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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땅 다른 세계
- 화천 백암산 답사기 -
<봄날의 겨울, 백암산>
우리를 반겨 준 것은 군데군데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백암산 어느 언저리였다. 얼음 밑으로 백암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소리를 내며 흘렀다. 2012년 4월 27일. 올 해는 유난히 봄이 일찍 왔다. 그리고 고온의 날씨 탓에 날짜를 잊고 온갖 꽃들이 한꺼번에 만발했다. 아직 사월이 가지도 않았는데, 오월 말 같은 날씨에다 자연의 적응도 빨랐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게 된 백암산 어느 기슭은 아직 완연한 겨울이었다. 어떻게 이곳에 봄이 왔다고 할 것인가. 그야말로 삭막함은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산은 우리한테 말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본 적이 있나요?”
선계(仙界)의 멋진 풍경을 기대했던 일행은 실망이 아니라 고립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좁은 산길을 따라 30여분 달려 온 곳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풍경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군 입대를 하였다는 동행한 병사는 이곳이 우리가 갈 수 있는 마지막 지대라고 했다. 걸어서 백암산 정상까지 갈 수 있으나, 우리 일행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아쉬움이 남았다. 몇 채의 군막사가 산비탈을 타고 지어져 있었으나 인적은 전혀 없고 앙상한 나뭇가지와 함께 적막할 뿐이었다. 흰 색의 막사가 만춘(晩春)의 겨울 풍경 속에 돋보였다. 쳐다보니 목이 아플 정도로 비탈은 가팔랐다.
휴대폰도 모두 통화불통지역이라고 표시돼 있었다. 병사의 말이 이곳은 특수 휴대폰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휴대폰 화면에 찍힌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다. 동행한 두 여교수님은 나보다 더 무서웠던 것 같았다. 찬바람만 앙상한 나뭇가지를 휩싸고 소리를 내며 귓가에 스치고 있었다. 게다가 멀리 북녘 땅은 자욱한 안개에 덮여 볼 수가 없었다. 저곳은 얼마나 더 삭막하기에 우리의 눈길조차 허용하지 않을까? 통일전망대, 을지전망대 등에서 보는 북녘 땅보다 더 삭막할까? 병사의 손 가리킴을 따라 눈에 들어온 백암산 어느 기슭에서 보는 북녘의 풍경이었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우리보고 빨리 돌아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에 맞춰 동행한 두 여교수님이 돌아가잔다.
그냥 가기가 못내 섭섭했다. 백암산 마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라도 먹어보고 싶었다. 얼음이 곳곳에 남아있는 계곡으로 가서,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을 손으로 받아먹었다. 싸늘한 기운이 손끝을 스치고, 이어 백암산 빙수(氷水)는 입술을 적시면서 목을 타고 뱃속까지 흘렀다. 그런데 물맛이 최고였다. 순간 주변의 환경과는 달리 신선들이 먹는 물이 이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젖었다. 동화에 나오는 젊어지는 샘물 생각이 나기도 하였다. 연거푸 세 번을 그렇게 마셨다. 일행들에게 물맛을 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봄날의 삭풍(朔風), 흰 눈, 얼음, 앙상한 나뭇가지, 안개에 가린 북녘 땅, 더 이상 갈 수 없는 산길, 살을 에는 추위’ 4월 말 백암산 어느 기슭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백암산에도 봄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한명희 교수가 “어, 쑥이 돋았네.”라며, 뜯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옆에 있던 전이정 교수도 “정말 그렀네요.”라며 맞장구를 쳤다. 두 교수님은 추위에 몸을 감싸고 있으면서도 봄을 알리는 쑥이 파릇파릇 돋아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백암산 계곡에 돋아나는 쑥 잎은 일행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쑥은 백암산에도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렸다.
<민통선으로 가는 길>
화천의 민통선에 있는 안동철고, 양의대습지, 오작교에 관한 얘기를 익히 들었던 터라 언젠가 한 번 답사를 하자고 벼르던 터였다. 이곳은 오랫동안 눈이 쌓여 있으므로 늦봄이나 돼야 갈 수 있다는 귀띔에 여태까지 기다리게 된 것이다. DMZ(비무장지대)를 답사한다는 설렘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였다. 게다가 화천군에서는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 중이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답사하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원래 민간인이 갈 수 없는 민간인통제구역이다. 그래서 일주일 전에 화천군청을 통해서 출입신고를 하고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GOP에서 군대생활을 해봤던 터라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군청의 이기진 씨가 통행증을 발급해 주면서 출장 때문에 같이 가지 못하여 무척 미안해하였다. 우리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데 부득이 그렇게 됐다고 하였다. 이기진 씨의 안내를 받고,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우리는 열심히 보고, 좋은 글을 쓰고자 우리끼리 민간인 통제구역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스토리텔링이 있는 화천여행>은 뭔가 다른 느낌을 줄 것이라 확신이 든다.
4월 27일. 1시까지 풍산리 초소로 가면 된다는 이기진 씨의 안내에 따라 12시 40분경에 이곳에 들렀다. 이기진 씨는 화천읍내에서 10여분이면 풍산리 초소까지 도착한다고 했는데 일행은 행여나 늦을까봐 부리나케 점심을 먹고 서둘렀던 것이다. 점심은 먼저 답사에서 먹었던 대이리의 민물매운탕식당에서 빠가사리매운탕으로 했다. 식당에서 나오면서 병사들에게 줄 음료수라도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해서 몇 군데 구멍가게에 들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초소를 통과해야 되는지 몰랐다. 많이 준비하지 못하여 무척 미안했다. 정말 10여분 정도 자동차로 달리자 초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이곳을 방문하게 된 사연을
산과 계곡을 타고 민통선으로 난 길을 호기심과 기대 속에 달렸다. 제일 먼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고지대라는 것이었다. 춘천에서 차를 타고 오면서 무성한 신록과 알록달록 산을 수놓은 꽃 풍경을 보고 정말 아름답다고 환호하던 모습과 이곳의 풍광은 아주 딴 판이었다. 이제야 겨우 진달래가 피고 나뭇가지에서는 한잎 두잎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한적한 산골의 아스팔트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창문을 열고 민통선의 풍광을 만끽하였다. 길 곳곳에는 이곳이 군사지역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얼마를 갔을까? 꽤나 들어왔다 싶었는데, 도로공사를 하는 인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굴삭기가 움직이고 도로변을 공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물었더니 앞에 보이는 다리가 안동철교라고 하였다. 안동철교 앞으로는 아주 큰 늪지가 있었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그곳을 감상하였다. 전이정 교수는 벌써 늪지까지 가서 걷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민통선 안의 안동철교를 보게 된 것이다.
<뗏목이 머물던 안동포나루>
안동철교는 쿵쾅거리며 우리를 맞이했다. 철재를 이용해서 다리를 엮어서 철교라 한다. 안동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안동포(安東浦)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산부터 화천일대에 이르기까지 무성하게 자라던 황장목을 베어 뗏목에 싣고 서울 마포나루로 향하다가 쉬어 가던 곳이다. 나루가 있었으니, 그때는 주막도 있었을 것이고, 시큼한 막걸리에 주모의 손맛 좋은 안주와 함께 떼꾼의 애환을 달래던 주모의 거친 입담도 있었으리라. 반대로 인천에서부터 올라오던 소금배도 있지 않았을까. 그야말로 시골 나루터에서 시전(市廛)을 이루던 곳일 게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늪지뿐이다.
이곳에는 아스팔트도로와 자전거 길을 내느라 분주하게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자전거 길은 폭이 상당히 넓게 만들어졌다. 언젠가는 도로가 나고 말겠지만, 산을 깎고 습지를 파헤쳐서 도로를 내는 모습이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 길은 화천에서 관광용으로 만드는 것이다. 완공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도로가 완공되면 수많은 관광객이 자동차를 타고 구경을 올 것이고, 이곳의 환경은 예전 모습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중에는 오작교와 백암산까지 연계한다고 하는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 화천에서 새로운 늪지를 볼 수 있고, 휴전의 현장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견우와 직녀의 만남, 오작교>
여행안내자가 없으니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오작교를 보지 못했으니 그냥 갈 수 없는 것이다. 5시간 동안 답사를 하라고 했으니 분명 더 갈 곳이 있을 것인데 길은 없었다. 안동철교 못 미쳐 왼쪽으로 난 샛길이 있는 것을 보고 무작정 차를 몰았다. 길은 포장과 비포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역시 오른쪽으로 습지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광경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했고 눈 닿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행여나 운이 좋으면 산양이나 노루, 멧돼지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면서 좁은 도로를 따라 한없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모르고 지났는데, 우리가 지나면서 끝없이 난 습지는 바로 양의대습지였다. 수상2교라는 다리를 건너자 이정표가 나왔다. 양의대습지를 1.7km나 지나왔고,
이제 눈에 선하게 오작교가 보였다. 강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큰 다리였다. 가까이 가자 눈에 익숙한 철조망이 보였고, 많은 군인들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 30년 전 병장 계급장을 달고 작업을 했던 모습과 같았다. 땅을 파서 지주를 심고, Y피켓에 올라가서 유자철조망을 고정시키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분단의 현실에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역시 GOP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긴장되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은 이 광경이 모두들 눈에 선할 것이다. 차를 오작교 앞에 세웠다.
우리가 갈 수 없는 DMZ에는 오늘도 평화대사 수달이 남북을 넘나들고 있을 것이다. 잔잔한 물결이 푸른 자태를 뽐내며 남북의 방책선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었다.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 하루 빨리 유람선을 타고 금강산 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아, 백암산 GOP>
우리 일행은 오작교에서 나와 백암산 이정표를 보고 또 무작정 차를 몰았다. 수상2교에서 백암산까지 이정표에는 8km라고 되어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오작교를 갔듯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곳은 현역 병사를 탑승해서 안내를 받으며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위병소에 이르자 신고한 서류를 바탕으로 신원조회를 다시 하고, 안내할 병사와 함께 백암산에 올랐다. 몇 번 시동을 꺼먹고 저속 4륜 기어를 넣고서야 간신히 오를 수 있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오르는 길은 돌들이 곳곳에 무너져 내렸고, 짚차가 아니면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오를 때는 그렇게 오를 수 있다지만, 내려올 때는 정말로 대략난감이었다. 1단 기어를 놓고도 계속해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차라도 고장이 난다면 대책이 없었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군부대까지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 고립무인지경이기 때문이었다. 속으로 차가 고장이 나지 않기를 무척 빌었다. 백암산을 내려오자 절로 한숨이 나왔고, 자동차보고 고맙다고 했다.
백암산의 어느 언저리를 보고(봄날의 겨울, 백암산 참조) 길을 내려오자, 왼쪽으로 난 포장된 길이 보였다. 일행은 그렇게 혼이 나고도 또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길은 포장이 잘 돼 있었지만 가파르기는 먼저 길이나 마찬가지였다. 길 초입새에는 곳곳에 이른 봄에 피는 생강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김유정이 동백꽃이라고 한 그 꽃나무이다. 나도 어렸을 적에 동백나무라 했고, 꽃이 지고 난 다음 까맣게 열리는 열매를 땄던 기억이 난다. 그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바르고 등잔불을 켜기도 했다고 어른들에게 들었었다. 생강나무라고 하는 것은 나무를 꺾어서 냄새를 맡으면 생강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여기도 역시 산 중간 쯤 오르자 삭막한 나뭇가지만 우리를 반겼다. 그렇게 고갯마루까지 올랐다.
그곳에서 다시 우리를 맞이한 것은 백암산의 GOP(General out Post, 남방한계선)였다. 역시 차가운 바람이 몹시 불었다. 창문을 열자 소리와 함께 냉기가 차 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북녘 땅은 아직도 안개에 덮여 있었다. 시간이 오후 5시 정도는 되었을 것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검고 삭막한 겨울 풍경과 그 풍경을 휘감고 돌아가는 안개뿐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순간 정말로 ‘같은 땅 다른 세계’라는 느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느낀 것은 ‘나는 민간인’이라는 것이다. 1983년 그곳에서 근무하던 23살의 이등병이 아니었다. 아직도 그 시절이 생생한데, 엊그제가 아니라, 어느 덧 30여 년이 지난 옛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30년 만에 GOP를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련한 추억일 뿐이었다. 그곳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어느 덧 아들 나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추운 곳에서 털모자를 눌러쓰고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들을 보면서 옛날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차를 돌려 바로 나왔다. 역시 오작교에서 느꼈던 감정이 또 났다. 통일에 대한 염원이었다. 우리는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에 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호기심과 답사에 대한 과욕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답사를 한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답사시간이 5시간이었으니 계산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백암산은 아직 민간인을 반기기엔 이른 것 같았다.
<민통선을 나오며>
예상된 시간을 30분가량 지나서 우리는 민통선을 나올 수 있었다. 민통선을 벗어나면서 일행들에게 답사여행 어땠냐고 묻자 이구동성으로 ‘다른 세상’에 갔다 온 것 같다고 하였다. 한명희 교수는 백암산에서 내려올 때 이렇게 험한 길은 처음이 아니냐고 물었다. 물론 처음은 아니다. 눈길에 갇혀서 고생을 한 적도 있고, 혼자 잘못 길을 들었다가 날이 어둡고 하여 고생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휴대폰도 터지지 않고 몇 번의 신원조회를 거치면서 다녀야 하는 스릴 넘치는 길은 없었던 것 같다.
오작교를 갔다가 나올 때는 정말로 우리의 바람과 같이 노루 두 마리가 달리는 자동차 앞을 가로 질러 뛰어갔다. 얼른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켰으나 벌써 노루는 습지를 향해 달아나 몸을 감추고 말았다.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백암산 GOP에서 내려올 때도 역시 엔진브레이크에 계속 페달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남북의 긴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운전 중에도 계속 긴장을 해야 했다. 백암산 산길은 고립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갔던 길을 돌아 나왔다. 이 길을 언제 다시 갈 수가 있을까? 화천군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만든다고 하니 그때 다시 와야겠다.
통행증을 반납하고, 민통선을 벗어났다. 풍산리에 이르러 휴게소 겸 구멍가게를 하는 곳에 들러 잠시 쉬기로 하였다. 차에서 내리니 엉덩이가 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