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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에 꽃을 꽂다
김 순 길
오색 단풍이 길 가는 나그네의 가슴팍에 깊숙이 파고든다. 정녕 가을의 정취에 흠뻑 젖어드나 싶더니 어느덧 입동이 찾아와 겨울 문턱에 들어섰다. 한 여름 내내 만개하여 보는 이에게 기쁨을 선사했던 수국도 추운 날씨에는 더 버틸 수 없는지 고개를 떨군다. 대부분의 꽃들은 제철을 맞아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쌈박 피고 지는데, 수국은 개선장군 이냥 몇 달을 버텨주어 안쓰러울 정도로 고마웠다. 거기에다 날씨와 햇볕에 따라 색상이 변하는 묘기도 있다. 맨 처음에는 베이지색으로 피는가 싶더니 어느덧 연 하늘색으로 변했다. 햇볕과 친해지더니 꽃 색이 변한다. 가을이 되니 햇볕을 받은 초록색 꽃잎은 붉게 타오르는 단풍 색으로 변한다.
지난해 서울에 사는 딸에게서 어버이날 때 ‘어버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정중히 쓴 리본이 달린 호접란 화분이 배달되었다. 그간 직장에 다니면서 사남매를 오직 모유에만 의존하여 키우느라 어려웠던 고생의 보상을 받은 기쁨이다. 리본에 새겨진 글귀를 되풀이해서 새기면서 위로를 받았는데, 예쁜 호접란도 한 달이 못가서 시들고 말았다. 화분을 송두리 채 없애기가 못내 아쉬워, 버티고 있는 리본 옆에 가을볕에 물든 수국 한 송이를 꽂았다. 날이 가고 몇 달을 넘겨 일 년이 되어도 수국 색상과 모양이 처음 그대로이다. 이렇게 오래 지탱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처음 보는 신기한 발견이다.
올해에는 작년 경험을 살려 꽃이 서리를 맞아 퇴색되기 전에 서둘렀다. 붉게 물든 수국을 한아름 욕심껏 꺾었다. 겨울 내내 일 년 동안 즐길 욕심으로 큰 화병에 가득히 꽂았다.
요사이 코로나 19가 확산되어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콕 해야 한다. 고령자는 면역력이 약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니 혹 자녀들에게 걱정이 될까 싶어 더 조심이 된다. 치과에 가서 이도 치료해야겠고, 안과도 들러 눈 검사도 해보면 좋겠는데 선뜻 나서기가 두렵다. 코로나 19가 처음 발생했을 때만 해도 ‘몇 달만 참으면 되겠지’ 하고 믿었던 막연한 희망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년이 되어도 병균은 온 세계에 더 확산되어 혼란스럽다. 이렇게 긴 시간 자숙하면서 그간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오늘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생명들이 ‘코로나 19’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는데 이 순간까지 무사히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가족들도 다 무사하니 더욱 감사할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의 아름다운 정경을 만끽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두 발로 힘찬 발걸음을 디딜 수 있으니 어찌 다 감사하랴. 친구와 우정 어린 격려의 전화도 주고받으니 한없이 행복하다. 이 삶의 기쁨을 어떻게 누리며 살아갈까?
마음속 깊은 밭을 들여다본다. 한 세상 살아오는 동안 사막에서 뜻하지 않던 엉뚱한 일로 돌팔매질을 당한 적이 있었다. 상처 난 자국은 다 아물었는지? 그 당시는 그이가 그토록 밉고 저주스러워 단단히 뭉쳤던 응어리는 용서함으로 말끔히 녹아 내렸는지? 내가 먼저 용서하고 어설픔을 덮어 주고 보듬으면 평화의 신은 나에게 안정을 주고 참된 가치를 안겨 주는 것을 ……
내가 있어 이웃이 행복하고 가는 곳마다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삶의 보람을 찾게 되는 지혜를 찾아보자. 코로나 19 예방책으로 마스크 착용은 필수이다. 입은 다물고 귀로 듣는 것을 배로 하란다. 친지 이웃 동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자. 꽃은 피면서 자신을 위하여 향기를 발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을 닮고 싶은 마음에서 꽃을 닮아 보자. 손에 움켜 쥔 것을 펴서 이웃에게 풀 수는 없을까? 겨울이 오기 전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꽃의 아름다움을 더 만끽하려고 화병에 꽃을 꽂음과 같이, 나와 인연이 닿는 이마다 삭막한 가슴속에 사랑의 꽃을 심어 언제나 보고 싶고 영원히 기억되는 마르지 않는 꽃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어떨는지?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12), kimsk3527@hanmail.net
전조증상
김 기 태
바람이 분다. 살랑이는 바람에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낙엽들이 길 위에서 중심을 잃고 무리 지어 몰려다닌다. 봄, 여름, 가을, 땅 속에서 부지런히 수분을 빨아들여 영양분을 공급받아 성장을 하다가 가을이 오면 나이테 하나 건졌다는 흐뭇함에 황홀한 모습을 보여주며 지내다 사라진다.
겨울이 오니 모든 잎을 떨구고 나목(裸木)으로 서서 겨울잠에 들어간다. 추위 때문에 얼어 죽지 않고 내년을 기약하며 내 몸을 지키기 위해 하는 자구책이다. 이것이 나무가 이 시절에 보여 주는 만추(晩秋)의 모습이다. 기저질환(基底疾患,underlying disease)을 알고 있는 나이 든 노인에게는 더욱 마음 쓰리게 다가오는 계절이다.
목욕탕에 들어가 홀딱 벗은 뒷모습을 보면 궁둥이가 축 처진 사람을 보게 된다. 70세를 넘긴 사람들의 모습이다. 평소에 운동을 해서 궁둥이를 치켜 올려 놓아야 하는데, 한번 쳐지면 추켜세우기가 불가능한 일이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젊었을 적 탱탱한 궁둥이로 못 돌아가니 이것이 우리네 삶이다.
피부는 윤기를 잃어가고, 몸에서는 각질이 떨어진다. 얼굴에는 골이 패어 살아온 흔적들이 스며있고 무성했던 검은 머리카락은 언제부터 도망을 갔는지 흰 살이 보인다. 몇 개 안 남은 것마저 파뿌리처럼 하얗게 변해간다.
입안에 있는 건강했던 치아도 가을이 오면 밤송이에서 밤이 떠나가듯 이가 빠지고 보철로 가득 채워진다. 목은 성형외과 의사도 손을 못 데는 상황이다. 목줄이 튀어나와 닭 목이 되어가다 미역줄기로 진전되면 그나마 남아 있던 조그만 희망마저 사라진다. 이때부터 멍 때리기가 시작된다.
말이 우둔해지고, 하고 싶은 말과, 입에서 튀어 나오는 말이 다르다. 옛날 기억은 조금 남아 있는데 최근 기억들은 잘 모르겠다. 항상 입안에서 언어들이 버벅거린다. 지금까지 잘 몰고 다니던 자동차 1종 면허가 시력이 떨어져 재발급이 안 되는 경우도 생긴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개운하지가 않다. 한참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몸이 나른하고 구석구석에서 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약봉지에는 많은 약들이 들어 있어 내 몸을 지탱해 준다. 각방 쓰는 아내의 숨소리가 궁금해서 잠을 자다 확인하러 찾아가 보기도 한다. 잠을 자다 깨면 다시 잠이 올 때까지 TV를 켜고 비몽사몽인데, 이때 상대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각 방을 사용하는데 이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의료보험이 잘 되어 병원을 찾으면 진찰료가 1,500원이다.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우리나라처럼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는 나라는 없다, 몸의 이상함을 느껴 내 건강을 지켜주는 주치의에게 말하면 대부분 나이 드셔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려운 것은 내 몸이 아파서 일어나는 현상인지 나이가 드니 다른 사람과 똑 같이 일어나는 현상인지 혼동될 때가 많다는 점이다. 2년마다 의료보험에서 주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하니 어지간한 병은 찾아내지만, 의료보험 수가에 들어있지 않은 검사는 안 해주니 가족력이나 몸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되면 자기가 알아서 첨가하여 검사를 받아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 의료 수준은 병명만 알고 일찍 발견한다면 못 고치는 병이 없을 정도다. 그만큼 의료 수준은 세계적이다. 옛날에는 인명은 재천이라 했지만 지금은 건강검진이 내 생명을 지켜준다. 물론 배우자의 알뜰한 보살핌이 내 건강을 지키는데 절대적이지만……
75세를 건강하게 넘기면 90세 넘기기는 거뜬하다고 한다. 모두 100세를 희망하지만 가는 분은 하늘나라로 가고 있었다. 보통 70세가 넘어 병원을 찾으면 몸에 이상한 부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체 부위 중에서 장기 하나씩 병원에 반납하고 와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해가 안 가는 것 중에 장기 중에 제거해도 살아가는데 이상이 없는 장기들이 있다. 맹장이 그렇고 담낭이 그렇다. 왜 싱거운 농담을 잘하는 사람을 쓸개 빠진 놈이라고 하는지 몰라도 주변에는 쓸개 없는 사람이 건강하게 지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의 자문역을 맡고 있는 테스 형에게 물어보고 싶다. 없어도 되는 장기를 왜 주셨는지. 조물주는 필요하니까 인간에게 장기를 주셨겠지만 이해가 안 간다. 옛날 엔진 룸이 썰렁했던 현대 자동차에서 만든 포니1이 생각이 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내 몸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경우다. 병원에 가서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동안 몸에서 보내주는 이상한 징후가 전해져 왔는데, 우리는 노인들에게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생각하고 무시했던 것이다
주변 지인 중에 자기 몸을 열심히 관리하는 분이 있었다. 몸 관리 하나는 철저하게 하는 분이었다, 혈압도 정상이고, 당뇨도 없고, 고지혈도 없으며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는 78세 된 신체 나이가 건강한 분이었다.
몸무게가 1kg만 늘어도 식사량을 조절하고 운동 강도를 높였다. 칫솔도 7개를 사용하며 하루에 네 번 이를 닦았다. 그런 분이 아침에 일어나지를 않는 것이다. 누워 있으면서 반응이 없어 팔을 흔드니 힘이 없다. 119를 불러 병원에 가서 확인하니 뇌졸중이 온 것이다. 혈전이 뇌 핏줄을 막은 것인데 혈전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골든타임이 3∼4시간이라 했는데 불행하게도 뇌졸중이 초저녁에 와서 혼자 말도 못 하고 긴 밤을 새워 지금은 회복을 해도 후유증이 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부부가 같이 자야하는 이유다
지나고 보니 그분의 과거 일상에서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멀미가 나서 버스를 타지 못하고 기차를 타야 했으며, 커피 잔을 들면 힘이 없어 잔을 놓쳐 깨뜨리는 일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지만 부정맥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건강하다는 자신감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몸이 전해 주는 전조증상이었는데 몰랐던 것이다.
터널이 붕괴 될 때는 사전에 천정에서 잔돌들이 떨어진다. 이것을 이슬이 내린다고 한다. 본 공사를 하기 위해 설치하는 가시설에서 강재에서 총을 쏘는 것처럼 큰 소리가 들리면 그것은 압(壓)이 걸려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연결부에 볼트가 부러지거나 용접부가 찢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그곳만 찾아 보강하면 된다.
산사태가 날 때는 바람이 안 불어도 나무가 많이 흔들린다. 이런 것이 자연재해가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전조 증상이다. 이런 점을 잘 파악하여 대비하면 큰 재앙은 피할 수가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몸에서 전해 오는 전조 증상을 빨리 알아차려 자주 가는 병원 주치의와 상의하면 큰 화는 면할 수가 있다. 나의 수명은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잘 받고, 하루 무심코 먹는 식습관에서 병이 찾아오고 불건전한 생활습관이 몸을 병들게 하니 균형 있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마음은 편하게 유지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노력하며, 먹는 것은 옛날 머슴들이 즐겨 먹던 거친 음식으로 길들이고 자기 몸을 통제 관리하는 의지력이 있어야 무병장수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가족묘
경주 김 씨 태사 공파 후손들이 이곳 상산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돌아가신 후에는 그 시절 상황에 따라 이 산 저 산에 흩어져 계시다 이제 이곳으로 모두 모시게 되었다.
태사 공파 22세손인 서익 할아버지께서 부여 임천에서 이곳으로 처음 오시어 현재 31세손이 강원도까지 약 30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이어온 긴 여정에서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동네에서 터줏대감으로 위치를 굳히며 가족들을 보듬고 자손들을 키워왔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어 삶의 터전이 다양해져 자손들이 해외로 나가기도 하고, 국내에 있지만 명절에 더 바쁜 직업을 가질 수 있어 산소 관리가 어려워 관리하기 쉽도록 고심 끝에 윤달에 이장을 하게 된 것이다.
풍수지리를 공부한 지관을 부른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자문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풍수지리에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전국을 돌며 본 것과 광주 죽전 연천에 모신 조삼님들 산소도 찾아가 공부도 하였다. 30년간 전국을 돌며 토목공사를 한 것이 크나 큰 도움을 주어 직접 설계하고 작업자를 선정하여 시공하였다.
좌청룡 우백호도 모른다. 다만 위치가 편안하고 안정적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 상하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균형미가 잘 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 기준으로 내가 소유하고 있는 산에 터를 잡고 조성하고 보니 내 마음이 흡족할 정도로 마음에 든다.
조선 중조까지 이름 있는 분의 유택을 찾으면 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며 묘를 썼지만, 그 후로는 평지에 배수가 잘 되고 토질이 좋고 안정감이 있는 곳을 찾아 모신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옛날에는 묘역을 인력으로 조성했으나 지금은 장비가 있으니 폼 나게 모양새를 만들 수가 있었다. 아마 이런 형식으로 묘지를 조성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으리라 생각하며, 손이 귀하니 벌초하는데 신경을 써서 설계를 하였던 것이다.
만들고 보니 당초 생각한 것보다 공사비도 많이 들어갔지만 우리를 잘 지켜주고 바르게 살도록 인도해 주신 조상님이기에 아까울 것은 하나도 없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동생에게 부담을 안 주려고 하다 보니 내 비상금만 다 들어갔다. 해 놓고 보니 주변 사람들도 좋아한다. 산소 자리가 참 좋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조상님들도 좋아하셔야 할 텐데 걱정도 되지만 좋아하시리라 믿는다. 해 놓고 마음이 편하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한 번도 뵙지 못한 조상님들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뵙게 되었지만, 무골 집안답게 체격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00년 만에 뵌 할아버지도 계신다. 그런데 유골이 장대하다. 1m 80cm는 되실 것 같다. 한번 이장한 분은 모두 산화되었지만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 유골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화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습하여 안택에 모셨다. 3일 계획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6일이 걸렸다. 아직도 법면 정리와 배수로 공사가 남았다. 내년 봄비가 오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다
풍수지리에 잘 맞는지 몰라도 이곳을 꽃동산으로 만들고 싶다. 올해는 내년 봄에 씨를 뿌릴 씨앗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산소 주변에는 키가 작은 꽃으로 사계절 피는 꽃을 심을 생각이고, 법면에는 야생화 꽃을 심을 생각이다 산소 주변에는 벚꽃보다는 이팝나무를 심는 것이 더 운치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지인들에게 알리니 꽃씨를 주는 이가 많다. 차근차근 시간을 두고 가꾸어 나가려고 한다. 앞으로 우리 가족들이 아무 탈 없이 화목하고 우애 있게 이곳을 중심으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처한 환경에서 중심이 되어 그곳에서 진리를 깨닫아라"
명예와 부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자기 본분을 지키며 따뜻한 마음으로 살았으면 한다.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 마을 촌장, 수필 집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 하고집이 등. blog.daum.net/ondong
뽕잎과 누에
이 명 년
응접실 문을 열고 밖을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나무가 뽕나무이다. 어릴 때 먹어본 오디도 먹고 싶었고, 잎과 연한 가지를 잘라 차를 만들어 마시고 싶어서 한 그루를 심었다. 옆에 같이 심은 꾸지뽕나무보다 무성하게 잘 자란다. 자기가 할 일인 양 가지도 많이 뻗고 다른 나무에 비해 성장 속도가 월등히 빠르다.
뽕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누에 먹이로 뽕잎 따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어린다. 집에서 누에를 치는 일에 유별나게 신경을 쓰시고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다. 뽕잎을 따오는 것은 심부름하는 하인을 시켜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아무리 바빠도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았다. 손수 뽕잎을 따오곤 하셨다. 잎이 조금도 시들지 않고, 싱싱하고 깨끗하며, 벌레 먹지 않은 것으로 골라 따셨다. 그중에서 제일 깨끗한 것으로 골라 누에에게 먹이로 주었다.
한편, 베틀 위에 앉아 찰칵찰칵 북소리를 내며 명주를 짜시던 엄마의 모습도 보인다. 가끔은 구수한 번데기 맛도 떠오르게 한다.
내 나이 여섯 살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산 입구나 밭 언덕에 뽕나무가 있었다. 집 사랑방 한 편에 층층으로 선반을 만들고, 선반 위에서 뽕잎으로 누에를 길렀다, 기른 누에가 고치를 만들면 고치를 다듬어 모아 고운 실을 뽑는다. 실을 뽑을 때는 마당 한 모서리에 주둥이가 넓은 솥을 걸고 솥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인다. 끓는 물에 고치를 넣어 삶으면서 실 끝을 물레에 건 다음에 물레를 돌려 실을 뽑는다. 실을 뽑고 난 후 뜨거운 물에서 바로 건져서 먹는 번데기의 맛은 정말 고소했다. 어른들 말씀이 맛이 너무 좋아서 옆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져도 모른다고 했다. 그 어떤 맛과도 비교될 수 없이 입맛을 사로잡았다. 뽑은 실은 베매기가 마치면 기계 베틀(그때는 명주 짜는 베틀을 기계 베틀이라고 했다.)로 비단(명주)을 짰다. 베매기를 할 때는 날씨가 쾌청하고 좋은 날로 택했다. 실을 뽑기 시작하는 날부터 끝날 때까지, 여러 날 동안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다 모여 우리 집은 잔치하는 날 같았다. 고치에서 실을 뽑아서 실이 베틀에 오르기 전까지 이웃 분들이 날마다 오셔서 도와주셨던 것이다. 실이 다 완성되면 그 다음 일은 큰엄마와 엄마가 베를 짜는 것이었다.
엄마와 큰엄마는 시간만 나면 베틀에 올라가 명주 짜는 일이 일과 중 하나였다. 그렇게 짠 비단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은 아니었다. 집안 어른들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 가족들 옷을 만드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 같다. 특히 아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아들 속옷은 무명천이 빳빳하여 살을 깎는다며 부드러운 명주로 만들어 입히었다. 할아버지는 삼대독자이셨다. 집에 딸은 많고 남자는 귀해서 남자를 소중히 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로 여겼다. 특별히 명주옷은 고급비단으로 가벼우면서 부드럽고, 따뜻하며, 입으면 맵시도 있어 그 당시에는 한복 천으로서 가장 으뜸으로 여겼다.
엄마는 양반집 가문에서 자란 여인이라 바느질과 음식 솜씨가 남다르다고 했다. 시집 올 때는 몸종도 거느렸던 엄마다. 어떻게 명주를 짤 수 있었는지 때때로 궁금해서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의 대답은 “무엇이든 하려고 마음을 먹고 연습하면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말끝에 “아빠가 원하시는 일이기도 하다.”고 하셨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엄마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는 보성전문학교를 나오셨고 금광일도 하시다가 고향에 오셔서 금융조합에 근무하셨다. 직장에 나가시면서도 늘 사업에 뜻을 두고, 여러 가지 사업구상을 하셨다고 했다. 잠업도 관심이 있어서 가족과 이웃 아낙들을 활용하여 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확인해 보려고, 뽕나무도 심고, 누에도 기르고, 명주도 짜게 된 것이다. 아빠의 뜻을 폭넓게 이해하고 도우시려 애쓰셨던 엄마다. 그 일로 동네 여인들도 누에 기르는 방법도 배우고, 번데기도 실컷 맛볼 수 있었다.
누에가 먹는 뽕잎에 이물질이 조금만 묻어도 뽕잎을 먹은 누에가 바로 죽는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고 깨끗이 닦아주던 기억이 난다. 그 어떤 것보다 깨끗한 환경에서 누에를 길렀다. 고모님과, 언니가 백세가 되도록 건강하게 사시다가 소천하시는 것을 보며 문득, 어릴 때, 몸 건강에 효능이 좋은 번데기를 많이 먹어서 병원에 드나들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뽕나무는 열매, 잎, 가지, 뿌리 할 것 없이 나무 전체가 독성이 없다고 한다. 우리 몸에 필요한 여러 가지 영양소로 효능을 주는 나무라고 했다. 누에는 그중에 제일 좋은 잎을 먹고 자랐으니 사람 몸에 비단을 걸치게 했고, 마지막엔 번데기로 유익함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차를 만드는 뽕잎채취는 6월 또는 9월이 적기로 가장 알맞다고 한다. 오디를 따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차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새순으로 쭉 뻗어 시원하게 잘 자란 가지를 잘라 뽕잎을 땄다. 깨끗이 손질하여 살짝 쪄서 말리다가 거의 다 말라갈 무렵 가볍게 볶아줬다. 나무 하나에서 새순으로 자란 잎만 채취한 것인데 생각보다 양이 많다. 평소에 녹차 마시는 것을 즐겨 하는 막내 여동생에게 절반을 나누어 주고도 매일 한 잔씩 몇 달은 넉넉히 마실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뽕나무는 나를 유년으로 돌려세워, 나의 가족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는 애틋한 사랑나무이다.
엄마의 치맛자락
계절이 바뀌어 옷장을 정리하고 있다. 장안 깊숙이 얌전히 개켜져 들어있는 한복 치마저고리가 눈에 뜨인다. 한복 치마저고리를 보자 예전엔 결혼한 여인들의 일상복으로 품위가 있어 우아하면서도 넉넉해 보이는 쓸모가 많았던 옷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폭넓은 긴 치마는 젊었을 때 어른들을 모시고 살 때의 일상복이다. 어느 날 김장배추를 씻는데 긴 치마폭이 거추장스러워 그 위에 간편한 몸 빼 바지를 걸쳐 입었다. 그러다보니 치마가 거추장스러워져 뒤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그 뒤로부터는 일 년에 두서너 번 명절이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 외에는 입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지난날, 엄마와 할머니 치마폭에는 꿈에도 잊지 못하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육이오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 집안에 온통 공포가 휘몰아칠 때이다. 아빠는 공산당에 잡혀가서 고문으로 등에 먹물을 끼얹은 몸이 되어 오셨다. 공산당은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죄 없는 사람을 잡아다 죄인을 만들었다. 생활이 조금만 여유가 있고, 지식인이면 무조건 잡아가 고문을 했다. 옳고 그름도 없었다. 죄목은 만들어 붙이면 되었다. 지방에서 유지급이면 다 잡혀들어 갔다. 그리고 고문을 당했다. 군산항으로 미군이 밀고 들어올 무렵, 공산 당원 다섯 명이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아빠를 잡아가려고 온 것이다. 온 식구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데 공산당이 대문을 두드릴 때 갑자기 아빠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밤잠에 들기 직전이라 이부자리도 방바닥에 그대로 깔아놓은 채였다. 공산당들은 방마다 들어가 이부자리도 다 들추고, 심지어 할머니 방, 부엌, 헛간, 변소까지 다 휘저어 놓고는 황급히 돌아갔다. 그런데 공산당이 달아나듯 사라진 후, 아빠가 아랫목 벽에 기대어 앉아 계신 할머니의 치마폭을 들추고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몸에 걸친 치마폭으로 아들을 감싸 숨기셨던 것이다. 그 일로 아빠는 죽음을 면하셨다. 그러기에 아빠의 생명을 살렸던 할머니의 치마폭을 잊을 수가 없다.
한편, 어릴 때를 그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숨바꼭질할 때마다 숨었던 엄마의 치마폭이다. 아랫동네 윗동네 꼬맹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나이는 상관이 없었다. 일터로 나가신 부모님은 항상 바빴기에 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형 몫이었다. 등에 업은 친구, 동생 손을 잡고 안아주고 어르는 친구도 다 같이 어우러져 놀았다. 내가 어릴 때는 놀이기구가 없어 아이들이 모이면 숨바꼭질이나, 땅뺏기, 줄넘기 놀이가 고작이었다. 그중에서 제일 즐겨 했던 놀이가 숨바꼭질이다.
술래가 눈을 가리고 하나둘 세는 동안,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이들은 숨을 곳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헛간이나 부엌, 장독 뒤, 나무 다발 뒤, 심지어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는다. 제일 숨기 편하고 못 찾는 곳은 엄마의 치마 속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우물에서 빨래를 하든지 부엌에서 일하시든지 상관하지 않고 엄마의 긴 치마 속에 들어가 숨는다. 치마폭에 숨으면 엄마는 그 자리에 가만히 계시다가 술래가 다른 곳으로 가면 나오라고 하신다. 찬바람이 불 때는 얼마나 따뜻한지 엄마 몸에 딱 붙어 엄마가 치마폭을 들출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때론, 어르신 말씀을 거슬러 아빠가 야단을 치시면 매를 맞지 않으려고 재빨리 할머니 치마폭을 떠들고 들어가 숨는다. 그러면 아빠는 헛기침을 몇 번 하시고 돌아서셨다.
우리 집에는 큰아버지가 돌보시는 벌통이 여러 개 있었다. 집에서 기르는 여왕 꿀벌이 집을 이탈하여 나가게 되면 꼭 필요한 것이 여인들 옥양목 긴치마였다. 치마를 두르고 나가 여왕벌을 치마폭으로 감싸 정중히 조심조심 벌통에 담았다. 그런데 재미있고 수수께끼 같은 일은 여왕벌이 집을 나갈 때이다. 어릴 때들은 믿지 못할 미신 같은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예전에는 동내 이웃이나 친척 집 초상이 나면 부고장을 보내온다. 받은 부고장을 맨 먼저 벌통에 붙이지 않으면 벌들이 여지없이 집을 나간다고 했다. 토종 꿀벌은 영물이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부고장만 오면 맨 먼저 벌통에 붙였다.
엄마 할머니 치마폭은 자식, 손자 손녀의 피난처로 생명까지 품어주는 사랑의 보자기였다. 여인의 긴 치마는 참으로 아름답고도 유용하여 그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우리 민족의 자산이다.
* 전북 여산 출생,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20), 수필집 뚝섬길, echlmn@hanmail.net
“다니엘의 창” 묵상기도를 하며
조 영 숙
다니엘은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택함을 받아 이방 나라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창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다니엘이 왕의 신임을 받는 것을 시기한 신하들은 다니엘의 흠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이 만든 금신상에 절하고 그렇지 아니한 사람은 사자 굴에 넣어 사자의 밥이 되게 하게 왕의 허락을 받았다. 왕은 나중에 다니엘이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다니엘을 구하고 싶었으나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사자에게 던져졌으나 상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 이를 도모한 사람들이 사자밥이 되었다. 이것을 본받아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 1주일 전에 한 주일 동안 하루에 한 말씀을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걸쳐 묵상하며 기도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를 실천하며 새로워지는 나의 모습을 적어 보고자 한다.
첫날 말씀은 쉼을 주제로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두 팔 벌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일일이 쉼을 주시겠다는 초대장이다. 요절을 암송하기 쉽게 어렸을 때 들은 설명이 기억에 새롭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모두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이다. 땀을 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고 해야 하는 일과 관계의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잘못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주님 앞에 나와 잘못을 회개하면 용서하셔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혹자는 우리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트레스에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하루의 수고와 짐은 잠을 통해 쉼을 얻을 수 있다. 일주일의 피로는 교회예배를 통해 주님 앞에 나가 쉼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아무런 짐도 지지 않고 살게 하겠다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기쁨과 감사로 할 수 있다면 그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워진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쉼을 찾아 사람에게 가지 말고 주님의 초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때 온전한 쉼을 맛보며 살기를 기대한다. 주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온전히 쉴 수 있게 하신다.
둘째 날은 구원을 주제로 시편 68편 19절 말씀이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매일 주님은 우리의 짐을 지신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무거운 짐을 우리를 대신해 주님이 지시면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있다. 학창 시절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는 사람에게 자동차를 태워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물건을 머리에 이고 내리지 않는다. 운전자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무거운 짐을 이고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박하면서도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무거운 짐을 지신다고 말씀했는데 우리는 맡기지 못하고 산다. 우리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면 되는데 말이다. 감사가 우리의 지친 영혼을 쉬게 하고 찬양이 새로운 힘을 얻게 한다.
셋째 날은 즐거움을 주제로 시편 16편 11절 말씀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생명의 길을 보이신다는 말씀은 사망의 길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묵을 가까이하면 검게 된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을 가까이하면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지만 슬픔이나 고통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주님을 가까이하면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약속하신다. 우리가 겸손히 주님 앞에 나가면 주님이 예비하신 복이다. 부패하고 연약한 인간으로 자신의 힘으로 기쁨을 찾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고 전능자의 품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지만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일상에서 자녀가 부모의 능력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처럼.
넷째 날은 평화를 주제로 한 말씀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위험이 많고 불안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주님이 평안을 약속하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풍랑이 그칠 날이 없다. 그래도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채우면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누가 이런 약속을 할 수 있나? 권력이나 금력, 인간의 힘으로 가지는 평안은 일시적일 수 있으나 영원할 수는 없다.
다섯째 날은 희망을 주제로 시편 62편 5절 말씀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낙심하기 쉽다. 그런데 주님이 침묵하라고 말씀한다.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내뱉기 쉽다. 그러면 그렇게 사고가 흘러가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침묵하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씀한다. 그때 우리는 소망을 볼 수 있다. 나는 비록 약하고 능력이 없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능력이 많으시며 소망으로 인도하신다.
여섯째 날은 감사를 주제로 골로새서 2장 7절 말씀이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뜻한다.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은 말씀을 배운 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말씀을 배워서 아는 대로 믿음으로 살면서 감사가 넘치게 살라는 명령이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별개의 경우가 많다. 믿는 것과 믿는 대로 사는 경우가 다른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말씀을 배워 아는 대로, 믿는 대로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기쁨, 감사, 평안, 구원 등 온갖 좋은 것을 맛만 보고 실제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거룩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리에 던져져 사람들에게 밟힐 소금이 되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한 구절 말씀 묵상은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쉼, 구원, 즐거움, 평화, 희망, 감사할 수 있도록 나를 인도했다. 이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선물이다. 이것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누리는 복이다. 이러한 축복을 감사로 받아 누리는 주님의 지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이웃에게도 이런 복을 누리자고 전하고 싶다. 나의 삶이 주변에 신뢰를 주지 못해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하는 기도를 본받아 아침, 점심, 저녁 편한 시간을 선택하여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기본 시간을 각 30분 정도 하기로 했으나 상황에 따라서 짧게는 10분 정도에 그친 적도 있다. 장소는 책상 앞에서, 길을 걸으며,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을 활용하기도 했다. 숲길이나 공원 산책을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하며 말씀을 조명하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한 절 말씀 묵상은 생각의 확장을 가져오는 경험을 하였다. 여기에는 지면의 제약으로 기본적인 내용만을 기록했지만 믿음의 훈련을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 한 절 묵상이 좋은 것은 알았으나 계속해서 묵상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훗날 다시 도전해보기로 마음에 다짐한다.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대전시민대학 ‘웰다잉’ 강사, ysc1951@naver.com
소쩍새 울던 콩밭
전 월 득
내 어릴 적 고향 큰독골에는 어머니의 꿀이 흐르던 밭이 있었다. 빈손으로 새살림을 차리고 1년 먹을 양식까지 보태어 거머쥔 금싸라기 땅이라고 하였다. 벼를 심는 무논은 바로 집 앞에 있었지만 어머니의 발걸음이 더 필요한 사래 긴 밭은 휘어진 오솔길을 한참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먼 거리에 있었다.
황량한 골짜기의 비옥한 땅에 긴 침묵의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오면 엄동설한 견뎌온 보리 싹들이 새파랗게 이랑을 이루고 엄마를 기다린다. 농한기의 달콤함도 잠시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본격적인 농부가 된 아낙은 날마다 호미 춤을 추면서 희망에 젖어 하루해가 짧다고 하셨다. 주변은 온통 산으로 둘러져 진달래 벚꽃이 만발하고, 생동하는 봄 동산에 아홉 살 동심도 덩달아 뛰며 꽃고무신 가시덤불에 찢기는 줄 모르고 오르내렸다.
햇살 따가운 유월이 오면 송글송글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송이들이 후텁지근한 바람결에 와삭거리다, 몇 가마니의 알곡으로 이어져 텅 빈 곡간을 가득 채워놓는다. 그제야 엄마는 허기진 보릿고개를 무난히 넘기고 구릿빛 얼굴에 뽀얀 미소를 지으며 안도하셨다. 보리를 베고 나면 뒤돌아서 콩을 심는 이모작에 들어간다. 바싹 마른 가문 하늘을 바라보며 촘촘히 뿌려놓은 콩밭에는 산비둘기 떼 지어 모여 들고 오색빛 아름다운 장 꿩들이 날아들어 아낙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하였다. 엄마는 무신론자였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며 하늘이 도와야 사는 거라고 중언부언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지혜로운 엄마의 콩밭에는 콩만 심는 게 아니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수용하며 사이사이 열무도 심고 뛰엄뛰엄 참깨와 옥수수를 심어 한 이랑에 뒤엉켜 싱그럽게 자라나고 있었다. 홀로 김을 매고 가꾸며 가족들의 먹거리를 공수하는 엄마에게 아홉 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큰언니가 만들어준 새참바구니를 나르는 것뿐이었다. 나는 포실포실한 감자 바구니를 옆에 끼고, 구불구불한 풀섶길을 깨금발하며 엄마한테 가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좁다란 풀섶길을 걷노라면 하얀 목덜미를 바르르 떨며 아기 청개구리 발밑으로 뛰어들고, 베짱이가 머리 위로 포르르 날아들면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였다. 지천에 오롱조롱 산딸기가 익어가고, 햇살 담은 자연의 맛 산머루는 꿀을 바른 듯 달콤하여 한 사발 가득 따다 엄마 앞에 내밀면 대견한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벌 쏘일라, 뱀 물릴라” 조심하란 당부도 하였다. 고요하고 청정한 콩밭 주변에는 나의 관심거리가 많았다. 가재잡고 다슬기 줍느라 숨죽여 있을 때, 호미질에 분주하던 엄마가 불현 듯 큰소리로 나를 찾아 나서면 고즈넉하던 큰독골에 쩌렁쩌렁 엄마의 정겨운 목소리가 메아리쳐 휘돌아 나갔다. 이쪽에서 저쪽 끝이 까마득하던 사래긴 콩밭에 구부정히 엎드린 엄마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고 사각거리던 호미질 소리도 점점 잦아들며 어깨가 축 늘어지는 듯했다. 산그늘 서서히 내려와 으스름 녘이 되면 엄마는 애기열무 한아름 머리에 이고 타박타박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한다. 때마침 지켜보았던가? 바람마저 잠들어 고요하던 산모롱이 숲에서 뻐꾸기와 소쩍새가 장단 맞추며 낭랑한 목소리로 “잘 가시라” 인사하듯 따라 다녔다. 그 맑고 고운 멜로디에 감동한 엄마는 “미물의 날짐승이 내 마음을 아는 듯하다.”며 둔탁한 마음을 녹이며 새들에게 화답하곤 하셨다. 지금도 엄마의 안부가 그리울 때면 형제들과 고향에 가서 큰독골 콩밭의 엄마를 찾아 나선다. 제아무리 뾰족한 새 호미라도 엄마 손에 잡히면 조막손이 된다고 하소연하던 큰독골 사랑이었건만, 무심한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만 간다.
소쩍새 울음 이마에 달고 날마다 오르던 엄마의 오솔길도, 청개구리 피하며 깨끔발 하던 나의 풀섶길도 모두 사라지고, 이젠 경계마저 허물어진 콩밭만 널브러져 있다. 가족들의 심장이었고 젖과 꿀을 따던 금싸라기 땅이었건만 보존의 가치마저 상실된 현실에서 엄마를 만나면 무어라 말할까?
수십 년의 풍화 속에 여전히 변하지 않았을 구슬픈 소쩍새 울음만이 허공을 가르며 엄마의 콩밭을 지켜 주리라.
가을, 그리고 나
손대면 토옥 터질듯이 맑은 가을날 눈부신 태양을 보며 살아있음에 감사가 넘치는 아침이다. 수개월째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 중에도 청명한 하늘과 산들바람의 상쾌함을 느끼며 선인들의 어록을 되새겨본다. ‘한 달이 크면 한 달이 작다’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이치는 공평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언제부터인가 뿌연 미세먼지로 우중충한 나날이 계속되면서 계절의 정체성마저 실종되었다고 하소연 하였는데, 올해 가을은 어느 해보다 맑고 쾌청하여 코로나 방역 덕분이라 생각하니 옳고 그름과 길고 짧은 것의 정의를 단순히 내리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화창한 날씨에 매료될 때가 많다.
또한 해마다 찾아오는 이 아름다운 가을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51년 9월 7일 새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염려와 사랑이 시작된 축복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6.25 직후 가난한 농촌에서 오곡이 익어가는 가을에 태어났지만 토끼 직성을 가지고 풀끝이 마르는 절기에 태어났으니 배고픈 사주가 아닐지 하며 막연한 염려를 하시던 어머니를 보면서 자식사랑의 한계는 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토록 살뜰한 사랑 속에 자라서 일까?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고 착한 딸로 살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슬하에 오남매를 키우면서도 나 같은 자식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며 욕심 아닌 욕심을 내비치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품안의 자식이란 말이 있듯이 사랑으로 키워준 부모님께 결혼과 동시에 효도는 먼 이야기가 되었다. 내 삶의 넋두리만 합리화하면서 용돈 한번 넉넉히 드려보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아 먹먹한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딸집에 오실 때 마다 바리바리 보따리 챙겨 이고지고 오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 했던가! 즐겨 입는 청바지와 좋아하는 돼지고기 소주 한 병까지 챙겨 오시니 손녀와 손주들은 차치하더라도 사위의 마음까지 사로잡으며 장모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게 하던 지혜로우신 어머니셨다. 언제나 드리는 것보다 받는 게 많아서 죄송해하면 너의 집에 오면 마음이 편해서 좋다고 하시던 말씀이 그나마 위안이고 감사한 일이었다.
며칠 전 찬란히 빛나던 가을날의 오후, 년 초부터 온가족이 야심차게 계획했던 하와이 여행티켓을 코로나19에 반납하고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70회 생일 파티가 있었다. 코로나 방역을 준수하며 조심스럽게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 남편과 친정어머니의 부재는 못내 그립고 아쉬운 마음으로 한쪽이 텅 빈 느낌이었다. 사랑스런 삼남매를 낳아주고 함께 키워주던 두 분이었기에 나 혼자 받는 과분한 사랑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부모님께 다하지 못한 효도를 우리 자녀들은 하나도 빼지 않고 나에게 다 해주는 것이 기특하고 뿌듯하면서도 회한의 마음은 쉽게 삭으러들지 않았다.
우리 자녀들은 나보다 앞선 생각으로 힘든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도 내색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나에게 필요한 선물을 각자 준비하여 내가 깜짝 놀라 감동하게 한 것은 참으로 기쁘고 고마운 일이었다.
학창시절 또래친구들이 앞 다투어 해외 유학길에 오를 때 몸져누운 아빠의 병간호가 급선무라서 제대로 해준 것도 없기에, 이 같은 영광을 기대하면 욕심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뜻밖에도 나보다 훨씬 착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삼남매 가족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올곧게 자라고 성숙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 역시 아낌없는 사랑으로 우리 가족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하며 자녀들의 든든한 울타리로 여생을 웃으며 살고 싶다.
*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20), jwd503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