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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브리서 3:1-6)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아주 깁니다.
사도신경은 전체가 291 글자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176 글자가 예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291 글자 가운데 176글자, 전체의 60%입니다.
사도신경의 3/5이 예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 권위 있는 신앙고백으로 ‘니케아신경’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씀드리면서 니케아신경을 소개해 드린 일이 있는데요, 그 때 소개해드린 니케야신경은 모두 680 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401자가 예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680글자 가운데 401글자, 역시 60%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왜 이렇게 길고 복잡할까요?
예수님에 대한 고백 다음에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 나오는데 성령에 대한 고백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일곱 글자입니다.
균형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예수님께 대한 고백은 왜 이렇게 길고 복잡하게 되어 있을까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도신경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하고 자세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중요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그 교회, 얼마나 크지?’ 하는 것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누구지?’ ‘그 교회에 누가 나오지?’ 그것을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 교회 찬양대 얼마나 잘 하지?’ 그것을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음악 좋아하는 분에게 전도를 하는데 “우리 교회 찬양대 참 잘해요. 찬양 들으러 교회에 오세요”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 중요한데 제일 중요한 것은 ‘그 교회, 예수님을 얼마나 잘 모시고 있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저 구석에 두고 있으면 칭찬 받을 수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아까 ‘그 교회 찬양대 얼마나 잘 하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는데요, 저는 저희 교회 찬양대의 찬양을 들을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원은 복사중창단도 안 되는 숫자이지요.
그러나 성도들에게 주는 은혜는 참 큽니다.
특별찬양 순서가 끝난 다음에 성도들이 저절로 박수를 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가성비가 높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격에 비해 성과가 높다’라는 뜻인데요, 전에 한 번 말씀드린 걱 같은데, 용산교회 찬양대는 인성비가 높은 성가대입니다.
인원에 비해 성과가 큰 찬양대라는 뜻입니다.
북한에 교회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봉수교회이고, 하나는 칠골교회입니다.
저는 그 교회들을 여러 번 가보았고, 두 교회에서 모두 예배의 순서도 맡은 일도 일도 있습니다.
‘북한의 교회들 진짜 교회이에요? 가짜 교회이에요?’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기에 대한 말씀을 여기서 드리면 좀 길어지고 논쟁이 일어나기 쉬워 피하겠는데요, 중요한 것은 그 교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용산교회, 예수님을 모신 교회, 가장 중심에 모신 교회, 가장 소중하게 모신 교회, 이것이 변함도 없고 흔들림이 없는 교회, 더욱 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사도신경의 모든 고백이 다 중요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예수님께 대한 고백은 특히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 그대로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이단 문제는 교회에 부담을 많이 주는 문제입니다.
‘어떤 집단이 이단이냐?’ 이것은 간단하게 판정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단 문제가 일어났을 때 대개의 경우 총회에서 이단심사위원회, 또는 연구위원회를 조직해서 1년 동안 살펴서 그 다음 총회에 보고해서 판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단에서 믿는다고 하는 것 가운데 예수님이 빠져 있으면 두 말 할 것 없이 이단입니다.
예수님 대신에 다른 존재를 집어넣었으면 더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중심에만 있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기독교인이라고도 하고 예수교인이라고 하는데, 예수교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잘 아시지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이 찬송은 2절과 3절도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가사로 시작이 됩니다.
2절,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3절,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후렴에서 이 말이 다시 한 번 반복되지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이 찬송가 가사가 여러분과 저의 꾸밈없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힘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인용한 찬송가 94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찬송 가운데 하나입니다.
찬송가를 보면 제일 앞에 ‘제목 분류’가 있습니다.
찬송가는 무질서하게 배열된 것이 아니고 주제에 따라서 모여져 있는데요, 제목 분류를 보면 제일 먼저 예배, 그 다음은 성부, 그 다음은 성자, 그 다음은 성경, 교회, 성례, 이렇게 계속되는데 제일 많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찬송입니다..
290장에서 494장까지, 205장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찬송입니다.
그 다음이 성자, 예수님에 대한 찬송입니다.
80장에서 181장까지, 101장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는 찬송입니다.
그 다음에 많은 것은 예배 찬송이고, 그 다음이 전도와 선교입니다.
찬송가에도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찬송이 많습니다.
이제 사도신경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순서대로 잠깐씩 살펴보겠습니다.
“그 와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입니다.
줄여서 “독생자”, 또는 “독생성자”라고 하지요.
하나님은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주셨습니다.
놀라운 사랑입니다.
어느 가난한 집에 자녀가 여럿 있었습니다.
집은 가난하고 자녀들은 많고, 그래서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를 못했습니다.
어느 마음씨 좋은 부잣집에서 그것을 보고 그 가운데 하나를 우리집으로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호적에 넣고 사랑하며 잘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고맙다고 하고서 ‘누구를 보낼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부부가 의논했습니다.
첫째는 첫째니까 안되고, 둘째는 머리가 좋아서 안되고, 셋째는 예뻐서 안되고, 넷째는 몸이 약해서 안되고, 다섯째는 이래서 안되고, 여섯째는 저래서 안되겠고, 일곱째는 막내여서 안되고, 다시 첫째, 둘째, 셋째, 아무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부모는 밤믈 꼬박 새우고 다음날 부잣집을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고생스럽더라도 우리가 키우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 집에 보내면 편하게 잘 살살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에 보내면 고생 실컷하고 비참하게 죽을 줄을 알면서도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목사님들이 축도를 하실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런 말로 축도를 하십니다..
이것은 축도의 원형인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여러분 축도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할 때 나를 위해 외아들을 내 주신 그 사랑에 다시 한 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힘입어 한 주일을 승리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예수는 개인의 이름입니다.
고유명사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여럿 있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직책 이름입니다.
보통명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에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 임직식을 비롯해서 중요한 임명 절차에서 임명을 받는 사람에게 기름을 주었습니다.
예수는 메시아, 구세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하는 고백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동정녀 탄생을 한 분,. 처녀의 몸에서 나신 분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아니, 처녀가 어떻게 아기를 낳는단 말이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말씀이 있는데 영어 성경 가운데 여기 “처녀”를 "virgin"으로 번역하지 않고 "young woman", 젊은 여인이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지식으로 이해되는 것만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성의 세계이고 지식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초등학생이 구구단을 잘 외우니까 부모님이 기특해서 ‘그러면 너, 12 곱하기 12는 얼마니?’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초등학생이 “12 곱하기 12? 에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어요”하더랍니다.
내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맏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 초등학생과 같은 사람입니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이 교회 교회학교 중고등부 교사를 하고 있을 때 학생 가운데 눈이 유난히 동그란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가르치니까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서 “에이 선생님,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아요? 나는 그거 죽을 때까지 안 믿을 거에요!” 했습니다.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아주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소식도 모르고 있는데 다시 만나면 “지금도 못 믿어요?”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큰일을 하나 했습니다.
자기 반 친구를 전도해서 교회에 데리고 왔습니다.
전도 받은 그 친구가 믿음이 잘 자랐는데 나중에 시각장애인 목사님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시각장애인 목사님은 국내외에서 수만 번 전도집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왔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교회 출신 그 전도 받은 여학생이 내조를 잘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그 눈이 동그란 여학생이 누구인지, 그 여학생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왔고 시각장애인 목사님과 결혼한 여학생이 누구인지, 그 시각장애인 목사님이 누구인지 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분이 몇 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못 믿겠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어도 전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못 믿겠다고 여겨지던 것은 믿음이 자라면서 저절로 믿게될 것입니다.
더 잘 믿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여기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한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이름이 나오는데요,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지옥에 가 있는 분들은 누구나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빌라도는 더 싱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 수억의 기독교인들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힐 때마다 괴로워서 꿈틀거릴 테니까 말입니다.”
만일에 빌라도가 재판을 할 때 “내가 보니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무죄석방이다!” 했다면 반대가 되었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부활하신 분입니다.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지난주일이 부활절이었습니다.
부활절이 지났다고 부활이 우리와 관계 없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교회는 부활주일부터는 ‘부활절 제 몇 주’ 이렇게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제2주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응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늘에 오르사” 승천을 말하지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예수님의 현존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우리를 위해 변호를 하고, 우리를 위해 중보를 하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재림하실 분입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서”는 “그 곳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설교가 좀 더 많이 선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179장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저 천국을 얻을 자 회개하라” 이 찬송이 더 많이 불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매우 톡특하고 좀 까다롭다는 말을 듣고 있는 성경이 있습니다.
어느 성경일 것 같습니까?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우선 저자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바울이 기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여러 가지를 살펴볼 때 그것은 아닌 것 같고, 누가가 기록했을 것이다, 바나바가 기록했을 것이다, 실라가 기록했을 것이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기록했을 것이다,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볼로가 기록했을 것이라는 말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볼로는 큰 도서관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인데 사도행전 18장 24절은 아볼로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것을 “기독론”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은 모세보다 뛰어난 분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유대인인들은 율법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데 그 율법을 준 사람이 모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첫 다섯 권,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율법서라고도 하고 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모세오경이라고도 합니다.
그 모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정말 큰 사건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5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신실한 종이라고 하였는데 6절을 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12장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깊이 존경하고 있는 신앙의 선배 한 분은 이 말씀을 평생의 표어로 삼고 지내셨습니다.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는데 신앙양심을 가지고 학교를 운영하시느라고 어려움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실 때는 목소리가 떨려 나왔습니다.
그래요, 예수님은 믿음의 주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이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 가운데 1절을 다시 봅니다.
먼저 앞부분,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제약이 많이 풀리고 대면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어 오늘 전보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나왔는데요, 서로를 돌아보며 우리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랄 때 아쉬운 것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성도를 교제를 나누덴 제약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제약이 많이 풀렸으니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의 교제가 이 교회에 가득하기 바랍니다.
그 다음 말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여러분, 예수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시기에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나?
예수님은 누구이시기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서기 연호가 BC,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과 AD, Anno Doini, 주님 이후로 갈라졌나?
예수님이 누구이시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인 나라는 발전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나라는 그렇지 못한 현상을 보이고 있나,
예수님이 누구이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순교를 했고, 지금도 공산권과 이슬람권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나,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이 예수님이 누구인가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믿음이 더욱 뜨거워지고, 깊어지고, 확실해지고, 분명해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저희를 위해, 나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부르는 일이 많았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주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좋아지게 하여 주옵소서.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가장 귀한 이름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