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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네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김규식 탁월한 국제외교관 교육자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 1. 29~1950. 12. 10) 선생은 1881년 1월 29일 조선 문신이었던 김지성(金智性)과 경주 이씨 사이의 2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청풍(淸風), 호는 우사, 죽적(竹笛)이며, 중국에서 활동할 때 김성(金成), 중문(仲文), 일민(一民), 왕개석(王介石) 등의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의 부친 김지성은 선전관을 역임하였고, 개항 이후에는 외교 관리로 일본과 러시아 등지를 다녀온 적도 있었습니다.
양반 관리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선생의 성장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친이 부산 개항장에서 일제가 불평등 무역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그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귀양을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충격으로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선생은 4세의 어린 나이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선생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 집에 입양되어, 1887년부터는 그가 세운 고아학교인 민로아학당과 구세학당에서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고 1896년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선생은 당시 국문과 영문으로 발간되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활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서재필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국민계몽 및 정치, 사회 운동 단체로서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조국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근대식 교육을 받았던 선생이 이 같은 독립협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은 언더우드 목사의 주선으로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였고, 또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습니다. <독립신문>사에 근무하면서 선생은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 의식세계 또한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이때 서재필은 유망한 청년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는데, 선생 또한 그러한 권고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서재필의 영향으로 미국 유학 단행,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약관의 나이에 미국 유학을 단행한 선생은 1897년 가을,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녹(Roanoke College)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습니다. 1893년부터 30여 명의 한국 학생들이 이 대학에 유학하였으므로, 당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선생은 전 과목 평균 90점 이상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라틴어, 불어, 독일어 등 외국어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이 생전에 영어, 불어, 중국어, 일어는 물론, 러시아어, 독어, 라틴어, 인도어까지 구사하였다고 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선생이 파리강화회의의 한국 대표로 선발된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어렵게 유학생활을 마치고, 1903년 6월 로녹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1903년 가을 선생은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고국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 결심으로 1904년 봄 귀국 길에 올랐습니다. 귀국 후 선생은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도와 선교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경신학교, Y.M.C.A 학관, 배재학당 등에서 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에 전력하였습니다.
상해 망명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이 시기 조국과 민족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식민통치체제의 안정을 위하여 민족운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1910년 12월 황해도 지역 민족운동자 탄압에 이용된 안악사건이었고, 이듬해 신민회 민족운동자들을 겨냥한 ‘데라우치총독 암살 음모 조작 사건’이었습니다. 안악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김구를 체포하였으며 데라우치 암살 사건을 빌미로105명의 신민회민족운동자들을 기소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국내의 독립운동 기반이 붕괴되었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망명하였습니다. 선생 또한 이때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결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선생은 호주 유학을 핑계로 망명길에 올라 1913년 4월 중순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상해에서 선생은 신규식의 주도로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등이 1912년 7월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파견
제1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폭압적이고 착취적인 식민주의, 제국주의는, 정의와 평화를 주창하는 인도주의와 민족주의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노농정권이 들어서면서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을 선언하자,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와 반(半)식민지 국가의 민족들은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선전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선생이 파리에 가서 한국 대표로 활동할 인물로 선발된 것입니다. 선생은 신한청년당의 요청이 있자 이를 기꺼이 수락하고, 2월 1일 파리를 향해 상해를 출발하였습니다.
선생이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것은 3월 13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선생은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접하고 용기백배하여 파리 샤토당가에 한국대표관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독립 외교활동에 들어갔습니다.
파리위원부에 통신국을 병설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각국 대표들과 언론사 및 주요기관에 배포함으로써, 3.1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세계만방에 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화회의에 <일본으로부터 해방 및 독립국가로서 한국의 재편성을 위한 한국 국민과 민족의 주장>이라는 공고서와 비망록을 제출하였습니다.
여기서 선생은 역사적 사례와 국제관계, 국제법 등을 활용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공격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갔습니다. 비록 열강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 못하였지만, 선생의 독립 외교활동은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뒤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즉 선생은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각국 대표들을 방문하여 3․1운동 이후의 국내 상황을 전하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설파해간 것입니다.
조소앙,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 창당
1933년 8월 미국에서 수천 불의 투쟁자금을 모금하여 귀환한 뒤, 선생은 민족대당 건설에 나섰습니다. 그것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의 성격을 띠었으므로, 그 결속력과 통제력에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민족대당의 결성이 요청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선생은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민족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전선 형성에 진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남경 금릉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선생이 대표인 대한독립당과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의 창당이 이루어졌습니다.
광복 후 납북되어 같은 해 서거
1945년 8․15 광복 이후, 선생은 임정 요인들과 함께 11월 23일 1차로 귀국하였습니다. 남북 양쪽에서 단독정부의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김구 선생과 더불어 민족분단으로 치닫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기 위해 1948년 4월 북행하여 남북협상에 참석한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선생이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 선생은 납북되어 같은 해 12월 10일,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7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규식 선생의 활동은 대단했습니다. 그 옛날 5~6개국 언어에 능통하고 마지막 민족운동,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이 남북 양쪽의 단독 정부를 반대하셨습니다. 즉, 하나의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70세로 서거하셨습니다. 그의 일생은 민족 독립운동 애국에 평생을 바친 것입니다.
자료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김규식 [金奎植] - 탁월한 외교활동가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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