 관군의 출동
에 맞서 전투보다는 동족간의 부전(不戰)을 택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의병지휘부는
자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최익현의 거의는 한민족에게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큰
외침이었다. 이후 능주에서 양회일, 창평에서 고광순, 광양에서 백낙구, 남원에서 양한규 등
이 의병을 일으켜 항일 전쟁의 대열에 나섰다.
중기의병기 영남 의병은 정용기의 산남의진과 신돌석의 영릉의진이 대표적이다. 이 의병
대는 후기 의병기로 이어진 특성이 있다. 1906년 3월에 편성된 산남의진은 신돌석 의진과
연계하면서 경주와 영덕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정용기는 체포되었다가 다시 석방된 후에도
북상을 준비하면서 항쟁하였다 그러나 입암 전투에서 그를 비롯한 지휘부 여러 명이 전사함
에 의진이 무너졌다. 영릉의진은 영양 관아를 공격하고, 울진의 일본인을 공격하여 어업 침
탈 세력을 응징하였다.
후기의병기 영남 의병으로 산남의진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정용기의 부친인 정환직이 산
남의진을 재기하여 항일전을 치렀다. 정환직은 북상을 기도하던 중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그 뒤를 이어 최세윤이 경북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다대한 전과를 거
뒀다. 신돌석의 영릉의진은 일본군 수비대의 ‘토벌’작전에 태백산맥으로 이진하면서 항쟁을
지속하였다.
후기의병기 호남 의병은 반제국(反帝國)적 성격은 물론 안민(安民)적인 성격을 띄면서
격렬하게 반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후기의병기 주도층은 지방 유생이 참여하였으나, 그
보다도 농민·보부상·해산군인·승려·산포수, 심지어는 안규홍과 같은 머슴 등 기층민
의 참여가 눈에 띄게 많아진 특징을 갖는다. 특히 유배수들이 탈출하여 의병을 일으킨 경
우도 드러난다. 황준성과 정원집·추기엽 등이 그들이다. 후기의병기 의병들은 장기 항
전에 대비하여 국내외에 의병 기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호남의병장 고광순이 이를 적극
추진하였는데, 그는 이른바 ‘축예지계(蓄銳之計)’라 하여 지리산을 장기 항전의 기지로 주
목하고 지리산 피아골을 의병 기지로 삼아 항전하였다. 호남 의병은 지역 주민과의 유대
를 강화하였다. 특히 평민 출신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가짜 의병과 부호의 토색 등
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의병들에게 숙식과 정
보를 제공하여 의병을 지원하였다.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호남 의병의 출신지는 전남이 전북보다 많게 보인다. 전남의 나주·함평·장성·영광·광
주 순이고, 전북은 순창·임실·태인·무주·부안·고부의 순이다. 이는 유력 의병장의 지
역적 기반과 관련이 된 것으로 보인다. 태인의 임병찬, 순창의 최산흥·양윤숙, 임실의 이석
용·전해산 등이 그러하다. 호남 의병은 전투 중에 전사하거나 체포되었더라도 사형을 당하
거나 10년 이상의 중형을 받았다. <표2>에 소개한 인물 중에서도 조정인·이황룡·정원국·
여규호·임세묵·공성찬·유지명·박동식·정일국·박도경·정낙중·김공삼·김영백·최
산흥·이복근·이원오·황준성·양진여·이중백·이강산·박치일·정인술·박장봉·서성
학·양창국·양윤숙·김선여·손덕오·염인서·정기찬·양상기·유병기·임하중·전수
용·김치홍·장인초·이세창·김응백·국호남·김선중·김필수·이석용 등이 교수형을 선
고받고 순국하였다.
한말 의병의 강력한 반일 투쟁은 일제의 식민지화 정책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일
제는 1909년 후반기에 조선을 강점하려 하였으나, 의병의 투쟁이 장기화됨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과 같은 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대 탄압을 가한 후
에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의병은 1910년 경술국치 후에 제국주의 열강의 지원과 비호를 받은 일제침략자에 대한 최
대의 항일 민족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가운데 한 갈래는 풍기광복단과 대한광복회 그리고
독립의군부 등으로 이어져 1910년대 국내에서의 민족 운동을 주도해 갔다. 또 다른 갈래는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해외에서의 무장 독립 운동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반외세 불굴의 투쟁 정신은 1910년 이후 한국인의 독립 투쟁의 정신적 연원을 이루어 저항적
인 민족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할 수 있다.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판결문(대구지방재판소, 대구공소원, 광주지방재판소,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황현,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52.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독립유공자호남유족회, 『담산실기』, 1983.
이긍연, 『을미의병일기』.
심성지, 『적원일기』.
『산남창의지』 하.
『폭도에 관한 편책』.
강재언, 『조선근대사연구』, 일본평론사, 1970.
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 『 한국독립운동사』, 1965.
김상기, 『한말의병연구』, 일조각, 1997.
, 『한말 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1.
김희곤 외, 『의성의 독립운동사』, 의성군, 2002.
,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영양의 독립운동사』, 영양문화원, 2006.
, 『봉화의 독립운동사』, 봉화군, 2007
,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안동시, 2007.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도서출판 한울, 1998.
, 『한말 중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박성수, 『독립운동사연구』, 창작과비평사, 1980.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사』 1, 경상북도, 2012.
오길보, 『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
윤병석, 『의병과 독립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 『한말의병장열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조동걸, 『한말의병전쟁』, 독립기념관, 1989.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0.
,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0.
,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연구』, 서울대출판부, 1994.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일조각, 2004.
, 『한말 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강길원, 「한말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항일투쟁」, 『원광사학』 2, 1982.
, 「해산 전수용의 항일투쟁」, 『역사학보』 101, 1984.
, 「담산 안규홍의 항일투쟁」, 『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88.
권대웅, 「1896년 청송의진의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9, 1998.
, 「김산의진고」,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1990.
권영배, 「산남의진의 조직과 활동」, 『역사교육논총』 16, 1991.
김강수, 「한말 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의병활동」, 『북악사론』 2, 1990.
김상기, 「1895~1896년 안동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항일투쟁」, 『사학지』 31, 1998.
, 「한말 일제의 침략과 의병 학살」, 『역사와 담론』 52, 2009.
, 「최익현의 정산이주와 태인의병」, 『충청문화연구』 7, 2011.
김희곤, 「신돌석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2001.
박민영, 「신암 노응규의 진주의병 항전 연구」, 『박성수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1990.
, 「한말 의병의 대마도 피수 경위에 관한 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배용일, 「산남의진고-정환직, 정용기 부자 의병장 활동을 중심으로」, 『논문집』 6, 포항실업전문대학, 1982.
, 「최세윤의병장고」, 『사총』 31, 1987.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참가층과 사회적 기반」, 『역사연구』 창간호, 1992.
, 「1909년 가을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대하여」, 『고고역사학지』 9, 동아대 박물관, 1993.
홍영기, 「안규홍의병의 조직과 그 활동」, 『한국학보』 겨울호, 1987.
, 「구한말 심남일 의병의 조직과 그 활동」, 『동아연구』 17, 1989.
, 「구한말 김동신 의병장에 대한 일고찰」, 『한국학보』 56, 1989.
, 「1896년 나주의병의 결성과 활동」,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하, 1994.
, 「한말 호남의병의 특성과 일제의 대응」, 『전남사학』 10, 1996.
, 「한말 태인의병의 활동과 영향」, 『전남사학』 11, 1997.
, 「한말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일고찰」, 『한국근현대사연구』 21, 2002.
참고 문헌
제1부
총 설
한말 영·호남 지역 의병 전쟁과 의병장 1. 영남 지역의 의병전쟁
2. 호남 지역의 의병전쟁
3. 영·호남 의병의 특성과 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