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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구원이 큰 이유
히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히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히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딱하고도 안타까운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박해에 시달리다 보니 자신들이 받은 큰 구원에 대한 기쁨보다 두려움과 불안이 더 커졌고 그 때문에 옛 유대교를 돌아보며 그것을 등지고 새로운 신앙과 가르침을 믿은 것이 조금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었을까 의심하는 이들까지 생겨났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낙심하며 불행해 하는 신자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 위대한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이런 상태에 빠지는 주된 원인이 들은 것"을 놓치고 떠내려간 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확신을 잃고 반신반의하는 영적 침체 상태를 치료하려면 "들은 것에 더욱 유해야 한다고 배가 계류장에서 떠내려가듯 "들은 것"에서 떠내려간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아주 심각하고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구약성경에 나오는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모세에게 주시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율법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율법도 그렇거든 하물며 우리기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제가 그리스도인들, 기독교회 교인들, 특히 히브리 그리스도인들과 비슷한 상태에 빠진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기뻐하지 못하는 신자들뿐 아니라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불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또한 이것입니다. 기독교회가 이처럼 계속 설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아직도 존속하는 타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교회의 메시지는 낡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번에 제가 특별히 다루고 싶은 구절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큰 구원!" 이것이 우리가 가진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온 관심을 쏟는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이제부터 이 말을 분석해 봅시다.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성경의 메시지는 곧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구원한다는 것은 구해 주고 해방시킨다는 뜻이며, 병들고 아픈 데를 고쳐 건강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이 곧 구원받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메시지는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면은 다른 여러 단체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복음' 자체가 '좋은 소식'이라는 뜻으로서, 복음은 구원과 해방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신문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형성한 사람은 당연히 수소폭탄이나 전쟁 같은 여러 문제에 항의하는 것이 곧 기독교 메시지라는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복음 메시지는 구원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첫 번째로 강조한 점이 이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에 전해진 소식 중에 가장 크고 좋고 놀라운 소식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을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신약성경 기자의 특징이 이것입니다. 복음메시지를 말할 때마다 최상급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이 그렇습니다. 사도는 "그(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이야기하며 (엡 2:7),
엡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야기합니다(엡 3:8).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
성경만 구원에 "큰"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대성당들을 보십시오. 그 장엄한 건축물들을 설명할 만한 말이 있습니까? 대성당에 대한 견해는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지금은 그 건축물들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목해 봅시다. 그들은 기독교회가 전하는 중대한 메시지, 구원 메시지의 위대함과 광대함과 장엄함을 석조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미술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위대한 화가들이 이 큰 구원에 관한 교리를 그림에 담아냈습니다(다빈치 Leonardo da Vincd의「최후의 만찬」을 보십시오). 가장 위대한 명연설과 웅변도 기독교 강단에서 흘러나왔습니다.
마지막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강렬하고 장엄한 합창들로 이루어진 헨델 Georg Friedrich Hinded의 「메시아」야말로 가장 위대한 음악 작품이리라는 말에 다들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헨델은 기이할 만큼 짧은 기간에 「메시아를 작곡했다고 말합니다. 마치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웅장한 십자가가 일부 보였다는 것입니다. 합창 '할렐루야'는 '이같이 큰 구원"에 대한 헨델만의 표현방식이었습니다. 얼마나 거대하고 방대하며 거침없는지 모릅니다.
찬송시인 아이작 와츠의 위대한 찬송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도 보십시오. 그는 십자가를 슬쩍 보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마치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끝없이 펼쳐지는 엄청난 전경을 바라보듯 바라봅니다. 찰스 웨슬리 Charlier Winder의 찬송 「오. 만 입이 내게 있으면도 보십시오.
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내 크신 구주와
내 하나님 내 왕의 영광과
그 은혜의 승리를 찬송하겠네.
여러분도 복음 메시지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독신앙에 대해 이렇게 고유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까? 구원의 위대함과 광대함과 강력함에 감동하고 있습니까? 구원을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까?(롬 1:16)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이 메시지가 부끄러우냐? 너희 문제는 이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뛰어나심과 십자가의 영광만 깨달아도 옛 유대교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우리가 과연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만큼 자랑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강력한 구원을 받은 것이 너무 기뻐 뛰고 있습니까? 이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마치 사소한 것인 듯한 인상-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몇 가지 행동은 하고 몇 가지 행동은 하지 않는 것에 불과한 듯한 인상-을 주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이같이 큰 구원"을 믿는 자들로서, 이처럼 악한 때에 사람들이 얼마나 중대한 것을 잃고 있으며 놓치고 있는지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이 이같이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구원을 시작하신이(author)가 크시고 그 기원이 크며 개념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이든 크기를 검증하기에 좋은 방법이 이것입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보면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책을 찾을 때 으례 검증하는 방법도 이것 아닙니까? 공공도서관에 가서 읽을 만한 소설을 찾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제목을 보는 것입니까? 현명한 사람이라면 제목이 아닌 저자명을 볼 것이며, 위대한 작가의 책을 읽으려 할 것입니다. 저도 소년 시절에 원터 스코트 (Walter Scon) 경을 가장 위대한 작가로 생각해서 항상 그의 책을 찾아 읽곤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위대한 작가를 찾습니다. 이것은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되는 건전한 원칙이요 방침입니다. 소더비 경매에서 한 그림이 136,000파운드에 팔리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는 기사가 나온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00기니가 안 되는 값에 팔렸던 그림이 무려 136,000파운드에 팔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그림을 조사하고 살펴본 한 유명한 전문가가 스페인의 거장 엘그레코 (Green)의 작품이라는 판정을 내렸고, 다른 전문가들이 그 판정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전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그림이었음에도 엘 그레코의 작품으로 판명된 즉시 136,000파운드로 값이 뛰어오른 것입니다. 실제로 그림의 위대함을 결정짓는 것은 화가의 위대함입니다.
"이같이 큰 구원!" 우리가 성경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메시지를 크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가르침은 위대하지 않다고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메시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히 1:1-2). 2장에 나오는 구절도 보십시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때문에 기독교회가 존속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세상을 향해 우리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바는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세상이 이토록 흉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위해 친히 '큰 구원"을 계획하고 설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그 계획을 실행하는 일에 자원하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셨고 마침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도 친히 우리 삶에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시작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자랑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은 미쳤습니다. 분쟁과 시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적이지 못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서로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 구원이 큰 것은 이처럼 시작하신 이가크시기 때문이며 그 구성 자체가 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이 구원이 큰 것은 우리를 붙잡고 있는 원수가 크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이것이 구원의 가치를 평가하는 두 번째 방법입니다. 구원은 병든 우리를 고쳐 건강하게 합니다. 구원의 크기를 검증하려면 그 병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번에도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신문을 보면 의사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약에 관한 기사들이 자주 나옵니다. 보건성에서 익에 너무 많은 비용을 쓴다는 기사도 나옵니다. 약의 중대성과 가치를 평가하고 검증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스피린은 훌륭한 약이요 진통제임에도 아주 저렴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치명적인 병을 치료하는 약들을 보십시오 그런 약들이 훌륭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두통이나 통증이나 아픔만 고쳐 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항상 목숨을 앗아가던 병을 고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약의 중대성과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 약으로 완화시키거나 치료할 수 있는 병의 심각성에 있습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구약 율법, 즉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보십시오. 율법은 본질적으로 무서운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표현대로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 십계명을 어기는 행동 을 정죄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율법을 어기는 자를 반드시 벌하십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겔 18:4.20)
겔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겔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아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복음. 이 큰 구원을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느냐? 이복음이 너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해 주는지 아느냐?"라고 묻습니다 지금우리는 많은 사람이 기독교회 밖에 머무는 이유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은 한가지뿐입니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서운 상태를 한 번도 깨달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암이 자라고 있는데도 '난 아무 문제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죽음을 가지운 종양이 자라고 있는데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그들의 상태를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17)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복음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복음을 기꺼이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의인은 없으되 한 명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타락한 모든 인간을 구원할 것은 오직 복음뿐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얻는 의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들으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토머스 차머즈 박사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전에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이 땅의 삶은 작고 영원한 세계는 크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달은 순간 인생 전체가 바뀌면서 복음주의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 사람은 죽을 뿐 아니라 죽은 후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성경이 시종일관 전하는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 자기 인생을 설명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는 네게 영혼을 주었다.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은 나를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실 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너는 그렇게 했느냐? 나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았느냐? 나를 즐거워하는 삶을 살았느냐? 십계명을 지켰느냐?"라고 물으실 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사는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의 십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주님의 선고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쫓겨나 지옥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설사 의를 행했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보응을 피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뿐입니다(롬 4:25).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음을 믿어야 합니다(사 53:6).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고후 5:21).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벧진 2:24).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히브리서 기자가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직 이 메시지만 하나님의 심판 및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영원한 형벌의 공포와 비참에서 우리를 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구원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이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해주며, 멸망과 상실의 상태로 영원히 지내게 될 무서운 가능성에서 건져 줍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았는지 생각할 때 이 구원은 큰 것임이 분명합니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해 구원받았는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이 또한 복음이 우리를 위해 해주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죄 사함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멀리 떠났고 반역했습니다.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으로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욥 25:4).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기 죄를 없앨 수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됩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아들이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죄를 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구원입니까! 세상 그 무엇도 이 일을 해줄 수 없습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세인트앤드루스와 애버딘, 에든버러와 글래스고 대학에서 배운다 해도 죄 사함의 지식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지식을 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기 죄를 지시고 제하신 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케 될 뿐 아니라 그의 가족으로 입양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십시오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음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지휘관]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그는 연이어 말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그를 믿는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어떻게 한 근원에서 났다는 것입니까? 본성이 하나 됨으로 서로 하나 됨으로 한 근원에서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우리의 죄만 사해 주시고 거리에 그대로 비려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데려가 가족으로 삼아 주시며 자기 형제로 삼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니라 (히 2:12-13).
그는 우리를 누더기 차림으로 밖에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화목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으며 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에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세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2:17~18)
시험받을 때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매시간 주가 필요하오니
가까이 계시옵소서.
주 가까이 계시면
시험도 힘을 잃사옵니다.
-애니 S. 호크스.
이분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는 모든 시험을 직접 겪으셨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이 얼마나 큰 구원입니까!
이 구원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까요?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히 2:5-8).
"장차 올 세상"은 천사를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 준비된 곳입니까? 우리를 위해 준비된 곳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이같이 큰 구원 "만큼 놀라운 것은 현대세계에 없습니다. 죄 사함을 아는 지식에 비할 것이 있습니까? 자신이 심판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것과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자녀로 깨어날 것을 알기에, 설사 밤사이에 죽는다 해도 아무 걱정 없이 잠자리에 누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까? 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은 또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사실은 장차 올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멸망할 곳입니다. 죄로 가득한 곳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세상을 개선시켜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것이라고 하며,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주겠다고 합니다(벧후 3:13).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만물이 새로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자들이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우리야말로
“구원받을 상속자들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롬 8:17).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피조물이고 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 8:19).
세상이 원자폭탄으로 멸망한다 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보호는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보호는 은행계좌나 세상 직업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며 삽니다. 그의 마음은 장차 올 영광,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큰 구원'은 바로 그 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는 지금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한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1-3). "이것이 큰 구원"은 장차 이 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이 사실로 인해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이 구원이 큰 것은 우리를 위해 이 구원을 준비하신 방식이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드라마에서 재미를 찾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텔레비전 쇼를 놓치기 싫다는 핑계로 주인저녁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참 대단한 드라마예요 정말 굉장하다니까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시대를 풀어 가장 위대한 드라마. 영원히 위대한 드라미가 히브리서 2장에 나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예수 – 목수 나사렛 예수-를 보니'(히 2:9). 예수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훈련받은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난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는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 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1-3)
천사들보다 잠시 못하게 하심을 입은 예수는 실제로 천사들을 만드신 장본인입니다. 히브리서 1강이 말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히 1:4).
만물이 그를 통해 지은 바 되었고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그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곁들고 계십니다. 그가 붙들지 않으시면 전부 무너져 내립니다.
베들레헴 구유에 누운 아기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찰스 웨슬리는 "성 육신하신 하나님을 환호하며 맞이하라"라고 찬송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온전히 모든 영광 가운데 계시던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력한 아기가 되셨고 목수가 되었으며, 제 손으로 일하는 노동자가 되셨습니다.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그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오셨습니다. 하늘 궁전을 떠나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우리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이처럼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그는 세상의 창조자요 보전자요 생명의 주이심에도 수치와 모욕 속에 죽으셨습니다. 왜 죽으셨습니까? 왜 처형되셨습니까?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까? 그에게 유죄선고를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귀조차 죄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도살장으로 잠잠히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끌려가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죽으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옥의 영벌을 면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이 목적을 위해 그는 하늘 궁전을 떠나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가 가장 높은 하늘 궁전에서 가장 비통한 십자가로 내려오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구출되고 구속되고 속량되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장차 올 세상의 영광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감사하게도 죽음에 멈추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히브리서 기자가 1장에서 말하듯이, 그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 말하듯이, 원수가 그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택함받은 자들이 다 모일 때까지 그가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신 영혼들이 실제로 하나님 나라에 다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장차 다시 오셔서 원수를 멸하시고 자신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때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그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의 참모습을 볼 것이며, 자신들도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다스리며 그와 함께 심판할 것입니다.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구원은 이같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는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한 마디 불평 없이 그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자신을 비난하고 부인한 우리를 위해 그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구원은 이같이 큰 것입니다. 아이작 와츠는 다음과 같이 찬송합니다.
인간이 아는 모든 이름.
천사가 지닌 모든 이름,
지혜와 사랑과 능력의
영광스러운 이름 다 모아도
그의 귀하심 담기에 부족하고
내 구주 일컫기에 초라하도다.
찰스 웨슬리의 찬송도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내 크신 구주와
내 하나님 내 왕의 영광과
그 은혜의 승리를 찬송하겠네.
또 다른 놀라운 찬송은 이것입니다.
허다한 면류관 가져와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께 드리라.
들으라, 모든 음악 잠재우는
하늘의 저 찬송 소리!
내 혼아, 깨어서,
널 위해 죽으신 주 노래하라.
영원토록 홀로 뛰어나신 네 왕께
면류관을 드리라..
여러분도 구주께 면류관을 드리고 있습니까? 그를 믿고 있습니까? "이같이 큰 구원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구주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습니까?
온 세상이 그를 알길 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기이함과 광대함과 영광의 크기를 본 적이 있습니까? 다시금 그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태어나신 그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사시고 죽으신 그를 바라보십시오. 구주께 자신을 내드리십시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눈을 여사 "이같이 큰 구원"의 크기를 보게 해주시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