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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opes&Joys -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빌의 신앙인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AlwaysHopes
http://www.martinluther.or.kr/stand/index.html
강한 저항…..
서문
루터 시대에 세계 정세는 어두웠습니다. 온 땅에 짙은 어둠으로 덮혀 있었습니다. 빛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어두움이 가장 짙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반응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두움 가운데서, 카톨릭 교회 내에서 한 그릇을 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카톨릭 교회의 충실한 이를 사용하셨는데 이는 그분이 예전에 종교의 어두움에 저항하도록 유대교의 죽은 상태에서 불러내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인 바울을 사용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루터를 택하사 빛비춤을 가져오셨습니다.
VI. 윔즈 회의(Diet of
A. 교황의 공고 (Papal Ban)
교황이 더 이상 루터를 견딜수 없자 루터에 반대하는 공고를 내렸습니다. 교황은 독일인들이 달려와 다음과 같은 칙서를 따르기를 바랬습니다.
오 주여 일어나 심판하소서. 멧돼지가 당신의 포도원을 엄습했습니다. 오 베드로여 일어나 당신의 피로 헌신한 모든 교회들의 어미인 거룩한 로마 교회의 상황을 주시하소서. 당신의 가르침과 죽음으로 교회가 빛비춤 받게 했던 바울이여 일어나소서. 성경의 해석이 강한 공격을 받고있는 모든 성도들과 온 우주적인 교회여 일어나소서. 우리는 독일에서 일어난 오래 된 이단에 대해 우리의 슬픔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더 우울한 것은 독일이 항상 이단에 대한 전쟁에서 최전선에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제 직분들은 더 이상 다음 사십 일 개의 오류와 같은 위험한 바이러스를 허용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아 낱낱이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의 밭에 뱀이 접근하는 것을 견딜수 없습니다. 이러한 오류를 갖고 있는 마르틴 루터의 책들을 검열하고 태워야만 합니다. 선한 하나님이시여, 마틴 자신에게 그의 오류로부터 돌이키게 하기 위해 어떠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등한히 했습니까? 우리가 그에게 그 여행을 위한 틀림없는 안내와 돈을 주지 않았습니까? [루터는 그러한 제한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던 피오 2세와 율리어스 2세가 그러한 항소를 이단이라는 형벌로 내렸지만 그는 장래 종교 회의에 항소하려는 무모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틴이 제기할 날을 그의 지역에 이 교서가 공포되는 날부터 60일을 줄 것입니다. 감히 우리의 파문과 저주를 위반하는 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저주 아래 있을 것입니다. 1520년 6월 15일.[1]
루터에게 교황의 칙서를 전달하는 임무는 레입식(Leipsic)에서 루터와 토론을 했던 천주교 신학자인 엑(Eck)이 맡았습니다. 추가로 또 하나의 편지가 루터가 살던 주의 선제후인 프레드릭 더 와이즈(Frederick the Wise)에게 교황으로부터 전달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여, 우리는 네가 불법의 아들인 마르틴 루터에게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않은 것을 기뻐하도다. 우리는 이것이 네 현명함 때문인지 신앙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루터는 보헤미아인들과 터키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이단 처벌을 비탄하고 거룩한 박사들의 글과 세계 종교 회의의 법령과 로마 교황의 칙령을 거절하고 자기 자신조차도 구원하지 못하는 이의 의견을 믿는데 이는 어떠한 이단도 전에 감히 할 수 없던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양떼에게 영향을 미치는 더러운 양을 견딜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존귀한 형제들의 모임을 열었다. 성령 또한 그곳에 계셨고 그러한 상황에서 성령은 결코 우리의 교황청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교서를 작성해 납으로 봉인했는데 그 안에는 이 사람이 범한 셀 수 없는 오류 중에 그가 믿음을 곡해한 것과 순진한 자들을 꾄 것과 복종과 금욕과 겸손의 결속을 느슨하게 한 것이 있다. 그가 교황청에 대항하여 한 공격을 자랑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맡긴다. 우리는 네가 그를 권유하여 그가 제정신을 찾아 우리의 관용을 받도록 하길 권면한다. 만약 그의 광기가 계속된다면 그를 잡아두어라. 우리의 폰티피케이트(pontificate) 8년째인 1520년 7월 8일 어부의 반지의 봉인아래 주어짐.[2]
칙서를 받고 루터는 그의 직위를 떠나려 하는 이에게 답변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정사들과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에 대한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강하게 서서 주님의 나팔을 주의해야 하네. 사탄은 우리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네. 우리는 주님의 전쟁을 싸우고 있네. 그러므로 강해져야 하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면 누가 우리에게 대항하겠는가?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면 누가 우리를 대항하겠는가?
당신은 엑(Eck)이 루터와 그의 책들과 그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가장 맹렬한 교서를 공포하기 때문에 놀라고 있네. 어떠한 일이 일어나던지 간에 나는 움직이지 않는데 이는 하늘에 앉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의 뜻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네. 당신의 마음이 요동치 않게 해야 하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구하기 전에 당신의 필요를 알고 계신다네. 나무의 나뭇잎 한 장이 떨어지는 것도 그분은 알고 계시네. 만약 그분의 뜻이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네.
만약 영을 갖고 있다면 당신의 지위를 떠나지 말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가 당신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네. 우리를 위해 우리의 육체 안에서 그분의 목숨을 내려놓으신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은 작은 것일세. 우리는 그분과 함께 일어나 그분과 함께 영원히 거하네. 그때는 당신의 거룩한 부르심을 멸시하지 않을 것이네. 그분은 오실 것이고 지체하시지 안을 것이네. 누가 우리를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겠는가. 생각과 영을 위로하시고 지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잘 있게. 아멘. [3]
루터는 또한 교황의 사십 일개의 “오류” 항목들에 있는 몇 개의 항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내가 면죄부에 대하여 “종교를 빙자하여 신실한 이를 속이는 것”이라 말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합니다. 나는 철회하고 “면죄부는 교황의 가장 위선적인 기만이자 사기이다. 면죄부로 사람을 속이고 신실한 이의 소유를 파괴한다”라고 말합니다. [4]
나는 잘못했습니다. 나는 요한 후스(John Hus)가 복음주의 적이라는 특정 기사에 대한 언급을 철회합니다. “몇몇이 아니라 요한 후스의 모든 기사들이 사탄의 회안에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정죄받았습니다.”라고 지금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대리자인 당신의 면전 앞에서 요한 후스의 정죄받은 모든 기사들은 복음주의 적이고 기독교적이며 당신의 것들은 완전히 종교를 빙자한 것이며 극악무도하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말합니다. [5]
더 심한 모욕으로 루터는 공개적으로 칙서를 태웠는데 칙서와 함께 교회 방침과 교회 법과 교회 교리 등등을 정의하는 성직자들에게 일반적인 책들을 함께 불태웠습니다. 루터는 그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들이 나의 책을 불태웠기에 나도 그들의 책들을 태운다. 법규집(canon law)은 교황을 이 땅위의 신으로 만들기에 그것도 태웠다. 지금까지 나는 그저 교황의 이러한 일들에 장난친 것에 불과하다. 적그리스도가 정죄한 내 모든 기사들은 기독교적이다. 교황은 누군가를 성경과 이론으로 정복하지 않는다. [6]
루터에게 회개할 시간이 60일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60일 후에도 교황과 새로운 황제와 루터가 살던 주의 선제후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교황 칙서는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칙서에 의하면 루터는 읨즈 회의나 공적인 정부 집회앞에 출두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루터는 어찌할바를 몰랐습니다. 루터는 안전한 이동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가 가야합니까? 그가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까? 이 기회를 사용하여 서서 믿음을 변호해야 합니까?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반드시 두려움으로 인해 복음이 창피를 당하는 것을 막아 고백하고 우리의 가르침을 피로 증명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황제가 나를 부르면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묻습니다. 나는 너무 아파 내 발로 서지 못하더라도 갈 것입니다. 가이사가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만약 폭력이 사용되더라도, 그것 또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고 바벨론 왕의 불타는 풀무에서도 세 소년을 구한 분이시니 그분이 나를 구하지 않으시면 내 머리는 그리스도에 비교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안전을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나는 반드시 두려움으로 인해 복음이 창피를 당하는 것을 막아 고백하고 우리의 가르침을 피로 증명해야 합니다. [7]
B. 회의 앞에 나옴
루터는 1521년 4월 17일 윔즈 회의에 출두했습니다. 이는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단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회의가 아니라 황제 자신이 관련되어 있었고 또한 더 지위가 낮은 공관들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 장면 자체로도 극적인 묘사였다. 여기에 카톨릭 군주의 오랜 계통의 후손-막시밀리안 더 로맨틱(Maximilian the romantic), 퍼디난드 더 카톨릭(Ferdinand the Catholic), 이사벨라 더 오소독스(Isabella the orthodox)-인 찰스와, 합스버그(Hapsburg)가의 자손과, 오스트리아와 부르고뉴(Burgundy)와 낮은 나라들과 스페인과 나폴리의 군주와 샤를마뉴 대제를 빼고는 누구보다도 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거룩한 로마 황제는 중세의 연합을 상징하며 영광스럽더라도 없어질 전통의 실현이다. 그리고 이 앞에 단순한 수도사이자 광부의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그 믿음 빼고는 아무 것도 그를 지탱해줄 것이 없는 바로 그가 서있다. 여기서 과거와 미래가 만났다. [8]
트리어의 주교의 대표인 요한 엑이 루터를 심문했습니다(그는 레입식 토론의 엑이 아닙니다). 엑은 책더미를 갖고 와 루터에게 이 책들이 그의 책들인지를 물었습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 책들은 다 내 책들이고 내가 다 썼습니다.” 문이 닫히자 엑은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당신은 그 책 모두를 변호합니까? 아니면 어느 부분은 부인합니까?”
루터는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고려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언급합니다. 이는 혼의 구원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내 아버지 앞에서 나도 그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을 거의 하지 않거나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부탁드리건대 내게 생각할 시간을 더 주십시오.” [9]
답변을 고려할 하루의 시간이 루터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그의 글에서 그가 말한 것들 중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만약 성경의 오류를 그에게 보여준다면 그가 제일 먼저 그의 책들을 불에 던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엑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이라는 당신의 변명은 항상 이단들이 하는 말입니다. 당신은 위클리프와 허스의 오류를 되풀이했을 뿐입니다. [10]
루터가 답했습니다.
폐하와 각하께서 단순한 답변을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경과 명백한 이유가 책망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종교회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내 양심에 거슬리는 것이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11]
C. 유죄선고를 받음
그의 추종자들 또한 정죄받을 것입니다. 그의 책들은 사람의 기억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이 이단자를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격론이 일어났습니다. 루터에게 철회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록 루터는 그의 관점을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루터에게 주어진 시간이 만기되자, 그 문제는 완료되었고 루터는 이단으로 선고받았습니다.
신성 로마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다음의 칙령은 루터를 무법자로 선언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에서 언급한 마르틴 루터에게 환대나 숙소나 잠자리를 거절해야 합니다. 누구도 그에게 음식이나 마실것을 주어서는 안됩니다..어디서 그를 만나던 그를 죄인취급하고 우리에게 넘겨야 합니다...그의 친구들이나 그를 지지하는 자들을 공격하고 타도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여러분이 가지십시오...마르틴 루터의 책들은 아무도 사거나 팔거니 보관하거나 복사하거나 출판해서는 안되며 그 책들을 지지하거나 가르치거나 변호하거나 주장해서도 안됩니다...루터의 책들은 태우거나 어떤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파기해야 합니다. [12]
윔즈 칙령의 궁극적인 초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결혼을 욕되게 하고 고백을 비난하며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부인했습니다. 그는 성찬식이 받는 이의 믿음에 의존하게 했습니다. 자유 의지를 부인하는 이교도입니다. 수도복을 입은 이 악마는 냄새나는 웅덩이에 오래된 오류들을 가져와 새로운 것들을 발명했습니다. 그는 열쇠의 능력을 부인하고 평신도에게 성직자의 피로 손을 씻으라고 격려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반항과 분열과 전쟁과 살인과 강도와 방화와 기독교계의 붕괴를 만듭니다. 그는 괴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칙서와 총검도 멸시했습니다. 그는 성직 권력에게보다도 시민들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수고해왔었지만 그는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는데 그것은 그가 스스로 그의 생각대로 해석하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4월 25일부터 21일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재산을 수거했고 루터는 정죄받은 이단으로 간주됩니다. 시간이 되면 아무도 그를 숨겨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추종자들 또한 정죄받을 것입니다. 그의 책들은 사람의 기억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13]
D. “납치”
루터는 윔즈 회의까지와 그곳으로부터의 안전한 이동을 약속 받았습니다. 백년 전에 허스 역시 안전한 이동을 약속 받았지만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정부는 그 말을 지키고 루터가 떠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교황은 이 반항아를 궤멸할 환경을 만들려 노력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루터의 안전을 위해 프레드릭(Frederick)선제후가 그를 붙잡았을 때 루터는 비텐베르크(Wittenberg)로 출발했습니다. 후에 루터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편지로 친구에게 알렸습니다.
... 교황은 이 반항아를 궤멸할 환경을 만들려 노력했다는 것이 ...
내 옷을 벗기고 기사들이 입는 옷을 입혔다. 내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있기에 당신도 나를 거의 알아보지 못할 것이네-참으로 어떨 때는 나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네! 나는 기독교의 자유 안에 살고 있네...안녕,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게. [14]
바르트부룩(Wartburg)성에서 1521년 4월부터 1522년 초까지 숨어 지냈고 심지어 그의 이름을 정커 조지(Junker George)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는 성에서 머물던 이 기간을 그의 사막, 그의 밧모, 그의 광야라고 불렀습니다. 루터의 부재중에 나중에 루터의 성경을 위해 목판을 만들었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는 루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지 살해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에든 그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 인해 고난받았다. 우리가 만약 누구보다도 더 분명하게 글을 썼던 이 사람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님이 그의 영을 다른 이에게 주시길 원한다. 그의 책들은 황제의 명령처럼 태워서는 안되고 큰 공경을 받아야 하며 대신 그의 적들의 책들을 태워야 한다. 오 하나님, 만약 루터가 죽었다면 누가 앞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해주겠습니까? 그가 다음 10년 20년 동안 우리를 위해 어떠한 글들을 썼을 까요?
VII. 바르트부룩(Wartburg)에서의 체류 (A.D. 1521-1522)
A. 건설적인 기간
마르틴 루터가 바르트부룩에서 체류한 것은 그의 일생에 아주 건설적인 기간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고 신약을 마쳤는데 이는 라틴이 아닌 헬라어 본문에서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그것은 1522년 9월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막”에 있는 동안 면죄부를 계속해서 공격해왔습니다. 그는 자세하게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 당시는 또한 심한 고난의 때였습니다. 그는 그의 친구인 멜란히톤(Melanchthon)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영 안에서 불타올라야 하지만 사실은 내 육안에서 정욕과 나태함과 게으름과 졸음으로 불타고 있네...여기 갇혀서 죄에 잠긴 나를 위해 부디 기도해 주게. [16]
B. 복음파와의 투쟁
또한 이 때 루터는 유럽에 있는 여러 복음파와 투쟁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츠빙글리와 의견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재침례교도와 슈벵크벨트(Schwenckfeld)와 뮌춰(Muntzer)를 포함한 츠비카우(Zwickau)의 선지자들과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 몇몇 복음주의자들의 믿음에 대한 강한 저항은 루터보다도 더 분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저자는 츠빙글리를 따르는 이들 사이에서 생겨난 재침례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에라스무스(Erasmian) 프로그램의 또 다른 방면으로서 츠빙글리에게도 귀한 것이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의 회복으로서 산상 수훈을 그들의 규례로 취해 맹세와 전쟁이나 시민 정부안에서 칼의 사용과 사유 재산과 장신구와 환각이나 술취함을 거절한다. 평화주의와 종교적인 공산주의와 단순함과 절제가 그들 공동체의 표시이다. 교회는 반드시 두 번 거듭나고 제자들의 언약에 헌신적인 자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영적 체험과 도덕적 성취라는 두개의 시험으로 알아볼 수 있는 선민들의 관념을 본다. 교회는 영아 침례가 아니라 성숙했을 때 받는 침례로 상징되는 거듭남에 의존해야 한다. 모든 지체는 전도 여행에 착수할 준비가 된 성직자나 사역자나 선교사여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하지만 그러한 교회는 개종하지 않은 공동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나라가 모든 백성들로 구성된다면 교회와 나라는 나뉘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종교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17]
위의 저자는 그들의 삶이 그들 주위에 사람들에게 간증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헤세의 필립(Philip of Hesse)은 루터 교파보다 분리파 교회 신도사이에서 생활의 발전을 더 목격했고 루터파의 사역자로서 재침례파에 반대하는 글을 쓴 이는 그들이 매우 천해보이는 가난한 이들 안으로 들어가고 기도를 많이 하고 복음서를 읽고 외적 생활과 선행과 이웃을 돕고 주고 빌려주는 것에 관해 특별히 많은 이야기를 하고 물건을 공유하고 누구에게도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모두 형제 자매로서 살고있다고 간증했다. 이들이 바로 색스니의 존(John of Saxony) 선제후에 의해 처형당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다시 한번 교회의 씨앗이었음이 증명되었다.[18]
...순교자들의 피는 다시 한번 교회의 씨앗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비록 재침례파의 순교로 인해 혼동스러웠지만 그들을 향한 그의 태도는 모순이었습니다. 한면에서 그는 다른 이들에게 결코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요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반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시장이 거짓 선지자들을 죽여도 되는지에 관해 물을지 모른다. 나는 죽어 마땅할지라도 사형에 대해서는 성급히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천주교도와 그리스도 앞에 유대인들 때문에 무서운데 이는 거짓 선지자와 이단의 사형 법에 있어서 오직 가장 거룩하고 결백한 이들이 죽었기 때문이다...나는 거짓 교사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추방당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19]
한편 1531년 멜란히톤이 작성하고 루터가 서명한 메모에서 보면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강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일관적이려는 것이 루터에게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메모에서 루터는 성직자 직위를 거절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국가교회의 분리를 도운 이들은 선동적이며 그러므로 교회의 최고의 유익을 반대하는 이들이라고 느꼈습니다. 다음은 이 메모에 남긴 루터의 추신입니다.
나는 주장한다. 비록 그들을 칼로 벌하는 것이 잔혹하게 보일지라도 그들이 말씀의 사역을 정죄하고 확립된 교리도 없이 진리를 억누르고 시민의 지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더 잔혹하다.[20]
C. 급진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가르치고 전파하고 저술합니다.
루터가 바르트부룩에 머무는 동안 그의 동료중 몇몇은 적극적으로 급진적 변화를 개혁하고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루터역시 변화의 필요를 깨닫고 있었지만 적당히 할 것을 조언했습니다.
루터는 개혁이 항상 힘이 아니라 부드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면죄부와 모든 천주교도들을 반대하지만 힘으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가르치고 전파하고 저술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로마 교황을 상당히 약하게 하여 어느 군주나 황제도 그러한 손실을 입힌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을 했습니다.’[21]
그후 루터가 자리를 비웠던 1521년과 1522년에 당황할 정도로 빠르게 계속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성직자들이 결혼하고 수도사들이 결혼하고 수녀들이 결혼했습니다. 수녀와 수도사들은 심지어 서로에게 장가들고 시집갔습니다. 출가한 이들도 머리를 기르도록 허용되었습니다...성직자들은 제의가 아닌 평범한 옷을 입고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미사의 일정부분은 독일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는 중단되었습니다. 철야기도는 중단되었고 저녁기도는 변경되었고 신상들은 부서졌습니다. 금식하는 날에 고기를 먹었습니다. 귀족들은 후원금을 중단했습니다. 성직 장학금을 더 이상 후원하지 않았기에 대학의 등록률은 떨어졌습니다.[22]
1. 독신주의
어떤 이들은 제사장의 독신주의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멜란크톤은 이 문제에 관해 망설였는데 이는 수도사의 서원중 일부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주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하여 이러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 수도사도 수도사 옷을 입는다고 구원받을 수 없고 수도원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고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떠나고 수도원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복음서에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23]
2. 미사
미사에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텐베르크에서 오거스틴의 교단에서 루터와 친근했던 이들은 모두 함께 미사를 폐지했습니다. 이것은 “미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지 제사가 아니며 믿는 이들의 교통”이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미사의 제사의 성격만을 제하려던 루터에게는 너무나 극단적이었습니다.[24]
3. 성찬식
성찬식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인 안드레아 칼스타드(Andreas Carlstadt)와 루터의 절친한 동료들은 형제 자매들이 떡은 물론 잔도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했었는데 이전에는 금지되었었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실행을 회복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칼스타드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그와 모이는 이들을 “헤르 닥터(Herr Doktor)”라 부르는 대신 “좋은 이웃” 혹은 “안드레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평범한 회색 외투가 그의 평소의 특이한 옷을 대치했습니다. 회중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는 대신 칼스타드는 농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4. 그림들
칼스타드가 성당에서 모든 그림을 떼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군중들은 성당에 들어가 벽에 있는 성상들을 떼고 신상들을 부서뜨렸습니다. 개혁이 결박한 것을 두려워한 루터는 1522년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폭력과 파괴를 사용하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1524년 제나(Jena)에 있던 칼스타드가 루터를 방문했습니다. 칼스타드는 개혁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지만 그러한 비난은 거짓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칼스타드가 살고 있던 올라문데(Orlamunde)를 방문했을 때 루터는 회중들의 개혁의 기질을 관찰하고 칼스타드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루터는 칼스타드의 추방에 동의하여 칼스타드는 임신한 아내와 아이들은 나중에 그에게 가도록 하고 색스니(Saxony)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칼스타드는 루터가 그러한 입장을 취할 줄 몰랐습니다:
[칼스타드]는 루터가 윔즈 회의 후 “듣지도 않고 유죄를 입증하지도 않고”정죄한다는 바로 그 똑같은 말을 하며 떠났고 그는 그의 예전 동료로서 두 번째 교황주의자이자 적그리스도의 사촌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25]
색소니에서 추방당한 후 칼스타드는 독일 남부 도시들로 여행했습니다. 스트라스버그(Strassburg)의 사역자들은 루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칼스타드에 의해 설득되지 않았지만 그의 주장중 많은 것들이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당신의 옛 동료를 그렇게 몰인정하게 추방한 것으로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바셀(Basel)과 취리히(Zurich)에는 그에게 동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26]
5. 시민 정부
시민 정부 역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칼스타드는 이 분야에서 또한 목소리를 높이며 교회사에 어떠한 시민의 간섭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특별히 정부가 로마 카톨릭이라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정부가 “복음주의적”이라는 데에는 항상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은 그의 편을 드는지 아니면 로마의 편을 드는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루터는 교회가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부인하며 이러한 것을 시민 권위들에게 위임했습니다.
다니엘이 말한 것처럼 적그리스도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부서질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폭력은 그를 더 강하게 만들뿐이다. 전파하고 기도하지만 싸우지는 말라. 모든 속박되는 것들이 제해지는 것이 아니라 임명된 권위들에 의해 사용되어야만 한다.[27]
루터는 시민 정부의 필요를 깨달았습니다. 루터의 관점을 바인튼(Bainton)이 다음과 같이 의역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행동할 때 사람이 행하는 방법이고 그럴 경우에는 법이나 검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는 어디에도 없고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거하는 교회안에도 없다. [28]
그 같은 저자가 교회와 시민 정부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관점을 평가했습니다.
...교회와 국가가 동맹할때 하나는 항상 지배하고 그 결과는 신정(Theocracy)이나 제왕적 교황주의(caesaropapism)이다. 루터는 교회와 국가를 나누는 것을 거절했고 신정을 거부하고 그러므로 제왕적 교황주의(제왕적 교황주의(caesaropapism))에게 문을 열어 놓았다. [29]
6. 구약의 실행들
어떤 구약의 실행들은 그때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실행들을 회복하는데 강하게 저항했고 그리스도가 율법의 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끝났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율법은 마음 안에 적혀 있었습니다(히 8:10).
7. 농민 전쟁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있는 동안 농민 전쟁이 독일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농민들이 일어나 정부를 타도하는 것이 루터의 전파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걸쳐진 많은 부정 행위의 결과라고 느꼈습니다. 바인톤은 농민 전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농민 전쟁은 청교도 개혁의 결합은 없었는데 이는 분명한 프로그램도 없었고 조리 있는 인도직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단체들은 소작농의 절대권을 원했고 어떤 이들은 계급 없는 사회를 원했고 어떤 이들은 봉건제도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어떤 이들은 모든 지배자들이 없어지는 것을 원했다...가끔 지배자들은 소작농들이었고...가끔은 기사들(knights)이었다. 나뉜 줄들은 협력하지 못했다. 종교의 연합조차 없었는데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가 양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30]
루터는 농민 전쟁을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농민들이 열린 폭동 안에 있으면 그는 하나님의 율법밖에 있는데 이는 폭동이 단지 살인이 아니라 온 땅을 공격하고 온 땅을 허비하는 큰 불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동은 살인자와 피흘림이 가득한 땅을 동반하며 과부와 고아들을 만들며 큰 재앙과 같이 모든 뒤집히게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 것도 저항보다 유해하고 상처를 주거나 악마적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며 비밀스럽게나 공개적으로 치고 살해하고 찔러 죽이라. 이것은 마치 미친개를 죽여야 할 때 그 개를 죽이지 않으면 그 개가 당신과 당신가 함께 한 온 땅을 치는 것과도 같다. [31]
농민 전쟁에 대한 루터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농민의 전쟁동안 긍휼없는 억압을 주장했듯이, 후에 그는 관용이 모든 이들에게 뻗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D. 확대된 서신왕래
그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루터는 계속해서 서신왕래를 했습니다.
1. 보헤미아 형제회
루터는 보헤미아 형제회에게 서신을 보내 교황을 반대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루터는 그들이 그와 관점을 달리 하지만 이 형제회를 온전히 인정했습니다.
2. 헨리 8세
영국의 헨리 8세는 비록 그 자신이 카톨릭에게 매우 충실하지 않으면서도 루터가 카톨릭 교회에 저항한다고 루터를 비난했습니다. 헨리 8세의 비난에 대한 루터의 답장은 “헨리의 통치에 반대함”이라는 다소 거친 제목의 논문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카톨릭 영주로서 헨리는 마르틴 루터를 “하나님의 은혜로된 비텐부르크의 사역자”라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하나님의 치욕인 영국의 왕 헨리께”라고 답했습니다. 비록 후에 루터가 헨리 8세와 화해하려 했지만 이미 금이 갔습니다. 헨리는 계속해서 루터를 만족하지 못한 자유“의 전도자라고 여겼습니다.
3. 에라스무스
루터는 에라스무스와 계속해서 서신왕래를 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빠른 속도로 벌어지는 개혁에 대해 방심하지 않았으며 교황과 교황제에 반대하는 루터의 견고한 선포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당분간 루터가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는 글을 썼습니다.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일지 모르나 합당한 때가 있다.” 그는 루터가 거칠다고 비난했습니다. 한편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겁쟁이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못 본척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VIII. 루터주의의 급속한 확산
루터주의는 개혁을 장려하기 위해 사용된 여러 방법들을 통하여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열광적인 선교사 활동은 개혁의 10년간 대부분의 북부 독일을 획득했다. 이러한 성공은 그전까지의 둘도 없는 선전의 물결과 결코 반복된 적이 없는 정확한 형태 안에서 이루어졌다. 소책자와 만화가 가장 으뜸의 수단이었다. 1521년부터 1524년까지의 4년 동안 독일에서 발행된 팜플렛의 숫자는 지금까지도 독일 역사의 어느 4년 동안 발행된 숫자를 훨씬 뛰어 넘는다...이러한 모든 것을 루터 자신이 지위했고 그 지방 언어로 만들어진 루터의 팜플렛은 수백 개에 이르렀다. 하지만 광대한 보병대가 그를 도왔고 이렇게 크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을 출판한 인쇄공들은 그들의 가정과 삶을 각오한 대담한 사람들이었다. [32]
소책자이외에도 개혁의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만화를 사용하였습니다.
로마 교회의 모든 외적인 악습들은 글로써 풍자하기 쉬웠다. 그리스도와 교황의 대조에 관한 익숙한 주제를 이용하였다. 교황과 대화를 나누는 그리스도는 “내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니 교황은 “시실리(Sicily)는 내것이고 코시카(Corsica)도 내것이고 아시시(Assisi)도 내것이고 페루지아(Perugia)도 내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시자 교황은 “면죄부를 돈 내고 사는 자들은 사면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시고 교황은 “나는 내 양털을 깎는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칼을 거두라”라고 말씀하시고 교황은 “율리어스(Julius)교황은 하루에 1600명을 죽였다.”라고 말했다. [33]
개혁의 목판은 악마가 편지로 그를 방해할 때 책상에 있던 루터를 보여줍니다.
우리 루시퍼는 영원한 어두움의 주와 모든 세상 왕국의 지배자로서 마르틴 루터에게 우리의 분노와 불만을 선포한다. 우리의 특사인 캄페기오(Campeggio) 추기경과 랭(Lang)추기경에게서 들은 바로는 네가 우리의 요청으로 지난 1400년 동안 거의 쓰이지 않던 성경을 부활시킨 손상을 끼쳤다. 수도사들과 수녀들을 설득해 그들이 전에는 우리를 섬기던 수도원을 떠나게 했을 뿐 아니라 너 자신도 우리를 섬기는 것으로부터 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를 불태우고 물에 빠뜨리고 목을 자를 것이다. 이것은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고 너는 또 다른 통보를 받지 않을 것이다. 1524년 9월의 마지막날 저주의 도시에서 지옥의 인으로 봉함. [34]
시들도 쓰여졌는데 넌버그(Nurnberg)의 구두장이가 쓴 “비텐베르크 나이팅게일”이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우리 모두가 아담의 타락에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만약 사람이 그의 속을 본다면 그는 상처와 죄의 저주를 느낄 것이다. 무서움과 절망과 공포가 닥칠 때 그는 무릎을 꿇고 회개할 것이다. 그럴 때 낯의 빛이 그에게 비췰 것이다. 그러면 복음이 움직일지 모른다. 그때 그는 아들 하나님인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신 분을 보게 될 것이다. 율법이 완성되었고 빚을 갚았고, 사망을 이겼고 저주를 완화시켰고, 지옥을 멸했고 마귀는 묶였으며 하나님과 함께 한 우리를 위한 혜를 찾았다. 그리스도 어린양은 모든 죄를 지우셨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음으로만
우리를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