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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 (벨직신앙고백18항)
기독론: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벨직신앙고백18항)
근래에 필요에 따라 삼위일체론을 생각했고, 그리고 성경에 대하여 몇 주간 생각해왔었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생각하는 중 마지막으로 정경론을 생각해 보려고 했었습니다만, 너무 딱딱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유보하기로 했습니다. 정경론이란 어떤 근거에서 성경 66권이 각각 기독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그리고 어떤 것 때문에 다른 책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는 분야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도 딱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이나 좀 더 공부할 것이지, 평신도들이 정경론을 알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정경론에 대하여서도 언제든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기독론이라고 불리우는 부분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벨직 신앙고백 18항과 19항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기독론이란 다른 말로 그리스론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이었다면 기독론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나온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생각했었고, 논의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독론이라는 말은 사실 기독논쟁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초대교회와 변증가들의 시대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여서 삼위일체 논쟁에 이어서 치열하게 논쟁하게 되었던 주제입니다. 이 논의는 지금도 학자들 중심으로 해서 좀 젊잖은 형태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위일체 교리도 다시 연구되고 있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기독론 역시도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간단한 이론이 아닙니다. 그만큼 간단하게 이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연구해 왔다는 것도 우리가 생각해야할 대목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한 대로 아무리 오늘날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 같이 보여도 그것은 이미 옛 사람들에 의해서 제시되고 논의되고 그리고 거부되고 또는 수용되었던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처음 발견한 것인 양, 자기의 생각을 계시 받은 것처럼 절대시하고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공박하려고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계시 받은 것 같아도, 하나님의 계시란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동의하고 공유하는 것이지 혼자만이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공동체 교회의 것입니다.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혼자서 옳다고 하는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단이 됩니다.
이단이란 힘 있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압력을 행사하여 소수의 옳은 이론을 축출하여서 생겨난 것이라는 해괴한 이론들이 요즈음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단으로 단죄될 만큼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보편 교회에서 단죄된 사람들이 이단입니다. 단죄하고 좇아내는 일이 볼성사나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좋게 보지 않지만, 저는 그것을 자연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논의하고 토론하면서 연구할 것으로 제시하고, 교회가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한 제시를 하면서 독선에 빠져 싸움을 건다면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대상이 있고 그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대상을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올바른 교의를 엉뚱하게 변형시킨다면 그것은 금지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교회사적으로 기독논쟁은 삼위일체 논쟁에 따라 왔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논쟁이 기독논쟁을 불러 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논쟁의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성자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와 똑 같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결론은 당연히 다음의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성자가 성부와 똑 같은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똑 같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가 있었는가 하는 물음을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면, 신성과 인성은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가? 즉 두 개의 성품이 각각 인격을 가져서 두 인격을 가지는가? 아니면 어떻게 연합하여서 하나의 인격만 가지는가? 그리고 하나의 인격만 가진다면 그것은 신성과 인성이 뒤 섞여버린 반신반인과 같은 상태가 되었는가? 아니면, 신성과 인성이 뒤섞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은 상태로 한 인격체로 통일을 이루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했는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입니다.
초기의 기독론 논쟁은 불미스런 일도 있었습니다. 감정이 너무 지나쳐서 무가치한 음모가 있어서 이단으로 정죄하고 축출하도록 만들기도 했고, 또 심지어 폭력까지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논쟁은 신앙적으로 유익을 주지 못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서 오늘날 믿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표준적인 교리가 정리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윤리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 못된 과정을 통해서 정리된 교리라고 하면서 반감을 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싸우고 폭력까지 행하는 일이 있었어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어디 윤리인가라고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은 수치와 혼란을 통하여 진리의 맑은 대기 속으로 교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런 문제를 우리가 다 다룰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리문답 중심으로 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18항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당신께서 정하신 때에 당신의 독생자이며 또 영원한 아들을 종의 형상을 취하여(빌2:7)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그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선조들에게 주셨던 약속을 성취하셨음을 고백합니다. 그 분은 참으로 연약함을 지닌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성신의 능력으로 축복받은 동정녀 마리아의 배에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은 참된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을 때에 육체만 아니라, 참된 사람의 영혼까지도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이 육체와 마찬가지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육체와 영혼을 다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체와 영혼을 다 가지셔야만 했습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선 다시 기억할 것은 삼위일체 논쟁의 결론대로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먼저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그분은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을 때에 육체만 아니라, 참된 사람의 영혼까지도 취하셨습니다’라는 대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 이런 정리가 나왔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사람의 육체만 취하셨지, 영혼은 취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아폴리나리우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라면 죄와 무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이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영과 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죄의 좌소 즉 죄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의 영과 혼과 육신을 취하셨다면 그리스도는 죄의 좌소를 취하셨다는 말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는 죄와 무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와 상관 없는 분이라는 것이 틀림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는 인간의 영은 취하지 않으신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로고스는 인간의 몸을 입을 때에 인간의 영은 빼고 혼과 육체만 취하셨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가 죄가 없다는 것을 변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또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용의하였던 것입니다. 로고스가 인간의 육체와 혼만을 입었다면, 인간의 혼과 육체를 입은 로고스가 되니 육체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인격은 신성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인격은 신성 하나라고 말하기가 너무나 좋습니다. 즉 단일인격을 말하기에 너무나 좋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그는 로고스가 사람의 혼과 육체를 입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혼과 육체는 결국 사람의 인격 없는 인간성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고로스가 자리한다면, 그리스도의 인격은 신성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일인격을 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다는 말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아폴리나리우스가 이런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러한 주장을 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가 죄가 없다는 것을 변호하고 그의 인격의 단일성을 주장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영을 제거한 인간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영이란 종교적 정신적인 기능을 하는 부분인데, 이것이 없는 인간은 이성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 인간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란 고기덩어리에 불과한 바보이든지, 짐승이나 똑 같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혼이 있으니 먹으려고 하고, 마시려고 하고, 생명 활동을 위하여 기본적인 욕구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이 없는 인간이란 이러한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고기덩어리와 같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로고스로서 이런 고리덩어리와 같은 것을 취하셨을까요? 그래서 신성이 인간의 육체를 지배하면서 사는 그러한 존재로 살았을까요?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분은 죄만 없을 뿐, 우리와 똑 같은 연약함을 체휼한 분이라고 했습니다(히4:15). 연약함을 체휼했다면 인간적 육체와 혼만 그렇게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인간으로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만약 인간적인 육체와 혼만 고통을 당했다면 그것이 실제로 무슨 체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성경만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세 사람의 갑바도기아 사람과 포이티얼스의 힐라리라는 사람이 반대했었습니다. 그들은 만약 그리스도가 죄인 전체 곧 전인을 구원하려면 인간성의 일부만 아니라 전체를 취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부만 취하였다면 영과 혼과 육을 포함한 온전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반론을 했습니다. 오늘 고백서 끝부분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이 육체와 마찬가지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육체와 영혼을 다 구원하기 위하여 육체와 영혼을 다 가지셔야만 했습니다”라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논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고백 18항은 이어서 그리스도가 육체를 취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아예 부인하는 재세례파의 이단설을 반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세례파는 그리스도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육체를 취하셨다는 사실을 아예 부인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세례파란 어떤 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재세례파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국가 교회를 거부하여서 거기서 받은 세례와 어릴 때 받은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에게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종교개혁의 좌파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아주 경건하고 바르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광신도들처럼 되어서 뮌스터에서는 재 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후에는 자기들도 박해를 받고 수만 명이 죽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성서나 성례전보다 심령에 비추는 성령의 내적 빛을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직접적인 영적인 계시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옛날의 영지주의와 요즘 교회 안에 있는 신비주의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후에 침례교, 메노나이트파, 슈벵크펠트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영지주의에서는 신이신 그리스도가 사람의 육체를 취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거룩한 신성이 추한 인성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산 것과 같은 것은 하나의 환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향을 가현설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재세례파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초대 교부들은 “성육신되어 존경받을 만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신성하나만 인정하고 싶은 견해입니다. 또 몹쉐스티아의 데오돌(Theodore of Mopsuestia)은 그리스도 안에서 로고스가 본질적으로 내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내주만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질적으로 로고스가 내주한 것이 아니라 감화를 미쳤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서 믿고 사는 것과 같이 로고스가 그 정신으로 감화를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있었지만 다 논해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신앙고백과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우리들과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육신을 따라서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으며,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고, 육신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사로서 유대인에게서 나셨습니다(롬9:5). 이런 표현들은 그가 온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육신을 따라서 나셨다는 것은 육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대조해서 죄 아래 있는 이 세상 첫 창조의 질서 아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즉 완전한 인간으로 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또한 완전한 사람이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완전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죄에 오염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알 수 없다고 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의 구미에 맞는 대로 변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머리로 다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논리에 신비를 다 맞추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 보는 것은 개인의 일로 개인의 자유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막을 자유는 성령님만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든지, 교회가 성경을 근거로 해서 토의되어서 받아들이고 있는 마땅한 교리들을 함부로 부정해버린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런 신앙을 가진 교회 공동체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소신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우리 교회에서 그런 사람을 축출할 것입니다. 진리는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교회의 것입니다.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하여 논의할 것이 있다면, 그 논의는 교회가 해 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제시하고 논의하고 연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해하고 결정하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을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어떤 인간의 아이디어도 이미 이전에 다 나타났던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개인에게 특별한 새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또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면, 이전에 비슷한 생각이 교회에서 어떻게 논의 되었던 지를 잘 살펴보면서 옳고 그름을 배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