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진주군 마동면 당촌동(馬洞面堂村洞), 신풍면 중동(新豊面中洞), 곤양군 곤명면본촌동(昆明面本村洞) 각 일부로서 당촌리(堂村理)라 하였다.
사평(砂坪) : 사평마을은 댐수몰이 되기전에는 92호로 5개마을로 분동되어 있었다. 현재 수중이 되어 있는 벗들에 28호가 주거하고 있었고 주작물인 벗들무우(대평무우)는 전국에서도 유명하여 옛날에는 나라 임금님께 진상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무종자를 채종하는데 옥방마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좋은 종자를 100여가마(1가마 72㎏입)나 생산 하던 곳이다. 수몰 전에는 무가 전국에서 뛰어나게 잘되던 옥토가 지금은 물속으로 변모하였다. 남강댐 수몰전에는 유명한 벗들무우를 매입하기 위하여 부산, 서울 등지의 상인이 하루 십여명씩 래왕하여 무를 밭떼기로 매매하는 사람과 하루 20여대의 자동차가 붐비어 주점에 만원을 이루었으며, 개가 십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돈이 흔하던 고장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는 곳이 되었다.
대평면남부출장소 : 남강댐 수몰로 상촌리에 소재하던 면사무소를 1970년 5월 대평리 경로당으로 이사하고 상촌리에서 내촌리까지 면 중앙으로 통하는 도로의 수몰로 통행을 못하여 면사무소까지 강을 건너는 것은 고사하고 하촌리 앞 소로(小路)도 없어 보행도 할 수 없는 처지로 면사무소에 민원서류를 못할 정도로 불편해서 1971년 3월 25일 군조례 제 166호(1971. 3. 25 공포)에 의하여 대평면 남부출장소를 대평초등학교 뒤편(현 당촌경로당)에 설치, 민원서류를 처리하였다. 출장소 관할 마을은 하촌, 사평, 당촌, 내촌, 신풍마을 5개 마을이었으며 1978년 4월 6일에는 군조례 제 418호(1978. 4. 6 공포)에 의하여 대평면 남부출장소를 폐지하였다.
벗 들 : 약 100정보의 밭이 광할하다 하여 벗들이라 하였다. 그곳에 심은 무맛이일미로서 옛날 임금님께 진상하였다는 유명한 대평무우 특산지였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황소골 : 당촌리 사평마을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마을 건터편에 산이 소같은 형국이라 하여 황소골이라 이름지었다.
당촌(堂村) : 남강댐 수몰되기 전 당촌리가 3개 마을로 분동(分洞)되어 있을 당시 당촌마을은 101호로서 큰마을에 속하여 일정때는 대평면 내에서 벼 공출을 제일 많이 낸 마을이다. 8. 15 해방후에는 무종자 생산으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였다. 1973년 2월 26일 법률 제 2555호로 종묘관리법이 제정되기 전 무종자 생산량이 당촌마을에서 약 400가마(72㎏입)였다. 당촌리거주 김덕용(金德龍)이 면내에서 생산된 무종자를 600여가마를 수집, 재던 전주 흥농종묘지사(興農種苗支社)로 80여가마 송출하고 잔여 무종자는 강원도, 경기도 등 전국 각지로 송출하였으나 종묘관리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이곳 당촌리에서 는 종자생산을 못하게 하고, 대전·전주 흥농종묘지사에서 종자를 생산하여 진주 대평무우라고 이름 붙여 보급하고 있다. 당촌리 지하(地下) 삼거리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곳이었다. 큰 상점이 있어 사람이 많이 왕래하던 곳이다.
안장설(鞍裝) : 말 안장같이 생긴 산이라 하여 그 산이름을 안장설이라 이름지었다. 그 안장설 산에 묘를 썼는데 명산일고 하고 있다.
늑실(勒谷) : 말의 안장같이 생긴 산이 있고 그 산 인근에 말 굴레같이 생긴 산이 있어 그 골 이름을 늑실골이라 부르고 있다.
땅고개 : 당촌마을에 있는 산고개이다. 그 고개에서 금계창월(金鷄唱月), 즉 닭이 울었다는 전설이 있어 고개 이름이 닭고개인데 사람들이 부르기를 땅고개라 한다.
빼 골 : 당촌마을에 있는 골 이름이다. 언제 부터인지는 알수 없으나 백학골(白鶴谷)을 빼골이라 부른다.
못안(池內) : 조선조 말엽 때 못이 되어 있었다. 크기는 1만2천평가량 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못이 없고 주거지역으로 못 안이라고 한다. 대평리 어은마을에 보를 막던 안사영이라는 부자가 당촌리, 내촌리 일대에 논을 만들려고 못 둑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산성(山城) : 당촌리마을 최하단(수몰전 당하마을) 뒷산에 있는 산성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서 지금도 성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