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회심의 본질과 그의 전 신앙의 발전 과정 속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그 의의에 대한 해석은 그의 전 신학에 대한 해석만큼이나 다양하다. 런연이 표현한 바와 같은 "웨슬리의 에큐메니즘"은 종교개혁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가지 지류가 합류하는 저수지이자, 오늘날까지 다양한 해석의 지류를 가능케 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기독교 전통으로 웨슬리의 전 신학체계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웨슬리 신학이 지니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사상(捨象)시키는 무모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신학 사상을 교회사적인 맥락과, 조직신학적인 구조를 함께 고찰함으로 보다 가까운 기독교적인 전통에 자리매김 하려는 시도는 웨슬리 연구자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웨슬리 회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올더스게잇 사건에 대한 해석사와 연구사를 고찰해 볼 때, 연구 결과는 연구자 자신이 속한 기독교적 전통의 영향과 속한 집단의 신학적인 자기 이해의 변화에 상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적합한 해석을 위하여 텍스트와 해석자의 지평융합이 불가피함을 인정하더라도, 역사의 연구는 해석자의 의도성이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올더스게잇을 둘러싼 상충된 해석은 해석자의 당파적인 의도성과도 연관이 있지만, 웨슬리 자신의 올더스게잇에 대한 해석의 모호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1960년대 이후 웨슬리 연구 분야에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다. 그 중 1975년부터 발행되고 있는 웨슬리 총서의 200주년 비평판(The Bicentennial Edition of The Works of John Wesley)은 역사 비평적 연구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며, 그 이후의 역사적인 맥락에 기초한 광범위한 연구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이 변화의 한 가운데 웨슬리의 올더스게잇에 대한 새로운 이해, 랜디 매독스가 쿤의 용어를 빌러 표현한 대로하면 "모형 전이(Paradigm Shift)",가 놓여 있다. 올더스게잇 이해의 모형전이의 주된 내용은 웨슬리의 영적, 신학적인 발전과 비연속적인 것으로부터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이전의 주도적인 '표준적 해석': 올더스게잇은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사상의 분수령으로,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구분짓는 결정적인 계기로 보는 입장에서, 인간 의식의 복잡성과 인간 현실의 다의성을 인정하면서 올더스게잇을 웨슬리의 영적, 신학적인 발전의 한 과정으로 보는 입장으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올더스게잇을 그의 전 신앙의 여정에서 따로 떼어내어 독립적으로 고찰할 수 없다. 웨슬리의 그의 진정한 회심은 1725년 거룩한 삶을 추구하기로 결단한 옥스퍼드 시절이었으며, 회심 후에 추구된 성화에의 노력은 바로 이러한 웨슬리의 초기 회심의 연속선상에 놓일 따름이라고 주장하여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회심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에 도전한 최초의 학자 중의 한 사람이 벨기에의 로마 카톨릭 신부인 피에트(Maximin Piette)였다. 그에 의해 이제까지 부정적으로 묘사되던 올더스게잇 이전의 웨슬리 상이 수정되었다. 이에 대해 셀(George Croft Cell)은 피에트가 지적한 대로 웨슬리에게 카톨릭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일차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칼빈적인, 요소를 재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웨슬리의 신학사상은 카톨릭의 성화의 윤리와 개신교의 은총에 의한 믿음의 윤리의 필요한 종합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셀은 웨슬리가 올더스게잇에서 그의 종교적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표준적인 해석'을 견지한다. 반면에 리(Umphry Lee)는 피에트의 견해와 같이 올더스게잇을 웨슬리의 신앙과 삶에 유일무이한 분수령이 될 수 없고, 그의 신학은 올더스게잇을 넘어 계속해서 성숙하게된다고 본다. 셀의 견해 보다 더욱 '표준적인 해석'을 더욱 단호하게 지지하는 래턴베리(J. Ernest Rattenbury)는 웨슬리의 올더스게잇의 회심을 율법적인 바리새인이 칭의론적인 의미의 복음주의적 신앙인이 된 결정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케논(William Cannon)은 올더스게잇에서 처음으로 웨슬리가 믿음에 의한 칭의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고 주장하면서도 웨슬리의 신학적인 강조점은 기독자의 완전에 있다고 보았다. 이상의 연구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던 것이 그 이후의 다양한 연구에서 더욱 활짝 꽃핀 결과를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이나 고대 교회 전통(특히 동방교회)에 기대어 웨슬리의 신학을 해석하는 학자들은 1738년 올더스게잇 회심보다는 그 이전 옥스퍼드 시절에 거룩한 삶으로의 결단과 그 시절 읽었던 카톨릭과 동방교부들의 서적을 통한 성화와 기독자의 완전사상 혹은 신화(神化, Theosis) 사상을 강조하는 경향을 지닌다. 이는 후기 혹은 성숙한 웨슬리의 성화와 완전 사상의 전제로서, 그 내적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그 주장의 정당성을 얻고자 한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계열, 특히 신정통주의의 영향하에 있는 복음주의적(Evangelical) 입장의 학자들은 웨슬리의 회심사건을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을 절대 수용한, 그의 신앙발전의 정점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지닌다. 이는 웨슬리가 올더스게잇 이전에 적어도 그처럼 칭의론에 대해 지적으로, 실존적인 체험으로 대면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그 정당성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인 논리는 올더스게잇 사건을 보도하는 웨슬리 텍스트(일기)와 그 이후에 전개된 신학적인 논쟁에 대한 철저한 역사비평적인 분석에서 나온 결과라고 보기보다는, 신학적인 전제와 의도 속에서 도식화된 결론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올더스게잇 이전과 이후의 신앙발전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추구함으로써 '표준해석'에 대한 대안적인 페러다임을 제시하는 하이젠레이터(Richard P. Heitzenrater)는 이러한 양극화된 해석의 틀을 일정부분 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이젠레이터는 회심에 배태되고 있던 그 이후의 신학 사상과의 연속적인 맥락을 간과함으로써, 그 이후의 사상의 전개를 '연속적 발전' 내지는 '신학 사상의 심화'의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올더스게잇의 입장 '변화'와 그 이후의 '성장'의 관점에서 보았다. 이는 하이젠레이터가 존 웨슬리의 회심이 '오직 신앙으로(sola fide)'만을 강조하는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으로 환원시킬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그의 칭의론이란 것이 곧 루터교 정통주의의 그것도 아니며, 또한 모라비안 형제들의 그것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교회사인 맥락을 간과한 데서 온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올더스게잇 사건 자체에 이미 '신앙의 등급과 성장 개념' 속에, 그 이후의 그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화론'의 단초가 있다고 본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회심이해가 후에 성숙된 신학에 의해 변화되고 수정된 것이 아니라 다소 모호한 올더스게잇 사건 속에 이미 후에 뚜렷이 나타나는 모라비안 형제들과 대립되는 그의 신학적 특징이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하이젠레이터가, 웨슬리의 올더스게잇에 대한 이해가 그의 전 생애를 거쳐 중요한 수정(significant modification)을 겪었다고 본 것은 올더스게잇 사건의 모호성과 웨슬리가 처음에 모라비안 형제들의 신학의 성격-특별히 루터신학의 수용과 관련하여-을 전체로서 이해하지 못하다가 점차로 인식하는 과정을 철저히 구명하지 못한 결과이며, 게다가 루터수용에 있어 모라비안과 대립된 할레 경건주의의 웨슬리에 대한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독일의 루터교 교회사가인 마틴 슈미트(Martin Schmidt)도 웨슬리의 올더스게잇의 회심을 모라비안 목사인 페터 뵐러(Peter B hler) 통한 바울적-루터적인 회심으로 보면서, 회심 이후 페터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 내에서 첨예하게 나타난 정적주의(Stillness) 내지는 반율법주의(Antinominianism) 논쟁을 몰터(Philipp Heinrich Molther) 개인의 신학적인 이견(異見)때문에 생긴 오해로 귀착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반율법주의 논쟁 와중에 웨슬리가 모라비안들의 오류의 근원으로 판단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Kommentar zum Galaterbrief)을 신랄하게 비판한 점과 그 후에 웨슬리가 칭의론과 성화론을 둘러싸고 모라비안 형제단의 창시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진젠도르프(N.L. von Zinzendorf)와 신학적인 논쟁을 벌인 후 결별한 사실을 신학적으로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하며, 그 당시의 모라비안 형제단의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필자는 이 문제는 독일 경건주의자들-모라비안은 루터교 경건주의의 예외적인 형태이다-이 루터의 칭의론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웨슬리가 이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수용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본다. II. 존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회심과 그 성격
1. 조지아 선교: 올더스게잇에 이르는 관문
웨슬리가 조지아 선교사로 떠나기 전, 그를 추천했던 옥스퍼드 동료인 존 버튼(John Burton)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밝혔던 선교사로 가는 자신의 목적, 즉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소망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함으로써 복음의 참된 의미를 배우려는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지아 선교사로서 웨슬리가 느낀 절망과 자기 환멸은, 다른 사람들, 특별히 인디안들을 회심시키러 갔던 웨슬리 자신이 남을 회심시키기 전에 먼저 자신이 회심되어져야 한다는 아이러니, 그리고 이제까지의 자신의 신앙이 "화창한 여름날의 종교(A fair summer religion)"이었음을 고백하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웨슬리의 실패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추구해온 거룩한 삶에 대한 노력이 좌절되었음을 뜻하며, 그는 자기가 설정한 이상(理想)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의 성공은 이를 통해 허상을 깨고 자신의 참된 실재, 죄에 얽매어 허덕이는 실존의 처절한 모습을 뼈저리게 체험했다는 점과 조지아에서 유럽 대륙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이주한 다양한 신앙공동체와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신학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신대륙 북아메리카의 조지아는 윌리암 펜(William Penn)의 펜실베니아처럼 유럽 대륙에서 핍박받던 여러 기독교 분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난처를 마련하고 새로운 신앙의 실험을 감행하던 곳이었다. 이들에 의해 많은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그 중에 존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신앙공동체는 사바나(Savannah)에 있는 헤른후트 형제단(모라비안 형제단)과 에벤에셀(Ebenezer)에 있는 잘쯔브루그(Salzburg) 이주자들이었다. 전자와의 첫 만남은 널리 알려진 대로 웨슬리가 조지아로 향하는 배에서였다. 심한 풍랑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가 배에 탄 사람들을 사로잡았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의연하게 행동하던 모라비안 형제들과 그들의 신앙은 존 웨슬리에게 몹시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좋은 인상으로 인해 조지아에서 모라비안 형제들과 좋은 관계를 계속하였다. 웨슬리는 그들과 많은 신앙의 대화를 나누며,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 영국 국교회 고교회주의자로서 존 웨슬리가 이러한 자유분방한 모라비안의 독특한 신앙공동체로부터 경건주의적인 찬양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기도와 예배형식, 형제들을 서로 권면하며 신앙을 세우는 신앙조직(Bands)은 후에 본격적인 메소디스트 운동 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잘쯔부르그 이주자들은 잘쯔부르그의 대주교의 재카톨릭화(Rekatholisierung) 정책으로 인한 거센 핍박을 피해 조지아로 이주해 온 독실한 루터교 신자들이었다. 1735년 10월 이들 중 3차 이주자들이 탔던 "런던 머찬트(The London Merchant)"호는 존 웨슬리와 그의 옥스퍼드 친구들은 모라비안과 함께 탄 "시몬즈(The Simmonds)"호와 한 선단을 이루어 조지아로 향했다. 잘쯔부르그 이주자들을 이끄는 목회자와 교사로 함께 조지아로 가서 그들의 신앙공동체인 에벤에셀을 건설한 사람이 할레 경건주의자들인 볼치우스(Johann Martin Boltzius)와 그로나우(Israel Christian Gronau)이다. 이들은 할레 경건주의의 또 다른 중심이었던 스톨베르그-베르니거오데(Stolberg-Wernigerode)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곳의 영주 에른스트 백작(Graf Christian Ernst)은 슈팡엔베르그(August Gottlieb Spangenberg)가 1733년 4월 할레에서 추방되어 헤른후트(Herrnhut)로 들어간 후, 격화된 진젠도르프와 그의 형제단과의 대립과 투쟁의 선두에 서게된다. 할레와 헤른후트의 대립과 경쟁은 단순한 세 확장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원래 할레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제국 백작이었던 진젠도르프는 1727년에 헤른후트 형제단이란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창단한 후 할레와 경쟁하게 된다. 1729년 할레의 목사인 미쉬케(Johannes Mischke)가, 진젠도르프는 참된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이후 진젠도르프는 할레의 회개투쟁(Bu kampf)과 율법이해를 비판하면서 그가 어린시절 영향받았던 신비주의적인 복음이해의 길을 심화시키며 독자적인 예배의식을 갖춘 신앙공동체를 구축해간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에서 서로 대립하며 경쟁하는 독일 루터교 경건주의의 두 유형에 대한 명확한 분별의식 없이 이들과 조우하게 된다. 존 웨슬리가 독일 경건주의를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은 모라비안 형제들을 만나기 전, 옥스프드시절, 하노버 왕가의 궁정목사로 영국에 와 있던 할레경건주의의 전파자 뵈메(Anton Willhelm B hme)가 "기독교 지식진흥회(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을 통해 출판한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와 할레 경건주의 서적을 통해서 이다. 이들 경건주의 서적 중 "니고데무스(Nicodemus: Or, A. Treatise against the Fear of Man)", "할레의 경건(Pietas Hallensis)" 그리고 어린 시절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로부터 들어 온 할레에서 파송된 선교사 지겐발그(Bartholm us Zigenbalg)의 선교보고서 "동방에서의 복음의 전파(Propagation of the Gospel in the East: Being an Account of the Success of Two Danish Missionaries)"는 웨슬리가 조지아로 떠나는 배에서, 조지아 선교지에서 즐겨 읽었던 책들이며, 이 책들의 웨슬리에 대한 영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존 웨슬리는 1736년 2월 조지아에 도착한 후 모라비안 형제들 중 유일하게 라틴어를 말 할 수 있었던 신학자이자 목사인 스팡엔베르그를 매개로 하여 모라비안 형제들과 가까워졌다. 웨슬리는 스팡엔베르그로부터 그가 이제까지 걸어 온 길, 특히 그가 할레와 갈라서게 된 이유에 대해 들었다. 후에 웨슬리는 할레 경건주의자 볼치우스로부터 슈팡엔베르그가 할레 대학의 교수가 아니라 조교(Adjunkt)였으며, 심문없이 왕의 명령으로 할레에서 축출된 것이 아니라 많은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레 대학의 권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반론을 들었다. 슈팡엔베르그를 높이 평가했던 웨슬리는 그를 감싸려고 했지만, 점차 그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볼치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존 웨슬리가 처음으로 서로 대립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두 유형을 어렴풋이 나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737년 8월 1일 웨슬리는 스팡엔베르그와 함께 잘쯔부르그인들의 이주지인 뉴에벤에젤을 방문하여 그들이 이룩한 큰 성과에 놀라며, 볼치우스와 그로나우의 친절함과 개방성과 경건뿐만 아니라, 스팡엔베르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그들의 아주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웨슬리는 특별히 진젠도르프 백작의 성서해석과 공중기도의 방식에 관해서 듣고는 그도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강한 확신을 하게된다. 이는 그가 처음 스팡엔베르그로부터 듣고 신앙상담의 편지를 보냈던, 진젠도르프에 대한 신화적인 상이 깨어졌음을 의미한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의 선교사로서 독일 경건주의자들과의 의미있는 만남을 경험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조지아 선교는 그의 다소 경직된 대인관계와 특히 사바나 시장의 조카인 홉키(Christian Hopkey)와의 결혼실패 사건으로 인해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옥스퍼드시절 이래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와 윌리암 로(William Law)의 영향하에 웨슬리가 추구해온 성화를 향한 자신의 노력이 율법 아래에서의 자기의(Selbstgerechtigkeit)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이것은 한 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뼈저린 경험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사 그 마음의 참된 현실성을 보여 주셨고 그 자신에 절망하도록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일어난 신앙의 시험(Anfechtung)이었다. 웨슬리에게 있어 조지아에서의 실패는 올더스게잇에 이르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었다.
2. 올더스게잇 회심과 모라비안 피터 뵐러(Peter B hler)의 의미
존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회심 사건은, 진젠도르프에 의해 북아메리카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영국에 잠시 머물렀던 페터 뵐러(Peter B hler)와의 만남과 그와 함께 결성한 페터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뵐러와의 많은 신앙의 대화를 통하여 웨슬리가 천착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이신론적 도덕주의 신학을 넘어서, 종교개혁적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이었다. 특별히 그는 1738년 3월 5일에서 7일 사이에 개신교적인 오직 신앙에 의한 칭의를 지적으로 승인하고 이 교리를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에게 선포하였다. 4월 23일 웨슬리는 그 동안 망설였던 '한 순간에(in a moment) 주어지는,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죄와 두려움으로부터 거룩함과 행복으로 옮기는,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에 대한 뵐러의 주장을 그가 제시하는 체험자들의 증언 앞에서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우시기를 기도한다. 5월 1일 존 웨슬리는 페터 뵐러와 함께 페터레인가(Fetter Lane Street)에서 신도회(Society)를 결성한다. 이 때 웨슬리는 이 모임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은 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페터 뵐러의 정신에 의해 좌우되지도 않았다. 페터레인 신도회의 규정의 성격을 웨슬리는 "성 야고보에 의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페터 뵐러의 충고에 따라…" 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웨슬리가 이 모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모임에 참여한 영국교회의 사제와 신자들은 이와는 별도로 각기 독자적인 신도회(Religious Society)를 인도하고 있었다. 5월 4일 페터 뵐러는 원래의 목적인 북아메리카 선교를 위하여 런던을 떠났다. 그가 떠난 다음날 페터레인 신도회의 7명의 창립멤버와 다른 8명이 서명하여 뵐러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는 편지를 진젠도르프에게 보냈는데, 이때 웨슬리는 이 편지에 서명하지 않았다. 웨슬리가 뵐러에 의해 "오직 은총을 통한 구원"의 교리가 영국에서 새롭게 인식된 점을 높이 평가한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그 이후 존 웨슬리는 "은총과 믿음에 의한 구원"을 설교했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고 지속적인 슬픔을 지녔는데, 이것은 단지 그가 영국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극심한 내면적인 신앙의 시련(Anfechtung)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의 상태는 올더스게잇 회심이 있던 당일인 24일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영혼의 모든 생각, 모든 기질은 하나님의 형상과 각인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나는 내가 죄 아래 팔려 있음을 느낀다. 나는 또한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에 합당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없앨 만한 선한 것이 내 안에 없음을 안다. 모든 나의 선행들, 나의 의로움, 나의 기도는 그 자체를 위한 대속을 필요로 한다."
웨슬리가 처한 상황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적 발견(Die reformatorische Entdeckung)"이라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Die Rechtfertigung sola fide)"에 대한 인식과 유사한데, 하나님의 율법을 단지 인간을 절망과 죄에 대한 인식으로 유도하는 고발자(Ankl ger)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거룩함과 선함을 본다는 점에서 루터와는 구별된다. 더욱이 웨슬리가 절망하는 대목은 이러한 인식과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누구도 헛된 말로 마치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얻은 것처럼 속이지 않게 하라! 그것의 열매로써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의 평화(Peace with God)'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Joy in the Holy Ghost)'를 느끼는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가? 아, 그는 나와 함께 증거하지 않는다."
이 편지와 함께 올더스게잇 회심을 예비하는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는 단서로 당일 새벽에 읽은,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한다'는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말씀이다. 웨슬리는 이 구절을 그리스어로 옮겨놓는다. 위의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존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대치하지 않는 신 중심적 기독론의 면모를 드러낸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말씀은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 자신의 성화론(Heiligungslehre)의 근거로서 즐겨 내세우는 구절이다. 24일 오후에 웨슬리는 성 바울 교회에서 저녁기도로서 시편 130편이 불려지는 것을 듣게 된다: "오 주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경, 존 웨슬리는 올더스게잇가의 네틀톤 코트(Nettleton Court)의 종교모임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 중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마음속에 역사 하시는 변화'에 관한 설명을 듣고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참으로 신뢰한다고 느꼈으며, 그가 나의 죄를, 나의 죄까지도 가져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존 웨슬리의 회심에 결정적인 말씀으로 작용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은, 독일 루터교 경건주의자들이 자신의 운동의 근본강령으로 삼는 핵심적인 교리이다. 이를 근거로 경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루터의 칭의론의 진리로부터 벗어났다고 비판하는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했으며, 자신들이야말로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을 자신의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여 루터의 본래정신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임을 강조했다. 독일 루터교 경건주의의 실제적인 추동자인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는 자신의 경건주의 운동의 개혁프로그램인 "경건한 요망(Pia Desideria)"에서, 루터와 참된 기독교의 회복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을 바라보면서 현재 루터교회에 만연해 있는 부패와 타락을 제거하기 위해 루터가 로마서 서문에서 주장한 '살아 있는 실천적인 신앙'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참된 살아 있는 신앙이란 형식주의적인 칭의론을 넘어선 실제적인 윤리적인 열매를 맺는 신앙을 뜻한다. 슈페너의 경건주의적 교회개혁 프로그램의 실제적인 완성자로 평가되는, 할레 경건주의의 창시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도 이 로마서 서문을 자신의 회심체험과 연관시키며, 자신의 신학과 신앙실천의 근거로 삼았다. 회심으로 웨슬리는 신앙의 고뇌에 찬 순례의 한 전기를 이루었지만, 이로써 그의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회심 후 간간이 유혹과 신앙의 시험(Anfechtung)을 경험하였으며,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루어졌지만 많은 유혹 때문에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는 독일 헤른후트 형제단의 창립멤버 중의 하나로 영국에 와있던 모라비안 ?치히(Johann T lchig)에게 이럴 때 '모라비안 형제들은 무엇을 하는가' 라고 묻는다. 이때 ?치히는 "예수의 상처에서 피난처를 구하라(take schelter in the wounds of Jesus)"고 충고한다. 이는 모라비안 형제단의 '보혈과 상흔의 신학(Die Blut-und Wundentheologie)'을 표현하는 핵심적인 문구이다. 바로크적인 감상(感傷)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옆구리 (창)구멍(die Seitenh hle Christi)"을 제의화 하였다: 신자들은 "잣새(Kreuzluftv gelein)"들로서 "옆구리 작은 구멍(Seitenh hle)"에 깃들어야 한다. 진젠도르프의 '보혈과 상흔의 신학'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할레 경건주의의와 급진적인 경건주의자 디펠(Johann Konrad Dippel)과 결별한 이후, 그가 어린 시절 체험한 중세적인 "신부(新婦)와 고난의 신비주의(Braut-und Passionsmystik)", 와 이후의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zentrismus)"를 자신의 독특한 칭의론과 결합하여 표현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모라비안의 독특한 신학적인 표현을 시편에서 표현되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과 구원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웨슬리의 전체적인 모라비안 신학이해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회심 직후인 29일, 페터 뵐러가 '영국사역에서 거두었던 첫 번째 열매 중의 한 명'이자, 북아메리카로 떠난 뵐러를 영국에 다시 돌아와 머물도록 진젠도르프에게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했던 볼프(Shepherd Wolf)와의 대화에서,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그와 같은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 신앙이해의 차이점은 "신앙의 등급(degree of faith)"에 관한 것이다. 웨슬리는 볼프의 신앙이 강하고 나의 신앙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열매로 알 수 있는 어떤 신앙의 등급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6월 4일 웨슬리는 하루종일 어떤 "위대하고 보배로운 약속"에 관한 성경 구절을 묵상하고, 복음은 참으로 처음서부터 끝까지 하나의 위대한 약속임을 이전보다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 "위대하고 보배로운 약속"이란 웨슬리가 회심 당일 새벽에 묵상했던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반향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앙의 성장과 완전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속함을 웨슬리는 성경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이다. "신앙의 등급"에 대한 논점이 6월 6일 옥스퍼드에 있는, 모라비안의 영향권에 있는 사람으로 추정된 사람이 웨슬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반복된다. 그 편지는 "의심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가장 낮은 등급과도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어느 때에든지 어떤 의심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를 완전히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할 때까지는 어떤 믿음도 갖지 않은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고전3,1-3절에 있는,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어떤 의미에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 해답을 찾는다.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그들을 "하나님의 집"(고전3,9)이며 "하나님의 성전"(고전3,16)이라고 부른데서, 웨슬리는 분명히 이들의 신앙이 약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떤 신앙의 등급"을 가졌음을 확신했다. 이 "신앙의 등급" 문제는 이 후에 모라비안과의 반율법주의 논쟁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는 몇 시간을 성경과 기도를 보낸 후 마음의 평안을 찾았으나, 그는 자신의 마음의 어떤 상처(Soreness)를 느꼈고, 그래서 자신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음을 안 후,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오 하나님, 나와 믿음이 연약한 모든 사람들을 '의심스런 비판(doubtful disputation)'으로부터 구원하소서!" 이 의심스런 비판이란 롬14,1에 있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사도 바울이 충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는 비판을 말한다. 웨슬리의 마음의 상처란 모라비안 형제들에 의하여 자신의 회심과 신앙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에서 생긴 아픔이라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존 웨슬리의 회심에서 피터 뵐러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뵐러는 웨슬리에게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을 재 인식 하게 하는 계기를 주었고, 회심에 이르는 분위기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웨슬리의 회심 자체를 루터교 정통주의 법정적인 칭의론 이나 모라비안적인 칭의론의 단순한 수용으로 해석할 수 없다. 웨슬리는 뵐러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종교개혁적 칭의론을 지적, 교리적인 차원에서는 알고 있었다. 존 웨슬리가 종종 믿음만으로 얻는 칭의에 대한 교리는 1738년 이전 영국교회에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가르침이었다고 말하는데, 아우틀러(Albert C. Outler)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 옥스퍼드에서 신학을 공부한 웨슬리는 자신의 교회의 39개 조항과 설교집(Homilies)을 통해 칭의론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4월 22일 뵐러와의 대화에서 웨슬리는 뵐러가 말하는 바를 자신의 영국교회의 교리로 표현하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이전 조지아 선교사 시절에 웨슬리는 사우스케롤리나(South Carolina)의 영국교회 목회자 모임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의(Christ our Righteousness)"란 주제로 몇 시간 대화를 하였다. 회심 전 웨슬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객관적인 칭의론에 대한 개인적인 성령론적인 체험과 인식이었다. 이는 회심을 성령의 역사로 객관적인 말씀이 개인의 "마음 속으로(ins Herz)"로 쓰여지는 사건으로 파악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회심과 동일하다. 프랑케에 따르면 성령의 역사로 특별한 계기에 특히 시련 중에, 또한 설교 중에 사람들이 오래 전에 알았던 특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한 힘으로 그의 마음을 치며 새로운 각성을 일깨운다. 이런 점에서 엠마누엘 히르쉬(Emanuel Hirsch)가 독일경건주의의 핵심을 칭의론을 각 개인의 삶의 근저로 깊숙이 체험케 함으로써 그 칭의가 전인적 인간을 내면으로부터 규정하고 다스리게 하는 것을 본 것이나, 요하네스 발만(Johannes Wallmann)이 경건주의 운동의 포괄적인 프로그램인 슈페너의 "피아 데시데리아(Pia Desideria)"의 핵심으로 "성령의 경험할 수 있는 생명력을 통한 교회의 갱신(Erneuerung der Kirche durch die erfahrbare Lebenskraft des Heiligen Geistes)"으로 본 것이 존 웨슬리와 그의 감리교 운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여진다. 존 웨슬리의 회심을 신학적으로 모라비안의 칭의론의 수용으로 볼 수 없는 근거로 모라비안의 칭의론은, 적어도 진젠도르프가 소위 "가름의 시간(Sichtungszeit)"라는 열광주의적인 상황의 종말기에 모라비안 형제단을 전통적인 종교개혁적인 원리로 되돌리며, 루터교내의 한 분파로 인정받으려는 시도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관한 21가지 담론(Einundzwanzig Discurse ber die Augsburgische Confession)"(1747/48) 란 강연을 행하고, 이를 출판할 때까지는, 정통적인 루터교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신학은 다분히 신비주의적이며 열광주의적인 면이 있었다. 이점을 동시대인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은 가장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진젠도르프의 정신적인 추종자 뵐러가 주장한 "즉각적인 변화(회심)"은 진젠도르프가 할레 경건주의와 결별한 1734년 이후로 프랑케의 "회개투쟁(Bu kampf)"과 "단계적인 구원의 순서(Stufenm ige ordo salutis)"를 "율법적인 회심(gesetzliche Bekehrung)"으로 비판하면서 내세운 이론으로 이를 "복음적 회심(evangelische Bekehrung)"이라고 부른 것이다. 노르웨이의 루터교 신학자인 알렌(Leiv Aalen)에 따르면 진젠도르프에게서 신앙의 단계적인 성장은 칭의와 성화의 동시적인 힘으로써의 단 한번의 은총으로 환원되며, 따라서 회심 후의 경건주의적인 회개투쟁은 불필요한 인간의 일로 배격되면서 신앙은 특유의 바로크적인 명랑성(Fr hlichkeit)과 경박성(Leichtlichkeit)을 띠게 된다. 이에 반해 프랑케와 할레 경건주의자들은 회심 이후의 회개(Bu e)의 필요성과 칭의(Rechtfertigung)로부터 성화(Heiligung)에 이르는 단계적 성장을 주장함으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단과 대립적인 입장에 선다. 웨슬리는 뵐러의 "순간적인 변화(회심)"에 대해 주저하다가 정확한 신학적 이해 없이 받아들이나,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회심 직후 신앙의 등급(degree of faith) 논쟁이나 후에 더욱 첨예화되는 반율법주의 논쟁에서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들과 궁극적인 결별의 계기가 된 칭의와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둘러싼 진젠도르프와의 신학 논쟁에서 그 차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III. 존 웨슬리의 독일 방문과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신학논쟁
1. 독일 방문의 의미
존 웨슬리는 회심 후 "신앙의 완전한 능력의 살아있는 증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용납하는 거룩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하나님 아래서 자신의 영혼을 견고히 하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능력에서 능력으로' 나아가리라는 소망으로 독일을 방문한다. 그의 독일 방문의 의미는 주로 헤른후트 형제들(Herrnhuter Br der)과의 만남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되어 왔으나 실제로 웨슬리가 방문한 곳은 헤른후트 뿐만이 아니라 할레 경건주의의 본산인 할레(Halle)이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와 조지아 시절에, 특별히 영국에 주재하던 할레 경건주의의 대표자 뵈메(Anton Willehlm B hme)에 의하여 출판된 할레 경건주의 서적들, 그 중 교육, 선교, 의료, 출판, 문화센터인 "프랑케 슈티푸퉁(Die Franckeschen Stiftungen)"에 대한 보고서인 "할레의 경건(Pietas Hallensis)"을 통해서, 이미 프랑케와 할레 경건주의에 대해서 알았다. 웨슬리는 헤른후트를 방문하기 전 할레를 방문하여, 프랑케의 이름을 "값진 향유(precious ointment)"로 칭송하며 "오, 나도 그가 그리스도를 따랐듯이 그를 따르고 싶다(O may I follow him, as he did Christ!)"고 고백하며, "프랑케 슈티푸퉁"을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놀라운 증거(amazing proof that all things are still possible to him that believes)"로 표현한다. 그 시설의 방대함과 거기에서 교육받는 학생들의 수에 놀라며 "분명히, 하나님이 이곳에서 행하신 이 위대한 일과 같은 것을 우리도 우리의 조상들도 알지 못한다(Surely such a thing neither we nor our fathers have known, as this great thing which God hath done here)"고 말한다. "신앙개혁을 통한 세계개혁"을 꿈꾸는 할레 경건주의의 본산인 할레에서의 경험이 웨슬리의 사회적 경건(혹은 성화)의 실천과 선교활동, 그리고 킹스우드 학교(Kingswood school)의 설립과 그 이후의 교육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존 웨슬리가 당시 작센(Sachsen)에서 추방되어 프랑크프르트 근교 마리엔보른(Marienborn)에 거하고 있던 진젠도르프와의 만남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웨슬리는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들에 의해 "미성숙한 인간(Homo perturbatus)"으로 인식되었으며,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거부되었다. 웨슬리가 회심 후에, 칭의와 함께 시작되는 점진적인 신앙의 성장과 성화에 관심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아직도 율법적인 자기의(Selbstgerechtigkeit)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웨슬리 역시 마리엔보른과 헤른후트에 있는 평신도 형제들의 순수한 신앙고백과 그들 조직의 새로움에 깊은 감동을 느끼지만, 주님이 자신을 "그의 포도원의 다른 지역에서 일하도록 부르신다"고 확신하며 그 곳을 떠날 결심을 한다. 헤른후트에 대한 좋은 인상에도 불구하고 존 웨슬리는 그의 동생 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근원적으로 검토할 능력을 주시길 소망하며, 그래서 단지 좋은 점만 신앙과 행위와 훈련 속에 고수하길 원했다. 이러한 모라비안 형제단에 대한 어떤 거리감은 그가 런던으로 돌아 온 후 마리엔보른과 헤른후트에 있는 형제들에게 쓴 편지-그러나 부치지는 않았다-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지적된다. 웨슬리는 편지에서 먼저 그들의 신앙과 구세주에 대한 사랑에 대한 그의 기쁨과 더불어 일련의 물음과 의구심을 표명한다. 첫 번째로 그는 헤른후트 형제들이 금식(fast)을 완전히 소홀히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헤른후트 형제들의 행동에서 어떤 경박함을 느끼며, 보다 진지함을 아쉬워한다. 금식은 회심이후에도 웨슬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금식은 원래 '옥스퍼드 메소디스트'인 존 크레이톤(John Clayton)에 의해 제안되고 "신성크럽(Holy Club)"에서 수용된 것이었다. 그 당시 금식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율법적인 공적 수단으로 기능했으나, 회심 이후의 금식은 칭의 후의 신앙의 성장과 성화의 수단으로 이해되어졌다. 웨슬리가 헤른후트 형제단에 가한 또다른 비판의 내용은, 진젠도르프가 헤른후트 형제단에서 차지하는 지배적인 위치, 헤른후트 형제들의 비의(秘擬)적인 행태,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과 이와 결부되어 외부사람을 '복음의 자유 안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 등이다. 웨슬리의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진젠도르프와 그의 형제단의 행동방식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그 밑에 깔려있는, 진젠도르프에 의해 규정되는 그들의 신학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제기된 신학적인 물음은 율법과 복음, 칭의와 성화의 올바른 관계성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가 진지하게 논쟁되지는 않았다. 존 웨슬리의 제자이자, 페터레인 신도회의 창립멤버인 제임스 휴톤(James Hutton)은 웨슬리가 독일 방문 중 마리엔보른(Marienborn)에서 성만찬으로부터 배제된 후 가졌던 헤른후트 형제단에 대한 거리감이,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들른 할레에서 있었던, 헤른후트 형제단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인, 고트힐프 아우그스트 프랑케(Gotthilf August Francke)와의 대화를 통해 더 강화되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존 웨슬리가 헤른후트 형제들에게 쓴 그의 편지에서 제기한 비판점이 할레의 경건주의자들이 진젠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단에게 가한 그것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2. 반율법주의 논쟁과 칭의와 성화를 둘러싼 진젠도르프와의 논쟁
존 웨슬리가 그 동안 잠복되어있던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신학적 차이를 인식하며 그들과 본격적인 논쟁을 전개하는 것은, "페터레인 종교모임(Fetter Lane Society)"에서 발생한 "정적주의(Stillness)" 혹은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를 둘러싼 갈등이 계기가 되었다. 이 갈등은 1739년 10월 진젠도르프가 북미 펜실베니아의 선교사로 파견한 필립 몰터(Philipp Heinrich Molther)가 영국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발생했다. 몰터는 페터레인 신도회의 신실한 회원들에게, 참된 신앙에 도달하기 위해서 은총의 수단을 포함하는 모든 외적 행위를 단념해야 하며, 더욱이 웨슬리의 관점에서는 회심한 자들도, 그들이 조금의 의심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전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런 몰터의 주장은 페터레인 신도회를 양분시킬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많은 수가 몰터의 견해에 동조하였다. 존 웨슬리는 몰터와의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이견을 해소하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둘 사이의 입장의 차이만 분명해졌다. 몰터는 "신앙의 등급(degrees of faith)은 없으며,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신앙의 완전한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누구도 어떤 신앙도 갖은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몰터는 신앙의 등급과 단계를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실제적인 현실을 부정하며 "작은 신앙" 과 "약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존 웨슬리는 신앙의 등급과 단계를 인정했으며, 로마서 1, 14절과 마태복음 8, 26절을 들어 "작은 신앙, 약한 신앙"의 현실성과 권리를 옹호했다. 이러한 관점은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웨슬리는 이미 1738년 올더스게잇 회심에서 획득하였다. 소위 "정적주의(stillness)" 논쟁은 바로 이러한 몰터의 신앙이해와 연관되어있다. 몰터는 참된 신앙에 이르기까지 어떤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의 사용을 거부했으며, 선행조차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웨슬리는 모든 은총의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참된 신앙의 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특별히 성만찬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자신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낙관주의의 단면을 드러낸다: "필수 불가결한 사전의 준비란 없다. 단지 하나님이 기쁘게 주고자 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받으려고 하는 열망만이 필요할 뿐이다. 성만찬을 받을 때, 우리의 상태, 즉 우리의 전적인 죄인됨과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임(our utter sinfulness and helplessness)임을 아는 것 외에 어떠한 합당함도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고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선행을 단념해야 한다는 몰터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웨슬리는 야고보서의 경고를 내세웠다. 몰터와의 "정적주의 논쟁"에 주목할 점은 웨슬리가 율법과 계명(commandments)의 문제를 중심으로 놓고, 모라비안의 주장을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로 본 점이다. 몰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약성경에는 믿음이외에는 어떠한 계명도 없고, 어떤 다른 의무도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았다고 주장함에 반하여, 웨슬리는 이것은 신약성서의 전체의 주장과 모순됨을 마태복음 5,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과 요한복음14,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라는 말씀을 들어 반박한다. 웨슬리는 "계명(commandments)을 지키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의무이자 특권" 이라고 본다. 그에게 하나님의 모든 요구와 계명은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그가 요구하는 것을 주신다. 칭의 후 율법(Gesetz)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 믿는 자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죄와 죽음의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나, 하나님의 율법 자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께 순종할 자유이지, 불순종할 자유는 아니다. 이 경우 율법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계명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칭의 된 자에게 율법은 더 이상 형벌과 두려움에 의해 지켜야하는 심판의 법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지켜지는 사랑의 법이다. 왜냐하면 칭의 된 자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칭의 후의 율법 혹은 계명을 말하는 것은 복음으로부터 율법의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훈련과 성장, 성화로의 발전을 의미한다. 이로써 웨슬리는 행위를 통한 칭의(로마-카톨릭)와 반율법주의적인 칭의(모라비안)의 양극단에 빠지는 오류에서 벗어난 것이다. 마틴 슈미트(Martin Schmidt)는 웨슬리와 몰터 사이의 의견의 차이를 페터 뵐러와 몰터 사이의 그것으로 환원시켰다. 그에 따르면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젊은 세대인 몰터에 대항하여 진젠도르프와 뵐러의, 고전적인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웨슬리가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반율법주의 논쟁의 결과 페터레인 신도회를 탈퇴 한 후, 최종적으로 그들의 정신적, 영적 지도자인 진젠도르프와 벌인 신학적인 담판에서 드러난 양자간의 신학적 대립을 설명하지 못한다. 슈미트는 그 당시 이미 헤른후트 형제단 내에 세대간에 신앙과 신학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진젠도르프의 신학적 배경과 그 당시 헤른후트 형제단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이다. 1727년 헤른후트에 정착한 이후 진젠도르프는 형제단을 정신적으로, 조직적으로 완전히 지배하였으며, 1729 이후 벌어졌던 할레 경건주의와의 신학적 논쟁과, 교회정치적인 경쟁, 그리고 1736년 진젠도르프가 정통 루터교의 아성인 선제후작센(Kursachsen)으로부터 추방당한 후, 그의 지도력은 더욱 커졌다. 따라서 형제단 내의 세대간의, 근본적인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와 대립은 있을 수 없다. 몰터의 입장은 진젠도르프 신학이 내포하고 있는 것의 반영일 뿐이다. 진젠도르프 신학의 발전은 그의 유년시절에 받은 신비적 영성주의(Der mystische Spiritualismus)와, 파리 유학시절 접했던 프랑스 정적주의(Der Quietismus)에 기초하고 있다. 진젠도르프가 후에 "경건주의적-도덕주의적 율법성(Die pietistisch-moralische Gesetzlichkeit)"에 반대하여 강조하는 신앙의 "수동성(Passivit t)"은 루터적 칭의론을 말한 다기보다는 정적주의에서 보여주는 반율법주의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복음을 통해 단순히 해소되거나 대치된다는, 반율법주의적 입장을 진젠도르프는 루터교와 의식적으로 대립하며 견지하였다. 정통 루터교와 "율법주의적인 할레 경건주의"와 결별한 진젠도르프는 그 대신에 단순한, 하나님의 은총의 영접과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연합(Die personelle Konnexion mit Christus)"을 통한 구세주에 대한 순전한 느낌과 관조를 내세웠다. 구세주가 현재한다는 느낌으로 충만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단은 174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총회에서 형제단의 장로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의 후계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단의 총 장로(General ltester)로 선출하였다. 이 사건은 웨슬리가 진젠도르프와 신학논쟁을 벌인 직후의 일이다. 그리고 2년 후 감각적인 "보혈과 상흔의 제의(Blut-und Wundenkult)"로 열광하였던 "가름의 시간(Sichtungszeit)"이 이어진다. 1741년 9월 3일, 존 웨슬리와 진젠도르프는 페터레인 신도회에서 발생했던 반율법주의 논쟁과 이로 인해 야기된 웨슬리와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분열을 해소시키기 위해 신학적 대화를 가졌지만 입장의 차이만 확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왜 당신은 당신의 종교를 바꾸었는가?(Cur religionem tuam mutasti?)". 이에 대해 웨슬리는 "나는 내가 나의 종교를 바꾸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nescio me religionem meam mutasse)."라고 대답한다. 여기에서 "종교(religio)"란 신앙고백이나 신앙의 확신을 의미한다. 진젠도르프는 웨슬리가 모라비안 형제들과 결별한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한 것임을 다음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은 우리에게 고백했던 신앙의 확신을 포기하고 새로운 신앙을 고백한다(religione quam apud nos professus es, relicta, novam profiteris)". 이에 대해 웨슬리는 자신이 신앙고백을 바꾸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때 웨슬리가 모라비안 형제들에게 감동을 받고, 인간적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분명하지만 신학적으로 모라비안 교도인 적은 결코 없었다. 진젠도르프는 웨슬리가 3년 전 마리엔보른에 있는 자신을 방문했을 때 보다 더 혼동되어 있고 잘못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존 웨슬리와 진젠도르프의 신학논쟁 중 핵심적인 것은 칭의와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관계이다. 웨슬리는 칭의 후의 신앙의 성장과 이 세상에서 신자의 목적과 영광이 되는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믿었지만, 진젠도르프는 모든 종류의 완전주의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내재하는 완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류중의 오류이다〔…〕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완전이다. 내재적 완전주의를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이다(Nullam inhaerentem perfectionem in hac vita agnosco. Est hic error errorum ... Christus est sola perfectio nostra. Qui perfectionem inhaerentem sequitur, Christum denegat)". 이에 반해 웨슬리는 사랑안에서 성장하는 신자는 또한 성화에서도 성장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젠도르프는 이러한 성화를 복음적인 것이 아니라 율법적인 것으로 본다. 진젠도르프는 "모든 칭의와 성화는 같은 순간에 일어난다(Sanctificatio totalis ac lustificatio in eodem sunt instanti)"고 보며, 칭의 받는 순간에 인간은 완전히 가장 깊은 곳까지 성화되어서 그가 죽는 날까지 더 성화되거나 덜 성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인간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내용을 들어 신자는 은총 안에서 성장함("crescendum esse in gratia")을 믿는다고 말하며, 신자는 매일 매일의 자기 부정을 통하여 나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진젠도르프는 모든 자기 부정은 율법적인 것이며, 신앙의 자유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며, 그를 넘어서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고행(Abt tung)을 조소한다. 완전한 사랑엔 어떤 정화도 전제되지 않는다"("Facimus credentes omne quod volumus et nihil ultra. Mortificationem omnem ridemus. Nulla purificatio praeceddit perfectum amorem"). 이 신학적 논쟁은 결국 존 웨슬리와 진젠도르프간의 최종적인 결별로 끝났다. 이 논쟁은 그 핵심에 있어 이제까지 페터레인 신도회 내에서 발생했던 웨슬리와 몰터를 비롯한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논쟁의 연속이자 귀결점이었다. 여기에서 존 웨슬리는 만남의 초기에 신학적 배경에 대한 인식 없이 호감을 가졌던 모라비안 형제들과 진젠도르프와의 신학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3. 존 웨슬리의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 비판과 그 의미
진젠도르프와 마지막 신학적인 논쟁을 벌이기 3개월 전인 1741년 6월에, 존 웨슬리는 그 동안 말로만 듣고 부분적으로만 알던,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는다. 루터의 로마서 서문(die Vorrede zum R merbrief)과 만남으로 회심 한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는 루터의 저서가 갈라디아서 주석(Das Kommentar zum Galaterbrief)이다. 웨슬리는 여기에서 루터가 율법을 죄와 죽음과 악마와 연결시키면서 거부하고, 선행을 기독교적인 삶으로부터 제외시키며, 무엇보다 성화에 대해서 무지한 점을 들어 루터를 비판한다. 그리고 루터의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모라비안 형제들의 큰 오류의 실제적인 근원을 본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면제한 것이 성서에 의해 증명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함, 혹은 하늘로부터 면제한다는 것도 성서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 여기에 (내가 이해하기에) 모라비안들의 큰 오류의 참된 근원이 있다. 그들은 더 좋은 것에 대해서도 더 나쁜 것에 대해서도 루터를 따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행도, 율법도, 계명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마틴 루터는 1516/1517년 갈라디아서에 관한 첫 번째 강의를 하고, 이를 토대로 1519년 갈라디아서 주석서를 쓰는 데, 이것이 로마-카톨릭의 공적의인(die Werkgerechtigkeit) 사상에 대한 첫 번째 투쟁의 산물이다. 루터가 "신약성서의 핵심이며,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여긴 로마서에 서문을 부친 것은 1522년의 9월판 성서(Septembertestament)였다. 루터는 그후 심화된 자신의 칭의론 -루터 자신이 '교회가 바로 서느냐 넘어지느냐를 결정하는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여긴 - 관점에서 이를 강화시키려는 의도에서 1531년 갈라디아서 대한 두 번째 강의를 하였는데, 이것은 루터의 교수활동의 최정점을 이룬다. 1535년 게오르그 뢰러(Georg R rer)의 필기를 토대로 카스파 크루시거(Kaspar Cruciger)의 참여 하에 루터의 대 갈라디아서 주석(das gro e Kommentar zum Galaterbrief)를 출판되었다. 루터는 가열되는 로마-카톨릭과 열광주의자들(die Schw rmer)의 칭의론에 대한 공격이 계기가 되어 이 책의 출판을 승인했다. 이 책에서 루터는 카톨릭교회의 율법성(Gesetzlichkeit)과 열광주의자들의 엄격한 신비적 성화(die mystische Heiligung)에 대항하여 자신의 칭의론을 상세하게 전개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행위와 믿음, 율법과 복음, 칭의와 성화의 올바른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자신의 칭의론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칭의론이 다시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복음적 윤리(Evangelische Ethik)를 전개하는 것이 어려운 과제임을 잘 인식했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을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주석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주지시켰다: "Postquam fidem in Christum sic docuimus, docemus etiam de bonis operibus. Quia apprehendisti fide Christum per quem iustus es, nunc eas et diligas Deum et proximum, Invoca, Gratias age, praedica, lauda, confitere Deum, Benefac et servi proximo, fac officium tuum. Haec vere sunt bona opera quae fluunt ex ista fide...(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그렇게 가르친 후에, 우리는 또한 선한 행위에 대하여 가르친다. 왜냐하면 당신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를 통해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선행을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부르고, 찬양하고 칭송하고 고백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하고 그를 섬기며, 당신의 임무를 다하라. 이것이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참된 선행이다...)" 이것이 루터가 주장하는 믿음과 선행의 올바른 관계이다. 루터는 칭의론과 기독교인의 복음적 자유가 사탄의 계략으로 잘못 이해되어 도덕적 방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경건한 설교자들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선한 행위에 대해 열심히 간곡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루터는 요한 아그리코라(Johann Agricola)와의 반율법주의논쟁(der antinomistische Streit)의 와중에 1538년 자신의 대 갈라디아 주석서 2판의 서문에서 반율법주의란 새로운 소종파에 대해 경고하였다. 복음에 의한 율법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하는 아그리코라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전체 인간의 삶과 교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1539년에 출판한 "반율법주의자에 반대하여(Wider die Antinomer)"란 책자에서 반율법주의 주장의 근거를 루터 자신에게서 찾는 아그리코라의 주장을 아주 분명하게 거부했다. 이상의 루터의 입장을 살펴볼 때, 루터가 율법을 거부하고 선행을 기독교인의 삶에서 제거했다는 존 웨슬리의 비판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웨슬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루터가 웨슬리의 입장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을 헨리 카터(Henry Cater)는 구체적인 사례와 그것이 말해진 상황과 문맥을 들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였다. 단지 웨슬리가 지적한 대로 루터가 성화를 강하게 강조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세력과 벌이는 싸움에서 루터가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반율법주의를 주장하는 모라비안 형제들과 진젠도르프의 오류는 루터에게서 반율법주의의 근거를 찾는 아그리코라와 열광주의자들의 오류와 동일한 것이다. 루터교 내에서, 루터의 율법이해에 대한 적절한 해석과 칭의에서 성화로의 강조점의 변화는 루터교 경건주의자인 아우그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와 그의 할레 경건주의(der hallische Pietismus)에 이르러서이다. 그는 복음과 율법의 상관성, 칭의 이후에도 유효한 율법의 기능, 윤리적 열매,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성장과 신앙에 대한 과정적인 이해, 그리고 성화와 칭의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완전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신학적인 토대에서 할레 경건주의는 사회적 경건(성화)의 실천의 꽃을 피운 것이다. VI. 나오는 말
힐데브란트(Franz Hildebrandt)는 그의 책 "루터로부터 웨슬리까지(From Luhter to Wesley)"에서 존 웨슬리를 자신의 동시대인에게 루터를 매개시킨 위대한 중계자로 특징 지우면서 "영국교회사에 있어서 웨슬리 형제처럼 그렇게 강하게 루터로부터 영향받은 사람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셀(George Croft Cell)이 존 웨슬리를 칼빈과 연결시킨 것 보다 휠씬 더 루터에 근접시켰다. 힐데브란트는 존 웨슬리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Vorrede zum R merbrief)에 의해, 찰스 웨슬리가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Kommentar zum Galaterbrief)에 의해 회심을 체험했으며 그 회심이 그들의 신앙과 삶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감리교 운동에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웨슬리 형제와 루터와의 접촉점을 찾고 있다. 영국의 종교개혁이 루터보다는 칼빈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았고, 사실 18세기초까지도 루터의 책이 영국에 널리 퍼져있지 않은 상황에서, 웨슬리 형제가 루터의 저서를 통해 회심했다는 사실은 가히 교회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칭의론은 모라비안 형제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써,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으며, 그 이후 페터레인 신도회에서 발생한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반율법주의 논쟁과 분열, 그 와중에 웨슬리가 행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 비판, 진젠도르프와 벌린 칭의와 성화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과 최종적인 결별이 올더스게잇 사건과 어떤 내적인 신학적 연관성이 있는가가 이제까지의 웨슬리 연구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본 논문은 이러한 모호성을 일관되게 설명해보려는 한 시도였다. 존 웨슬리와 루터와의 만남은 루터교 정통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루터교 경건주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루터교 경건주의란 정통주의 형식주의화 된 법정적인 칭의론에 대해, 젊은 루터에 근거하여 살아 있는 신앙, 삶의 변화와 성화된 삶을 지향하는 루터에 대한 재해석 운동이다. 존 웨슬리는 서로 다른 두 유형의 경건주의와 만나게 되는데, 특별히 회심에 이르는 과정에서 모라비안 형제들에게 강한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신학적인 근본사고나 사회적 실천에 있어 웨슬리의 입장은, 모리비안과 대립적인 입장에 있던 할레의 경건주의자들에게 훨씬 가깝다. 이러한 루터 수용의 내적인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연속성이 없어 보이는 회심과 회심 이후 벌어졌던 반율법주의 논쟁을 전체적인 역사적인 맥락과 신학적인 구조에서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존 웨슬리의 회심의 본질과 그의 전 신앙의 발전 과정 속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그 의의에 대한 해석은 그의 전 신학에 대한 해석만큼이나 다양하다. 런연이 표현한 바와 같은 "웨슬리의 에큐메니즘"은 종교개혁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가지 지류가 합류하는 저수지이자, 오늘날까지 다양한 해석의 지류를 가능케 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기독교 전통으로 웨슬리의 전 신학체계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웨슬리 신학이 지니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사상(捨象)시키는 무모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신학 사상을 교회사적인 맥락과, 조직신학적인 구조를 함께 고찰함으로 보다 가까운 기독교적인 전통에 자리매김 하려는 시도는 웨슬리 연구자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웨슬리 회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올더스게잇 사건에 대한 해석사와 연구사를 고찰해 볼 때, 연구 결과는 연구자 자신이 속한 기독교적 전통의 영향과 속한 집단의 신학적인 자기 이해의 변화에 상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적합한 해석을 위하여 텍스트와 해석자의 지평융합이 불가피함을 인정하더라도, 역사의 연구는 해석자의 의도성이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올더스게잇을 둘러싼 상충된 해석은 해석자의 당파적인 의도성과도 연관이 있지만, 웨슬리 자신의 올더스게잇에 대한 해석의 모호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1960년대 이후 웨슬리 연구 분야에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다. 그 중 1975년부터 발행되고 있는 웨슬리 총서의 200주년 비평판(The Bicentennial Edition of The Works of John Wesley)은 역사 비평적 연구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며, 그 이후의 역사적인 맥락에 기초한 광범위한 연구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이 변화의 한 가운데 웨슬리의 올더스게잇에 대한 새로운 이해, 랜디 매독스가 쿤의 용어를 빌러 표현한 대로하면 "모형 전이(Paradigm Shift)",가 놓여 있다. 올더스게잇 이해의 모형전이의 주된 내용은 웨슬리의 영적, 신학적인 발전과 비연속적인 것으로부터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이전의 주도적인 '표준적 해석': 올더스게잇은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사상의 분수령으로,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구분짓는 결정적인 계기로 보는 입장에서, 인간 의식의 복잡성과 인간 현실의 다의성을 인정하면서 올더스게잇을 웨슬리의 영적, 신학적인 발전의 한 과정으로 보는 입장으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올더스게잇을 그의 전 신앙의 여정에서 따로 떼어내어 독립적으로 고찰할 수 없다. 웨슬리의 그의 진정한 회심은 1725년 거룩한 삶을 추구하기로 결단한 옥스퍼드 시절이었으며, 회심 후에 추구된 성화에의 노력은 바로 이러한 웨슬리의 초기 회심의 연속선상에 놓일 따름이라고 주장하여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회심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에 도전한 최초의 학자 중의 한 사람이 벨기에의 로마 카톨릭 신부인 피에트(Maximin Piette)였다. 그에 의해 이제까지 부정적으로 묘사되던 올더스게잇 이전의 웨슬리 상이 수정되었다. 이에 대해 셀(George Croft Cell)은 피에트가 지적한 대로 웨슬리에게 카톨릭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일차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칼빈적인, 요소를 재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웨슬리의 신학사상은 카톨릭의 성화의 윤리와 개신교의 은총에 의한 믿음의 윤리의 필요한 종합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셀은 웨슬리가 올더스게잇에서 그의 종교적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표준적인 해석'을 견지한다. 반면에 리(Umphry Lee)는 피에트의 견해와 같이 올더스게잇을 웨슬리의 신앙과 삶에 유일무이한 분수령이 될 수 없고, 그의 신학은 올더스게잇을 넘어 계속해서 성숙하게된다고 본다. 셀의 견해 보다 더욱 '표준적인 해석'을 더욱 단호하게 지지하는 래턴베리(J. Ernest Rattenbury)는 웨슬리의 올더스게잇의 회심을 율법적인 바리새인이 칭의론적인 의미의 복음주의적 신앙인이 된 결정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케논(William Cannon)은 올더스게잇에서 처음으로 웨슬리가 믿음에 의한 칭의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고 주장하면서도 웨슬리의 신학적인 강조점은 기독자의 완전에 있다고 보았다. 이상의 연구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던 것이 그 이후의 다양한 연구에서 더욱 활짝 꽃핀 결과를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이나 고대 교회 전통(특히 동방교회)에 기대어 웨슬리의 신학을 해석하는 학자들은 1738년 올더스게잇 회심보다는 그 이전 옥스퍼드 시절에 거룩한 삶으로의 결단과 그 시절 읽었던 카톨릭과 동방교부들의 서적을 통한 성화와 기독자의 완전사상 혹은 신화(神化, Theosis) 사상을 강조하는 경향을 지닌다. 이는 후기 혹은 성숙한 웨슬리의 성화와 완전 사상의 전제로서, 그 내적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그 주장의 정당성을 얻고자 한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계열, 특히 신정통주의의 영향하에 있는 복음주의적(Evangelical) 입장의 학자들은 웨슬리의 회심사건을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을 절대 수용한, 그의 신앙발전의 정점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지닌다. 이는 웨슬리가 올더스게잇 이전에 적어도 그처럼 칭의론에 대해 지적으로, 실존적인 체험으로 대면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그 정당성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인 논리는 올더스게잇 사건을 보도하는 웨슬리 텍스트(일기)와 그 이후에 전개된 신학적인 논쟁에 대한 철저한 역사비평적인 분석에서 나온 결과라고 보기보다는, 신학적인 전제와 의도 속에서 도식화된 결론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올더스게잇 이전과 이후의 신앙발전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추구함으로써 '표준해석'에 대한 대안적인 페러다임을 제시하는 하이젠레이터(Richard P. Heitzenrater)는 이러한 양극화된 해석의 틀을 일정부분 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이젠레이터는 회심에 배태되고 있던 그 이후의 신학 사상과의 연속적인 맥락을 간과함으로써, 그 이후의 사상의 전개를 '연속적 발전' 내지는 '신학 사상의 심화'의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올더스게잇의 입장 '변화'와 그 이후의 '성장'의 관점에서 보았다. 이는 하이젠레이터가 존 웨슬리의 회심이 '오직 신앙으로(sola fide)'만을 강조하는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으로 환원시킬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그의 칭의론이란 것이 곧 루터교 정통주의의 그것도 아니며, 또한 모라비안 형제들의 그것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교회사인 맥락을 간과한 데서 온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올더스게잇 사건 자체에 이미 '신앙의 등급과 성장 개념' 속에, 그 이후의 그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화론'의 단초가 있다고 본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회심이해가 후에 성숙된 신학에 의해 변화되고 수정된 것이 아니라 다소 모호한 올더스게잇 사건 속에 이미 후에 뚜렷이 나타나는 모라비안 형제들과 대립되는 그의 신학적 특징이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하이젠레이터가, 웨슬리의 올더스게잇에 대한 이해가 그의 전 생애를 거쳐 중요한 수정(significant modification)을 겪었다고 본 것은 올더스게잇 사건의 모호성과 웨슬리가 처음에 모라비안 형제들의 신학의 성격-특별히 루터신학의 수용과 관련하여-을 전체로서 이해하지 못하다가 점차로 인식하는 과정을 철저히 구명하지 못한 결과이며, 게다가 루터수용에 있어 모라비안과 대립된 할레 경건주의의 웨슬리에 대한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독일의 루터교 교회사가인 마틴 슈미트(Martin Schmidt)도 웨슬리의 올더스게잇의 회심을 모라비안 목사인 페터 뵐러(Peter B hler) 통한 바울적-루터적인 회심으로 보면서, 회심 이후 페터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 내에서 첨예하게 나타난 정적주의(Stillness) 내지는 반율법주의(Antinominianism) 논쟁을 몰터(Philipp Heinrich Molther) 개인의 신학적인 이견(異見)때문에 생긴 오해로 귀착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반율법주의 논쟁 와중에 웨슬리가 모라비안들의 오류의 근원으로 판단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Kommentar zum Galaterbrief)을 신랄하게 비판한 점과 그 후에 웨슬리가 칭의론과 성화론을 둘러싸고 모라비안 형제단의 창시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진젠도르프(N.L. von Zinzendorf)와 신학적인 논쟁을 벌인 후 결별한 사실을 신학적으로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하며, 그 당시의 모라비안 형제단의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필자는 이 문제는 독일 경건주의자들-모라비안은 루터교 경건주의의 예외적인 형태이다-이 루터의 칭의론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웨슬리가 이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수용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본다. II. 존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회심과 그 성격
1. 조지아 선교: 올더스게잇에 이르는 관문
웨슬리가 조지아 선교사로 떠나기 전, 그를 추천했던 옥스퍼드 동료인 존 버튼(John Burton)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밝혔던 선교사로 가는 자신의 목적, 즉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소망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함으로써 복음의 참된 의미를 배우려는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지아 선교사로서 웨슬리가 느낀 절망과 자기 환멸은, 다른 사람들, 특별히 인디안들을 회심시키러 갔던 웨슬리 자신이 남을 회심시키기 전에 먼저 자신이 회심되어져야 한다는 아이러니, 그리고 이제까지의 자신의 신앙이 "화창한 여름날의 종교(A fair summer religion)"이었음을 고백하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웨슬리의 실패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추구해온 거룩한 삶에 대한 노력이 좌절되었음을 뜻하며, 그는 자기가 설정한 이상(理想)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의 성공은 이를 통해 허상을 깨고 자신의 참된 실재, 죄에 얽매어 허덕이는 실존의 처절한 모습을 뼈저리게 체험했다는 점과 조지아에서 유럽 대륙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이주한 다양한 신앙공동체와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신학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신대륙 북아메리카의 조지아는 윌리암 펜(William Penn)의 펜실베니아처럼 유럽 대륙에서 핍박받던 여러 기독교 분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난처를 마련하고 새로운 신앙의 실험을 감행하던 곳이었다. 이들에 의해 많은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그 중에 존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신앙공동체는 사바나(Savannah)에 있는 헤른후트 형제단(모라비안 형제단)과 에벤에셀(Ebenezer)에 있는 잘쯔브루그(Salzburg) 이주자들이었다. 전자와의 첫 만남은 널리 알려진 대로 웨슬리가 조지아로 향하는 배에서였다. 심한 풍랑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가 배에 탄 사람들을 사로잡았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의연하게 행동하던 모라비안 형제들과 그들의 신앙은 존 웨슬리에게 몹시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좋은 인상으로 인해 조지아에서 모라비안 형제들과 좋은 관계를 계속하였다. 웨슬리는 그들과 많은 신앙의 대화를 나누며,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 영국 국교회 고교회주의자로서 존 웨슬리가 이러한 자유분방한 모라비안의 독특한 신앙공동체로부터 경건주의적인 찬양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기도와 예배형식, 형제들을 서로 권면하며 신앙을 세우는 신앙조직(Bands)은 후에 본격적인 메소디스트 운동 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잘쯔부르그 이주자들은 잘쯔부르그의 대주교의 재카톨릭화(Rekatholisierung) 정책으로 인한 거센 핍박을 피해 조지아로 이주해 온 독실한 루터교 신자들이었다. 1735년 10월 이들 중 3차 이주자들이 탔던 "런던 머찬트(The London Merchant)"호는 존 웨슬리와 그의 옥스퍼드 친구들은 모라비안과 함께 탄 "시몬즈(The Simmonds)"호와 한 선단을 이루어 조지아로 향했다. 잘쯔부르그 이주자들을 이끄는 목회자와 교사로 함께 조지아로 가서 그들의 신앙공동체인 에벤에셀을 건설한 사람이 할레 경건주의자들인 볼치우스(Johann Martin Boltzius)와 그로나우(Israel Christian Gronau)이다. 이들은 할레 경건주의의 또 다른 중심이었던 스톨베르그-베르니거오데(Stolberg-Wernigerode)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곳의 영주 에른스트 백작(Graf Christian Ernst)은 슈팡엔베르그(August Gottlieb Spangenberg)가 1733년 4월 할레에서 추방되어 헤른후트(Herrnhut)로 들어간 후, 격화된 진젠도르프와 그의 형제단과의 대립과 투쟁의 선두에 서게된다. 할레와 헤른후트의 대립과 경쟁은 단순한 세 확장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원래 할레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제국 백작이었던 진젠도르프는 1727년에 헤른후트 형제단이란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창단한 후 할레와 경쟁하게 된다. 1729년 할레의 목사인 미쉬케(Johannes Mischke)가, 진젠도르프는 참된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이후 진젠도르프는 할레의 회개투쟁(Bu kampf)과 율법이해를 비판하면서 그가 어린시절 영향받았던 신비주의적인 복음이해의 길을 심화시키며 독자적인 예배의식을 갖춘 신앙공동체를 구축해간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에서 서로 대립하며 경쟁하는 독일 루터교 경건주의의 두 유형에 대한 명확한 분별의식 없이 이들과 조우하게 된다. 존 웨슬리가 독일 경건주의를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은 모라비안 형제들을 만나기 전, 옥스프드시절, 하노버 왕가의 궁정목사로 영국에 와 있던 할레경건주의의 전파자 뵈메(Anton Willhelm B hme)가 "기독교 지식진흥회(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을 통해 출판한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와 할레 경건주의 서적을 통해서 이다. 이들 경건주의 서적 중 "니고데무스(Nicodemus: Or, A. Treatise against the Fear of Man)", "할레의 경건(Pietas Hallensis)" 그리고 어린 시절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로부터 들어 온 할레에서 파송된 선교사 지겐발그(Bartholm us Zigenbalg)의 선교보고서 "동방에서의 복음의 전파(Propagation of the Gospel in the East: Being an Account of the Success of Two Danish Missionaries)"는 웨슬리가 조지아로 떠나는 배에서, 조지아 선교지에서 즐겨 읽었던 책들이며, 이 책들의 웨슬리에 대한 영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존 웨슬리는 1736년 2월 조지아에 도착한 후 모라비안 형제들 중 유일하게 라틴어를 말 할 수 있었던 신학자이자 목사인 스팡엔베르그를 매개로 하여 모라비안 형제들과 가까워졌다. 웨슬리는 스팡엔베르그로부터 그가 이제까지 걸어 온 길, 특히 그가 할레와 갈라서게 된 이유에 대해 들었다. 후에 웨슬리는 할레 경건주의자 볼치우스로부터 슈팡엔베르그가 할레 대학의 교수가 아니라 조교(Adjunkt)였으며, 심문없이 왕의 명령으로 할레에서 축출된 것이 아니라 많은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레 대학의 권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반론을 들었다. 슈팡엔베르그를 높이 평가했던 웨슬리는 그를 감싸려고 했지만, 점차 그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볼치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존 웨슬리가 처음으로 서로 대립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두 유형을 어렴풋이 나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737년 8월 1일 웨슬리는 스팡엔베르그와 함께 잘쯔부르그인들의 이주지인 뉴에벤에젤을 방문하여 그들이 이룩한 큰 성과에 놀라며, 볼치우스와 그로나우의 친절함과 개방성과 경건뿐만 아니라, 스팡엔베르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그들의 아주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웨슬리는 특별히 진젠도르프 백작의 성서해석과 공중기도의 방식에 관해서 듣고는 그도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강한 확신을 하게된다. 이는 그가 처음 스팡엔베르그로부터 듣고 신앙상담의 편지를 보냈던, 진젠도르프에 대한 신화적인 상이 깨어졌음을 의미한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의 선교사로서 독일 경건주의자들과의 의미있는 만남을 경험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조지아 선교는 그의 다소 경직된 대인관계와 특히 사바나 시장의 조카인 홉키(Christian Hopkey)와의 결혼실패 사건으로 인해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옥스퍼드시절 이래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와 윌리암 로(William Law)의 영향하에 웨슬리가 추구해온 성화를 향한 자신의 노력이 율법 아래에서의 자기의(Selbstgerechtigkeit)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이것은 한 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뼈저린 경험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사 그 마음의 참된 현실성을 보여 주셨고 그 자신에 절망하도록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일어난 신앙의 시험(Anfechtung)이었다. 웨슬리에게 있어 조지아에서의 실패는 올더스게잇에 이르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었다.
2. 올더스게잇 회심과 모라비안 피터 뵐러(Peter B hler)의 의미
존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회심 사건은, 진젠도르프에 의해 북아메리카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영국에 잠시 머물렀던 페터 뵐러(Peter B hler)와의 만남과 그와 함께 결성한 페터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뵐러와의 많은 신앙의 대화를 통하여 웨슬리가 천착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이신론적 도덕주의 신학을 넘어서, 종교개혁적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이었다. 특별히 그는 1738년 3월 5일에서 7일 사이에 개신교적인 오직 신앙에 의한 칭의를 지적으로 승인하고 이 교리를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에게 선포하였다. 4월 23일 웨슬리는 그 동안 망설였던 '한 순간에(in a moment) 주어지는,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죄와 두려움으로부터 거룩함과 행복으로 옮기는,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에 대한 뵐러의 주장을 그가 제시하는 체험자들의 증언 앞에서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우시기를 기도한다. 5월 1일 존 웨슬리는 페터 뵐러와 함께 페터레인가(Fetter Lane Street)에서 신도회(Society)를 결성한다. 이 때 웨슬리는 이 모임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은 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페터 뵐러의 정신에 의해 좌우되지도 않았다. 페터레인 신도회의 규정의 성격을 웨슬리는 "성 야고보에 의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페터 뵐러의 충고에 따라…" 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웨슬리가 이 모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모임에 참여한 영국교회의 사제와 신자들은 이와는 별도로 각기 독자적인 신도회(Religious Society)를 인도하고 있었다. 5월 4일 페터 뵐러는 원래의 목적인 북아메리카 선교를 위하여 런던을 떠났다. 그가 떠난 다음날 페터레인 신도회의 7명의 창립멤버와 다른 8명이 서명하여 뵐러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는 편지를 진젠도르프에게 보냈는데, 이때 웨슬리는 이 편지에 서명하지 않았다. 웨슬리가 뵐러에 의해 "오직 은총을 통한 구원"의 교리가 영국에서 새롭게 인식된 점을 높이 평가한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그 이후 존 웨슬리는 "은총과 믿음에 의한 구원"을 설교했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고 지속적인 슬픔을 지녔는데, 이것은 단지 그가 영국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극심한 내면적인 신앙의 시련(Anfechtung)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의 상태는 올더스게잇 회심이 있던 당일인 24일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영혼의 모든 생각, 모든 기질은 하나님의 형상과 각인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나는 내가 죄 아래 팔려 있음을 느낀다. 나는 또한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에 합당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없앨 만한 선한 것이 내 안에 없음을 안다. 모든 나의 선행들, 나의 의로움, 나의 기도는 그 자체를 위한 대속을 필요로 한다."
웨슬리가 처한 상황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적 발견(Die reformatorische Entdeckung)"이라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Die Rechtfertigung sola fide)"에 대한 인식과 유사한데, 하나님의 율법을 단지 인간을 절망과 죄에 대한 인식으로 유도하는 고발자(Ankl ger)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거룩함과 선함을 본다는 점에서 루터와는 구별된다. 더욱이 웨슬리가 절망하는 대목은 이러한 인식과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누구도 헛된 말로 마치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얻은 것처럼 속이지 않게 하라! 그것의 열매로써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의 평화(Peace with God)'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Joy in the Holy Ghost)'를 느끼는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가? 아, 그는 나와 함께 증거하지 않는다."
이 편지와 함께 올더스게잇 회심을 예비하는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는 단서로 당일 새벽에 읽은,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한다'는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말씀이다. 웨슬리는 이 구절을 그리스어로 옮겨놓는다. 위의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존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대치하지 않는 신 중심적 기독론의 면모를 드러낸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말씀은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 자신의 성화론(Heiligungslehre)의 근거로서 즐겨 내세우는 구절이다. 24일 오후에 웨슬리는 성 바울 교회에서 저녁기도로서 시편 130편이 불려지는 것을 듣게 된다: "오 주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경, 존 웨슬리는 올더스게잇가의 네틀톤 코트(Nettleton Court)의 종교모임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 중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마음속에 역사 하시는 변화'에 관한 설명을 듣고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참으로 신뢰한다고 느꼈으며, 그가 나의 죄를, 나의 죄까지도 가져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존 웨슬리의 회심에 결정적인 말씀으로 작용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은, 독일 루터교 경건주의자들이 자신의 운동의 근본강령으로 삼는 핵심적인 교리이다. 이를 근거로 경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루터의 칭의론의 진리로부터 벗어났다고 비판하는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했으며, 자신들이야말로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을 자신의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여 루터의 본래정신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임을 강조했다. 독일 루터교 경건주의의 실제적인 추동자인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는 자신의 경건주의 운동의 개혁프로그램인 "경건한 요망(Pia Desideria)"에서, 루터와 참된 기독교의 회복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을 바라보면서 현재 루터교회에 만연해 있는 부패와 타락을 제거하기 위해 루터가 로마서 서문에서 주장한 '살아 있는 실천적인 신앙'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참된 살아 있는 신앙이란 형식주의적인 칭의론을 넘어선 실제적인 윤리적인 열매를 맺는 신앙을 뜻한다. 슈페너의 경건주의적 교회개혁 프로그램의 실제적인 완성자로 평가되는, 할레 경건주의의 창시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도 이 로마서 서문을 자신의 회심체험과 연관시키며, 자신의 신학과 신앙실천의 근거로 삼았다. 회심으로 웨슬리는 신앙의 고뇌에 찬 순례의 한 전기를 이루었지만, 이로써 그의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회심 후 간간이 유혹과 신앙의 시험(Anfechtung)을 경험하였으며,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루어졌지만 많은 유혹 때문에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는 독일 헤른후트 형제단의 창립멤버 중의 하나로 영국에 와있던 모라비안 ?치히(Johann T lchig)에게 이럴 때 '모라비안 형제들은 무엇을 하는가' 라고 묻는다. 이때 ?치히는 "예수의 상처에서 피난처를 구하라(take schelter in the wounds of Jesus)"고 충고한다. 이는 모라비안 형제단의 '보혈과 상흔의 신학(Die Blut-und Wundentheologie)'을 표현하는 핵심적인 문구이다. 바로크적인 감상(感傷)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옆구리 (창)구멍(die Seitenh hle Christi)"을 제의화 하였다: 신자들은 "잣새(Kreuzluftv gelein)"들로서 "옆구리 작은 구멍(Seitenh hle)"에 깃들어야 한다. 진젠도르프의 '보혈과 상흔의 신학'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할레 경건주의의와 급진적인 경건주의자 디펠(Johann Konrad Dippel)과 결별한 이후, 그가 어린 시절 체험한 중세적인 "신부(新婦)와 고난의 신비주의(Braut-und Passionsmystik)", 와 이후의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zentrismus)"를 자신의 독특한 칭의론과 결합하여 표현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모라비안의 독특한 신학적인 표현을 시편에서 표현되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과 구원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웨슬리의 전체적인 모라비안 신학이해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회심 직후인 29일, 페터 뵐러가 '영국사역에서 거두었던 첫 번째 열매 중의 한 명'이자, 북아메리카로 떠난 뵐러를 영국에 다시 돌아와 머물도록 진젠도르프에게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했던 볼프(Shepherd Wolf)와의 대화에서,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그와 같은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 신앙이해의 차이점은 "신앙의 등급(degree of faith)"에 관한 것이다. 웨슬리는 볼프의 신앙이 강하고 나의 신앙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열매로 알 수 있는 어떤 신앙의 등급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6월 4일 웨슬리는 하루종일 어떤 "위대하고 보배로운 약속"에 관한 성경 구절을 묵상하고, 복음은 참으로 처음서부터 끝까지 하나의 위대한 약속임을 이전보다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 "위대하고 보배로운 약속"이란 웨슬리가 회심 당일 새벽에 묵상했던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반향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앙의 성장과 완전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속함을 웨슬리는 성경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이다. "신앙의 등급"에 대한 논점이 6월 6일 옥스퍼드에 있는, 모라비안의 영향권에 있는 사람으로 추정된 사람이 웨슬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반복된다. 그 편지는 "의심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가장 낮은 등급과도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어느 때에든지 어떤 의심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를 완전히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할 때까지는 어떤 믿음도 갖지 않은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고전3,1-3절에 있는,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어떤 의미에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 해답을 찾는다.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그들을 "하나님의 집"(고전3,9)이며 "하나님의 성전"(고전3,16)이라고 부른데서, 웨슬리는 분명히 이들의 신앙이 약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떤 신앙의 등급"을 가졌음을 확신했다. 이 "신앙의 등급" 문제는 이 후에 모라비안과의 반율법주의 논쟁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는 몇 시간을 성경과 기도를 보낸 후 마음의 평안을 찾았으나, 그는 자신의 마음의 어떤 상처(Soreness)를 느꼈고, 그래서 자신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음을 안 후,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오 하나님, 나와 믿음이 연약한 모든 사람들을 '의심스런 비판(doubtful disputation)'으로부터 구원하소서!" 이 의심스런 비판이란 롬14,1에 있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사도 바울이 충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는 비판을 말한다. 웨슬리의 마음의 상처란 모라비안 형제들에 의하여 자신의 회심과 신앙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에서 생긴 아픔이라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존 웨슬리의 회심에서 피터 뵐러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뵐러는 웨슬리에게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을 재 인식 하게 하는 계기를 주었고, 회심에 이르는 분위기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웨슬리의 회심 자체를 루터교 정통주의 법정적인 칭의론 이나 모라비안적인 칭의론의 단순한 수용으로 해석할 수 없다. 웨슬리는 뵐러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종교개혁적 칭의론을 지적, 교리적인 차원에서는 알고 있었다. 존 웨슬리가 종종 믿음만으로 얻는 칭의에 대한 교리는 1738년 이전 영국교회에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가르침이었다고 말하는데, 아우틀러(Albert C. Outler)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 옥스퍼드에서 신학을 공부한 웨슬리는 자신의 교회의 39개 조항과 설교집(Homilies)을 통해 칭의론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4월 22일 뵐러와의 대화에서 웨슬리는 뵐러가 말하는 바를 자신의 영국교회의 교리로 표현하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이전 조지아 선교사 시절에 웨슬리는 사우스케롤리나(South Carolina)의 영국교회 목회자 모임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의(Christ our Righteousness)"란 주제로 몇 시간 대화를 하였다. 회심 전 웨슬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객관적인 칭의론에 대한 개인적인 성령론적인 체험과 인식이었다. 이는 회심을 성령의 역사로 객관적인 말씀이 개인의 "마음 속으로(ins Herz)"로 쓰여지는 사건으로 파악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회심과 동일하다. 프랑케에 따르면 성령의 역사로 특별한 계기에 특히 시련 중에, 또한 설교 중에 사람들이 오래 전에 알았던 특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한 힘으로 그의 마음을 치며 새로운 각성을 일깨운다. 이런 점에서 엠마누엘 히르쉬(Emanuel Hirsch)가 독일경건주의의 핵심을 칭의론을 각 개인의 삶의 근저로 깊숙이 체험케 함으로써 그 칭의가 전인적 인간을 내면으로부터 규정하고 다스리게 하는 것을 본 것이나, 요하네스 발만(Johannes Wallmann)이 경건주의 운동의 포괄적인 프로그램인 슈페너의 "피아 데시데리아(Pia Desideria)"의 핵심으로 "성령의 경험할 수 있는 생명력을 통한 교회의 갱신(Erneuerung der Kirche durch die erfahrbare Lebenskraft des Heiligen Geistes)"으로 본 것이 존 웨슬리와 그의 감리교 운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여진다. 존 웨슬리의 회심을 신학적으로 모라비안의 칭의론의 수용으로 볼 수 없는 근거로 모라비안의 칭의론은, 적어도 진젠도르프가 소위 "가름의 시간(Sichtungszeit)"라는 열광주의적인 상황의 종말기에 모라비안 형제단을 전통적인 종교개혁적인 원리로 되돌리며, 루터교내의 한 분파로 인정받으려는 시도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관한 21가지 담론(Einundzwanzig Discurse ber die Augsburgische Confession)"(1747/48) 란 강연을 행하고, 이를 출판할 때까지는, 정통적인 루터교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신학은 다분히 신비주의적이며 열광주의적인 면이 있었다. 이점을 동시대인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은 가장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진젠도르프의 정신적인 추종자 뵐러가 주장한 "즉각적인 변화(회심)"은 진젠도르프가 할레 경건주의와 결별한 1734년 이후로 프랑케의 "회개투쟁(Bu kampf)"과 "단계적인 구원의 순서(Stufenm ige ordo salutis)"를 "율법적인 회심(gesetzliche Bekehrung)"으로 비판하면서 내세운 이론으로 이를 "복음적 회심(evangelische Bekehrung)"이라고 부른 것이다. 노르웨이의 루터교 신학자인 알렌(Leiv Aalen)에 따르면 진젠도르프에게서 신앙의 단계적인 성장은 칭의와 성화의 동시적인 힘으로써의 단 한번의 은총으로 환원되며, 따라서 회심 후의 경건주의적인 회개투쟁은 불필요한 인간의 일로 배격되면서 신앙은 특유의 바로크적인 명랑성(Fr hlichkeit)과 경박성(Leichtlichkeit)을 띠게 된다. 이에 반해 프랑케와 할레 경건주의자들은 회심 이후의 회개(Bu e)의 필요성과 칭의(Rechtfertigung)로부터 성화(Heiligung)에 이르는 단계적 성장을 주장함으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단과 대립적인 입장에 선다. 웨슬리는 뵐러의 "순간적인 변화(회심)"에 대해 주저하다가 정확한 신학적 이해 없이 받아들이나,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회심 직후 신앙의 등급(degree of faith) 논쟁이나 후에 더욱 첨예화되는 반율법주의 논쟁에서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들과 궁극적인 결별의 계기가 된 칭의와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둘러싼 진젠도르프와의 신학 논쟁에서 그 차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III. 존 웨슬리의 독일 방문과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신학논쟁
1. 독일 방문의 의미
존 웨슬리는 회심 후 "신앙의 완전한 능력의 살아있는 증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용납하는 거룩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하나님 아래서 자신의 영혼을 견고히 하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능력에서 능력으로' 나아가리라는 소망으로 독일을 방문한다. 그의 독일 방문의 의미는 주로 헤른후트 형제들(Herrnhuter Br der)과의 만남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되어 왔으나 실제로 웨슬리가 방문한 곳은 헤른후트 뿐만이 아니라 할레 경건주의의 본산인 할레(Halle)이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와 조지아 시절에, 특별히 영국에 주재하던 할레 경건주의의 대표자 뵈메(Anton Willehlm B hme)에 의하여 출판된 할레 경건주의 서적들, 그 중 교육, 선교, 의료, 출판, 문화센터인 "프랑케 슈티푸퉁(Die Franckeschen Stiftungen)"에 대한 보고서인 "할레의 경건(Pietas Hallensis)"을 통해서, 이미 프랑케와 할레 경건주의에 대해서 알았다. 웨슬리는 헤른후트를 방문하기 전 할레를 방문하여, 프랑케의 이름을 "값진 향유(precious ointment)"로 칭송하며 "오, 나도 그가 그리스도를 따랐듯이 그를 따르고 싶다(O may I follow him, as he did Christ!)"고 고백하며, "프랑케 슈티푸퉁"을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놀라운 증거(amazing proof that all things are still possible to him that believes)"로 표현한다. 그 시설의 방대함과 거기에서 교육받는 학생들의 수에 놀라며 "분명히, 하나님이 이곳에서 행하신 이 위대한 일과 같은 것을 우리도 우리의 조상들도 알지 못한다(Surely such a thing neither we nor our fathers have known, as this great thing which God hath done here)"고 말한다. "신앙개혁을 통한 세계개혁"을 꿈꾸는 할레 경건주의의 본산인 할레에서의 경험이 웨슬리의 사회적 경건(혹은 성화)의 실천과 선교활동, 그리고 킹스우드 학교(Kingswood school)의 설립과 그 이후의 교육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존 웨슬리가 당시 작센(Sachsen)에서 추방되어 프랑크프르트 근교 마리엔보른(Marienborn)에 거하고 있던 진젠도르프와의 만남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웨슬리는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들에 의해 "미성숙한 인간(Homo perturbatus)"으로 인식되었으며,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거부되었다. 웨슬리가 회심 후에, 칭의와 함께 시작되는 점진적인 신앙의 성장과 성화에 관심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아직도 율법적인 자기의(Selbstgerechtigkeit)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웨슬리 역시 마리엔보른과 헤른후트에 있는 평신도 형제들의 순수한 신앙고백과 그들 조직의 새로움에 깊은 감동을 느끼지만, 주님이 자신을 "그의 포도원의 다른 지역에서 일하도록 부르신다"고 확신하며 그 곳을 떠날 결심을 한다. 헤른후트에 대한 좋은 인상에도 불구하고 존 웨슬리는 그의 동생 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근원적으로 검토할 능력을 주시길 소망하며, 그래서 단지 좋은 점만 신앙과 행위와 훈련 속에 고수하길 원했다. 이러한 모라비안 형제단에 대한 어떤 거리감은 그가 런던으로 돌아 온 후 마리엔보른과 헤른후트에 있는 형제들에게 쓴 편지-그러나 부치지는 않았다-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지적된다. 웨슬리는 편지에서 먼저 그들의 신앙과 구세주에 대한 사랑에 대한 그의 기쁨과 더불어 일련의 물음과 의구심을 표명한다. 첫 번째로 그는 헤른후트 형제들이 금식(fast)을 완전히 소홀히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헤른후트 형제들의 행동에서 어떤 경박함을 느끼며, 보다 진지함을 아쉬워한다. 금식은 회심이후에도 웨슬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금식은 원래 '옥스퍼드 메소디스트'인 존 크레이톤(John Clayton)에 의해 제안되고 "신성크럽(Holy Club)"에서 수용된 것이었다. 그 당시 금식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율법적인 공적 수단으로 기능했으나, 회심 이후의 금식은 칭의 후의 신앙의 성장과 성화의 수단으로 이해되어졌다. 웨슬리가 헤른후트 형제단에 가한 또다른 비판의 내용은, 진젠도르프가 헤른후트 형제단에서 차지하는 지배적인 위치, 헤른후트 형제들의 비의(秘擬)적인 행태,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과 이와 결부되어 외부사람을 '복음의 자유 안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 등이다. 웨슬리의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진젠도르프와 그의 형제단의 행동방식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그 밑에 깔려있는, 진젠도르프에 의해 규정되는 그들의 신학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제기된 신학적인 물음은 율법과 복음, 칭의와 성화의 올바른 관계성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가 진지하게 논쟁되지는 않았다. 존 웨슬리의 제자이자, 페터레인 신도회의 창립멤버인 제임스 휴톤(James Hutton)은 웨슬리가 독일 방문 중 마리엔보른(Marienborn)에서 성만찬으로부터 배제된 후 가졌던 헤른후트 형제단에 대한 거리감이,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들른 할레에서 있었던, 헤른후트 형제단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인, 고트힐프 아우그스트 프랑케(Gotthilf August Francke)와의 대화를 통해 더 강화되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존 웨슬리가 헤른후트 형제들에게 쓴 그의 편지에서 제기한 비판점이 할레의 경건주의자들이 진젠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단에게 가한 그것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2. 반율법주의 논쟁과 칭의와 성화를 둘러싼 진젠도르프와의 논쟁
존 웨슬리가 그 동안 잠복되어있던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신학적 차이를 인식하며 그들과 본격적인 논쟁을 전개하는 것은, "페터레인 종교모임(Fetter Lane Society)"에서 발생한 "정적주의(Stillness)" 혹은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를 둘러싼 갈등이 계기가 되었다. 이 갈등은 1739년 10월 진젠도르프가 북미 펜실베니아의 선교사로 파견한 필립 몰터(Philipp Heinrich Molther)가 영국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발생했다. 몰터는 페터레인 신도회의 신실한 회원들에게, 참된 신앙에 도달하기 위해서 은총의 수단을 포함하는 모든 외적 행위를 단념해야 하며, 더욱이 웨슬리의 관점에서는 회심한 자들도, 그들이 조금의 의심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전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런 몰터의 주장은 페터레인 신도회를 양분시킬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많은 수가 몰터의 견해에 동조하였다. 존 웨슬리는 몰터와의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이견을 해소하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둘 사이의 입장의 차이만 분명해졌다. 몰터는 "신앙의 등급(degrees of faith)은 없으며,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신앙의 완전한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누구도 어떤 신앙도 갖은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몰터는 신앙의 등급과 단계를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실제적인 현실을 부정하며 "작은 신앙" 과 "약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존 웨슬리는 신앙의 등급과 단계를 인정했으며, 로마서 1, 14절과 마태복음 8, 26절을 들어 "작은 신앙, 약한 신앙"의 현실성과 권리를 옹호했다. 이러한 관점은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웨슬리는 이미 1738년 올더스게잇 회심에서 획득하였다. 소위 "정적주의(stillness)" 논쟁은 바로 이러한 몰터의 신앙이해와 연관되어있다. 몰터는 참된 신앙에 이르기까지 어떤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의 사용을 거부했으며, 선행조차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웨슬리는 모든 은총의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참된 신앙의 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특별히 성만찬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자신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낙관주의의 단면을 드러낸다: "필수 불가결한 사전의 준비란 없다. 단지 하나님이 기쁘게 주고자 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받으려고 하는 열망만이 필요할 뿐이다. 성만찬을 받을 때, 우리의 상태, 즉 우리의 전적인 죄인됨과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임(our utter sinfulness and helplessness)임을 아는 것 외에 어떠한 합당함도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고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선행을 단념해야 한다는 몰터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웨슬리는 야고보서의 경고를 내세웠다. 몰터와의 "정적주의 논쟁"에 주목할 점은 웨슬리가 율법과 계명(commandments)의 문제를 중심으로 놓고, 모라비안의 주장을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로 본 점이다. 몰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약성경에는 믿음이외에는 어떠한 계명도 없고, 어떤 다른 의무도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았다고 주장함에 반하여, 웨슬리는 이것은 신약성서의 전체의 주장과 모순됨을 마태복음 5,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과 요한복음14,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라는 말씀을 들어 반박한다. 웨슬리는 "계명(commandments)을 지키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의무이자 특권" 이라고 본다. 그에게 하나님의 모든 요구와 계명은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그가 요구하는 것을 주신다. 칭의 후 율법(Gesetz)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 믿는 자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죄와 죽음의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나, 하나님의 율법 자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께 순종할 자유이지, 불순종할 자유는 아니다. 이 경우 율법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계명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칭의 된 자에게 율법은 더 이상 형벌과 두려움에 의해 지켜야하는 심판의 법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지켜지는 사랑의 법이다. 왜냐하면 칭의 된 자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칭의 후의 율법 혹은 계명을 말하는 것은 복음으로부터 율법의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훈련과 성장, 성화로의 발전을 의미한다. 이로써 웨슬리는 행위를 통한 칭의(로마-카톨릭)와 반율법주의적인 칭의(모라비안)의 양극단에 빠지는 오류에서 벗어난 것이다. 마틴 슈미트(Martin Schmidt)는 웨슬리와 몰터 사이의 의견의 차이를 페터 뵐러와 몰터 사이의 그것으로 환원시켰다. 그에 따르면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젊은 세대인 몰터에 대항하여 진젠도르프와 뵐러의, 고전적인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웨슬리가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반율법주의 논쟁의 결과 페터레인 신도회를 탈퇴 한 후, 최종적으로 그들의 정신적, 영적 지도자인 진젠도르프와 벌인 신학적인 담판에서 드러난 양자간의 신학적 대립을 설명하지 못한다. 슈미트는 그 당시 이미 헤른후트 형제단 내에 세대간에 신앙과 신학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진젠도르프의 신학적 배경과 그 당시 헤른후트 형제단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이다. 1727년 헤른후트에 정착한 이후 진젠도르프는 형제단을 정신적으로, 조직적으로 완전히 지배하였으며, 1729 이후 벌어졌던 할레 경건주의와의 신학적 논쟁과, 교회정치적인 경쟁, 그리고 1736년 진젠도르프가 정통 루터교의 아성인 선제후작센(Kursachsen)으로부터 추방당한 후, 그의 지도력은 더욱 커졌다. 따라서 형제단 내의 세대간의, 근본적인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와 대립은 있을 수 없다. 몰터의 입장은 진젠도르프 신학이 내포하고 있는 것의 반영일 뿐이다. 진젠도르프 신학의 발전은 그의 유년시절에 받은 신비적 영성주의(Der mystische Spiritualismus)와, 파리 유학시절 접했던 프랑스 정적주의(Der Quietismus)에 기초하고 있다. 진젠도르프가 후에 "경건주의적-도덕주의적 율법성(Die pietistisch-moralische Gesetzlichkeit)"에 반대하여 강조하는 신앙의 "수동성(Passivit t)"은 루터적 칭의론을 말한 다기보다는 정적주의에서 보여주는 반율법주의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복음을 통해 단순히 해소되거나 대치된다는, 반율법주의적 입장을 진젠도르프는 루터교와 의식적으로 대립하며 견지하였다. 정통 루터교와 "율법주의적인 할레 경건주의"와 결별한 진젠도르프는 그 대신에 단순한, 하나님의 은총의 영접과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연합(Die personelle Konnexion mit Christus)"을 통한 구세주에 대한 순전한 느낌과 관조를 내세웠다. 구세주가 현재한다는 느낌으로 충만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단은 174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총회에서 형제단의 장로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의 후계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단의 총 장로(General ltester)로 선출하였다. 이 사건은 웨슬리가 진젠도르프와 신학논쟁을 벌인 직후의 일이다. 그리고 2년 후 감각적인 "보혈과 상흔의 제의(Blut-und Wundenkult)"로 열광하였던 "가름의 시간(Sichtungszeit)"이 이어진다. 1741년 9월 3일, 존 웨슬리와 진젠도르프는 페터레인 신도회에서 발생했던 반율법주의 논쟁과 이로 인해 야기된 웨슬리와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분열을 해소시키기 위해 신학적 대화를 가졌지만 입장의 차이만 확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왜 당신은 당신의 종교를 바꾸었는가?(Cur religionem tuam mutasti?)". 이에 대해 웨슬리는 "나는 내가 나의 종교를 바꾸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nescio me religionem meam mutasse)."라고 대답한다. 여기에서 "종교(religio)"란 신앙고백이나 신앙의 확신을 의미한다. 진젠도르프는 웨슬리가 모라비안 형제들과 결별한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한 것임을 다음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은 우리에게 고백했던 신앙의 확신을 포기하고 새로운 신앙을 고백한다(religione quam apud nos professus es, relicta, novam profiteris)". 이에 대해 웨슬리는 자신이 신앙고백을 바꾸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때 웨슬리가 모라비안 형제들에게 감동을 받고, 인간적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분명하지만 신학적으로 모라비안 교도인 적은 결코 없었다. 진젠도르프는 웨슬리가 3년 전 마리엔보른에 있는 자신을 방문했을 때 보다 더 혼동되어 있고 잘못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존 웨슬리와 진젠도르프의 신학논쟁 중 핵심적인 것은 칭의와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관계이다. 웨슬리는 칭의 후의 신앙의 성장과 이 세상에서 신자의 목적과 영광이 되는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믿었지만, 진젠도르프는 모든 종류의 완전주의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내재하는 완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류중의 오류이다〔…〕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완전이다. 내재적 완전주의를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이다(Nullam inhaerentem perfectionem in hac vita agnosco. Est hic error errorum ... Christus est sola perfectio nostra. Qui perfectionem inhaerentem sequitur, Christum denegat)". 이에 반해 웨슬리는 사랑안에서 성장하는 신자는 또한 성화에서도 성장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젠도르프는 이러한 성화를 복음적인 것이 아니라 율법적인 것으로 본다. 진젠도르프는 "모든 칭의와 성화는 같은 순간에 일어난다(Sanctificatio totalis ac lustificatio in eodem sunt instanti)"고 보며, 칭의 받는 순간에 인간은 완전히 가장 깊은 곳까지 성화되어서 그가 죽는 날까지 더 성화되거나 덜 성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인간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내용을 들어 신자는 은총 안에서 성장함("crescendum esse in gratia")을 믿는다고 말하며, 신자는 매일 매일의 자기 부정을 통하여 나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진젠도르프는 모든 자기 부정은 율법적인 것이며, 신앙의 자유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며, 그를 넘어서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고행(Abt tung)을 조소한다. 완전한 사랑엔 어떤 정화도 전제되지 않는다"("Facimus credentes omne quod volumus et nihil ultra. Mortificationem omnem ridemus. Nulla purificatio praeceddit perfectum amorem"). 이 신학적 논쟁은 결국 존 웨슬리와 진젠도르프간의 최종적인 결별로 끝났다. 이 논쟁은 그 핵심에 있어 이제까지 페터레인 신도회 내에서 발생했던 웨슬리와 몰터를 비롯한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논쟁의 연속이자 귀결점이었다. 여기에서 존 웨슬리는 만남의 초기에 신학적 배경에 대한 인식 없이 호감을 가졌던 모라비안 형제들과 진젠도르프와의 신학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3. 존 웨슬리의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 비판과 그 의미
진젠도르프와 마지막 신학적인 논쟁을 벌이기 3개월 전인 1741년 6월에, 존 웨슬리는 그 동안 말로만 듣고 부분적으로만 알던,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는다. 루터의 로마서 서문(die Vorrede zum R merbrief)과 만남으로 회심 한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는 루터의 저서가 갈라디아서 주석(Das Kommentar zum Galaterbrief)이다. 웨슬리는 여기에서 루터가 율법을 죄와 죽음과 악마와 연결시키면서 거부하고, 선행을 기독교적인 삶으로부터 제외시키며, 무엇보다 성화에 대해서 무지한 점을 들어 루터를 비판한다. 그리고 루터의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모라비안 형제들의 큰 오류의 실제적인 근원을 본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면제한 것이 성서에 의해 증명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함, 혹은 하늘로부터 면제한다는 것도 성서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 여기에 (내가 이해하기에) 모라비안들의 큰 오류의 참된 근원이 있다. 그들은 더 좋은 것에 대해서도 더 나쁜 것에 대해서도 루터를 따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행도, 율법도, 계명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마틴 루터는 1516/1517년 갈라디아서에 관한 첫 번째 강의를 하고, 이를 토대로 1519년 갈라디아서 주석서를 쓰는 데, 이것이 로마-카톨릭의 공적의인(die Werkgerechtigkeit) 사상에 대한 첫 번째 투쟁의 산물이다. 루터가 "신약성서의 핵심이며,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여긴 로마서에 서문을 부친 것은 1522년의 9월판 성서(Septembertestament)였다. 루터는 그후 심화된 자신의 칭의론 -루터 자신이 '교회가 바로 서느냐 넘어지느냐를 결정하는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여긴 - 관점에서 이를 강화시키려는 의도에서 1531년 갈라디아서 대한 두 번째 강의를 하였는데, 이것은 루터의 교수활동의 최정점을 이룬다. 1535년 게오르그 뢰러(Georg R rer)의 필기를 토대로 카스파 크루시거(Kaspar Cruciger)의 참여 하에 루터의 대 갈라디아서 주석(das gro e Kommentar zum Galaterbrief)를 출판되었다. 루터는 가열되는 로마-카톨릭과 열광주의자들(die Schw rmer)의 칭의론에 대한 공격이 계기가 되어 이 책의 출판을 승인했다. 이 책에서 루터는 카톨릭교회의 율법성(Gesetzlichkeit)과 열광주의자들의 엄격한 신비적 성화(die mystische Heiligung)에 대항하여 자신의 칭의론을 상세하게 전개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행위와 믿음, 율법과 복음, 칭의와 성화의 올바른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자신의 칭의론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칭의론이 다시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복음적 윤리(Evangelische Ethik)를 전개하는 것이 어려운 과제임을 잘 인식했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을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주석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주지시켰다: "Postquam fidem in Christum sic docuimus, docemus etiam de bonis operibus. Quia apprehendisti fide Christum per quem iustus es, nunc eas et diligas Deum et proximum, Invoca, Gratias age, praedica, lauda, confitere Deum, Benefac et servi proximo, fac officium tuum. Haec vere sunt bona opera quae fluunt ex ista fide...(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그렇게 가르친 후에, 우리는 또한 선한 행위에 대하여 가르친다. 왜냐하면 당신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를 통해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선행을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부르고, 찬양하고 칭송하고 고백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하고 그를 섬기며, 당신의 임무를 다하라. 이것이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참된 선행이다...)" 이것이 루터가 주장하는 믿음과 선행의 올바른 관계이다. 루터는 칭의론과 기독교인의 복음적 자유가 사탄의 계략으로 잘못 이해되어 도덕적 방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경건한 설교자들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선한 행위에 대해 열심히 간곡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루터는 요한 아그리코라(Johann Agricola)와의 반율법주의논쟁(der antinomistische Streit)의 와중에 1538년 자신의 대 갈라디아 주석서 2판의 서문에서 반율법주의란 새로운 소종파에 대해 경고하였다. 복음에 의한 율법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하는 아그리코라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전체 인간의 삶과 교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1539년에 출판한 "반율법주의자에 반대하여(Wider die Antinomer)"란 책자에서 반율법주의 주장의 근거를 루터 자신에게서 찾는 아그리코라의 주장을 아주 분명하게 거부했다. 이상의 루터의 입장을 살펴볼 때, 루터가 율법을 거부하고 선행을 기독교인의 삶에서 제거했다는 존 웨슬리의 비판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웨슬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루터가 웨슬리의 입장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을 헨리 카터(Henry Cater)는 구체적인 사례와 그것이 말해진 상황과 문맥을 들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였다. 단지 웨슬리가 지적한 대로 루터가 성화를 강하게 강조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세력과 벌이는 싸움에서 루터가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반율법주의를 주장하는 모라비안 형제들과 진젠도르프의 오류는 루터에게서 반율법주의의 근거를 찾는 아그리코라와 열광주의자들의 오류와 동일한 것이다. 루터교 내에서, 루터의 율법이해에 대한 적절한 해석과 칭의에서 성화로의 강조점의 변화는 루터교 경건주의자인 아우그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와 그의 할레 경건주의(der hallische Pietismus)에 이르러서이다. 그는 복음과 율법의 상관성, 칭의 이후에도 유효한 율법의 기능, 윤리적 열매,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성장과 신앙에 대한 과정적인 이해, 그리고 성화와 칭의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완전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신학적인 토대에서 할레 경건주의는 사회적 경건(성화)의 실천의 꽃을 피운 것이다. VI. 나오는 말
힐데브란트(Franz Hildebrandt)는 그의 책 "루터로부터 웨슬리까지(From Luhter to Wesley)"에서 존 웨슬리를 자신의 동시대인에게 루터를 매개시킨 위대한 중계자로 특징 지우면서 "영국교회사에 있어서 웨슬리 형제처럼 그렇게 강하게 루터로부터 영향받은 사람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셀(George Croft Cell)이 존 웨슬리를 칼빈과 연결시킨 것 보다 휠씬 더 루터에 근접시켰다. 힐데브란트는 존 웨슬리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Vorrede zum R merbrief)에 의해, 찰스 웨슬리가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Kommentar zum Galaterbrief)에 의해 회심을 체험했으며 그 회심이 그들의 신앙과 삶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감리교 운동에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웨슬리 형제와 루터와의 접촉점을 찾고 있다. 영국의 종교개혁이 루터보다는 칼빈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았고, 사실 18세기초까지도 루터의 책이 영국에 널리 퍼져있지 않은 상황에서, 웨슬리 형제가 루터의 저서를 통해 회심했다는 사실은 가히 교회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칭의론은 모라비안 형제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써,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으며, 그 이후 페터레인 신도회에서 발생한 모라비안 형제들과의 반율법주의 논쟁과 분열, 그 와중에 웨슬리가 행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 비판, 진젠도르프와 벌린 칭의와 성화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과 최종적인 결별이 올더스게잇 사건과 어떤 내적인 신학적 연관성이 있는가가 이제까지의 웨슬리 연구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본 논문은 이러한 모호성을 일관되게 설명해보려는 한 시도였다. 존 웨슬리와 루터와의 만남은 루터교 정통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루터교 경건주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루터교 경건주의란 정통주의 형식주의화 된 법정적인 칭의론에 대해, 젊은 루터에 근거하여 살아 있는 신앙, 삶의 변화와 성화된 삶을 지향하는 루터에 대한 재해석 운동이다. 존 웨슬리는 서로 다른 두 유형의 경건주의와 만나게 되는데, 특별히 회심에 이르는 과정에서 모라비안 형제들에게 강한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신학적인 근본사고나 사회적 실천에 있어 웨슬리의 입장은, 모리비안과 대립적인 입장에 있던 할레의 경건주의자들에게 훨씬 가깝다. 이러한 루터 수용의 내적인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연속성이 없어 보이는 회심과 회심 이후 벌어졌던 반율법주의 논쟁을 전체적인 역사적인 맥락과 신학적인 구조에서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