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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국(東國)의 남산에 명산이 있어서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의 거암(巨岩)이 있고, 그 바위 한가운데 샘이 있으며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들이 헤엄치며 놀았다.그래서 산명을금정산(金井山)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梵魚寺)라 한다.”
범어사는 창건 이후 고려와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지 그 면모를 유지해 오다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의 병화를 만나 모두 소실되어 10여 년 동안 거의 폐허나 다름이 없었는데 선조 35년(1602년)에 관(觀) 선사가 중건하였으나 얼마 있지 않아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광해군 5년(1613)에 묘전(妙全)화상과 그 문도들이 대웅전, 용화전,관음전, 나한전, 일주문, 심검당(현 원주실)을 건립하였다.또한 1684년에는 해민(海敏) 화상이 비로전을, 1700년에는 명학 화상이 팔상전, 종루, 불이문, 보제루, 천왕문을 건립하였다. 이후에도 사세의 확장에 따라 크고 작은 개수 및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범어사에는 일주문(보물 제 1461호), 삼층석탑(보물 제 250호), 대웅전(보물 제 434호),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526호), 금장요집경(보물 제1525호), 주범망경(보물 제894-2호), 불조삼경(보물 제1224-2호),삼국유사(보물 제419-3호)보물 8점과 당간지주(부산광역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 석등(제16호), 백의관음도(제53호),금고(제5호),사천왕도(제51호),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제67호), 대웅전 삼장보살도(제68호), 대웅전 제석신중도 (제69호), 목조관음보살좌상(제70호),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제71호), 목조미륵불좌상(제72호), 미륵전석조연화대좌하대석(제73호), 팔상독성나한전(제63호)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산문
범어사에는 별도의 산문이 없었으나 2012년 사찰과 속세의 경계를 나타내는 산문을 경동아파트 뒤쪽 지장암 입구에 건립하여 그 위상을 높혔다. 이전 까지는 일주문인 조계문이 산문 역활을 하였으나 조계문이 대웅전 등과 너무 가까워 주변의 소음 등이 수행 분위기를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산문의 건립으로 한결 나아졌다고 볼 수 있다.
비석군이 나온다. 평소 잘 알지 못하면 방문해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곳이지만 이곳에는 범어사에서 주석하신 낭백스님의 환 설화가 담겨있는 "순상국 조공 불망비"를 볼 수 있다.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에는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데 자신은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으며,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가 열 것이며,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하리라 라는 것이었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흘러 낭백 스님의 그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 순상국(巡相國)이라는 중앙의 높은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 온다는 전갈을 받고 범어사 스님들은 언제나 지방관리가 와도 그러했듯이 주지스님 이하 모든 대중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부복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이 사람은 반드시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그리고 사찰을 자세히 돌아본 뒤 수 십 년 동안 봉해둔 낭백 스님의 방 앞에 와서는 기어이 문을 열라하여 봉함을 뜯고 열어보니, 개문자시폐문인(開門者是閉門人)이란 스님의 친필유묵이 몇 십년의 세월 속에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지 스님의 차대접을 받으면서 사찰의 어려움을 묻고 36종의 부역을 혁파해 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그 즉시 동래부사에게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 증거로써 지금 어산교에서500∼600m 정도를 아래로 내려가면 옛날에 사용하던 길옆에 몇 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嚴革祛寺弊永世不忘壇)'이라는 비가 그것이다.
순상국 조공은 스스로 낭백 스님의 후신이라고 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분은 낭백 스님의 원력을 성취시킨 사람이므로 낭백 스님의 환생임에 틀림없다.
세심교, 사찰에 가면 항상 사찰 경내 또는 법당에 이르기 전 다리를 만나게 된다. 각 사찰마다 나름대로의 다리 이름을 붙여 표기하지만 공통적인 이름은 세심교이다. 마음을 씻는 교량이라는 의미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 속세의 번뇌와 모든 알음알이를 깨끗이 씻는다는 의미이다
범어사 세심교는 어산교라고 하며 주위의 노송이 너무 아름다워 범어사 삼기팔경중 "어산노송"이라하여 8경중의 하나이다.
범어3기는 기이한 바위를 말하는데 원효암의 '원효석대(원효암 뒤편 원효대사가 참선한 곳으로 아름답고 매우 기이한 암석)' 계명암의 '자웅석계 (계명암 동편의 암닭과 수탉의 모습을 한 바위인데 일제 시대 때 일본인들이 지네 모양의 일본을 쪼아 먹는 형태라 훼손 시켰음)' 금정산 정상에 위치한 바위에 있는 금샘을 이르는 '암상금정 (범어사 창건 설화에 전해지는 바위위에서 나는 우물 금샘)'을 말한다.
8경은 계절별로 각 암자와 금정산의 아름다운 정취를 표현한 것으로 1) 어산노송(어산교 주변의 울창한 노송의 아름다운 경치) 2) 대성은수 (대성암에서 내려다 본 자연석 바위 밑으로 흐르는 맑고 은은한 물소리) 3) 청련야우 (청련암 주위의 울창한 대나무 숲에 내리는 빗소리의 정겨운 운치) 4) 내원모종 (내원암에서 저녁예불을 기다리며 큰절에서 치는 범종소리 속의 선경) 5) 의상망해 (의상스님이 선정에 들으셨던 석대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 6) 계명추월 ( 계명암에서 바라보는 가을 달의 운치) 7) 금강만풍 ( 금강암 주변을 감싸고 있는 가을 하늘아래 붉게 물든 단풍의 아름다움) 8)고당귀운 (고당봉에서 흰구름이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선경)을 말한다.
조선 후기 사원에는 각종 계(契)가 조직되어, 사원 경제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범어사에도 다양한 계가 조직되어 각종 불사(佛事)의 경비를 충당하여 보사(補寺)하였다. 이 가운데 갑계(甲契)가 가장 활발하였는데, 전답과 현금 등을 헌납하여 계금을 조성하였다. 갑계는 동갑내기 승려들로 구성되는 것이 원칙으로, 범어사 갑계는 자(子자축인묘진사)·오(午오미신유술해)년마다 조직하여 6년차의 동갑 승려들로 이루어졌다. 갑계의 자금 운영은 소임(所任)들이 맡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빌려 주고, 기일이 되면 원금과 함께 이자를 회수하여 재회전하는 방식이었다.
[범어사 갑계의 보사비]
현재 범어사 경내에는 1860년(철종 11) 세운 갑자갑원보사비(甲子甲員補寺碑)부터 1947년 세운 갑오갑보사단비(甲午甲補寺壇碑)·무자갑보사단비(戊子甲補寺壇碑)까지 자연석에 새긴 총 14기의 비가 남아 있다. 이들 보사비는 계원들이 모은 재화를 헌납한 일이나 사찰이나 전각을 중수하거나 불경을 인출(印出)하는 등의 불사를 마치고 세운 기념물이다.
비석군과 바위에 새겨진 보시자들의 이름- 범어사 창건이나 중창, 중건 등 불사에 많은 보시를 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있다.
비석 뒷면에 새긴 글들은 범어사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석제수조 물을 저장하기 위해 돌로 만들어진 큰통이다 특이한 것은 배와같은 모양을 하고있다는 점에서 반야용선을 떠올리게 한다 범어사 지세가 행주형 배모양을 하고 있다 대략 고려말 조선초에 만들었다고 전한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도량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 깃발을 다는 나무, 철 등으로 만들어진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 옆에서 지탱해 주는 한 쌍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범어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찰에는 두 기둥만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 말기 또는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기단(基檀)부와 당간의 받침돌(간석 竿石)이 모두 사라지고 양쪽의 두 기둥(지주)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하마비(下馬碑)는 경의의 표시로 가마나 말에서 내려 걷도록 하는 비석으로 태종 13년(1413년)에 처음으로 궁궐, 종묘 앞에 일정한 간격으로 표목을 세운 것이 시초라 한다. 하마비에는 보통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단순히 하마(下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의미이다.
일주문은 주 법당에 도착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산문 중 첫 번째 문으로 일직선상의 기둥 위에 맞배지붕을 한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 줄로 되어 있어 일주문이라 하며 이는 수행자의 일념(일심)을 상징한다. 우리가 사는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구분 짓는 곳으로서 문밖을 속계(사바세계) 문 안을 진계(부처님 세계)라하며 일주문을넘어서는 그 순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여의고 깨달음을 향한 일념(일심)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진리를 구하는 마음으로 이 문을 들어서야 하며 이 문 앞에서는 합장 반배를 한다.
일주문은기둥 4개가 한 줄로 늘어선 3간의 구조 (一柱三間)인데 이는 법화경의 회삼기일 사상 즉 중생의 바탕과 능력에 따라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로 나누어진 불교의 여러 교법을 오직 성불을 지향하는 일불승(一佛乘)의 길로 향하게끔 한다는 사상적 의미가 담겨있다.
범어사 일주문은1614년 묘전화상이 처음으로 창건하였다. 숙종44년 1718년 명흡(明洽)스님의 주관으로 높이 1.45M의 배흘림 석주로 개조하였으며 1781년 이 석주 위에 짧은 두리나무 기둥을 세우고 다포식의공포위에겹처마맞배지붕을 얹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으로 중건하였다.
세 개의 문 위에는 각각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가운데 ‘ 조계문(曹溪門)’이라는 작은 편액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존자 달마 대사 육조 혜능 대사의 법맥을 이은 조계종 사찰임을 나타내는 일주문의 명패이다. 즉 범어사 일주문의 이름은 '조계문'인 것이다.
오른쪽의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편액은 범어사가 선종의 으뜸 사찰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범어사는 선을 중시하는 한국의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창건되었다.
범어사의 창건설화 중 또 다른 얘기는, 신라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꿈에 나타난 신인(神人)의 계시로 금정산 금샘 바위(金井)아래서 7일7야 동안 일심으로 화엄신중을 독송하여 왜군을 물리치게 되니 이 산이 영험있는 곳임을 알고 서기678년(문무왕18년)에 창건한 호국도량이며 한국불교의 선풍(禪風)을 진작한 선찰대본산이다.
범어사 조계문(일주문)에 걸려있는 좌우의 두 편액은조선후기 ‘성균관대사성’‘전라도 관찰사’ ‘규장각 직제학’ ‘홍문관 제학’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한말 의정부 참정과 탁지부 대신을 지냈고대한제국 수립 후 ‘법부대신’ ‘탁지부 대신’을 지낸 해사 김성근 선생(1835~1919)의 필적인데 그는 서재필 박사의 외숙이기도 하다.
편액의 관지를 살펴보면 오른편에 “壬子小春下浣” 이라 쓰여 있는데 소춘은 음력 시월이며 하완은 하순이니 임자년(1912년) 시월 하순을 뜻한다. 1912년 10월 15일 조선 총독부로부터 “선찰대본산”이란 종지를 인가 받았음을 뒷받침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왼편 “七十八翁海鹵堂”은 해로당이 78세 때 관서했음을 말한다. 해사 김성근 선생은 국권을 침탈 당한 1910년 이전에는 海士로 이후에는 해로당으로 낙관하였는데 여기서 “로”는 소금鹵(로)의 속자로 “염전” “척박한 땅” “포로의 땅”을 뜻하는 글자인데 선생은 빼앗긴 땅의 아픔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칠층석탑은 원래 대웅전 옆 현재의 지장전 자리에 있었으나 지장전이 불타고 현재의 자리에 지장전을 건립할 때인
1984년 성보박물관 앞 광장으로 옮겼다가 2012년 1월 29일 문화광장 조성을 위해 범어사 칠층석탑을 이전 해체하는 중 사리를 비롯한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이날 발견된 복장물은 금은 제사리기 및 사리 2과와 옥기류 금속류 자수품 경전 오곡 목제품 등 8종 54점이다. 특히 사리기 내함은 금으로 만들어졌다. 함께 발견된 조성기와 경전은 습기로 인해 훼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범어사 칠층석탑은 조성 당시 인도 달라파라 스님이 1938년4월 15일 한국에 오며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기록돼있다.
성보박물관
범어사의 창건에서 부터 중창과 중건을 거치면서 범어사 내에 산재된 불교 문화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종합적으로 연구·전시하기 위하여 1999년 12월 20일 박물관 건립을 시작하여 2003년 3월 26일 개관하였다.
이곳에는 범어사의 역사와 주제 전시실-책판·서적- 및 불교 문화 공예품, 동산 대종사 유품, 영정등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전시되고 있으며 지하 1층에는 수장고, 학예 연구실, 기계실이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높은 1,000여 종의 불교 서적과 책판류를 소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고전적만 660종 가량을 보유하고 있다. 이중 『삼국유사(三國遺事)』(보물 제 419-3호), 『불조삼경(佛祖三經)』(보물 제1224-2호), 『금강요집경(金藏要集經)』(보물 제 1525호),『주범망경(注梵網經)』(보물 제 894-2호)과 같은 보물과 『대전화상주심경(大顚和尙注心經)』, 『함허어록(涵虛語錄)』,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등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도 진열 전시되어 있다.
또한 17~19세기에 제작된 불상 20여 구와 의상대사를 비롯한 영정 4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불교 공예와 불교 미술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 공예 미술품으로는 사찰 의식에 주로 사용되었던 금고(金鼓)와 요발(鐃鈸), 연(輦) 등의 의식 법구(儀式法具), 향로(香爐)와 향완(香椀) 및 유제 대발(鍮製大鉢) 등의 공양 법구(供養法具), 불전 내의 불단(佛壇)에 안치되었던 원패(願牌)와 소통(疏筒) 및 불감(佛龕),사찰 외부를 장엄하는 기능을 지닌 기와류, 인통(印筒)과 등잔(燈盞) 등이 있다.
천왕문은 일반적으로 사찰의 두 번째 문이며,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곳으로 구도자가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녔던 일심이 수많은 역경과 유혹 등에 의해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수미산 정상까지 포기하지 말고 오를 수 있도록 격려하며 선을 정려하고 악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 정상인 도리천의 제석천왕을 섬기며 아래로는 팔부 중을 거느리고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원래는 고대 인도의 토속신 왕들 이었으나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불법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숙종 25년 1699년에 처음 건립하였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64년 다시 재건하였으며 1989년 전면 보수하였으나2010년 12월15일 방화로 전소되었다. 2012년 3월 23일 복원불사 회향 및 사천왕상 봉안법회를 열었는데 현재의 모습은1964년 재건 당시의 설계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 천왕문 주련.
제석천왕혜감명(帝釋天王慧鑑明) 제석천왕의 지혜는 밝게 빛나니
사주인사일념지(四州人事一念知) 세상사를 한 생각에 알도다
애민중생여적자(哀愍衆生如赤子) 중생을 친자식처럼 가엾게 여기니
시고아금공경례(是故我今恭敬禮) 그러므로 나 이제 공손히 예를 올립니다.
동방 지국천왕은 불법으로써 중생을 보살피고 국토를 지키므로 지물은 비파를 들고 있으며
남방 증장천왕은 자신의 덕망으로 중생에게 지혜를 증장시키고 번뇌를 제거하므로 지물은 칼을 들고 있고
서방 광목천왕은 눈을 크게 뜨고 중생들의 선,악 행위를 살피어 선행은 여위주로 보상을 하고 악행은 용으로 다스린다고 한다.
북방 다문천왕은 도량을 지키면서 항상 법문을 들으며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므로 열반(니르바나)의 상징인 보탑을 들고 있다.
그러므로 천왕문을 통과 할 때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마음의 삼독심을 버릴 수 있도록 계율과 고요한 마음,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다짐을 하여야 한다.
주 법당을 도달하기 전 통과해야 할 사찰의 마지막 문 불이문은해탈문, 안양문, 자하문, 진여문이라고도한다.
불이不
신광불매만고휘유 입차문내막존지해(神光不昧萬古揮猷 入此門內幕存知解):
싱그러운 광명이 만고에 빛나니 이 문안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두지마라.
不二
란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선과 악 세간과 출세간 등법계의 실상이 둘이 아니며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관점을 뜻한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관련되어 있으니 존재하는 모든 법은 실체가 없는 제법무아를 의미하기도 한다.
숙종 20년(1694)에 자수自修장로가 창건했으며, 2012년 보제루普濟樓를 대대적으로 중창할 때 철거한 후 다시 지었다.
가운데 어칸 좌우 기둥에는 서산대사가 지어신 선가귀감에 나오는 구절을 동산東山대종사가 직접 쓰신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萬古輝猷’와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신광(신령스러운 빛 : 부처님의 가르침)의 오묘한 뜻을 알기 위해서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분별심(세속의 알음알이)을 내지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산사山寺에 들어서는 마음 자세를 지적한 것이다. 이문을 통과 함으로써 명실공히 사파를 떠나 정토애로 통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보제普濟란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처럼 보제루는 많은 대중들을 위한 법회용 건물로 사용된다. 흔히 이러한 중정누각中庭樓閣은 대웅전大雄殿 앞마당 입구의 축대에 걸쳐서 벽체가 없는 2층 별서식別墅式으로 짓지만, 이후로는 법회를 여는 강당으로 사용하면서 벽체를 친 경우가 많다. 이 건물도 숙종 26년(1700) 자수自修장로가 별서식 누각으로 창건했으나 순조 12년(1812) 중건 때 단층으로 바뀌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벽체가 쳐지고 일본식으로 일부 변개되었다. 2012년에 전통법식으로 복구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중창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한편 범어사 보제루는보살계, 사미계, 비구계 등을 수계하는금강계단(金剛戒檀)으로 사용된다.
종루鐘樓는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고 교화하기 위해서 소리와 관련된 불전사물佛殿四物(지옥과 천상의 중생을 위한 범종梵鐘, 축생을 위한 법고法鼓, 물고기를 위한 목어木魚, 날짐승을 위한 운판雲版)을 봉안하는 전각이다. 숙종26년(1700) 명학明學대사가보제루를 지으면서 종루를 대웅전大雄殿 앞마당 왼편으로 옮겨 지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현재 위치로 옮겨서 지금에 이른다.
범종은 조석 예불과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울리는 것으로, 지옥과 천상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며 새벽에는 28번(마하가섭존자 부터 중국의 보리 달마대사까지 28대 조사, 또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28천을 상징) 저녁에는 33번 (욕계2천의 도리천 정상 33천을상징)을친다.
★ 범종의 연뢰와연곽: 범종의 표면에 9개의 연뢰4 방향의 연곽은 사생 구계를 상징한다.
사생(四生) :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의 탄생방법
구계(九界)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연각, 보살의 세계.
상부의 용뉴는 불계(부처님의 세계)를 상징.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으로 북소리가 축생들의 마음을 울려 일심을 깨우치게 하는 것으로 북의 가죽은 암소와 수소의 가죽을 각기 양면에 부착하여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
목어는 물에 사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또한 수행자들로 하여금 물고기처럼 늘 깨어있는 상태에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된다는 의미도 가진다.
운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조류나 허공을 떠도는 영혼들을 천도하기 위하여 치며 청동으로 된 판을 구름 모양으로 만들어 운판이라고 한다. 선종의 사찰에서는 재당(齋堂)이나 부엌에 달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기구로도 사용된다.
영주선제 (瀛州禪齊) 옛 부터금정산은 산세가 좋아 신선들이 살던 곳으로 그 경치와 절경을 자랑해 왔다. 그래서 금정산을 영주(瀛州)라 했으며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영주선제(瀛州禪齊)도 신선사상과 불교의 만남을 의미하며 대문을 들어서면 청풍당 또는 금어선원(金魚禪院)이라고 하는 선원이 있으며 스님들이 마음을 깨닫고자 정진하는 수행처로옛부터 훌륭한 선사들이 거쳐 갔으며 경허 스님과 동산 스님께서 오랫동안 주석하시면 선풍을 진작 시킨 곳이다.
★ 문 손잡이가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화 토끼와 거북이의 내용에서처럼 선 수행은
끊임없이 정진함을 의미하기 위해서이다.
미륵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 세상에 출현할 부처님인 미륵불(彌勒佛)(미륵은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모신 전각으로서 미륵불은 56억7천만년 후 용화수(龍華樹)나무 아래에서 성불하여 중생들을 널리 구제할 부처이다. 그러므로미륵전은용화전(龍華殿), 자씨전(慈氏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협시보살로서법화림보살과대묘상보살(김제 금산사) 또는 묘향보살과법륜보살을 모시기도 하지만 범어사에는 아미타수인을 한 목조미륵불상 한 분만 모셨으며 후불탱화는 아미타삼존불도이다.
범어사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부처님은 다른 전각의 부처님과는 달리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미륵전 밑을 파보니 미륵부처님께서 일본을 등지고 앉아 있어 그대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의상義湘대사의 사찰 창건 때부터 있었던 건물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숙종 9년(1683) 해민(海敏)대사가 중창했고,경종 원년(1721) 진열進悅스님 등이 중수 했다.
목조미륵불상과 석조연화좌대하대석은각가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72호,73호로 지정 되어있다.
비로전
비로전은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법신불(法身佛), 즉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비로자나는 태양처럼 널리 비추는 분이라는 뜻)을 모신 전각이다. 본전일 경우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 하며 이때는 좌우 협시불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며, 비로전, 화엄전으로불릴경우 좌,우 협시보살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다.
수인은 지권인(智券印)이며 이는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생(生)과 사(死), 어리석음(迷)과 깨달음(悟)이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한다.
후불 탱화는 화엄경변상도이다.
★ 지권인(智券印) 은좌우 두 손의 엄지를 손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 왼손의 검지를 펴서 바른손으로 감싸쥐고, 바른손의 엄지와 왼손의 검지 끝을 서로 맞대는 손모양으로 이때 바른손은 불계, 왼손은 중생계를 상징한다. 즉, 중생의 무명과 번뇌를 부처님의 지혜로써 감싸는 형국으로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요 미혹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의 중도,연기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비로자나삼존불상은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71호이다.
심검당(尋劍堂) 검(劍)은 지혜(慧)를 상징하는 말이며 심검당은 지혜를 찾는 집이란 뜻으로 원래는 초심납자들의 선방이었으나 사찰 규모가 커지면서 선방의 기능은 금어선원으로 옮기고 지금은 원주실로 사용하고 있다.
뒤쪽으로 들어가면 승가대학 강원과 범종각이 있다.
석등石燈은 흔히 불전佛殿 앞마당에 등불을 안치하는 일종의 공양구供養具이다. 불교에서 등불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지혜를 상징하며, 이를 밝히는 것은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겼으므로 일찍부터 석등을 제작했다. 석등은 조명시설로서뿐 아니라 신앙심을 일으키는 조형물로서 다양한 형식이 있다. 범어사 석등은 연꽃잎을 새긴 상, 하대석 위에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을 올린 팔각당八角堂형식으로 삼층석탑과 비슷한 통일신라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에 있는 네개의 창은 사성제의 진리를 팔각은 팔정도를 의미한다.
본래 미륵전 앞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심검당 앞의 종루를 옮길 때 현 위치로 옮겨졌다.
부산 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 16호 이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보물 제 250호) 석탑石塔은 불사리佛舍利 신앙을 바탕으로 발생한 불교 특유의 조형물로서 흔히 대웅전大雄殿 앞마당의 자오선상에 일탑一塔 또는 쌍탑雙塔으로 배치된다. 사리는 부처님의 열반 후 다비茶毘의 과정에서 나온 구슬 모양의 유골로서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도 하며, 이를 봉안하는 탑도 불전 내의 존상尊像처럼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초기 불교에서는 신앙대상의 중심이었으나 불상이 조성되면서 신앙의 대상이 불상으로 바뀌었다.
최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8개의 탑을 근본 8탑이라고 하며 사리가 들어있었던 병을 병탑, 남은 재를 봉안한 회탑을 포함하여 근본 십탑이라 부른다.
범어사 삼층석탑은 높이가 4M에이르는 비교적 규모가 작고,옥개석과 받침, 면석과 우주 등이 간소화되었고 이중 기단 위에 돌로 만든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基壇, 밑받침)은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을 조각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석에 꽉 들어차게 안상 한 구씩을 조각한 수법이 특이하다. 탑 중간의 탑신부는1층 탑신에 비해 2층부터 매우 작게 줄었으며, 옥개석은 평평하고 얇아 신라 하대의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탑의 위쪽 부분인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이슬받이)이 거꾸로 놓여 있고,후대에 보충한 보주(寶珠)만이 있을 뿐 다른 부분은 없어졌다기단부 아래의 석단과 주위 난간은 일제강점기에 보수 할 때 설치 하였으나, 2010년 4월23일 해체 복원 완료하였으며,새로 봉안한 사리함(29cm*29cm* 13.5cm의 도자기)에는 동래 법륜사선래 화상이 미얀마 양곤시 수도원에 봉안된 것을 모시고 온 부처님 진신사리6과와 삼층석탑 역사자료, 대중명단, 탑다라니, 반야심경, 신묘장구대다라니, 금강경,법화경 등 각종 경전과 오색천, 오색실, 오보(금, 은, 수정, 유리,산호), 오향(침향, 백단향, 정향, 울금향, 용뇌향), 오약,오곡 등이 봉안되었다
괘불대(掛佛臺) 선원과 미륵전 앞에 위치한 괘불대는사찰의 큰 마당에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걸어 놓는 예배용 걸개 그림(괘불)을 걸어두는 것으로서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범어사에 소장되어 있는 괘불은 광무9년(1905)의 작품으로 화면 중앙에 입상형의아미타본존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이 있고 보살 뒤편에 가섭과아난존자가 묘사되어 있다.
모양은 당간 지주와 유사하나 일반적으로 당간 지주는 사찰의 입구, 즉 일주문 밖에 위치하며 괘불대는 사찰의 법당 앞 마당에 위치한다.
대웅전 보물434호
대웅전은 크나큰 영웅(大雄)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 즉 법력으로 이 세상을 밝힌 참 영웅이 계신 전각 이란 뜻이다. 대웅이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칭한 말로서 인도어 마하비라에서 유래하였다.
범어사 대웅전은 광해군 6년(1614)에 건립하고 1713년(숙종 39년)에 다시 건축 한것으로간박하고 힘찬 다포식가구와 소박한 맞배지붕의 양식으로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어서 목조건축 양식 발전을 연구하는데 크게 주목되는 예 이며, 보물 제434호로 지정 되어있는 중요한 건축 문화재이다.
대웅전 4기둥의 주련은금강경오가해 서문에 나오는 글로서 동산 스님께서 쓰시고 무진장 스님께서 판각 하신 작품이다.
마하대법왕(摩河大法王): 진리의 왕이신 부처님은
무단역무진(무단역무진): 길고 짧은것도 없으시고
본래비주백(본래비주백): 또 붉다거나 희다거나 그러하지도 않으시되
수처현청황(수처현청황): 때에 따라 푸르게도 누르게도 나타 나신다
마하대법왕(摩訶大法王) 거룩하고 위대하신 법왕이시여
무단역무장(無短亦無長)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으며
본래비조백(本來非皂白) 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고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 모든 곳에 인연 따라 청 황으로 나타나신다
주련의 뜻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의진리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항상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대웅전 좌우에는 대웅전을 협시하는 관음전과 지장전이 배열 되어 있는 독특한 가람 배치의 구도로 되어 있다.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은 가운데 하나였으나 후대에 좌우에 하나씩 더 두어 3중 계단으로 하였다.
대웅전 석가여래삼존불좌상(보물 제1526호, 1661년)
상단에는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왼쪽에는 미륵보살을 오른쪽에는 제화갈라보살을협시불로 모신 수기 삼존불의 형상으로 과거, 현재,미래불을 한자리에 모신 것이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우견편단에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그리고 그 좌우로 8보살을 배치하였고 본존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2구의 분신불을 비롯 10대 제자와 기타 신중들을, 본존 무릎아래 오른쪽에 아난과 범천을 왼쪽에는 가섭존자와제석천를 그렸으며, 좌 우에 사천왕을 표현하였다.
후불 석가영산회상도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 되어있다.
범어사대웅전 제석신중탱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9호)
대웅전안 오른쪽 벽에 봉안되어 있는 신중탱화는 비단바탕에 맨 위의 상단에 마혜수라천을 중앙 왼쪽에 일천자, 인드라(제석천왕), 오른쪽에 월천자,브라흐만(대범천)이 모셔져 있으며, 그 주위로 무장을 한 천병 즉 팔부중을 배치하였으며, 신중탱화에는마혜수라천 외 53명이 등장한다.
신중탱화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 되었으며, 1882년 3월에 조성 되었다.
범어사 대웅전 삼장보살탱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제68호)
왼쪽 벽에 봉안되어 있는 삼장탱화는 중앙에 천장보살, 왼쪽에 지지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이 배치되어 있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탱화이며, 임진왜란 직전에 등장한 불화이다.
중앙의 천장보살 무릎아래 협시인 진주보살, 대진주보살이 합장하고 서 있으며, 일월천상을 비롯한 천부중들과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왼쪽의 지지보살 역시 무릎아래 용수보살, 다라니보살이 합장하고 서 있으며, 견뢰신중과 금강신중을 비롯한 여러 권속들이 배열되어 있다.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협시로도명존자와무독귀왕이 무릎 아래에서 장하고 있으며, 시왕(十王) 및 명부중 사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삼장탱화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 본존불 후불탱화, 신중탱화,삼장탱화는 모두 1882년 3월에 조성된 것이다.
♣ 범어사 대웅전 상단에는 특이하게도 업경대2개가 있다.업경대(業 鏡臺)란 지옥의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는 거울로 여기에 비추어 보 면 죽은이가 생전에 지었던 선악의 행적이 그대로 나타난다
화광대(火光臺)란 낮에는 물그릇을 두어 불전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을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또는 불전에 올릴
공양물을 잠시 내려놓는 장소로, 그리고 밤에는 전기가 없었던 시절에 관솔불을 피워 법당앞을 밝히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범어사에는 대웅전 앞 좌우에 2개가 잘 보존되어 있다.
금고 (대웅전 앞)금고(金鼓)란 금구(金口) 또는 반자(飯子)라고도 하며, 절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이나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데 두드리는 도구로서 쇠북이라는 뜻이다.
관음전
대웅전과 함께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중창하였으나 지금의 건물은 양식으로 보아 뒤에 크게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주심포식으로 공포를 짜올린맞배지붕이다.
관음전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며, 원통전(圓通殿) 또는 보타전[補陀殿:보타는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곳인 보타낙가(補陀洛迦)의 줄인 말]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관세음은 세상의 소리를 듣고 관조하는 분이라는 뜻)은 고난에 빠진 중생들이 일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을 구제한다고 한다.
법화경(法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서는 관세음보살은 고통 받는 온갖 중생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33가지의 갖가지 모습을 나투어서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한다.관음은 관세음의 줄인 말이며,관자재(觀自在)라고도 한다.관자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한다는 뜻이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계시다. 왼손에는 연꽃, 오른손에는 감로수병을들고 계신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을 표시하고,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다는 뜻을, 그 봉우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관세음보살은 보통 6관음(성, 천수천안, 마두, 십일면, 준제,여의륜)을 일컫는다. 그 중 성관음이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보문시현
관세음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가지 형태를 나태낸다. 이를 보문시현이라 하며 33응신이 있다고 한다.
목조관음보살좌상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70호)
백의관음보살도
관음전의 후불탱화는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월관음도이나 범어사 관음전의 후불탱화는 청색치마에 백의를 걸친 백의관음도로 대웅전의 3개의 탱화와 같이 1882년 3월에 조성 봉안된 것으로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목조 관음 보살좌상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70호 이다.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53호
관음전 안에 모셔진 목조관음보살좌상(1772)의 뒷벽에 있는 백의관음도는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모습을 잘 표현한 후불화이다. 현재 전각 내에 모신 것은 2002년에 만들어진 모사본이며, 진본은 현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각형의 화면에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원안에 보관(寶冠: 보살이 쓰는 모자))에서부터 양 어깨를 감싸고 발 아래로 곡선을 이루면서 몇 가닥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흰 천의(天衣)를 입은 모습과 함께 거신광(擧身光:몸 전체에서 드러나는 신령한 빛)과 다양한 대상들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관음보살의 왼쪽 발 언저리에 선재동자가 합장하고 있으며, 반대편에는 남녀가 관음보살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고려 말과 조선 전기에 나타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종합화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지장전
지장전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육도중생 모두를 해탈케 할 때 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원을 세우고 지옥에서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시는 지장보살을 모신 곳으로,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주불로 좌우에 도명존자와무독귀왕을협시로 봉안하고 그 좌우에 명부 시왕상을 안치하고 시왕상 앞에 시봉을 드는 동자상을 배치하였다.
옛날에는 현 독성전 앞에 명부전으로 대웅전을 마주보고 있었으나 1988년에 소실되고, 1990년에 7층 석탑이 있던 지금의 자리에 새롭게 지었다.
지옥계의 심판관인 시왕 중 일곱 왕들에게는 7일째 되는 날마다 붙 잡혀가서 혹독한 심문을 당하고(그래서 이때 잘 봐달라고 비는 후 손들이 기원한다, 7*7이면 49일이니 49재라 한다), 여덟 번째 왕에 게는 100일 만에 가고, 아홉 번째 왕에게는 일 년이 지나면 가고, 마지막 열 번째 오도전륜왕에게는3년이 지나야 잡혀가서 죄를 심 판 받고 죄질에 따라서 육도 윤회를 하게 된다.
지장보살은 비구의 모습이거나 머리에 두건을 쓰고 육환장이나보주를 들고 있다.
☞ 육환장(六環丈)은 보살이 두타행을 닦을 때, 독사나 독충 따위를 쫓거나, 민가를 돌며 탁발을 할 때 소리를 내어 그 뜻을 전하거 나, 산길을 가다가 노인을 만났을 때 부축하는데 등에 사용 하 였다. 여섯 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데 육도를 나타내며 육도중 생을 모두 제도하려는 보살의 서원이 담겨 있다.
지장전의 주련은
지장대성위신력(地 藏 大 聖 威 神 力): 지장보살님의 위신력을 보니
항하사겁설난진(恒 河 沙 刦 設 難 盡): 항하사 겁 설하여도 다 말할 수 없네
견문첨례일념간(見 聞 瞻 禮 一 念 間): 보고 듣고 우러러 예배하기 일념 중에
이익인천무량사(利 益 人 天 無 量 事): 인간 천상에서 그 이익 한량 없어라
라고 쓰여 있다. (지장보살 본원경 중에서)
산령각
산령각은 불교가 전래의 토속신앙과 습합(褶合)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당우이다. 가람터와 산악을 수호하는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팔상독성나한전
응진전 이라고도 하는 나한전은1613년 묘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석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불로 모셨으며 삼존불 모두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1905년에 후불탱화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좌상을 한 석가모니부처님의 직제자 가운데 정범을 지키기로 맹서한 16나한을 안치 하였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뜻은 성자이다. 아라한은 공양을 받을 자격을 갖추고 진리로 사람들을 충분히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들로 부처님에게는 16명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어 이들을 16나한이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5백 나한을 모신 곳도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열반한 후 가섭존자가 부처님 생존 시의 설법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을 때(1차 결집) 모인 비구가 5백명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팔상 독성 나한전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성전
독성전은1905년 학암스님이 나한전과 팔상전이 별도의 건물이던 것을 중앙에 독성전을 중창하여 팔상.독성.나한전이 한 건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불멸 후에 미륵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까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남인도 천태산에서 선정을 닦고 있는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이다.
나반존자는16나한중의 빈두로발라로 여겨지며 빈두로존자라고불리워 지기도 한다.
독성이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홀로 깨달았다고 하여 독성이라 하며, 나반존자님은 남인도 천축산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 잎이 지는 것, 봄에 꽃이 피는 것, 가을에 열매가 맺는 것 등 변함없이 운행하는 우주의 법칙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며, 삼명(三明)의 능력을 지녔다. 삼명은 전생을 꿰뚫어 보는 숙명명(宿明明), 미래를 보는 천안명(天眼明), 현재의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누진명(漏盡明)이다.
건물의 중앙문을 아치형으로 꾸며 양기둥과 아치형의 통나무 사이를 화려한 꽃문양으로 장식하였으며 아랫목 좌,우에 나무로 조각한 청신사, 청신녀가 꽃이 있는 화반을 두 팔로 떠 받쳐 공양하는 모습이 있으며 입가에는 엷은 미소까지 표현되어 있다. ( 경판을 머리에 이고 있는 동자, 동녀상이라고 표현된 기록도 있음)
팔상전
석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불로 모셨으며, 삼존불 모두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석가여래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와 비슷하며 광무 9년(1905)에 조성한 것이다. 팔상전에 봉안하는후불탱화는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주요 사건에 따라 8단계로 압축하여 묘사한 일대기인 팔상도를 모시는데, 이는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부터 유행하였다고 함. 좌우에 각기 4폭씩 부처님 일대기를 그린 팔상성도를 배치 하였다. 팔상도는1978년에 제작 되었다.
후불탱화 화면 하단 화기에 의하면, 대한광무 5년(1905)에 제작된 작품으로, 선명한 적색과 밝은 군청이 눈에 띈다. 화면 중앙에는 파상형의 화려한 광배를 구비한 항마촉지인의 석가상이 앉아있고, 그 왼쪽(좌 협시)에는 두 손을 모아 정병을 쥔 백의관음상이 시립하고, 반대편에는 금강저를 든 보살이 있으며, 그 약간 위쪽으로 문수·보현보살을 비롯하여 보살 6분이 좌우측에 배치되어 있어, 팔대보살 도상을 나타내고 있다. 팔대보살상은 고려 13∼14세기 아미타팔대보살도에 보이는 도상으로, 조선전기에도 지속적으로 보이다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석가설법도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단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각각 2명씩 배치되어 있고, 화면 상단으로 갈수록 아난과가섭을 포함한 10대 제자와 8대금강상을 비롯한 공양상 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팔상성도의 명칭과 뜻
1. 도솔래의상: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옴
2. 비람강생상: 석가모니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남
3. 사문유관상 : 4문을 나가 노, 병, 사, 수행자를 만남
4. 유성출가상 : 성벽을 넘어 고행의 길로 떠남
5. 설산수도상 : 설산에서 수도 후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깨우침
6. 수하항마상: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악마들을 항복받음
7. 녹원전법상 : 녹야원에서 최초 법문을 하심
8. 쌍림열반상 :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심
1. 도솔래의상
도상적으로는 조선후기 1631년 정두경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책을 바탕으로 1673년 승려 자습이 남양주 불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발간한 《석씨원류응화사적釋氏源流應化事蹟》 참조함
구담(瞿曇,고타마)이 귀성(貴姓)이라는 내용과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도솔천에서 육아(六牙)의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꿈을 꾸는 마야부인에게 탁태(托胎)하는 장면.
마야부인이 꿈 꾼 내용을 정반왕과 함께바라문에게 물어보는 장면 등이 묘사됨
2. 비람강생상
◈ 마야 부인이 궁 전을 떠나서 친 정으로 가던 도 중 룸비니 동산 에서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고서 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아기를 낳는 장면.
◈ 태어난 아기가 한 쪽 손은 하늘 을, 한 쪽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외치는 장면.
◈ 제천(諸天)이 기뻐하면서 갖가지 보물을 공양하는 모습.
◈ 아홉 마리의 용이 오색의 감로수로 태자의 몸을 씻겨주고 천신들 이 내려와 차례로 예배 드리며 이 세상 가장 존귀한 분의 탄생을 축복하는 장면.
◈ 왕궁으로 돌아오는 장면(정반왕은 태자의 이름을 ‘고타마싯달타’ 라고 지었다)
◈ 아지타 성인의 예언 장면.-왕자님은 훗날 성장하셔서 전 인도를 통일하여 덕으로써 다스리는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걸어 시면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이 될 것 입니다 라고 예언 하였다.
3.사문유관상
◈ 태자가 동문으로 나가 노인의 늙은 모습을 보고 명상하는 장면.
◈ 남문으로 나가 병자를 보고 노고 (老苦)를 느끼는 장면.
◈ 서문으로 나가 장례 행렬을 보고 죽음의 무상을 절 감하는 장면.
◈ 북문으로 나가 수행하는 사람 (출가한 중=수도자) 출가 사문(沙門)으로부터 무상법문(無常法門)을 듣는 장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본 태자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
4. 유성출가상
* 태자궁(太子宮)에서 부인 야소다라와 갓난 아들 라훌라 및 시녀들이 취하여 잠자고 있는 장면
* 사천왕과 여러 천신들의 영접을 받느라 합장한 장면
* 성 넘기 직전 마부 찬타카가 항명(抗命)에 사천왕이 놀라는장면
* 29세 때인 2월 초 8일에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칸타카라는 말을 타고 궁성을 뛰어넘는 때 사천왕이 말굽을 바치는 장면
* 찬다카가 돌아와 왕과 왕비에게 옷을 바치면서 보고하는 장면
5. 설산수도상
* 태자가 금도로 삭발하고 제석천이 옷을 바치는 것과 찬다카가 슬피 울면서 환궁하는 장면
* 니련하(泥蓮河)에서 몸을 씻은 후 사문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천지가 감동하는 장면
* 정반왕이교진여(憍陳如) 등 5명을 보내 돌아가기를 간청하는 장면과 궁에서 식량을 보내나 받지 아니하고 돌려보내는 장면
* 설산(雪山)에 들어가 까치가 머리에 집을 틀 정도로 6년간 수행한 후 네란자 강에 내려가 지치고 때묻은 몸을 씻고 목녀수자타가 바치는 우유를 마시고 건강을 회복하여 보리의 정각을 이루는 장면. 이때 같이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는 태자의 곁을 떠남
6. 수하항마상
◈ 마왕이 세 딸을 시켜 여래에게 갖은 유혹을 다하는 장면과 여래가 미간의 백호에서 빛을 비추어 파순궁을 밝히는 장면
◈ 마왕 파순이 코끼리를 타고 병사들을 인솔하면서 여래에게 오고 있는 장면과 마왕이 80억 무리를 모아 보리수 아래의 부처님을 몰아내려는 장면. 이때 앞에 있는 병을 넘어뜨려 보라 하였으나 부처님의 도력 때문에 병을 넘어뜨릴 수 없었다.
◈ 마왕의 항복을 받고 성도하는 장면.
◈ 항마촉지인: 마왕 파순의 군대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마왕 파순이 그것을 누가 증명할 수 있는지 말해보라 하였을 때 수행자 고타마는 오른손을 내밀어 땅을 가리키며 ‘이 땅은 능히 일 체의 물건을 내어 차별이 없이 평등한 행을 하도다 원컨대 지금 진실을 말하라’하니 ‘가장 큰 대장부시여 내 당신을 증명하리다 제가 아나이다’ 라고 지신이 크게 외치며 이를 증명 하였다. 이때의 손 모습이 바로 항마촉지인이다
7. 녹원전법상
◈ 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 는 모습(중도와 사성 제 등을 설하여 연기의 이치를가르치셨 다) - 3보의 구성.
◈ 코살라국의수잣타 장자가 땅에 금을 깔아 주고 산 땅에 기원정사를 지었다.
◈ 흙장난을 하던 아이들이 흙 쌀을 공양 올리는 장면. 부처님 입멸 후 공양 올리는 아이가 8만4천 사리탑을 건립한 아쇼카왕 임.
◈ 석가께서 설법하시는 모습(영산회상).
◈ 야사가 친구들과 같이 법문을 듣고 제자가 됨 - 60명의 아라한 탄생, 야사를 찾으러 온 야사의 부모님이 제자가 됨- 최초의 재가 불자.
◈ 가섭3형제가 1,000명의 제자들과 함께 귀의하여 제자가 됨.
◈ 마가다국빔비사라왕이 기증한 벨구바나 동산의 죽림정사- 최초의 절.
8. 쌍림열반상
◈ 쿠시나가라의두 그루의 사라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불과 비통해하는 제자들과 대중들의 장면
◈ 금관(金棺) 속의 부처님이 입관에 뒤늦게 도착한 가섭이 비통해 하자 두발을 밖으로 내어 보이는 장면.
◈ 다비(茶毘)하여 사리가 나오자 사리를 차지하려는 8대왕들의 다툼과 이를 중재하는 도로나 바라문의 장면 등이 묘사됨
◈ 출가 수행승은 여래의 장례 일에 상관하지 말아라, 재가 신도들이 맡아서 진행해 줄 것이다.
◈장례는 쿠쉬나가라의말라족에 의하여 치러어 졌다. 점화만은 마하 가섭이 했다.
◈ 근본10탑 : 사리를 분배받은8개국이 새운 사리탑, 분배를 중재한 드르오나(바라문)이 받아간 사리가 들었던 병(병탑), 늦게 도착한 핍팔리바나의모랴족이 남은 재를 가지고 감(회탑).
*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근본 팔탑의 사리를 꺼내어 인도 전역에 팔만 사천 개의 사리탑을 건립.
설법전
범어사 설법전은 매 주 일요일 범어사포교사회가 주관하는 일요법회를 봉행하는 곳이며 각종 행사 및 재를 올리는 법당이다. 내부에는 주존불을 아미타 부처님과 좌우협시보살로 관세음 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부도전
부도전은 스님들이 돌아가신 후 스님들의 사리나 유물을 안치하는 곳으로, 전면 3기(관조당, 명진당 덕산 대선사, 무진장 대종사), 둘째 면 11기, 셋째 면 11기 후면에 9기 총 34기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화엄전
화엄전은 원래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전각이지만 범어사은 별도 비로전이 있으며 화엄전은 현재 무비 큰 스님의 처소로 사용되고 있다.
휴휴정사 입구의 금강역사상 –나라연금강과 밀적금강
휴휴정사는 마음에 조그만 한 그 어떤 것도 두지 말고 편안하게 쉬고 쉬어라는 뜻에서 지어진 말이다.
이곳은 1982년 종신 수도원을 개원하여 9명의 스님이 수행 정진했다. 1983년 이 종신수도원을 휴휴정사라 이름하고 공부하는 스님들이 최근까지 사용하여 오다가 지금은 사찰문화체험(templestay)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산스님
불교정화운동의 발단은 36년간 일본식민지에서 일본불교계의 제도에 순응한 역사에서 비롯된다. 당시 조선불교계가 대처승이라는 일본불교 승단의 제도를 수용하면서, 1945년 8월15일 해방이후에도 한국불교는 심각한 정체성의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라는 정화유시 발표이후 대처승과 선학원의 선불교를 중심에 둔 순수 비구승(선승)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불교계 정화라는 종교적·정치적 사건으로 전개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려 8차례나 유서를 발표하게 됨으로써, 불교 종단 내적인 문제로 시작된 정화운동이 이승만 대통령의 개입으로 정치화된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의 정화유시는 불교정화운동을 촉발했다. 또한 정화운동의 향방을 가늠하는 계기가 됐고, 특히 불교정화운동이 본래 의도와 주체성을 모두 상실하고 세속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치운동으로 변절됐다는 점이다. 불교정화운동 당시 정화운동의 상징적인 대표가 동산 스님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동산의 삶과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동산이야말로 일제강점기 때 한국불교의 선승이자 민족족주의자였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동산 스님은 이승만 대통령의 개입이후, 종단 정화운동에 실질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선불교 선승으로 되돌아가 비정치적인 수행승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전념하기도 했다.
동산이 65세였던 1954년 선학원에는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의 선승들이 집결했고,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해 하동산 종정의 이름으로 정화선언문을 선포했다. 당시 동산이 적극 정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아주 격화되기도 했다. 어쨌든 1955년 8월 12일 한국불교계 정화운동은 종막을 고했다.
1955년 8월 28일 뚝섬 봉은사, 안암동 개운사 접수를 시작으로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등 3대 사찰과 전국 주요 사찰 및 각도의 종무원을 모두 접수함으로써, 그 재산관리권을 장악했다. 다만 범어사는 1913년 3월 15일 동산이 출가한 곳이기도 해 대화를 통해 합법적으로 비구승측인 동산이 주지가 됐다. 1955년 범어사 주지로 임명된 동산은 종정을 사임했다. 범어사 조실로 복구하면서 금어선원의 수좌들을 지도 했다. 이후 1956년 두 번째 조계종 종정직을 사임하고 범어사를 떠나 고려시대 요세가 법화결사를 주창했던 만덕산 백련사에 거주처를 옮겨 불교 정화운동의 종결을 위해 용맹정진했다.
동산은 1958년 8월 10일 대한불교조계종 13회 중앙종회에서 세 번째 종정(69세)으로 추대된다. 조계종단은 동산의 정치적 힘이 필요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동산을 가장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을해년인 1959년 70세인 동산은 범어사의 조실로 주석하면서 종정의 소임을 당했다.
불교정화운동에 있어 이승만 대통령의 정화유시가 불교계 분열을 시키는 결정적인 변수이었다. 하지만 대처승 측 종단 간부들이 조금 양보했고, 당시 비구승 측에서 이승만 정부의 성격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했더라면 종단의 문제로 불교가 분열되지 않았을 것이고, 건강한 민족불교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라고 저자 진관 스님은 밝히고 있다.
동산의 정화운동은 화합보다 갈등의 방향으로 전개됐다는 점과 이승만 정권과 유착관계로 말미암아 정화운동의 순수성이 정치화되면서 왜곡됐다는 점 그리고 비구승과 대처승의 양측은 환부역조로 대응해 용납의 미덕이 없었다는 점은 불교정화운동의 한계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산은 해방이후 불교계의 새로운 종단을 구성하고자 했던 정화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주도해 오늘날 한국불교의 기반을 구축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특히 그는 한국불교 통합종단 이전의 조계종 종정에 추대돼 고려시대 선종의 정통인 조계종 법맥을 계승했고,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역사적 연원을 확립했다고도 할 수 있다
금강계단, 대웅전주련, 불이문주련, 동산스님 친필
조선후기 사원경제는 兩亂을 거친 후에도 계속된 억압에 의해
거의 존폐의 지경까지 이를 정도로 참혹하게 피폐해져 갔다.5)당시의 승려들은 관아나 향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해 승려생활을감내하기 어려워 환속해 버리거나 깊은 산중으로 은둔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각종 잡역을 면제받기 위해 노력한다거나새로운 방도를 모색하는 활동을 하였다.6)즉, 승려들이 체납과 공납의 의무뿐만 아니라 토목공사 및 무기제조․採銀․屯田 경영 등 육체적인 노동력의 제공을 해야 하는 공역, 군역 등에도 동원되었지만,7) 또 한편으로는 제지·짚신삼기·누룩빚기 등의 수공예에 종사하면서 사유재산을 소유하게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승려들에의한 사원경제의 자구적인 활동도 생겨났는데 상업활동과 私有전답 조성, 각종 계의 조직 및 운영, 그리고 이를 통한 보사 활동이었다.8) 특히 수공예 등에 종사한 승려들 중 축적된 생산 기술을 통해잉여물을 창출하고 이를 통한 자산 증식 및 私田을 경영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소속 사찰의 보사를 위해 뜻을 모아 계를 조직한 후 獻金・獻畓하거나 불사를 거행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존속했던 사찰에서는 열악한 사원경제 속에서도 수많은 불사가 행해졌는데 그 이면에는 신도들의 시주에 의한 불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소속 사찰의 승려들의 보사 활동에 의해 진행된 불사였다. 조선후기 사찰계는 신앙활동을 위한 계와 보사 활동을 위한계로 구분된다. 현재까지 사찰계는 갑계를 비롯하여 念佛契, 佛糧契, 燈燭契, 門徒契, 廳契, 지장계 등 모두 25종232건이 파악되어지고 있다.9) 그중 보사 활동의 대표적인 사찰계이자 가장많이 결성된 계가 갑계이다. 사찰계로서의 갑계는 그 발생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머리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명대사갑회문이 시초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조선중기부터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10) 즉, 사명대사의 갑회문에서는 다섯 가지행복을 설하며 동료 승려들에게 갑회를 통회 은혜를 갚고 인연을 돈독히 할 것을 서원하고 있다. 본래 사찰에서의 갑계는 일찍부터 성립된 민간에서의 갑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계가 이익 추구를 했던 것처럼갑계 또한 계원간의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하기 위한 집단으로조직화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본고에서의 갑계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조선후기 사찰에 거주하는 동갑 또는 비슷한9) 韓相吉, 2006, 『앞의 책』, 55~67쪽10) 『사명대사집』 권6 잡문에 수록된 사명대사가 20세를 전후한 시기에 쓴 것으로보이는 甲會文을 여기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금 減劫에 태어나 포대기 속을 면하지 못하고 일찍 죽는 사람이 절반이나되는데 우리는 20 여 년을 살았으니 이것이 그 첫째의 행복이다. 우리는 공부를 이루지 못했는데 이런 蒼黃한 때를 당해서도 마침내 이 몸을 잃지 않았으니 이것이그 둘째의 행복이다. 영원한 과거 세상으로부터 지금까지 온갖 세계로 돌아다니다가 천만다행으로 이 바른 법을 만났으니 이것이 그 셋째의 행복이다. 불붙은 집 같은 이 세상이요, 하루살이나 물거품이나 허깨비 같은 이 몸이라 한 달에도 입을 열고 크게 웃어 보는 사람이 얼마 안되는데 우리는 이런 仙山에 모여 이런 法會에 같이 참석하여 웃고 이야기하면서 같이 놀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넷째의 행복이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그 몸을 완전히 보전하지 못하고 장님이나 귀머거리나 벙어리로죽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는 귀와 눈이 완전하고 남자로서의 형상을 완전히 갖추어사람의 버림을 받지 않으니 이것이 그 다섯째의 행복이다. 이런 다섯 가지 행복을갖추었거늘 어찌 짐승처럼 헛되이 났다 죽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벗들은 부디 과거의 저축을 아끼지 말고 천지와 성현의 끝없는 은혜를 갚는 동시에 나라와 백성을위해 기원함으로써 태평천하를 이루고 이내 한량없는 미래 세상에서도 영원히 형제가 될 인연을 만들어야 하겠다. 원컨대 우리 좋은 벗들은 다시 머리를 돌려 스스로생각하시라.동국역경원, 1970, 『한글대장경』152, 동국역경원, 244~245쪽6 / 港都釜山 第31號- 188 -연령의 승려들이 조직했던 同甲契를 지칭한다고 하겠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사찰 승려 가운데 동갑 또는 출생연도가비슷한 또래의 승려들이 대개 20세 전후에 갑계를 조직하였다.또한 계원들은 매월 또는 매년 일정 자금이 모은 후 그 자산으로 이자를 받아 그 계금으로 사찰을 보수하거나 사찰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갑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기술하자면 12地神 중 子년생에서巳년생까지, 午년생에서 亥년생까지 각각 1단체로 묶어 조직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갑계의 운영은 계원들이 낸入契金과 사찰의 찬조금을기본금으로 삼아 殖利도 하고, 계원들의 공동노력으로 절의 공사를 맡아 생기는 소득을 자금으로 바꾸어 기본금을 늘리기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계원들이 늙으면 땅을 사서 절에 바치거나그 밖에 사찰에서 필요한 불사나 도구 따위를 계금으로 마련하는 등 사찰을 보호하는데 목적을 두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후기경상도 지역 사찰에서 많이 결성된 갑계는 19세기에 가장 성행하였으며 이 갑계는 해방 이후까지 존속되기도 하였다.11) 전국 사찰 중에서 가장 많은 사례를 보여주는 범어사 갑계의경우 모두 25건이 조직되어 총 32번 보사 활동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조선후기 불교와 寺刹契』를 참고하여 다시 정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