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셋째 날(1984년 1월5일)
지금 우리가 정진精進하고 있습니다만, 그 완전한 정진 틈이 없는 정진은 지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헌데 이러한 틈이 없는 정진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부처님 경전에 말씀하신 데가 있어요. 그것은 ‘상사리象舍利아사리阿闍梨’ 라, ‘상사리’이분은 부처님의 전신前身입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서 『본생경本生經』, 본생경은 부처님이 금생에 나오시기 전에 과거 무수겁 동안에 낳고 죽고 하시면서 닦고 할 때, 여러 가지 보살행의 모습을 적은 경전입니다. 본생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상사리라는 비구가 공부를 한다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대개 수행법을 어느 정도 터득한 다음에는 혼자 많이 했습니다. 대중들과 있으면 관심도 쓰이고 여러 가지 복잡한 잡음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혼자 많이 했습니다. 총간좌塚間坐라, 대중이 없는 묘지에 가서 한다든지 사막 가운데 혼자 가서 한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혼자 했습니다.
‘상사리’라는 비구는 혼자 선림禪林에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입정入定이라 선정에 들어간다 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참선 좀 해서 선정에 들어간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여 선정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그때는 선정의 팔재환八災患이라 선정을 방해하는 그 재환을 다 없애버리고서 오로지 정적에 잠겨야합니다.
선정을 방해하는 그 팔재환이 어떤 것인가 하면 여덟 가지 인데 ‘우憂, 희喜, 고苦, 락樂, 심尋, 사伺, 입식入息, 출식出息’입니다. 우憂란 근심할 우憂자, 근심하고 우수에 잠기는 것이고 희喜는 기쁠 희喜자, 마음이 기뻐서 들뜨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름하는 것도 참선에 방해가 되지만 마음이 들떠서 마음이 부동浮動한 것도 참선에 방해입니다.
고苦라 괴로울 고苦자 괴로워도 참선에 방해입니다.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는 괴로우면 공부가 잘 될 줄 알지만 그 역시 괴롭다는 분별 때문에 방해입니다. 낙樂이라 낙도 역시 안락스런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들뜨게 만들어 이것도 참선에 방해입니다.
심尋은 찾을 심尋자, 즉 말하자면 분별시비分別是非한다 말입니다. 거친 분별보고 불교술어로 심상尋常하다라는 심상, (그전에 일본사람은 국민학교를 심상소학교라고 했어요) 자꾸만 이렇게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거친 분별 시비 이것보고 심이라 합니다. 그다음은 살필 사伺자 사라, 이것은 조금 더 세밀한 미세한 분별을 말합니다.
그다음은 입식入息이라 들 입入자, 숨쉴 식息자 즉 말하자면 우리가 들어 마시는 호흡이라 말입니다. 그다음은 출식出息날 출出자 숨쉴 식息자, 출식입니다. 내 쉬는 숨입니다.
여러분들 참선을 해보신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숨 이것이 굉장히 방해합니다. 숨이 고요히 해야 할 것인데, 이 숨이 헐떡거리면 도저히 참선을 못합니다. 몸도 무겁고 또는 망상妄想도 나고 등골도 이렇게 개운치 않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말입니다. 우리 참선과 숨 호흡呼吸과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숨을 다스리지 못 하면 깊은 참선을 절대로 못합니다.
이상의 ‘우, 희, 고, 낙, 심, 사, 입식, 출식’ 이것이 참선을 방해하는 8재환이라, 재앙 재災자 근심 환患자 참선을 방해하는 원수와 같다 말입니다. 이것을 못 잡으면 참선을 못합니다.
헌데 아까 제가 말씀처럼 선정에 들어간다, 입정入定이라 선정에 들어간 것을 입정이라 하지요. 입정한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방금 말씀한 것과 같이 팔재환八災患을 다 끊어버려야 입정入定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불교에서 공부하는 스님이라 할지라도 과연 입정한 스님네가 몇 분일 것인가 생각하면 참 비관적입니다. 우·희·고·낙 아까 말씀처럼 좀 거치러운 분별 심尋, 아주 미세한 분별인 사伺와 또는 호흡이 들숨 날숨입니다. 호흡까지 딱 끊어질 정도로 참선을 해서 들어 갈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될 것인가?
헌데 상사리象舍利비구는 호흡도 끊어질 정도로 입정을 했다 말입니다. 참선이 익어지면 그때는 그냥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 안 쉬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기 숨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착 가라앉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꼭 탁수濁水와 같아서 흐린 물과 같아서 가만 두어 흐린 물에 앙금이 가라앉고서 바닥이 훤히 비추어와야만 도를 깨달을 텐데, 그렇게 되려면 방금 말씀처럼 호흡이 잠자버려야만 된다 말입니다. 물론 완전히 끊어져 버리면 죽어버리겠지요.
개구리가 동면을 날 때에 땅속에 가만히 있는 것 보십시오. 숨은 쉬고 있지만 결국은 하도 숨이 고요해서 그땐 숨을 안 쉬는 것같이 보여 개구리도 의식意識을 못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입정할 수 있는 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그와 같이 숨이 고요해야 합니다.
상사리象舍利비구는 그와 같이 고요히 숨이 딱 멈추었다 말입니다. 공부를 어떻게 했던지 머리도 쑥대머리가 되서 봉두난발蓬頭亂髮이 되었겠지요. 옷인들 관심 있겠어요. 머리에 관심이 있었겠어요, 숲속에 들어가 앉아서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 되어서 마치 떨기모양으로 돼있고 하도 꼼짝도 안하므로 새란 놈이 머리에 날아와 집을 지었다 말입니다.
그렇게 입정한 분들은 마치 나무토막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저 같은 중도 공부한다고 했지만 참다운 입정은 다 못해서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입정문제는 나무토막 같이 되어서 한 번 들어 앉아버리면, 내가 언제 나가야 되겠다 생각하면 그 기한에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7일후에 나가야겠다 하면서 입정 해버리면 그 7일 동안은 몰라버린다 말입니다. 그래도 7일이 되면 그때 나가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30년 후에 나가야겠다 하면서 들어앉아 버리면 나올 때까지 그동안 꼭 고목사회枯木死灰라, 다 말라빠진 고목에 불길이 지나간 뒤 재나 같지만 30년 지나면 나와진다는 겁니다.
상사리 비구도 입정을 한다고 작정했고 입정을 했다 말입니다. 나무토막 같이 보이고 하도 앉아 숨도 안 쉬고 있으니 새란 놈이 머리에 와서, 출정出定을 하려고 좀 까닥 해보니 그때는 의식이 돌아오니까 머리가 이상해서 머리를 만져보니 새 둥우리가 있고 새알이 있다 말입니다.
깐 것도 있고 미쳐 안 깐 것도 있고, 그때 상사리 비구가 생각하기를 ‘아 이것 서서 덤벙거리면 내가 죽은 줄 알고 어미 새가 둥우리를 치고 알을 낳았는데 이놈들이 죽어버리겠구나’ 어미가 알을 까가지고 새끼를 키워서 날개가 돋아 날아가야 할 텐데, 이것이 내가 새끼를 죽이겠구나 생각해서 다시 또 입정을 했다 말입니다. 새가 알을 품고 날개가 나와서 날아간 다음에 일어나야겠다. 그런 생각에 다시 입정을 해서 나중에 어미 새가 새끼를 다 키워서 데리고 날아가기를 기다려서 출정을 했다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선하는 사람의 모범입니다. 여러분들 인도 요기 말씀 들으셨지요. 인도 요기들 역시 그와 같이 깊이 들어갑니다. 어떤 분들은 딱 묶어서 땅속에 몇 개월 동안 파묻어 두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괴롭다는 생각, 시름<근심걱정>하는 생각, 기쁜 생각, 마치 고목과 같이 안 되면 안 됩니다.
중국 원나라 때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스님이 계셨는데 임제종 스님입니다. 그분도 위대한 도인이지요. 고봉어록高峰語錄 이란아주 훌륭한 어록이 있습니다. 그분이 공부할 때 고목당枯木堂이라, 사람도 뭣도 아닌 고목같이 죽은 그런 형태가 되도록 까지 공부한다고 해서 고목당이라, 자기 공부하는 방 현판에 써놓고서 10년 동안을 15년이라는 말도 있는데 문지방도 안 나서고 공부를 했다는 말입니다. 밥 들여 주는 것 한 입만 먹고서 말입니다. 과장해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그렇게 전기傳記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조백대사棗栢大士라, 이분은 이통현李通玄장자란 분인데 이분은 화엄경론華嚴經論이라는 『화엄경華嚴經』을 주석하셨는데 알아먹기 쉽기도 하고 부연도 하여서 훌륭한 논장을 냈습니다. 화엄경 논장을 내신 조백대사-조백이란 대추나무 조棗자 잣나무 백栢자 그래서 조백대사란 말입니다.
어째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가 하면은 이분이 화엄경을 보니까 화엄경이 하도 좋아서 어떻게 하면 화엄경을 풀이해서 훌륭한 보다 더 일반대중이 알아먹기 쉽게 가장 합리적이게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자기가 보통 사람 모양으로 밥이나 먹고 그냥 앉아만 있으면 안 되겠거든요. 뭣인가 깊은 공부를 해야만 싶어서 내가 그야말로 참 한없는 좌정을 하면서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도 틈이 없는 경계에 이르러가지고 해야겠다고 그렇게 작심하고서 자기를 외호하는-외호는 밖에서 돕도록 말입니다.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도 밖에서 돕는 분이 없으면 안 됩니다.
공부할 때는 꼭 세 가지 선지식善知識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는 법法을 지도한 분, 교수하시는 교수선지식敎授善知識 이 필요하고,또 한 가지는 같이 공부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편달도하고 적선하는 도반道伴인동행선지식同行善知識필요하고 말입니다. 나머지 한 가지는 외호 선지식이라 밖에서 공양도 준비하고 시주도 해주는 그런 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있는 것도 역시 외호해서 사방에서 시주도 하니까 이렇게 지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도 외호外護하는 분이 없으면 안 됩니다.
헌데 조백대사 그 분도 자기가 외호선지식에게 시주도 부탁하고 ‘제가 3년 동안은 용변 보는 것 외에는 마당에도 안 나올 것이니까 하루에 나한테 대추 10개와 잣나무 떡 3개만 달라’고 했단 말입니다. 매일 그걸 3년 동안, 대추 열 알과 잣나무 떡 세 개로 하루 한 끼만 말입니다. 그렇게 먹으면서 결국은 그 청정 무비한 마음에서 화엄경론이라는 그 시대를 초월한 걸작을 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본다하더라도 역시 심상尋常한 마음에서는 공부를 못 하는 것입니다.
초심<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서 보면 약득획보若得獲寶방하피낭放下皮囊이라, 만약 보배를 얻으려하면-보배는 무엇입니까 가장 큰 가장 위대한 보배가 삼보三寶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그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자성부처님 아닙니까. 그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보배 영원히 안 썩고 안 죽는 보배, 일체공덕을 갖춘 보배는 불성佛性우리불성 아닙니까? 우리 인간성의 본질은 우리 부처님 성품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본질인 부처님 성품입니다.
이러한 것을 얻으려 하시려면 그냥 무보수로 헐값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방하피낭’ 이라 놓을 방放자 아래 하下자 가죽 피皮자 자루 낭囊자 이런 가죽 몸뚱이를 딱 버려야 된단 말입니다. 몸뚱이를 제일로 소중히 알아서는 절대로 공부 못 합니다. 무슨 공부나 다 그렇습니다.
아까 입승스님이 반야바라밀般若婆羅蜜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불교는 그 반야를 얻는 것입니다. 반야란 무엇인가? 실상지혜實相智慧입니다. 상대 유한적인 좋다 궂다 그 상대적인 지혜가 아니라 실상지혜 말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지혜가 실상지혜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실상지혜인가. 이건 바로 공空지혜 입니다. 제법은 공이라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우리가 보는 것 같이 존재하지 않고서 텅 비어있다 말입니다. 공지혜가 이것이 실상지혜요 이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상제비구는 나중에 공부해서 ‘상제보살常啼菩薩’이 되었습니다만, 상제비구 그 분이 선지식을 만나서 반야般若를 얻어야겠는데, 반야라는 것은 ‘참 지혜’, 죽지 않는 지혜 즉 말하자면 생사를 초월한 지혜입니다. 반야는 실상지혜,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이 있지 않습니까. 『반야심경般若心經』입니다.『금강경金剛經』도 본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입니다.
금강이라는 것은 파괴할 수 없는 견고 부동한 것이 금강金剛아닙니까? 그런 견고부동堅固不動한 참다운 지혜 ,실상지혜 영원히 변치 않는 지혜 우리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해탈 시켜서 영생할 수 있는 지혜 이것이 반야란 말입니다.
그 선지식도 많이 알지 못해서 반야의 내용을 모른다 말입니다. 나는 반야의 내용을 모르니까 당신이 반야를 구하십시오. 자기를 인도하는 스승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까 반야라는 것이 그와 같이 좋은 것 인데-반야지혜가 최상의 지혜인데-반야를 구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스승이 상제비구 당신이 반야지혜를 구해오십시오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상제비구가 반야를 구해야 하겠지요. 자기 스승님 보고 반야를 어디서 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여기서 부터서 몇 천리 밖에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 몇 천리 밖에 가서 중향성衆香城이라, 아주 향기만 풍기는 성城, 전단향栴檀香과 같은 향기만 풍기는 아주 훌륭하고 장엄스러운 성이 있는데, 그 성에 가서 훌륭한 스님인 법용보살이라 - 법 법法자 용솟을 용涌자 말입니다. 법을 어떻게 잘 말씀하던지 법이 마치 진리가 용솟음치듯이 설법하시는 법용보살이 계시는 거기에 가서 반야바라밀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을 한다 말입니다.
상제비구는 아주 적빈赤貧해서 아주 곤란스러워서 거기까지 가는 노자도 없다 말입니다. 그런 선지식한테 가면서 빈손으로 맨 낯으로 갈수 없고, 노자를 장만할 겸 그 선지식한테 갖고 갈 폐비幣篚즉 예물禮物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길이 없다 말입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이 어둡고 특출한 사람 아니면 반야를 구하려 했겠어요, 우선 자기가 잘 먹고 잘 입고 몸뚱이를 버리려 하는 게 아니라 살찌우려 하겠지요.
허나 이 상제비구도 과거 전생에 닦아 나온지라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 전신前身이었습니다. 그만치 마음이 선량하고 진리를 위해서는 앞뒤로 불물을 안 가리고 던지는 그런 분이니까 어떤 고난도 무릅쓰고 반야를 구하려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뚱이를 바쳐 돈을 벌려고 며칠이나 한 달이나 일을 할 테니 몸을 사라고 외치면서 마을로 다닙니다.
우리들은 마구니하면 아주 무서운 모양만 하고서 우리를 방해하고 해치고 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구니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마구니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주 가냘프게 우리에게 동정을 구하는 그런 마구니도 있고 합니다. 어떤 때는 마구니가 아주 예쁜 모양으로 와서 우리를 유혹한 때도 있고, 석가모니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하실 때 제일 끊기 어려운 마구니가 무엇이었던가 하면은, 천녀天女 모습을 한천상의 아주 예쁜 세 여인이 아양 부리고 춤추고 하는 그런 여인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보실 때는, 그 때는 아직 부처님이 덜 되시었지만, 싯달타 태자가 볼 때는, 역시 그 공부가 익어 가는지라 저것도 해골에 가죽만 입혔구나. 부정관不淨觀을 해서 미인도 보니 역시 저것도 해골에 가죽만 입혔구나, 이렇게 딱 관조觀照하니까 그냥 즉시에 세 천녀가 순간적으로 변화 되어버린다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구니를 퇴치했다 말입니다.
헌데 이 상제비구도 자기 몸을 팔아서 물론 완전히 노예처럼 팔지는 않겠지만 품팔이를 하려고 했지만, 마구니가 생각하기를 상제비구가 공부하면 틀림없이 부처가 될 텐데, 그렇게 되면 결국은 마魔의 나라는 멸망한다. 그만치 악마가 핍박을 받아서 악마가 없어진다. 그래서 상제비구가 외치는 소리를 못 듣게 했단 말입니다.
이것은 비유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도 공부가 잘 될라고 하면 꼭 무슨 마가 붙습니다.
저와 같은 중도 삼동결제 여름결제結制를 한 번도 안 쉬고 했습니다만, 그렇게 많이 하는 삼동결제 여름결제 동안에 마장魔障없이 잘 나갔던 적이 없어요. 별로 많지 않아요. 꼭 무슨 하여튼, 하물며 자기 고향에서라도 어머님이 아프단 말입니다. 아버지가 아프다. 꼭 가서 안보면 안 될 정도로 뭔가가 있습니다. 그러면 애써 공부하다가도 가야죠.
이런 것도 마구니 장난인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공부를 방해하는 것은 자기 아버지 모양을 하고 왔던 어머니 모양을 하고 왔던 이것은 마구니 장난입니다. 상제비구가 공부하면 도인이 될 것 같으니까 마구니가 일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못 듣게 했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소리를 외쳐도 아무도 누가 자기를 몸을 살 사람이 없다 말입니다.
그때 소리가 들려오니까 마구니가 앞에 나와서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값에 당신 품팔이를 살 수는 없고 단지 내가 필요한 것은 당신의 골수骨髓, 뼈 속에 있는 골수가 필요하다’고 했다 말입니다. 아무리 선지식을 만나고 싶고 선지식에게 가져갈 마땅한 여러 가지 예물을 사고 싶다 하더라도 뼈를 부러뜨려 골수를 내주는 건 쉽지 않겠지요. 허나 이 상제비구는 그 반야를 구하고 싶다는, 반야 법문을 듣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자기 몸뚱이는 기분에 어디로 간 곳이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팔을 부러뜨려서 골수를 내려한다 말입니다. 그때 마침 아주 부잣집 처마 밑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부잣집 2층에서 예쁘고 하얀 아가씨가 그걸 봤단 말입니다. 잘나고 젊은 사람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걸 구하려고 자기 팔을 부러뜨려 골수를 내려하니 그걸 차마 볼 수 없단 말입니다.
2층에서 달음박질로 내려와 잠깐 멈추라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구하려가는 노비勞費라든가 반야바라밀을 설법하시는 법용보살에게 드리는 예물은 내가 다 장만할 테니까 몸을 부러뜨리지 말라고 한다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쁠 것입니까? 아무리 법문을 듣고 싶어 하지만 자기 몸을 희생시켜서는 어려울 것이고 그렇지 않고 하는 길이 있다고 하니까 환희심이 충만하겠지요.
그래서 아가씨가 자기 부모님께 말씀드려 갖은 여비를 장만해서 여비도 대고 예물도 사는데 조건을 내건단 말입니다. 아가씨의 조건은 금생에 자기와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그래 딴 길은 없고 자기 몸의 골수는 내야 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그러자고 그래서 같이 갔다 말입니다. 교통수단이 나쁘지만 물론 여비는 있기에 마차로 천리 길을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겠지요.
마침내 중향성衆香城이라 향기가 풍기는 그야말로 찬란하고 장엄한 성루에 갔습니다. ‘법용보살’ 계신 곳을 물어 가서 보니 수천 명이 모여서 법용보살한테 반야바라밀 법문을 들으려 한다 말입니다. 허나 마치 자기가 가자마자 법용 보살이 7년 동안 삼매에 드신다는 겁니다. 아까 말한 입정入定말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가니 가자마자 7년 동안 입정해서 삼매에 들어버리면 얼마나 한탄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7년 동안 같이 간 아가씨와 상제비구 둘이서 한번 잠도 안 자고서 꼬박 기다렸단 말입니다. 나중에야 소중한 반야바라밀 법문을 들을 수 있었지요, 즉 공空지혜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제법이 공이다. 반야심경에서 조견照見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이런 말씀이 모두가 이와 같이해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손쉽게 듣지만은 이러한 법문은 이같이 어렵사리 해서, 이 분들뿐만 아니라 무수한 수행자들이 생명을 몇 천 번 바치고 구해서 얻은 것이 반야바라밀 공空지혜 실상지혜입니다.
참다운 지혜는 분명히 제법공諸法空입니다. 제가 몇 번이고 역설 했습니다만 어떻게 애쓴다 하더라도 제법諸法이 공空인지를 못 통하면 절대로 도道는 못 통합니다. 어찌해서 그런가 하면은 제법이 공인지를 알아야 바로 보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도 공이요, 내 몸을 구성하는 어떤 것도 다 공이요, 내 마음도 공이요, 마음뿐만 아니라 저 앞에 있는 남도 공이요, 천지 우주가 두두물물 전부가 다 공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할 때는 말입니다, 공을 못 느끼면 마음도 개운치가 않습니다.
임제 선사 법문에서 ‘휴거혈거休去歇去철수개화鐵樹開花’라 마음을 쉬고 또 쉬어라 그러면 쇠鐵로 만든 나무에서 꽃이 핀다. 쇠로 된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은 공적空寂의 신통 지혜가 발휘한 것이지요. 신비로운 신통지혜가 발휘가 안 되면 쇠로된 나무에서 꽃이 피겠어요?
마음을 텅 비우게 해서 마음이 공이 되어야만 비로소 공성空性공의 본성은 불성이고 불성은 즉 마음입니다. 형체 있는 물질은 상이 있는 물질은 텅 비워버려야 마음뿐이죠. 우리가 실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부처님 말씀이 일체가 유심조라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은 잘 합니다만, 천지 우주가 마음뿐이란 것을 모르면 우리가 못 깨닫습니다.
내 몸뚱이에 걸리고 좋은 옷에 걸리고 내 집에 걸리고 재산에 걸리고, 그때는 마음을 못 깨치는 것입니다. 못 깨치면 결국은 공 소식을 모르는 셈이죠. 나와 내 것, 내 형제 내 가족 내 애인 이런 것에 마음을 두면 결국 못 깨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비록 마음의 본성本性을 다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불성을 우리가 이번 공부 동안에 다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공空소식만은 꼭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선오후수先悟後修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선입니다. 공을 못 깨달으면 참선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어제 말씀처럼 천지 우주 모두의 물질을 구성한 근본 요소가 원자原子아닙니까. 근본인 원자 이 원자도 텅 비어 있다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은 바로 보면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것은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것을 마음이라 그럽니다. 마음은 걸릴 것도 없는 것을 마음이라 하지요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물질이 아무 것도 없이 마음뿐인 것이니 텅 비어서 공이므로 그때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가 마음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질 이것이 불성입니다. 불성은 하나의 생명이니까 불성은 인격이니까 부처님이라 그러죠. 부처님의 대명사가 자비慈悲로 보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전체를 통해서 보면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마음을 텅 비어서 분명히 없는 것이니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면 분명히 ‘없는 것’ 공空입니다. 미처 마음이 어두워서 ‘없는 것’을 우리는 아직 못 통달通達했다 하더라도, 수많은 도인들이 아까 말씀처럼 반야지혜 공지혜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수많은 분들이 목숨을 바치고 했던 것이니 우리는 믿어야 한다 말입니다. 목숨을 바치고 도를 구한 분들이 공空을 다 봤으니 그 분들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참선은 먼저 믿음이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 다음에는 이 옳은 것을 위해서 내 생명을 바쳐야겠다는 그런 대大용맹심勇猛心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이 이레 동안 잠도 안자고 깨치고자 하신 것은, 마치 상제비구가 반야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신명身命을 공고히 하는 태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편하게만 살려고 하는 때에, 공空소식을 꼭 얻으시고 그동안 공부를 독실篤實히 하셔서 우리 자성 내 본질인 불성을 찾고 영생永生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라면서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탁수와 같은 우리 마음.
공부할 때 세 선지식이 필요하다 :
법을 지도하는 교수선지식, 도반인 동행선지식, 외호선지식.
인간성의 본질은 우주의 본질인 부처님 성품이다.
불교는 영원히 변치않는 실상지혜, 반야바라밀, 바로 공의 지혜인 반야를 얻는 것이다.
천지우주 두두물물 전부가 다 공.
공의 본성은 불성이고 불성은 마음, 부처님이다.
천지우주가 마음 뿐임을 알아야 참선이 되고 깨달을 수 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
소중한 법문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