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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묘비명(墓碑銘)
광양군 묘표음기 (廣陽君 墓表陰記)
증직(贈職)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이시고, 행직(行職)은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광양군(崇政大夫 判中樞府事兼判義禁府事知經筵 廣陽君)이신 이공(李公) 세좌(世佐)의 묘음기(墓陰氣)인 바, 그 공열(功烈)은 국사(國史)에 다 나타나 있다. 정경부인 양주조씨(貞敬夫人楊州趙氏)의 묘표석(墓表石)의 음기(陰記)이다. 관찰사(觀察使) 근(瑾)의 따님이요. 영중추(領中樞) 이사원(李師元)의 외손녀(外孫女)이다. 14세에 정헌대부 호조판서 이공 세좌(正憲大夫 戶曹判書李公世佐)에게 시집와서, 홍치 을묘(弘治乙卯) 7월 24일에 돌아가시매, 그 탄생(誕生)하심이 정묘(丁卯) 4월 8일이니 나이 49세(四拾九歲)이시다. 4남 5녀를 낳으시니 男에 수원(守元)은 음서(蔭仕)로 광흥봉사(廣興奉事)요. 수형(守亨)은 문과(文科)하여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이요. 수의(守義), 수정(守貞)은 유업(儒業)으로 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女는 경력 정홍손(經歷鄭洪孫)과 직장 양윤(直長梁潤)과 세마 정현(洗馬鄭鉉)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미혼(未婚)이다(後에 병사 윤여해(兵使尹汝諧)에게 시집 가다). 묘재(墓在) 충주 남불정리 자좌원(忠州南佛頂里子坐原)이며, 부군(夫君)과 쌍영(雙瑩)으로 되어 있다.
홍치(弘治) 8년(1495) 12월 일 입석(立石)
이 음기(陰記)는 광양군께서 정경부인 양주조씨께서 돌아가셨을 때 처음 세운 묘비(墓碑)의 음기(陰記)인데 후에 추기(追記)하였다.
판중추부사 광양군 신도비명 국역
判中樞府事 廣陽君 神道碑銘 國譯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성인(聖人)은 세상의 동량(棟樑)이요. 육경(六經 易詩書春秋禮樂)은 성인(聖人)의 동량(棟樑)이다⌟라고 하였는데, 오직 선생께서는 성인(聖人)과 육경(六經)의 글을 배우고, 올바른 도리(道理)를 행하는 기질(氣質)로서 국가의 동량(棟樑)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대하(大厦 국가)가 기울어지려고 하니, 뒤집힌 짚더미 밑에는 아무것도 온전할 수가 없다 할지라도, 어찌 천도(天道)가 회복되어 일월(日月)이 다시 밝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아! 선생의 휘(諱)는 세좌(世佐)요. 자(字)는 국언(國彦)이요. 호(號)는 한원(漢原)인데 姓은 이씨(李氏)로서 근본이 광주부(廣州府)의 출신(出身)이다. 여계(麗季)의 명현(名賢)으로 둔촌선생 휘 집(遁村先生 諱 集)께서 고조벌이 되고 증조(曾祖)는 휘가 지직(諱 之直)인데 직제학(直提學)으로서 소도의 변(昭悼之變)을 당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간(諫)하였으나, 태종(太宗)이 듣지를 않았고, 물러나 광주(廣州)의 탄천(炭川)에서 사시니, 학자(學者)들이 탄천선생(炭川先生)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태종(太宗)이 유명(遺命)으로 동궁(東宮)에 수용(收用)할 것을 부탁했고, 세종(世宗)이 즉위(卽位)하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버리니, 맨 처음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뽑혔고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追贈)하였으며, 문인(門人) 남수문(南秀文)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인손(諱 仁孫)인데, 우의정(右議政)을 지냈고 태사(太師)를 추증(追贈)받았으며 시호(諡號)는 충희(忠僖)요. 호(號)는 풍애(楓崖)로서 세덕(世德)의 첫머리가 되었고, 문인(門人) 서거정(徐居正)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다. 아버지의 휘는 극감(諱 克堪)인데 형조판서(刑曹判書)와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지냈고, 원임 세자사(原任世子師)로서 광성군(廣城君)에 훈봉(勳封)되었으며,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요. 호(號)는 이봉(二峰)인데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으로 동국(東國)에 이름이 가득했다. 어머니 충주최씨(忠州崔氏)는 광흥창사 덕로(廣興倉使 德露)의 따님인데 어질고 학식(學識)이 있어 여사(女士)로 일컬었다.
선생은 세종 을축(세종27 1445)년 6월 7일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 자택(自宅)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릴 때부터 침착하고 태연하여 사람들이 공보(公輔)로서 기망(期望)하였다. 다섯 살 때 모부인(母夫人)께서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말로서 전(傳)하여 주니 한번 읽고는 잊지 아니하였으며, 지학(志學 15세)에 미쳐서는 경사(經史)를 관천(貫穿)하였고, 시(詩)와 문장(文章)에 있어서도 배행(輩行)들 보다 월등(越等)하게 뛰어났다. 세조 을축(세조11년 1465)년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에 1등으로 합격(合格)하였고, 성종 계사(성종5 1473년)년에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태조릉)을 천수(薦授)받았으며, 병신(丙申)년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제수(除授)받았고, 정유(丁酉)년에 정랑(正郞)으로 올라 통훈계(通訓階)로서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이 되었다. 이 해에 문방(文榜)의 갑과(甲科)에서 아원(亞元)을 차지하고서, 곧 바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다 대사간(大司諫)을 제수 받았는데, 과거(科擧)에 응시(應試)하던 날 주시관(主試官)에 불공(不恭) 때문에 파면(罷免)을 당하였다. 수 일후(數日後)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서용(敍用)되었다가, 미구(未久)에 한원(翰苑 예문관)의 직제학(直提學)에 올랐으며, 국자감 대사성(國子監 大司成 성균관)으로 옮겨 지제교(知製敎)를 겸임(兼任)하였다. 무술년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어 한 돌 만에 고을이 맑게 다스려졌다는 풍성(風聲)이 있었다. 기해(己亥)년에 들어와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었으며, 경자(更子)년에 차례대로 육승지(六承旨)에 올랐고, 조사(詔使)의 선위사(宣慰使)로 차출되었다. 임인(壬寅 1482)년에 상(上)이 폐비(廢妃)가 음흉( 陰凶)하고 화심(禍心)을 품고 있어 후환(後患)이 있을까 염려스런 때문에 사사(賜死)하였는데, 마침 선생께서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명(命)을 받들고 감독(監督)을 위하여 현지(現地)에 갔었다. 계묘년에는 도승지(都承旨)로서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랐고, 을사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과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品階)와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차례로 배명(拜命)받았으며, 이어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배명(拜命)받고 정조사(正朝使)로서 표전(表文과 箋文)을 받들고 연경(燕京)으로 갔다. 병오(丙午)년에 연경(燕京)으로부터 돌아와서 다시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고, 광양군(廣陽君)에 피봉(被封)되었으며, 11월에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제수(除授)받았는데, 청명(淸名)이 충청도(忠淸道)에 재임(在任)할 때와 똑 같았다. 무신(戊申)년에 들어와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가 되었고, 경연청 특진관(經筵廳特進官)을 겸임했으며, 을유(乙酉)년에 성균관 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배명(拜命)받았고, 세 번이나 가선대부(嘉善大夫)에다 예조참판(禮曹參判)을 배명 받았다. 10월에 다시 대사헌(大司憲)을 배명 받았고, 다시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었으며,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아가 6개월 만에 고을을 크게 다스리고 병(病)때문에 글을 올려 사면(辭免)을 아뢰니 경직(京職)으로 바꾸기를 명하여 다시 성균관 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배명 받았고, 광양군(廣陽君)에 피봉(被封)되었다. 임자(壬子)년 38세의 나이로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수천언(數千言)의 의논(議論)을 올렸으며, 계축년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品階)에 올라 경기 감사(京畿監司)를 제수(除授)받았고, 갑인(甲寅)년에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제수 받았고, 세 번이나 광양군(廣陽君)의 봉호(封號)를 받았다. 12월에 성종(成宗)께서 승하(昇遐)하시니, 을묘(乙卯)년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었으며, 9월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다 호조판서(戶曹判書)에 배명되었고, 병진(丙辰)년에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를 겸임(兼任)하였으며, 2월에 함경도 순변사(咸鏡道 巡邊使)를 제수(除授)받았고, 6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加資)되어 다시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정사(丁巳)년에 사직(辭職)하는 계(啓)를 올렸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고, 정론(廷論)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다 양관 제학(兩館提學)을 제수 받았으며, 무오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가자(加資)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상(貳相 좌⋅우찬성의 별칭)의 의망(擬望 후보자로 추천)에 들게 되어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했다. 7월에 사화(史禍)가 일어나자 말썽이 생겨 파직(罷職)을 당하고 시골로 돌아갔다가, 8월에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제수받고 여러 차례 사양(辭讓)했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다. 신유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兼任)했으며, 9월에 3도(三道 忠淸全羅慶尙) 체찰사(體察使)로 차출(差出)되었다가 임술(壬戌)년 조정(朝廷)에 일이 생겨 돌아와서, 다시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계해(癸亥)년 9월에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재신(宰臣)들에게 순배로 잔을 내리는데, 선생께서는 본디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나이도 육순(六旬)이라, 늙고 숨이 차서 그 술잔을 손수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조금 쏟으니, 임금이 노하여 불경(不敬)하다 말하고, 정원(政院)에 내려 죄(罪)를 논(論)하여 체직(遞職)케 하라 명하고도 오히려 죄가 무거운데 처벌(處罰)이 가볍다고 여겼다. 그러나 대간(臺諫)이 겨레붙이가 붕비(朋比)보다 큰 것이 두려워 감히 탄핵(彈劾)하지 못하고 있자, 의정(議政)과 육조(六曹)와 한성제부(漢城諸府)의 의논(議論)을 거두어 선생의 죄(罪) 및 대간(臺諫)의 죄를 의논하였는데, 김공 응기(金公應箕)와 이공 집(李公諿) 등의 의논에는, 도리어 선생을 옹호한 바가 있었고, 윤필상(尹弼商)이하의 많은 신하들은 임금의 뜻에 아부하여 큰 불경론(不敬論)으로써, 선생을 무안(務安)에 부처(付處)케 하였고, 아들 의정부 사인 수형(議政府舍人守亨)과 예문관 한림 수의(藝文館翰林守義)와 홍문관 수찬 수정(弘文館修撰守貞)은 모두 파면(罷免)시켰다. 그리고 선생은 온성(穩城)으로 이배(移配)당했다가, 갑자년 정월 사령(赦令)으로 인하여 유환(宥還)하였는데, 이윽고 홍상 귀달(洪相貴達)이 언사(言辭)가 불공(不恭)하고, 임금을 경시(輕視)하는 태도가 있는 것은, 선생의 행위를 본받은 때문이라 하였으며, 대사헌 이자건(大司憲李自健)과 대사간 박의영(大司諫朴義榮)외에 대각(臺閣)의 많은 관원(官員)들은 금묵불언죄(噤嘿不言罪)를 추론(追論)하여, 금부(禁府)의 옥(獄)에다 가두고 선생과 홍상(洪相)도 같은 날 함께 물리쳐 버렸다. 처음에는 선생을 영월(寧越)로 이배(移配)시켰다가, 얼마 후 평해(平海)로 옮겼으며, 조신(朝臣)으로서 탄장(彈章 죄를 탄핵하는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과, 문안을 드렸거나 안부를 물은 사람들을 추국(推鞫)하기도 하고, 귀양을 보내기도 하니, 조정(朝廷)이 텅텅 비어 버렸다. 그리고 선생의 네 아들 및 아우 세걸(弟世傑), 사위 조영손(壻趙永孫)․양윤(壻梁潤)․정현(壻鄭鉉)․윤여해(壻尹汝諧)는 모두 곤장을 치고 여러 고을로 귀양을 보냈으며, 계부 광남군 극균(季父廣南君克均)도 인동(仁同)에 부처(付處)하였다. 선생은 평해(平海)에서 거제(巨濟)로, 거제에서 곤양(昆陽)으로 옮겼다가, 또 남해(南海)로 옮겼는데, 임금이 정원(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모(某)는 스스로 지위(地位)도 높고 나이도 늙었으니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 나이에 어찌 하랴 여기고 있다. 이리하여 그 교만(驕慢)과 오만(傲慢)이 자라서 친사(親賜)한 술을 마시지 않고 쏟았으며, 또 선왕(先王)께서 폐비(廢妃)할 때에 만약 힘써 간(諫)하여 임금의 마음을 돌리게 해서, 성덕(聖德)으로 하여금 누가 없게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구차하게 군명(君命)을 쫓아 약을 가지고 그 자리에 갔으니, 어찌 교묘하게 아첨하여 투생(偸生 죽어야할 때 죽지 않고 살기를 탐함)을 꾀 한 게 아니겠는가? 나는 반드시 참형(斬刑)으로 다스릴 것이다. 속히 헌의(獻議)하라⌟하니 여러 신하(臣下)들이 모두 이르기를 ⌜과연 성교(聖敎)와 같습니다.⌟하고, 마침내 4월 4일에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시켜 안처(安處)케 하고, 곧 바로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이 때에 선생께서는 남해 배소(南海配所)로 향해 가려고 곤양(昆陽)의 양포역(良浦驛)에 도착해 있었는데, 도사(都事)가 뒤따라 도착하여 명령(命令)을 전하자, 선생께서는 공손한 말씨와 올바른 낯빛으로 조용하게 역가(驛街)의 민가(民家)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 네 아들들은 모두 한훤 김선생 문하(寒暄金先生門下 김굉필)에 유학(遊學)하여 학문과 조행(操行)이 있었고, 아우 세걸(世傑)은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올바른 도리를 행한다는 세평(世評)이 높았는데, 이 때에 모두 극형(極刑)을 당했고, 광남군(廣南君)도 인동에서 살해(殺害)당했으며, 손자와 조카도 사방으로 나뉘어 귀양을 갔고, 동성(同姓)은 사종(四從)까지 이성(異姓)은 재종(再從)까지도 모두 축방(逐放)되거나 금고(禁錮)를 당했다. 그리고 선생께서 건백(建白)하여 시행한 것은 모조리 분갱(紛更)해 버리고, 권복방(權福榜)에 급제한 별시과(別試科)도 선생께서 장시(掌試)했던 까닭으로 취소(取消)해 버렸으며, 심지어 묘소(墓所)를 파헤쳐 뼈를 부숴 바람에 날리려고 까지 하였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그 화(禍)를 당할 즈음에, 충의(忠義)로운 사노(使奴)가 있어, 몰래 관금(棺衾)을 갖추어 산속으로 들어가 깊이 매장(埋葬)하고는, 큰손자가 있는 해남(海南)의 배소(配所)로 도망가서, 매장(埋葬)한 곳을 알렸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두 번 죽음은 면하였다.
아 아! 그 참상(慘狀)을 무어라 말하리오. 그러나 2년 뒤인 병인(연산12 1506)년 중종대왕(中宗大王)의 거의반정(擧義反正)로, 천일(天日)이 다시 밝아 혼주(昏主)를 교동(喬桐 강화)으로 내치고, 억울하게 입은 죄를 소설(昭雪)하였는데, 선생에게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追贈)하고, 광남군(廣南君)은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세걸(世傑)은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추증하고, 수원(守元)을 좌승지(左承旨), 수형(守亨)은 도승지(都承旨), 수의(守義)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수정(守貞)은 도승지(都承旨), 종자 수공(從子守恭)은 도승지(都承旨), 자(滋)는 직제학(直提學)을 각각 추증하고, 구현문(九賢門)의 편액(扁額)을 하사(下賜)하고, 여러 손자(孫子)들과 사건에 연좌(連坐)된 많은 사람들도, 모두 사면(赦免)하는 은혜(恩惠)를 입었다.
아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던가?
배위(配位) 정경부인 양주조씨(貞敬夫人楊州趙氏)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근(瑾)의 따님인데, 사리(私利)에 달관한 식견(識見)과 앞날을 예견(豫見)하는 지려(志慮)가 있었다. 을묘(연산1 1495)년 7월 24일에 세상을 버렸고, 정묘년(세종29, 1447)에 나셨으니, 향년이 49세였다. 충주 불정면 탑동(忠州佛頂面塔洞)에 장사(葬事)를 지내고 선생께서 표석(表石)을 세우고 음기(陰記)를 지었는데 정묘(丁卯)년에 선생의 유해(遺骸)를 모셔다가 부인의 묘소 오른쪽에 장사(葬事)를 지내니 사람과 신령(神靈)이 모두 유감(有感)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갑자년(甲子年) 화(禍)를 당할 때 집에 보관(保管)하여 둔 많은 서첩(書牒)들이, 모두 소탕(掃蕩)되어 종이조각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 문헌(文獻)을 고증(考證)할 수가 없었다.
마침 선생의 여덟 손자(孫子)가운데, 탄수(灘叟)․숭덕(崇德)․동고(東皐)와 같은 3현(三賢)의 도덕(道德)과 공열(功烈)이 세상에 소중히 여김을 당하여, 진실로 조무(祖武)를 선양(宣揚)하여 무궁한 가르침을 전(傳)하였지만, 선생의 학력(學力)과 지도(志道)에 대한 사업을 고려할 바가 없고 보니, 평생(平生)의 행적을 새겨 묘비(墓碑) 세우는 일을 아직도 못하고 있었다. 후손들의 쌓인 한이 오죽했겠는가?
전자(前者)에 호남(湖南)의 언사(彦士) 병순보(秉巡甫 보는 공자와 군자의 중간 경칭)가 서울로 와서 그 친족(親族)인 강래(康來)․용옥(容玉)․휘재(徽載)․종원 제군(鍾元諸君)과 더불어 도서관(圖書館)의 도움을 꾀하여 병순보(秉巡甫)가 5개월 동안 관중(舘中)에 비장(秘藏)된 열성조(列聖朝)의 실록(實錄)을 모조리 열람(閱覽)하여, 선생의 유사(遺事)와 소차(疏箚)와 계의(啓議)와 경연(經筵)에서의 설화(說話)등의 글을 모아 편차(編次)를 만들고, 연보(年譜)와 행록(行錄)을 엮어 5부(五部)의 책자(冊子)를 갖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언(立言)할만한 장덕(長德 나이 많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글을 구하여 묘도(墓道)에 세우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럴만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웠던지, 내가 동당(同黨)의 후생(後生)으로서 대략이나마 어노(魚魯)를 분간할 수 있다 하여, 손수 명(銘)을 지으라 요구하기에 사양타 못하여, 삼가 그 뜻을 지키며 일을 마치고자 한다.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대가(大家)다운 명성(名聲)과 덕행(德行)으로 타고난 성품(性品)이 충효(忠孝)로운 데다, 대대로 시(詩)와 예(禮)를 물려받아 계묘년에 조고(祖考) 충희공(忠僖公)의 상고(喪故)를 만나고, 을유년에 또 조비(祖妣) 정경부인 노씨(貞敬夫人 盧氏)의 상고(喪故)를 당하여, 아버지 문경공(文景公)께서 슬픔에 지쳐 바짝 말라서, 거의 멸성(滅性)에 가까웠을 적에, 전후(前後) 6년간(六年間)을 좌우(左右)에서 받들어 도우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여묘(廬墓)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따라가 모시며, 차반(茶盤)을 돌보고 약을 맛보는데, 그 심혈(心血)을 다하였다. 그리고 문경공께서 병에 시달리어 영영 세상을 버리자, 거상중(居喪中)의 집례(執禮)에 있어 애경(哀敬)을 남김없이 다하여, 3년 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겨우 상(喪)을 마치자 모부인(母夫人)의 상고(喪故)를 당하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거상(居喪)때와 다름이 없이 하니, 진신(縉紳 지위가 높고 점잖은 벼슬아치)과 향당(鄕黨)들이 모두 그 효행(孝行)을 흠탄(欽嘆 아름다음을 탄복하여 칭찬함)하였다. 그리고 옥당(玉堂)에서는 뇌전(雷電)에 대하여 논변(論辯)하기를 ⌜아마도 재화(灾禍)가 그칠 날이 멀지 않다고 여깁니다. 무릇 재화(灾禍)가 있는 나라는 그 임금이 마음을 가다듬어 나라가 날로 다스려지고, 상서(祥瑞 복스럽고 길한 징조)가 많은 나라는 그 임금이 분수없이 호사하여 나라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견고(譴告)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아마도 하늘이 전하(殿下)를 인애(仁愛)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 옵건데 전하(殿下)께서는 화가 적다하여 두렵지 않게 여기지 마시고, 폐잔이 적다하여 제거(除去)하지 않겠다 여기지 마소서. 날로 정신(廷臣)들과 더불어 남김없이 강구하여, 상하(上下)가 서로 경계하며 덕을 닦고 선을 행하면, 천지(天地)가 절로 자리 잡히고 만물이 절로 자라서, 아름다운 징조가 절로 응해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경연(經筵)에서 춘추포폄(春秋褒貶)에 대한 이의와 왕패(王霸)에 대한 차이(差異)를 논사(論思)하고, 규간(規諫 사리를 말하여 간함)에 대한 의의(意義)를 문답(問答)했으며, 교연회(交年會 음력 12월 24일)에 궁중여악(宮中女樂)의 폐지(廢止)를 청하였다. 또 정원(政院)에서 유생(儒生)들을 구할 적에는 김경충(金敬忠)등 400여인이 요승원각(妖僧圓覺)을 배척하면서, 말이 임금의 비위에 거슬리자, 모두 옥에다 잡아 가두니, 선생께서 이르기를 ⌜저 의관(衣冠)차림 유생들이 설사 국가의 일을 알지 못하고, 오직 오도(吾道)를 보호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이라 여겨, 함부로 과격한 말을 한 것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직사(直士)들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이 성덕(聖德)의 미사(美事)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를 강론(講論)하면서 금탑(金塔)을 만들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 진소(陳秦)하기를 ⌜전조(前朝)의 폐풍(弊風)은 불교(佛敎)를 숭상한데 있었습니다. 개성부(開城府)에는 탑(塔)과 묘당(廟堂)의 터가 여각간(閭閣間)에 섞여 있었으니,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에서도 좋아하는 실례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정전(宣政殿)에서 임금이 유신(儒臣)들을 인견(引見)하시고 이르기를 ⌜전일(前日)의 강론(講論)은 모두 격언(格言)이라 듣기에 싫증이 나지를 않는다⌟고 하고, 대학(大學)을 강론하면서 ⌜혈구(絜矩)의 도(道)에 있어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니, 선생께서 아뢰기를 ⌜주상(主上)께서는 금지옥엽(金枝玉葉 임금의 집안과 자손)이 번성(繁盛)하시니, 자애(慈愛)로운 마음을 미루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그 자식을 보전하게 하여, 노노장장(老老長長 노인과 어른을 공경함을 이르는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한다면 계거의 도는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에 있어 무엇이 먼저냐⌟고 하니, 선생께서 이르기를 ⌜임금으로서의 도리는 참되고 올바른 마음으로 군자를 나누고, 소인(小人)을 물리치는 것으로서, 근본(根本)을 삼아야 한다⌟라고 하니, 임금이 술을 내려 주어 여러 신하들이 모두 취하였고, 임금도 주서(注書)에게 부축되어 나갔는데 밤은 이미 한 밤중이었다.
어느 날인가 정원(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지금 근사록(近思錄)과 전한서(前漢書)를 열람(閱覽)하고 있는데, 다만 성경현전(聖經賢傳)만을 알고 제자서(諸子書)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선덕(善德)을 분간할 수가 없다. 지금 열람(閱覽)하고 있는 글을 마치고 나서 노(老)․장(莊)․불(佛) 삼자(三子)의 글을 강론(講論)하고자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임금은 마땅히 성현(聖賢)의 글을 살펴서 고금(古今)을 통한 치란(治亂)의 업적을 상고할 뿐 장노(莊老)와 같은 열자(列子) 따위의 이단(異端)의 글은 열람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여깁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성현(聖賢)들의 글을 읽어서 그 옳은 것을 알고 이단(異端)들의 글을 읽어서 그른 것을 아는 것도 옳지 않겠는가⌟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이단(異端)을 전공(專攻)하면 해로울 따름이니라⌟하였고 이글을 풀이한 분(程子)은 이르기를 ⌜나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빠져 들어 간다⌟라고 하였으니 ⌜하필 이단의 글을 범람(泛覽)한 뒤라야 그 시비(是非)를 분간(分揀)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생께서는 전후(前後) 네 차례에 걸쳐서 예관(禮官)이 되었고, 세 차례에 걸쳐 풍헌관(風憲官)이 되어 나라를 위하여 논사(論思)하고 부재(不才 쓸모가 없는 사람)를 배척(排斥)하여 많은 소차(疏箚)를 올리니 조정(朝廷)이 숙연(肅然)해지고 소인(小人)들이 두려워하였다. 그 소차(疏箚)의 대략에 이르기를 ⌜신하(臣下)된 직분(職分)은 직도(直道)로서 임금을 섬기되 의(義)를 따를 뿐 무턱대고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닌데, 모두가 유유낙낙(唯唯諾諾)하며 영합(迎合)만을 힘쓰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전일(前日)에 더불어 의논하여 법을 만든 자(者) 이러한 대신(大臣)이요. 지금에도 더불어 의논(議論)하여 법(法)을 폐지한 자(者) 이러한 대신입니다. 한 사람의 대신으로서 전하(殿下)께서 법을 만들려고 하시면 따라서 “좋습니다”라고 하고, 전하(殿下)께서 법을 폐지(廢止)하려고 하시면 역시 따라서 “좋습니다”라고 하며, 한번도 가타부타하고 상제(相濟)한 적이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저런 재상(宰相)을 쓰시겠습니까. 신(臣)은 더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자지(慈旨 임금의 어머니 전교)를 가지고 지나침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신지요.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道理)는 오직 의리(義理)에 어긋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그 명령(命令)만을 따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모가 허물이 있거든 감정(感情)을 누르고 얼굴빛과 말을 부드럽게 하여 간(諫)해야 하며, 그 향당주려(鄕黨州閭)에 죄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숙간(熟諫)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이를 풀이하기를 ”숙간(熟諫)이란 매우 익숙하고 은근하게 간(諫)함을 이릅니다“라고 하였으니, 마치 생물(生物)이 성숙(成熟)해 가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왕(帝王)의 효도(孝道)는 대부(大夫)나 사서인(士庶人)의 효도(孝道)에 비할 수 없습니다. 일이 국가(國家)의 대계(大計)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대의(大義)로서 결단(決斷)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국가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고 오직 어버이의 명령(命令)을 따르는 것으로 효도를 삼는다면 효도(孝道)라고 이를 수가 없습니다. 방포원정(方袍圓頂 승려를 이르는 말)은 깊은 산속에 몸을 위탁(委託)하고 있고, 계액초방(桂掖椒房 궁성을 이르는 말)은 겹겹이 쌓인 속이라 깊고, 엄숙하여 감고(甘苦)와 우락(憂樂)이 마치 서로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곤외(梱外 궁성의 바깥)의 말도 깊숙한 궁전(宮殿)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때문에 바르지 못한 사람들은 요망스러운 말을 가지고 연줄을 대어 침투(浸透) 시키는 것이니, 이 요망(妖妄)스러운 말을 받아드린다면 조정(朝廷)의 정사(政事)를 망치게 됩니다. 그러나 자지(慈旨)를 지나침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제왕(帝王)의 효도(孝道)를 돌보지 않고 구차하게 자지(慈旨)를 쫓아 조정(朝廷)의 미법(美法)을 고쳐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올린 소차(疏箚)의 대략에 이르기를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수(隨 서로 잇대인다는 뜻)한 풍(風 손괘(巽卦)의 괘상)이 손(巽 순자와 입자의 뜻)이니, 군자(君子) 이(以 본을 삼는 다는 뜻)하야 명(命)을 신(申 거듭한다는 말)하여 사(事)를 행하느니라“라고 하였고, 풀이한 자가 이르기를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순케하여 명령을 내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히 하여 따른다는 것이니 중손(重巽)의 뜻이다. 군자(君子)는 손(巽)의 순(順)한 상(象)을 본받아 거듭 명령(命令)을 내어 정사(政事)를 행하되, 도리(道理)에 순종(順從)하면 민심(民心)이 합해져서 백성(百姓)들이 순종(順從)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법이라는 것은 인정(人情)을 인연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니, 이치에 순응(順應)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알맞고 영원히 행(行)할 수 있어 폐단이 없겠지만, 이치에 어긋나면 사람들의 성미(性味)에 거슬려 세상에 시행(施行)코자 한 들 가능(可能)하겠습니까? 지금 금승(禁僧)하는 명령을 시행(施行)한다면 도리에 어긋남이 없어 나라에 이로울게 다섯 가지가 있고, 금승(禁僧)하는 명령을 늦춘다면 도리에 어긋나서 나라에 해로울게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 이로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단(異端)의 그릇됨이 배척되고 오도(吾道)의 올바름이 보호(保護)되는 것이 한 가지 이로움이요. 금수(禽獸)와 같은 무리들을 감화(感化)시켜 인륜(人倫)의 가운데로 들게 하는 것이 두 가지 이로움이요. 도망하여 도적(盜賊)이 된 사람들을 잡아다가 농사(農事)에 힘쓰는 사람으로 삼게 되는 것이 세 가지 이로움이요. 하는 일 없이 손을 놀리는 무리들을 모아 창 자루를 잡는 군졸(軍卒)로 만들게 되는 것이 네 가지 이로움이요. 이미 만들어진 전법(典法)을 시행하여 만민(萬民)이 중히 여기는 것을 보이는 것이 다섯 가지 이로움입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해로운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사설(邪說)이 성해지고 정도(正道)가 쇠해질 것이 한 가지 해(害)로움이요. 교화(敎化)가 쇠해지고 풍속(風俗)이 문란(紊亂)해질 것이 두 가지 해로움이요. 농사를 짓는 자는 적고, 먹는 자가 많아지는 것이 세 가지 해로움이요. 정구(丁口)가 줄어서 군액(軍額)이 적어지는 것이 네 가지 해로움이요. 양법(良法)이 폐지되어 분갱(粉更)이 심해지는 것이 다섯 가지 해로움입니다. 다섯 가지 이로운 것을 따르면 나라가 다스려질 것이요. 다섯 가지 해(害)로운 것을 따르면 나라가 어지러울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다스려지기를 원하시나이까? 어지러운 것을 원하시나이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폐(廢 법을 폐함)할 바도 있으며, 흥(興 법을 세움)할 바도 있으매, 출입(出入 꾀를 내고 들이는 것)을 네 사[師 : 중(衆)]로 부터 우[虞 도(度)]하여 서언[庶言 중언(衆言)]이 동(同)커든 세역(細繹 자세히 상량함)하라” 하였습니다. 지금 이 법의 폐지를 대신들이 불가하다 말하고 대간(臺諫)이 불가하다 말하고,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도 항장(抗章)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서언(庶言)이 모의(謀議)를 하지 않고도 똑같습니다. 이 어찌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헤아릴 때가 아니겠습니까? 대신(大臣)은 전하(殿下)의 고굉(股肱)이오. 대간(臺諫)은 전하(殿下)의 이목(耳目)이오. 시종(侍從)은 전하(殿下)의 신하(臣下)입니다. 대신(大臣)이 말하여도 듣지 않으시고 대간(臺諫)이 말하여도 듣지 않으시고 시종(侍從)이 말하여도 듣지 않으시니, 전하(殿下)께서는 대신(大臣)과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을 버리시고, 누구와 더불어 다스리려고 하시나이까? 신(臣)은 언책(言責 언관)을 대죄[待罪 그 벼슬에 있는 것을 겸칭(謙稱)하는 말]하고서 말로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고 정성(情性)으로서 임금의 뜻을 돌이키기에 부족하오나, 다만 구구(區區)한 마음만은 곧 임금을 요순(堯舜)같은 임금이 되게 하기를 잊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신(臣)의 이 뜻을 받아들이시어 다시 부드러운 안색(顔色)으로 양전(兩殿)에게 간(諫)하여 주소서. 조용히 받들어 기른다면 어찌 아니 될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강(進講)할 적에 정자(程子)가 말한 “임금이 하루사이에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가까이 한 때가 많고 환관(宦官 내시)과 궁첩(宮妾)을 가까이 하는 때가 적으면 기질(氣質)을 함양(涵養)하고 덕성(德性)을 도치(陶治)할 수가 있다”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다시 아뢰기를 ⌜정자(程子)의 말씀은 “임금으로 하여금 언제나 어진 사대부(士大夫)들과 상접(相接)케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며,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여자(女子)와 소인(小人)은 가장 기르기가 어렵다. 가까이 하면 교만(驕慢)해지고 멀리하면 칭원(稱怨)을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이 몇 마디의 말을 잊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또 임금을 깨우치게 하려고 올리는 소차(疏箚)에 이르기를 ⌜신(臣)은 듣건대 ”목재(木材)가 먹줄을 맞으면 바로 잡혀지고 임금이 간언(諫言)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구언(求言)하기를 목마른 것 같이 하고,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물이 흐르듯이 하시면 참으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성세(盛世)가 될 것입니다. 이윤(伊尹)은 태갑(太甲)에게 고(告)하기를 “점점 극종(克終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하지 못 한다”하였고 위징(魏徵 당고조의 신하)은 십점(十漸)의 소(疏)를 올렸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선치자(善治者)는 많았지만 선종자(善終者)는 적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의 상도(常道)를 본받으시어 지성(至誠)을 멈추지 마시고, 끝마무리를 처음과 같이 삼가 하소서⌟라고 하였다. 또 방백(方伯 관찰사)의 책임(責任)을 논(論)하면서 ⌜백성들의 휴척(休戚 기쁜 일과 슬픈 일)과 수령(守令)의 현부(賢否)와 형옥(刑獄)의 결체(決滯)와 학교(學校)의 흥폐(興廢)가 모두 방백(方伯)의 한 몸에 달려 있는데, 어찌 사람답지 못한 사람에게 제수(除授)할 수가 있겠습니까?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인 한건(韓健), 정미수(鄭眉壽), 임광재(任光載 임사홍의 아들)같은 무리들은 서로 결탁하여 당(黨)을 만들고 법에 어긋난 일을 저질러 성덕(聖德)을 탄망(歎罔)하고 있습니다⌟ 하고 거듭 거듭 말씀하셨다. 그리고 태학생(太學生) 이목(李穆)과 이사균(李思鈞)의 구명(救命)을 청원(請願)하고, 윤필상(尹弼商)의 간년(奸侫)을 탄핵(彈劾)하고, 주계군 심원(朱溪君 深源 )의 원통함을 들추어 수용(收用)케 하였으며, 최부(崔溥)가 기서(記書 敬差官 각 도에 파견된 특명관)의 명(命)을 받고 분상(奔喪)하지 않은 것을 탄핵(彈劾)하였다.
예조(禮曹)를 맡아서는 방예(邦禮)의 의심난 점을 우아(優雅)하게 꾸미고, 낙원(樂院)을 관장(管掌)해서는 아악(雅樂)을 일으키고 음성(淫聲)을 제거하고, 선공감(繕工監)의 제조(提調)가 되어서는 재용(財用)의 박절(搏節)에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사도(四道)의 관찰사(觀察使)와, 삼남(三南)의 체찰사(體察使)와 관북(關北)의 순변사(巡邊使)가 되어서는 순이(循吏 규칙을 잘 지키는 관리)를 장려하고 탐묵(貪墨 욕심이 많고 마음이 검음)을 징계하고 민은(民隱 민고)을 구원하고 변방(邊防)을 단속하면서, 능재(能才)를 발휘(發揮)하고 청명(淸名)을 드러냈다.
성종(成宗)을 섬긴지 20년 동안 논도(論道 도를 논하여 밝힘)하고 헌체(獻替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림)하는데 있어 모두 심력(心力)을 다하였으며, 더더욱 사악(邪惡)을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지키고 어진이를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고 궁금(宮禁)을 엄숙히 하고 훈척(勳戚 훈공이 있는 임금의 친척)을 걷잡고 기강(紀綱)을 세우고 풍속(風俗)을 바로잡고, 도학(道學)을 밝혀서 요순(堯舜)같은 임금이 되게 하기를 자신(自身)의 임무(任務)로 삼았다. 그리고 전후(前後)하여 올린 수만 언(數萬言)의 장소(章疏)는 모두가 선생(先生)의 학문가운데에서 주출(做出)해 온 것으로서, 선생의 충의(忠義)와 지행(志行 의도와 행품)의 정조(情操)와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의 역량(力量)을 수 백년(數百年)이 지난 뒤에도 볼 수가 있다. 당시(當時)의 유종(儒宗) 김한훤(金寒暄 김굉필), 정일두(鄭一蠹 정여창), 유뇌계(兪雷溪 유호인), 조매계(曺梅溪 조위), 홍함허(洪涵虛 홍귀달)와 같은 제현(諸賢)들과, 모두 도의(道義)로서 교분(交分)을 맺고 서로 추중(推重)하며, 군임(群壬 임(壬)은 사(邪)와 같음)들의 측목(側目 증오와 질투)의 대상이 된지가 오래더니 불행(不幸)하게도 성종(成宗)께서 승하(昇遐)하고 혼주(昏主)가 나라 일을 맡게 되자, 폐비(廢妃)의 일로 원독(怨毒 몹시 큰 원한)이 심림(深林)보다도 깊어 술이 조금만 지나쳐도 매얼(媒蘖 죄를 만들어 모함하여 해침)하고 구흔(搆釁 트집을 잡아 죄에 빠트림)하였으며, 흉도(凶徒)와 간당(奸黨)들이 따라서 돌을 던지니 합문(闔門 집안전체)이 화(禍)를 만나 결단을 모면한 자가 아주 적었다
천도(天道)가 순환(循環)하여 곧 바로 신원설치(伸寃雪恥 원통한 일을 풀어 버리고 설욕함)하고 보니 어질고 착한 후예(後裔)들이 구름처럼 일어나서, 전후(前後) 300여년(三百餘年)이 지난 지금은 그 수효(數爻)가 한 없이 많을 뿐 만 아니라, 병순(秉巡)같은 많은 분들이 거의 잊혀지려는 시기(時機)에 마음과 힘을 돋우어 단란(斷爛 끊어지고 문드러짐)하여진 나머지를 수습(收拾)하여 이 글을 만들어서 천양(闡揚)하기를 도모하니, 매우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 비록 학문(學問)은 없지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바가 있는 때문에, 참월(僭越)됨을 헤아리지 않고 위와 같이 삼가 글을 지어 끝맺고 명(銘)을 흉내 낸다.
그 옛날 우리 성종(成宗)은
참으로 어진임금으로서,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다스릴제,
현량(賢良)들을 골라서 뽑았기로,
때 마침 힘을 모아 도운 분은,
훌륭한 광양군(廣陽君)이 계셨다네.
단심(丹心)을 열어 임금에게 부어넣고,
힘을 다하여 님의 미덕(美德) 드날리니,
치도(治道)는 더할 나위 없이 융성(隆盛)했고,
덕풍(德風)은 나날이 빛이 났네.
난윤(亂倫)과 음성(淫聲)남김없이 혁파(革罷)하고,
상례(常禮)와 정악(正樂) 바로 잡아 일으켰네.
오로지 한 곳으로 변함이 없이,
정성을 다하여 심학(心學)을 닦아,
그 충성(忠誠) 해와 달을 꿰뚫었고,
그 의리(義理) 태산(泰山)보다 무거웠네.
춘추(春秋)를 예로 들어 잘잘못을 논변(論辯)하고,
왕패(王霸)의 길을 따져 사리를 구명(究明)했네.
가차없이 이단(異端)을 배척(排斥)하고,
재빠르게 위사(僞邪)를 막아냈네.
이윤(伊尹)의 뜻을 닮았던가,
비간(比干)의 지조 짝을 했네.
운수(運數)란 원래 성쇠(盛衰)가 있기에,
모진 사화(士禍)를 전가(轉嫁)당했네.
무씨(武氏 폐비윤씨를 말함)는 비록 가버렸지만,
단주(丹朱 나쁜 행위를 한 연산을 말함)는 오히려 남아 있어,
이 자리가 참으로 애석하기에,
신자(臣子)들의 논란(論難)이 있었던 것을,
성명(聖名)께서 이미 아셨건만,
어찌하여 청언(聽言)하지 아니했던가?
저 하주(夏桀)같은 어리석은 임금은,
하늘과 땅을 속이고 놀려대면서,
사방(四方)에 시위를 벌려 기선(機先)을 잡아놓고,
밤낮으로 주색(酒色)에 묻혀 제멋대로 원망을 하며,
충신(忠臣)들은 모조리 삼키고 물어뜯고,
창생(蒼生)들을 짓밟고 뭉개 버리니
공께서도 나아 가실 때가 아니었던가?
흉악한 쇠사슬에 걸려들어서,
한 가문(家門)이 모조리 형(刑)을 당하니
지나는 길손들도 단장(斷腸)의 눈물 흘렸네.
억울한 영령(英靈)들 하늘에 호소하니,
무심 찮은 하느님 너그러이 받아서
잔악하고 모진 임금 물리쳐 버렸네.
중종(中宗) 임금 크게 천명(天命)을 받으시니,
영롱한 태양(太陽) 중천(中天)에 이르렀네.
저 무도한 연산(燕山) 교동(喬桐)에다 내치고,
모든 억울함 설치(雪恥)해 주셨는데,
서곡(黍谷 억울하게 하옥당했다는 말)에 화창한 봄바람 불고.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장사(葬事)를 내리니,
융숭한 은사(恩賜) 혁혁히 빛나도다.
충주(忠州)땅 어느 골짝 언덕배기는,
산수(山水)의 경치가 몹시도 아름다운데,
높고도 웅장한 가성(佳城 어진사람의 묘소)을 쌓고,
公의 의백(毅魄) 편안히 모셔졌건만
오직 위대한 업적 빗돌에 새길 일을,
어찌하여 오랜 세월 늦추어졌던가?
후손(後孫)들 모두가 탄식을 하며,
뜻을 모아 비석(碑石)을 세우니
해묵은 묘도(墓道)에 빛이 새롭고,
메마른 재목(梓木)엔 가지가 돋아나네.
까막까치 화표(華表 묘소 입구에 세우는 문)에 날아드니,
참으로 탄성(嘆聲)이 절로 나오네.
사람들이여 만약 믿지를 못할 양이면
바라노니 명시(銘詩)를 보아 주구려.
기묘년(己卯年 1939) 중양절(重陽節)
후학 통정대부 행승정원비서감승 겸 홍문관시강 영월 엄주완 근찬
後學 通政大夫 行承政院秘書監丞 兼 弘文館侍講 寧越 嚴柱完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