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이장군 초상화
北征歌(북정가)
(南怡 將軍)
白頭山石馬刀盡
(백두산석마도진이요)
백두산의 돌은 칼을가는데 다 쓰여지고
頭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라)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이는데 다 없어졌도다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이면)
사나이 이십대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리요)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겠는가
- 남이장군(1441~1468)은 충북 음성 출생으로 태종의 넷째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1457(세조3)년 17세의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1467(세조13)년 이시애의난을 평정한공으로 27세의 젊은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으나,평소 남이장군의 영특함과 왕(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견제하던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 강희맹, 한계희등은 남이장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밀고해 28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 즉 유자광은 남이장군의 시조중 "男兒二十未平國"을 "男兒二十未得國"으로 변조해 나라를 얻으려하고있다고 왕에게 밀고한것이었다.그러나 왕은 수차례 현지에 사신을 파견해 사실여부를 신문했으나 사신조차도 음모에가담된 관계로 未平國이아닌 未得國이라고 증언했다 한다.
( 이 시조는 남이장군이 이시애의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길에 손수 백두산에 올라 평정비를 세우고 그 비에 새긴 시조로 그 천재성과 기개를 엿볼수 있다.)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천지에 성진이 잠겼애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 볼까 하노라
대명천지(大明天地) : 환하게 밝은 세상. 성진(腥塵) : 싸움으로 인한 먼지. 남북풍진(南北風塵) : 남만(南蠻)과 북적(北狄)의 병란
장검을 빼어들고 해발 2천 5백 미터를 넘는 백두산에 올라 보니, 환하게 밝은 세상에 싸움으로 인 먼지가 가득히 잠 겼구나. 이 작품은 남만과 북호를 밀어붙여 나라의 안녕을 이루어 놓으리라는 결의를 온 누리에 읊어본 시조로서, 우 리들의 마음의 거울을 닦아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 시조에 흐르는 이미지 역시 애국과 애족의 기개가 용솟 음치는 일종의 로맨티시즘이 물결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개인주의의 감정에서는 도저히 도 달할 수 없는 감정의 고지(高地)를 이루고 있다. 나라를 자기 집처럼 사랑하고 이를 가꾸려는 마음은 정신면에서 거의 사악에 가까운 이 시대 풍토에서는 더구나 그렇다.
투철한 국가 의식이란, 자기 집을 가꾸는 그 이상의 초개인 적 의식이 국가를 생각하고 겨레의 오늘을 걱정하는 정신의 선행(先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엔 거짓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거인은 칼을 갈아 나라를 지키는 일에 몸을 바쳤는 지도 모른다. 진실의 긴 보도를 따라 성장하면 칼은 저절로 나라를 위한 길에 눈을 뜨게 되고, 백성을 위한 백성에의 시책이 어떤 것인가를 그의 행적으로 곧장 이루어 놓는 법이다.
기개가 세차고 패기가 넘쳐도 쏟아짐이 없는 그 높은 절도 의 경지는 인품의 완성이 뒤따랐다는 하나의 산 증거이겠으 나, 남 이장군의 이 작품이 지니는 광활한 애국지상(愛國至 上)의 세계에서, 일어서는 나라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느끼 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의 시조 가운데,
백두산 바윗돌은 칼날 갈기에 다 닳았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 말랐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히 못할진댄 뒷세상 어느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는 그의 생리의 진수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작품이라 하겠다.
추가로.. 그의 또 다른 글 한 편을 살펴보자
오추마 우는 곳에 칠척장검 비겼는데 백이산하는 뉘땅이 되단말고 어즈버 팔천제자를 어느 낯으로 보련고
항우가 오추마를 타고 7자나 되는 큰 칼을 비껴들었는데 험준하여 백이산이라하고 일컬어지는 진나라가 누구의 땅이 되었는가 한의 차지가 된 것이다. 아아, 전쟁에 지고 8천의 강동 건아들도 모두 죽고 말았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형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시조는 중국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항우의 절망적인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힘과 기를 믿던 항우가 참패하고 돌아가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그린 것이다. 아마도 작자 남이가 자신의 힘만을 믿던 항우와 같은 장군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자기자신에 대한 다짐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남이는 세조 3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수많은 도적들과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이 되어 반란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기도 했다. 후에 유자광의 모함으로 평소에 남이를 좋게 생각지 않았던 예종은 그를 제거할 기회로 여겨 남이를 능지처사 시켰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남이의 옥'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때가 그의 나이 28세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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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이장군의 충절은 이명박대운하의 실천747님과 같고 유자광이는 대주이와 같구나"
에공 과찬에 말씀,,,,,, 지역에서 온통 대한민국,,위해서 애쓰는 아마데우스님과 남인수 회장님,,,딸라 갈려면 아직도부족 합니다 아자아자
스크렙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