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④
* 고국원왕의 전사(371)와 개로왕의 전사(475) 사이의 역사적 사실
고구려는 태조왕(53~146) 때에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동)옥저를 정복하였고(56), 요동으로도 진출을 꾀하여 선비족과 함께 요동 태수 채풍을 죽이기도 하였다(121).
고구려는 2세기 후반 고국천왕(179~197) 때에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었으며, 국상 을파소의 건의로 진대법(194)을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동천왕(227~248) 때에는 요동을 놓고 위나라와 갈등하며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인한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도 있었다(244~245).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원의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미천왕(300~331) 때에 마지막 한(漢) 군현인 낙랑군(313), 대방군(314)을 완전히 몰아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4세기 중.후반 고국원왕(331~371) 때에 서북쪽의 전연 모용황의 수도 침략(342)과 남쪽의 백제 근초고왕의 침략을 받아 평양성에서 국왕이 전사(371)하는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소수림왕(371~384)은 중국 북조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372)하여 인재를 길렀으며. 율령을 반포(373)하여 국가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소수림왕 때의 내정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391~412)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의 지역을 점령하고, 서북쪽의 거란과 선비족의 후연을 격파하고 동부여와 동쪽의 말갈을 굴복시켜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백제가 왜를 끌어들여 신라에 침입해오자, 신라의 군사원조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 5만을 보내어 왜를 격퇴하였다(400).
장수왕(413~491)은 414년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여 부왕의 업적을 기리고 평양천도(427)와 남진정책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개로왕(부여경)의 백제 수도 한성을 급습하여 함락시키고(475),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① 신라는 법흥왕 때에 이차돈의 순교를 통하여 불교를 공인하였다(527).
② 장수왕에 의해 수도 한성을 함락당하자 백제 문주왕은 금강 유역의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었다(475).
⑤ 백제 의자왕이 즉위하고(641),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정변으로 집권하며(642) 당과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동맹 수준으로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