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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애굽기 20:8~11)
오늘 설교 제목은 주보에 있는 것과 같이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이 설교 제목에 대해 ‘어, 이상하네’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본문을 함께 읽었는데 오늘의 본문 시작 부분, 출애굽기 20장 8절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과 찬송가 뒤에 있는 “십계명”을 보면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안식일이라는 말을 주일로 바꿨네. 왜 그랬을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왜 그랬는지는 설교 중에 알게 되실 것입니다.
매월 네 번째 주일에는 부족한 제가 이 강단을 섬기고 있는데, 올해 상반기, 1월부터 6월까지는 주기도문을 주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반기, 7월부터 12월까지는 십계명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시간에는 십계명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1 계명에서 제4계명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 수직적인 계명, 종적인 계명들입니다.
제5 계명에서 제10 계명까지는 나와 이웃의 관계에 대한 계명, 수평적인 계명, 횡적인 계명들입니다.
지금 제1 계명에서 제4 계명까지를 살피고 있는데요,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제목으로 제1 계명을 가지고 말씀 드렸습니다.
지난 달에는 “성도님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제2 계명을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제4 계명을 가지고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어, 목사님, 제3 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건너뛰네요." 하시는 분이 계실 것 같은데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어서 따로 한 시간을 내지 않았습니다..
잠깐 말씀 드리면, 우리는 부모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부모님 이름이, 존함(尊銜)이, 또는 함자(銜字)가 어떻게 되시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네, 홍길동입니다." 하면 ‘무식하다’, ‘버릇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네, 길할 길(吉) 자, 아이 동(童) 자를 쓰십니다." 해야 하지요.
자녀가 고향의 부모님께 편지를 보낼 때 봉투에 부모님의 이름을 적고 "아무개 귀하" 라고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는 것응 피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쓰고 "본제입납"(本第入納) 이라고 쓰도록 했습니다.
“아무개의 본집으로 들어가는 편지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국어교사 생활을 여러 해 했는데 그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자, 안식일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할 때 금요일 저녁이 되니까 거리가 조용해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법에는 안식일에는 이런 일은 할 수 있고,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고, 물건은 어느 정도의 무게까지만 들 수 있고, 어느 정도까지만 걸을 수 있고, 이런 것이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학교 선배 한 분이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아파트 밑 층에 유대인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토요일에 외출을 했다가 돌아왔는데 그 유대인 노부부가 그들의 집 앞에 서 있다가 , 우리 집 문 좀 열어달라고 하더랍니다.
아니 왜 그러시느냐고 문이 고장 났느냐고 하니까 그것이 아니고 문을 열려면 손을 써야 하는데 오늘은 안식일인데 오늘 손으로 할 수 있는 분량의 일을 다 했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는 문을 열 수 없어서 도와줄 사람을 기다라고 있었다고 하더랍니다.
그 대답을 듣고 ‘참 철저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문제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들아와서는 일요일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이미 나옵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을 보면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하고서. 바울 사도가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디.
‘그 주간의 첫날’, 주일이지요.
사도시대 때부터 이렇게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도시대 다음에는 교부들이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교부들이 남긴 편지를 보면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켜라’ 하는 말씀이 여기저기, 이 교부, 저 교부의 편지에 나옵니다.‘
교부들이 주일을 강조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주일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주간의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입니다.
구약시대의 일들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바뀌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들이 안식일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을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속죄의 제사들 드렸습니다.
신약시대 와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렇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식교인들입니다.
안식교인들은 생활태도도 정결한 느낌을 주고, 안식교회는 사회봉사도 많이 합니다.
공릉동에 있는 삼육대학교는 안식교에서 세워서 운영하고 있는 교육기관입니다.
휘경동에 있는 삼육서울병원, 예전에 청량리 위생병원이라고 부르던 병원도 안식교에서 운영하는 병원입니다.
그런데 안식교가 구약적이고 율법적이기 때문에 정통기독교, 주류 기독교로는 대접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들이 있습니다.
저도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그런 것을 많이 메모해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복잡하게 말 할 필요가 없다. 복잡하게 설명하면 오히려 효과가 줄어든다. ‘이제는 안식일이 주일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바꿨습니다.
주일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작은 부활절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교회에 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었지요.
겁이 나서 숨어 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 나와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다!” 외쳤습니다
우리도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며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일은 이름 그대로 ‘주님의 날’입니다.
나의 날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날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주일은 성일입니다.
우리는 ‘성’자가 들어간 말을 많이 씁니다..
성도, 성회, 성물, 성일, 성소, 많은데요, 교회에서 쓰는 ‘성’자에는 ‘구별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도 얼마 전에 같은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주일은 다른 날과 구별된 날입니다.
주일은 예배 드리는 날입니다.
중국에서는 일요일, 월요일 하지 않습니다.
별 성(星), 기약할 자(期)를 써서 ‘성기 1’ ‘성기2“ ”성기3“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일을 ‘예배일’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된 달력을 본 일도 있습니다.
ㄹ기독교와는 거리가 있는 어떻게 해서 중국에서 그런 말을 쓰는지 궁금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일, 급합니다.
거룩한 종교기관으로서 권위를 인정 받는 일, 급합니다.
방역지침을 잘 지키는지 조사한다고, 예배를 드리는데 공무원들이 예배당에 들어와서 사진을 찍는 일이 많은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겪을 때마다 ‘교회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 무시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나는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교회당을 보면, 특히 지붕 위 십자가를 보면 웬일인지 위로가 되고,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그렇게 되도록 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50여 년 전의 일인데 어느 목사님이 빈민촌에 들어가서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 빈민촌의 판잣집들이 거의 모두 무허가 건물이기 때문에 구청에서 철거를 나왔습니다.
주민들과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교회도 무허가 건물이어서 철거반원들이 교회도 철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민들이 “우리 집은 부수더라도 교회는 절대로 안 된다”며 힘을 다해 저항을 했습니다.
철거반원들이 어쩌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한양대학교 뒤쪽 빈민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겨지도록 하는 일, 급합니다.
이런 회복의 역사가 교회가 주일을 잘 지키는데서 출발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말은 주일을 잘 지키지 않는데서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뜻도 됩니다.
사실 교회는 지금 주일을 잘 지키는 일을 소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되고 불금, ‘불타는 금요일’ 이라는 말이 생기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지금 예배 참석인원 규제 조치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에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몸에 배서 예배 참석 인원 규제 조치가 풀린 다음에도 주일을 잘 지키지 않는 분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염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입대를 해서 훈련소에 들어가니까 부동자세를 아주 엄하게 가르칩니다.
교관이 하는 말, “부동자세를 제대로 할 줄 알면 군인 다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일 제대로 지키면 교인다운 교인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부동자세의 목적”이라는 것을 모두 외우게 했습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한 것은 5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만, ‘부동자세의 목적’, 지금도 외우고 있습니다.
“부동자세는 군인의 기본자세이다. 고로 내로는 군인정신이 충일하고 외로는 엄숙단정 하여야 한다.”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고로 안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밖으로는 엄숙단정한 몸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해방되기 전에 평양에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장로교의 장대현교회, 산정현교회, 감리교의 남산현교회,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평양을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은 1934년 9월 5일 자 「동아일보」2면 톱기사 제목에 큼직하게 나오는 말입니다.
그때 평양의 주일 모습에 대해 어떤 권사님이 말씀하신 것이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평양에서는 주일이 되면 가게들이 거의 문을 닫았디요. 주인이 교인인 가게는 두 말 할것 없고,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는 가게도 문을 열지 않았어요. 문을 열어도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온 시내에 여러 교회에서 치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깨끗하게 빤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 성경과 찬송가를 옆구리에 끼고 언덕 위에 있는 교회를 향해 올라갔디요, 천국광경이 따로 없었디요.”
평양이 다시 한 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분단이 되고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공산정권은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선거를 싥시하는데 1946년 11월 3일에 선거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 11월 3일이 주일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즉각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주일성수를 생명으로 함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고로 주일선거를 즉각 취소해라”
당시 교회가 발표한 성명서의 제1항이었습니다.
교회와 공산정권은 전에도 마찰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일선거 반대로 교회와 공산정권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까지는 김일성이 교회의 협력을 받으려고 여러모로 애썼습니다.
그런데 이 주일선거 반대 사건을 겪으면서 ‘안 되겠다’ 하고서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선거를 주일에 합니다.
북한의 선거는 우리나라처럼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자기가 뽑고 싶은 사람에게 찍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지정한 입후보자 한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제도인데 언제나 투표율 100%, 지지율 100%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선거를 주일에 실시해서 오전이면 다 끝난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선거를 주일에 한다고 하면 교회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그런데 남한에서도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들이 많아지는 것은 문제입니다.
일본에서도 선거를 주일에 한다고 합니다.
선거뿐만이 아니라 학교의 연구수업, 졸업식 같은 것도 주일에 한다고 합니다.
사와 마사히코(澤正彦)이라는 일본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 돌아가서 ‘주일에 그런 일 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하는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주일소송’이라고 해서 널리 알려졌는데요, 패소했습니다.
사와 마사히코 목사님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처음부터 이길 생각은 하지 못했답니다.
사와 마사히코 목사님은 원래 동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분입니다.
그래도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소송을 시작한 것인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하고 후원을 해 주어서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의 목회생활에서 잊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기백(李基白)이라는 역사학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남강 이승훈 장로님의 친척이 되는 분인데 이 분은 쓴 「한국사신론」이라는 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서로서 널이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섬기고 있던 교회의 집사님이었는데 이 분이 하루는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번에 불가피하게 주일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왜요?”
“제가 공부한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올해 졸업식에서 명예 학위를 준다고 오라고 하는데 졸업식을 주일에 합니다. 안 갈수도 없고 해서 주일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평소에도 그분의 인격과 신앙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주일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일본의 정신적인 면을 약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역사학자 한 분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습니다.
이만열(李萬烈)이라는 역사학자가 있습니다.
지금 말씀 드린 이기백 교수에게 배운 분입니다.
이만열 교수님은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를 오래 지내시고 정년은퇴를 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도 지내셨습니다.
장로님이신데 40년 전에 한국기독교교역사연구소를 세웠습니다.
이 연구소가 참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만열 장로님은, 기독교의 현실 참여, 사회정의, 이런 것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외국인 근로자 보호를 비롯해서 80대 중반인 지금도 여러 가지 일에 앞장서고 있는 분입니다.
「기독교사상」 10월호에 “역사학자 이만열, 그에게서 역사와 삶을 배운다”라는 대담기사가 실렸습니다.
읽어보니까 자기는 고려신학파 집안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주일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했습니다
고려신학파는 장로교의 한 파로서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분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괴에 입학을 했는데 국사학과에서는 정기적으로 현장답사를 나갑니다.
그런데 번번히 주일을 끼고 실시되어서 대학 4년 내내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분은 그 대담에서. “한국교회에서 주일회복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의 회복이 없으면 한국교회는 앞으로 더 어렵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는 붉은 줄을 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붉은 줄을 진하게 쳤습니다.
주일의 회복이 없으면 한국교회는 앞으로 더 어렵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일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일에 물건을 사도 됩니까?’
‘주일에 가게 문을 열어도 됩니까?’
‘주일에 여행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안 됩니다‘ ’안 되요‘ ’절대로 불가합니다‘할까요?
일곱 글자로 대답하겠는데요, “알아서 하십시오”입니다.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서 판단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원칙과 상황, 형편은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을 ’타원형적 긴장‘이라고 말한 신학자도 있습니다.
‘주일은 성일이다, 구별된 날이다, 나의 날이 아니고 주님의 날이다, 경건하게 보내야 하는 날이다.’ 라는 원칙과 형편이 균형을 이루는 결정을 내리라는 말씀입니다.
장로교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장로교회의 대부분이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하고 있는 데요, 이 신앙고백의 제21장이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입니다.
그대로 읽어드립니다.
이 날을 신자는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 날에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떠나서 거룩하게 쉬며, 이 세상의 고용주나 오락에서도 떠나 쉬어야 할 뿐 아니라(출20:8,
16:23, 25:26, 29, 30, 31:15-17, 사58:13, 느13:15-22)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쓰며,
필요한 의무에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칠 것이다(사 58:13, 마 12:1-13).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헌법의 “교회와 예배” 조항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좀 길지만 오늘 제가 말슴 드리고 싶은 내용이 다 들어 있으므로 그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사도시대부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을 주님의 날로 정하고
이 날에 예배를 드린다. 이 날에 모든 성도들은 죽음을 정복하신 주님의 부활을 송축하며 부활의 기쁨을 경험한다.
또한 이날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역사를 시작한 날이며 창조 후에 새로운 출발을 가져 온 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나, 이상과 같은 깊은 의미를 가진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창조의 은총과 부활의 승리를 송축하면서 예배를 드림으로 한 주간을 출발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이며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날을 성별하여, 이른 아침부터 육신의 생업을 중지하고, 모든 가족이 예배를 드릴 준비에
거리낌이 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삼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를 인도할 하나님의 종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특별한 은총을 받도록 준비해야 한다.
주님의 날에 드리는 예배는 정한 시간에 한 마음으로 모든 성도가 참예해야 하며, 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질서를 지켜야 한다.
공중예배를 마친 후에는 그 남은 시간을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기도, 찬송, 성경공부를 비롯하여 신앙의 대화나
경건한 서적을 읽도록 할 것이며, 병자 위문, 가난한 자 구제, 불신자를 위한 전도 등을 하면서 예배를 통하여 받은
사랑과 은혜가 생활에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감리교회에서는 주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을 살펴보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넣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질문을 하나 드리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상으로 이 예배에 동참하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일을 얼마나 잘 지키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네, 힘을 다해 잘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성도님들,
또는 “네, 힘을 다 해 잘 지키도록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라고 대답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찬송가 46장의 가사를 먼저 묵상합니다.
“이 날은 주님 정하신 참 기쁜 날일세 온 천하만민 주 앞에 다 찬송하여라
주 오늘 부활하시고 사망을 이겼네 구주를 믿는 성도들 그 복음 전하세“
주님 저희들이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주님의 명령에 부끄럽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교회, 주일 회복에 힘써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옵소서.
용산교회가 그 일에 모범을 보이게 하여 주옵소서.
코로나 방역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는 일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주일 지키는 일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일예배의 소중함을 깨닫고 열심을 내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