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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명 : 성 령 신 학 교수명 : 박혜근 교수
“복음의 초청” - 안토니A.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중에서 요약발췌
(요약)
복음의 초청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의 지상대명령(Great Commission)을 통하여 제자들과 모든 세대의 교회들을 향하여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이 모든 이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말씀전파의 표준은 항상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볼 때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고 있는 사실과 복음전파의 결과가 이미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1) 복음의 진상과 구원의 길의 제시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를 통해 전달되어야 하며 현시대의 필요와 문제점들에 상관이 있는 방법을 통해서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적인 접근방법을 취한다 하더라도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
(2)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초대
복음초청은 소개 자체에서 끝나면 안된다: 반드시 간절한 초대가 따라야 한다. 믿음이 어떤 진리에 대한 지적 동의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그 분의 사역에 대한, 사명감을 동반한 전 인격적인 그리스도의 받아들임이라는 것이다.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잘 균형잡힌 설교는 언약적 중요성과 복음전도적 중요성을 함께 연합하여 강조할 수 있는 설교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교회내의 교인들에게 전해지는 설교에도 항상 믿음과 회개를 촉구하는 간절한 권고가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교회 내의 모든 교인이 구원을 받았다고 추정해서는 절대 안된다. 아직 그리스도께 삶을 맡기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며 어른들 중에서도 주님을 위해 뚜렷한 결심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3) 용서와 구원의 약속
누구든지 복음초청에 응하는 사람은 죄의 용서와 주님과의 교제속의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약속이 반드시 복음초청의 내용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1. 복음초청은 듣는 사람 모두를 초대한다.
첫째는 복음초청이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마태복음 22장과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복음초청을 받아들이라고 청함을 받으나 그것을 거절하는 자가 많다는 사실을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지는 일반적 초청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설교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모든 청중들에게 구원받도록 초청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편에도 그러한 간절한 바램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미국과 화란 그리고 영국의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 서로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어 왔다. 소위 잘 의도된 복음제시를 부인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입장에 관해서, Herman Hoeksema, 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 in America, 2nd ed. (Grand Rapids, 1947), pp. 317 - 53; Reformed Dogmatics(Grand Rapids: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1966), pp. 465-68; "Whosoever Will" (Grand Rapids:Eerdmans, 1945). Cf. also Klaas Schilder, Heidelbergsche Catechismus, Vol. (Goes: Oosterbaan and LeCointre, 1949); Peter Toon, The Emergence of Hyper-Calvinism in English Nonconformity, 1689-1765(London: The Olive Tree, 1967)을 보라,
미국적 상황에만 국한시킨다면 故 헤르만 훅스마와 그의 교파인 Protestant Reformed Church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복음이 제시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진지하게 바라시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개혁교단(Christian Reformed Church)은 하나님께서 복음제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진지하게 바라신다는 사실을 확고히 천명하였다.
2. 복음의 초청은 진지하게 의도되었다.
훅스마에 의하면 복음초청은 결코 사람들에게 발송된 일이 없다는 것이다. 헤르만 훅스마의 신학은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적 신의(decree)를 지나치게 인과관계에 놓은 결과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훅스마는 하나님께서 유기자들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은총의 표식도 주시지 않으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훅스마에 의하면 복음이 진지하게 사람들에게 제의되었다(듣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도록)는 주장은 제한속죄교리와 상충되고 있다고 한다.
훅스마에게 있어서 이중예정론(선택론과 유기론)을 말하면서 유기자들에게 은혜를 제의하는 복음전파를 동시에 함께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복음전파(설교)는 특수한 약속에 연결되어 있는 보편적 선포(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라 할 수 있다. 즉 복음전파는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길을 통해 그의 선택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반면에 복음을 거절하는 유기자들을 유죄에 처하신다는 선언이다.
훅스마의 견해를 요약하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원하시지는 않는다; 오직 선택자만이 구원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정말로 제공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점에 관해 미국 기독개혁교단은 훅스마의 주장을 문제 삼아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와 동의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결정하였다: 복음의 전파행위는 설교자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의하는 좋은 의도로 행해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복음초청이 전달되는 모든 사람이 구원 되기를 진지하고도 간절하게 원하신다.
하나님은 복음들 듣고도 회개치 않는 자들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chaphets)않으시며 오히려 회개하고 그에게 돌아와 구원받기를 기뻐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부르심을 듣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나타난 뜻이며 구약 선지자들이 호소했던 회개로의 부르심이기도 하다. 에스겔 18:23에 관한 칼빈의 논평은 매우 중요한 요점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가 붙잡아야 한다. 그 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그들이 진지하게 회개하기만 하면 그들을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었다고 약속하신다. 만일 누구라도 반대한다면 - 그렇다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택정함이 없는 것이다. 이 택정함을 통해 그 분은 일정한 수의 사람을 구원에로 예정하셨다-대답은 분명하다: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참에 처해있는 사람을 절망으로부터 불러내어 용서의 소망을 붙잡고 회개하여 제시된 구원을 붙잡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John Calvin,Commentary on Ezekiel, trans. Thomas Myers(Grand Rapids: Eerdmans, 1948),2:247.
신약성경 마태복음 23:37에서 (참고, 눅 13:34) 탄식하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햐여 자기가 얼마나 자기 백성들이 자기에게 나아와 구원 받기를 원했으며, 또 그들이 거절했을 때 얼마나 슬퍼했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일반적으로 세상의 종말에 관한 모형이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예루살렘 사람들의 돌아섬과 구원을 소원하여 바랐으나 그들이 그를 믿어 구원받게 되기를 원치않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선언하시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 중에 속해 있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려는 바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제시된 모든 사람들, 심지어 택정함을 입은 우리 가운데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진지하고도 간절히 바라신다는 사실이다. 베드로후서 3:4에는 그에 대한 대답이 9절에 기록되어 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본 구절의 부정문적 형식은 아무도 제외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강조용법이다. 이 구절에 의하면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바램이라는 것이다.
칼빈의 해석은 도움이 되기에 충분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신다면 왜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이 멸망하고 있느냐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본 절에는 악한 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파멸 가운데 빠지게 하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이나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비하심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이나 사랑스런 자비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손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내밀지만 이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 그가 선택한 자들(자기에게로 이끄시는 방법을 통하여)만을 붙잡으신다. "John Calvin,Commentary on the First and Second Epistles of Peter, trans, William B. Johnston(Grand Rapids: Eerdmans, 1963), p.364
3. 좋은 의미로 의도된 복음제시와 돌트신경
돌트신경에는 이 문제에 관해 두가지 조항이 관련되어 있는데 첫 번째 조항은 제 2장 5조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에게 아무런 차별과 차이없이 선언되고 선포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한 기쁨 안에서 복음을 보낸다."
또 다른 조항은 Ⅲ∼Ⅳ, 8조인데 앞의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복음을 통해 초청받은 자는 모두 진지하게(serio vocantur)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진지하고도 진정으로(serio et verissime)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통하여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셨다: 즉 부르심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에게로 나오라는 것이다. 진지하게(serio) 그 분은 또한 자기에게 나아와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혼의 안식을 약속하신다."
"진지하게 부르심을 받은"이란 표현이 매우 의도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표현구는 돌트 총회시 칼빈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데 목청을 높였던 레몽스트랑트 혹은 알미니안들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돌트 총회는 화란의 개혁교회들 안에서 알미니안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어졌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의 신학적 체계로 라이든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야곱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에 의해 시작되었다.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을 가리켜 알미니안들 혹은 레몽스트랑트들이라 부르는데 그들도 총회에 출석하였으나 그들의 견해는 배척되었다.
알미니안들이 칼빈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당신들의 입장에 대해 우리가 제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 중의 하나는 만일 당신들이 선택과 제한속죄교리를 인정한다면, 잘 의도된 복음제시를 당신들은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이 제시된 모든 사람을 진지하게 부르신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매우 흥미있는 사실은, 바로 이 점이 헤르만 훅스마가 잘 의도된 복음제시에 대해 난색을 표시한 점이다. 물론 훅스마는 알미니안들과는 정반대의 신학적 입장에 서 있었다.
serio vocantur("진지하게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좋은 의도로 제시된 복음의 초청과 또 한편으로 선택과 제한속죄교리를 다 함께 수용하고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잘 의도된 복음 초청을 확신하기 위하여 선택교리와 제한속죄교리를 배격해야 할 하등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4. 합리적 해결을 피하여
피터 툰(Peter Toon)박사는 그의 저서 "영국 비국교도들에 있어서 초칼빈주의의 발흥" (The Emergence of Hyper-Calvinism in English Nonconformity)에서 지적하기를 17세기 말엽과 19세기 중엽의 영국 비국교파들 중에서 초칼빈주의의 한 형태가 부상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헤르만 훅스마나 그가 시작한 교단인 Protestant Reformed Church처럼 잘 의도된 복음초청을 부인하였다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기를 진지하게 열망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고 택정하였다고 동일한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방법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향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1)하나님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얻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2)또다른 형태의 합리적 해결방법은 훅스마와 초칼빈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성경이 분명히 선택과 유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 자들 중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스겔 33:11; 마태복음 23:37; 고린도후서 5:20; 베드로후서 3:9등과 같은 성경과 정면으로 충돌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합리적 방향 모두를 배격해야 한다. 성경은 영원한 선택과 잘 의도된 복음초청 모두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비록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이 둘을 잘 조화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여 붙잡아야 한다. 우리의 신학은 성경의 역설을 유지 시켜야 한다. 칼빈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학적 관심은 합리적으로 일관성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가르침들에 충실하는 일이어야 한다.
선교사들이나 복음전도자들은 마땅히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 각자 모두가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은 나의 바램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과 맞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죽음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지금 서 있는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호소하시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확신 속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 위에 복을 내리시어 그 분의 뜻하신 결과들이 일어나리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