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2002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이란 글이 주보에 올라와 있는데요. 참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은 어땠습니까? 어떻게 변했습니까? 잘 변했습니까? 나쁘게 변했습니까?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까? 변화가 없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변합니다. 변화에는 방향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만큼 변했는가보다 그 변화의 방향이 어떠했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여러분이 더 나아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인격은 성숙한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로 좀더 나아간 것 같습니까? 만약에 아니라면 왜 그런가를 분석해야 합니다. 아무런 분석과 비판 없이 한해를 지나가면 다음에는 어떤 일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떠하냐보단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지금의 모습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사람이 어떤가?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사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우리 공동체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공동체가 어는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청년공동체는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 방향이 보입니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보입니까? 아니면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방향으로 변화되어가길 기대하십니까? 본문 11장 15절에 일곱째 나팔이 울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으로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환난보다 더 심한 것이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심은 구체적으로 어떤 육체적 고통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변화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날에 주의 이름을 경외한 자들은 상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회가 없습니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 못가면 부끄럽지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재산이 얼마 이하이거나 키가 얼마 이하이거나 해서 못간다면 엄청난 슬픔이 그에게 있을 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절망적이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상 받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모든 인간이 상 받을 수 있도록 변화 시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우리가 6번째 나팔까지 엄청난 환난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보다는 오히려 우상숭배와 간음과 악행을 회개치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그 결과 11장 13절에 보면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사람들이 변화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변할 줄 모르던 자들이 이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10장과 11장을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10장 11장에서는 어떤 일이 있습니까? 10장에서 사도요한은 힘센 천사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책을 받고는 먹습니다. 요한은 11절에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예언할 것을 명 받습니다. 요한은 무엇을 예언하라는 명을 받은 것입니까? 그것은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곧 이제 마지막이 왔다. 그날에 주를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선지자에게 고통스러운 일인 것이 상징적으로 배에서 쓰게 될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요한의 사명은 11장에서 두 증인에게로 이양됩니다. 이들은 두감람나무와 두촛대니라고 말합니다. 촛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두 촛대. 일곱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직무는 교회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교회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6절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치 엘리야와 모세가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그 백성들을 구원했던 것처럼 교회도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것이라 예언되고 있습니다. 삼년반의 사역의 1/30인 3일반 동안 죽음의 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살리심과 승천을 경험합니다. 그 시에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후에 일곱째 나팔이 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세상의 많은 영혼들이 변화를 받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오느냐? 이 땅이 준비 됐을 때 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주님이 준비 됐다고 느낄 때 오십니다. 그 오실 때는 바로 우리가 세상을 변화 시켰을 때 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어떻게 변화됩니까? 이 땅은 어떻게 변화됩니까? 심판으로 징벌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심판과 고통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가 끝까지 죽음으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복음이 증거 될 때 세상은 증거자들을 대적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대적할 때 그들은 교회로부터 임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교회의 복음 증거는 그들의 마음을 괴롭혔다고 봅니다.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깨닫게 합니다. 증거자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면서 그들에게 미움이 되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이 두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말합니다.
세상은 악함으로 빛이 비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가 저보고 못생겼다고 말하면 저는 그냥 웃습니다. 그런데 정말 못생긴 사람보고 못생겼다고 하면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너희들은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회개해라.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돌이켜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교회는 이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스스로가 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도전이 될 만한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이렇게 해야한다.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본을 보이려면 우리의 삶이 기본적으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컨닝하지 맙시다. 니가 하지 말아라. 이것은 기본입니다. 여기서 좀더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첫째는 사명자로 변해야 합니다. 요한의 그 책을 먹음으로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나는 이 땅에서 주님의 빛을 밝게 비추어야 할 사람이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은 이 일을 해야할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아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비전인 것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감당할 것인가? 그것은 사람마다 은사와 능력에 따라서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청년의 때는 이 일을 준비하는 때입니다. 그럼으로 청년들은 자기의 능력과 역량을 최대한 발전시키기 위해서 피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방학이라고 게으름 부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궁극적 비전을 가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많은 차이를 주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스스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먼저 자라야 할 것입니다. 자기 변화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냥 이대로가 좋사오니 입니까? 사명자로서 자각을 가지고 준비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새해가 다가옵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길 소원하십니까? 그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청년들은 송구 영신 예배 기도제목을 6교구로 가족과 따로 쓰십시오. 그러면 제가 구체적으로 기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인상부터 분위기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저를 봐도 인사를 안 해요.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보고 인사를 잘하겠습니까? 여러분 친절한 인상으로 서로를 바라봅시다. 그래도 무슨 흑심을 품고 있나 오해하지 맙시다. 작은 것부터 시작합시다.
둘째는 각오해야 합니다. 미움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저들이 우리를 손가락질 할찌라도 미워할찌라도 우리에게 주신 임무를 완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오해야합니다. 각오해야 합니다. 아무런 피 흘림 없이 고난 없이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겁먹지 마십시오. 오늘 성전을 측량하는 본문이 나옵니다. 성전을 측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전을 지켜 주시겠다. 의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우리를 적의 먹이로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복음을 전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거기서 주님의 임무를 완수하기까지 살려두십니다. 미움을 받더라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사에서 신우회를 만들면 미움받아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더 주의 복음을 잘 전하게 도와주십니다. 죽는 것 같으나 결국은 주님이 다시 살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십니다. 주님이 죽음으로 충성할 때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기쁘게 함께 죽을 각오를 합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그 영혼을 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진 않지만 여기에 나와 있지만 미우라 아야꼬란 일본 작가의 회심을 보면 영혼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야꼬가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리고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면서 살 때입니다. 그의 친구인 미에까와 다다시는 참으로 그 여인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오히려 그녀는 점점 더 깊이 자기의 생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눈물 흘리며 이야기해도 담배를 피우면서 무시하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다시는 너무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며 자기의 발을 돌로 내려 찍습니다. 이 모습에서 미우라의 마음은 조금씩 변해갑니다. 한 사람을 향한 진실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심정을 움직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이 세상 전체를 바꾸려고 한 사람이 선다면 초라할 것입니다. 절망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온 우주적 교회가 일년에 한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충분히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화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시기와 질투와 분쟁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사랑해야 합니다. 비판과 부정적인 말로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상처 주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섬길까? 그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루 속히 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도 속히 오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왜 아직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해동안의 기회를 더 주셨습니다. 이 한해를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여러분 변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사명자로서의 분명한 자각이 있길 바랍니다. 용기 있게 결단 청년으로 변하길 바랍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변화되어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