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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덕양구 용두봉 475-85에 위치한 서오릉은 한양(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서쪽에 다섯 기의 능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인순왕후의 창릉,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익릉, 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홍릉을 일컫는다
그 밖에 조선시대에 조성한 13대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순창원이 있고
1960년대에 이장한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 씨의 수경원과
20대 경종의 어머니 옥산부대빈(희빈) 장 씨의 대빈묘가 있습니다
고양 서오릉은 구리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5기의 능과 2기의 원 1기의 묘가 있습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라고 합니다
1970년대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고,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입니다
매표소 광장에 설치된 서오릉의 종합안내도 입니다
서오릉 관람코스 입니다
매표소 ▶ 명릉 ▶ 재실 ▶ 수경원 ▶ 익릉 ▶ 서어나무길 1.92km(40분 소요) ▶ 창릉 ▶ 홍릉 ▶ 대빈묘 ▶ 경릉 ▶ 순창원 ▶ 후문 (또는 재실 ▶ 매표소 ▶ 정문)
5기의 능 명칭과 2기의 원, 1기의 묘의 안내글 입니다
창릉에서 홍릉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조선 제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으로
정성왕후(1692 ~1757)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704년(숙종30년)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영조)과 가례를 올렸다.
1724년(경종 4)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평생 숙종과 경종의 왕비를 극진히 모시며내명부를 지켰다. 1757년(영조 33)에 소생 없이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제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정자각과 비각
홍릉(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의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비각
조선 제21대 영조의 첫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 입니다
조선 역대왕비 중에서 왕비 재임기간이 가장 긴 왕비로 1757년(영조 33)에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본인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드는
허우(虛右) 제도로 홍릉을 조성하고
석물 배치 역시 쌍릉의 형태로 배치하고 비어있는 자리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정혈에 묻었다
그러나 영조가 세상을 떠난 후 현재의 동구릉 내의 원릉(元陵)에 영조를 모시면서 현재까지도 비어있게 되었습니다
능침 석물은 국조상례보편의 예에 따라 배치하였다 합니다
홍릉(영조의 첫번째 왕비 정성왕후 능)에서
장희빈(대빈묘)로 갑니다
위 안내 표지목과 동일 합니다
위 사진과 동일한 위치 입니다
희빈 장(대빈묘)씨의 묘 입니다
대빈묘. 조선 제19개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묘
희빈장씨 :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며 20대 왕 경종의 생모이며, 별칭은 장희빈 본명은 장옥정
줄거리 :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인 윤성립(尹誠立)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張炫)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首譯)을 지냈으며 거부(巨富)로 이름이 높았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한 뒤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
희빈 장씨는 1683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야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정권을 남인(南人)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가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1689년(숙종 15) 음력 10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해 음력 4월 12일에 왕후(王后)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就善堂)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희빈 장씨는 죽은 뒤에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 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옮겨졌다. 아들인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은 1722년(경종 2) 생모인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다(두산백과)
대빈묘는 옥산부대빈(1659 ~ 1701)은장형의 딸로1686년(숙종 12)에 숙종의 후궁이 되었고
1688년(숙종 14)에 경종을 낳아 희빈(禧嬪)이 되었다
기사환국(1689)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갑술환국(1694년) 때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왕후를 무고한 죄로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었다
기사환국(1689년) 요약 : 언제 1689년(숙종 15)
남인(南人)이 희빈장씨의 소생인 원자(元子) 정호(定號)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
기사환국 줄거리 :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민씨가 왕후로 간택되기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궁녀 장옥정을 후궁으로 삼았으며 그러던 차에 장씨가 왕자 윤(昀)을 낳게 되자 일약 정치적 격변을 몰고오게 되었다. 왕자 윤의 출생으로 파급된 여파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치 실세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불렀다.
숙종은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正妃)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그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政局)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李玄紀)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회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賜藥)을 내렸다. 송시열의 사사(賜死)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金壽興) ·김수항(金壽恒)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목래선(睦來善) 등의 남인이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 이 환국(換局)의 여파로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廢黜)되고,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두산백과)
갑술환국 요약 : 1694년(숙종 20)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으로 희빈장씨 및 남인 처벌되고 소론과 노론 요직에 등용되다
갑술환국 줄거리 :
남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힘겹게 집권했는데, 기사환국은 남인이 스스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서인에 대한 숙종의 염증과 혐오 때문에 얻은 것이었다. 특히 궁녀였던 소의장씨를 두고 서인과 숙종의 갈등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남인이 집권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남인은 자신들의 실권을 항상 불안하게 여겼으며 언제든 또다시 실각할 수 있다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당시 노론이었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함이완이 이런 사실을 남인 민암에게 고변하였고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서인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이때 남인들은 민씨 폐출(廢黜)의 원인이 된 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 소생의 원자(元子) 정호(定號)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만일 민씨가 복위하여 다시 왕비가 되면 남인은 또 실권하게 되므로 폐비민씨를 지지하는 김춘택 등 서인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종의 심경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장씨를 총애하여 희빈(禧嬪:희빈장씨)을 삼았으며 아들을 낳자 나중에는 왕비로까지 책봉하였으나, 장씨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민씨를 폐한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게다가 장씨보다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 최씨(최씨는 후일 영조의 생모가 된다.)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게다가 궁중 내에서는 최씨의 독살설이 퍼지면서 남인들은 다시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마침내 숙종은 남인이었던 민암의 처사를 문제삼았고 김춘택 등의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옳게 여겨, 민암을 사사(賜死)하고 남인 세력인 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유배하였으며, 동시에 민씨를 지지했던 소론의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조정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한편, 기사환국 이후 왕비가 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고 그때 민씨를 지지하여 2번이나 상소를 올렸다가 사사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하여 김수항(金壽恒) 등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이 옥사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는 노,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사건을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하며 이후 남인은 정치력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집권하지 못했다(두산 백과)
대빈묘에서 경릉으로 갑니다
경릉의 정자각과 수복방 입니다
위 사진과 동일 합니다
뒤돌아 보니 지나왔던 길이 대빈묘와 홍릉, 창릉으로 어지는 길 입니다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이 있는 경릉 입니다
한 일(ㅡ)자로 자라는 소나무
추존 덕종의 소혜왕후의 능 입니다
소혜왕후의 능
소혜왕후의 능 입니다
덕종(1438 ~ 1457)은 제7대 세조의 맏아들로 1455년(세조 1)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 2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의경세자(덕종)는 세조의 둘째 아들 성종이 임금 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추존 덕종의 능
경릉의 정자각
경릉의 홍살문
경릉의 정자각과 수복방
경르의 정자각
경릉 :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 입니다
덕종(1438 ~ 1457)은 제7대 세조의 맏아들로 1455년(세조 1)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 2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경세자(덕종)는 세조의 둘째 아들 성종이 임금이 되면서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였습니다
소혜왕후(1437 ~ 1504)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475년(성종 6)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소혜왕후는 인수대비가 되었습니다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내훈( 內訓)을 책으로 펴내고 한문 불경을 한글로 풀어쓰기도 했다
경릉에서 순창원으로 갑니다
순창원 입니다
순창원의 홍살문과 정자각 입니다
순창원의 홍살문과 정자각
순창원의 정자각
조선 제13대왕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의 묘 순창원 입니다
순창원의 홍살문
순창원 정자각에서 바라본 홍살문 입니다
순창원 홍살문
순창원은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1534 ~ 1567, 재위 1545 ~ 1567)의 맏아들 순회세자(1551 ~ 1563)와
공회빈 윤씨(1550 ~ 1592)의 합장묘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세상을 떠나 명종의 뒤를 잇지 못했다
공회빈은 윤옥의 딸로 선조 25년에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으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순창원에는
현재 빈 재궁만 안장되어 있다
재궁 : 왕, 왕대비, 왕비, 왕세자 등의 시신을 넣던 관
순창원의 홍살문 앞 입니다
멧돼지를 만났을 때 주의 사항 입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익릉 입니다
익릉 홍살문 앞까지 갔다가 순창원 홍살문 앞으로 되돌아와
재실과 명릉을 거처 매표소로 갑니다
지나온길 뒤돌아 보고~
오후 4시 15분 입니다. 3시간 동안 서오릉을 둘러보는 탐방기는 여기서 마침니다
조선왕릉, 서오릉 관람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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