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속에서 우물 밖으로>
Scene 1. 쓰나미: 스리랑카
2004년 2월, 난생 처음 비행기에 탑승하여 향한 곳은 실론티의 나라 스리랑카였다. 처음 가봄직한 나라로 쉽게 연결 짓기 어려운 그 곳에 간 이유는 다니던 교회에서 파송하는 의료 선교팀에 합류하게 되면서였다. 2004년은 스리랑카에 대규모 쓰나미가 일어나고, 사후 복구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나는 ‘의료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주일학교 교사라는 이유로 선교팀 내에서 ‘어린이 전담팀’에 배치되어 동행하게 되었다.
대형재난을 당한 최빈국에 의료선교팀의 일원으로 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나는 이런 일련의 활동에 대해, 그리고 스리랑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상황에 휩쓸려 가게 되었을 뿐, 내 머릿속에는 대학입학 과정부터 쌓여왔던 학교와 전공에 대한 불만들, 친구들과의 관계문제들만 가득차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얼떨결에 닿은 스리랑카 땅에서, 약 10일간 지내는 동안 나는 부끄러워졌다.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지구의 어느 한 켠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요로움이고,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때가 나에게 있어 첫 ‘배움’의 경험이었다.
Scene 2. NGO 인턴 -> 공무원
2004년과 2005년 두 차례 스리랑카를 찾으며 나의 세계는 조금 달라졌다. 홍은전 작가님이 새로운 세계를 만나며 중력이 이동하는 듯했다고 말씀하신 순간이 나에게는 이 때였을 것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고 싶어졌고, 그리고 그 일이 특정한 누군가(특히 거대 기업가)만의 이익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관심분야의 여러 강의와 활동들을 찾아 다니던 중, 내가 다니던 학교의 한 대학원 주관으로 NGO 인턴을 모집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학교와 한 외국계 은행의 협약으로 소정의 인턴비를 지급받고, 국내의 여러 NGO(Non government organization, 비정부기구) 혹은 NPO(Non profit organization, 비영리기구)에서 근무하는 경험을 하는 인턴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일자리 지원 사업을 하는 비영리재단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이 일이 나의 진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했다.
일자리 지원 사업을 통해 저속득층 등 소외계층을 돕는 일을 하는 일은 매우 의미있고 흥미로웠다. 또한 그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께서는 일 자체에서 오는 보람과 높은 만족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셨다. 진로의 방향을 놓고 고민하는 나에게는 조금 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했는데, 이 지점에서 또 한번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은, 공익사업의 한계점이 예산문제에 있을 수밖에 없고, 공적 예산에 의지하게 되며, 결국 관계 중앙부처와 담당 공무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이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즐거움도 크지만, 많은 연구와 고민을 통해 수립한 지원사업이 예산 문제로 발목을 잡히게 되었을 때의 안타까움은 현장에서 느끼는 애로사항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중앙부처 공무원’이 되어 현실적인 지원을 하는 방법이 파급력이 있고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Scene 3. 공무원 임용 후 부처배정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한 후, 부처배정을 앞두고 내가 희망부서를 추려낸 기준은 ‘정책대상인 국민에게 직접 와 닿는 사업을 하는 곳’이었다. 이 기준을 토대로 희망한 부서는 보건복지부와 중소기업청이었고, 이 중 첫 부서로 중소기업청에 발령을 받아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여 만난 첫 부서장님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자아실현할 생각하지 말고 가정에 충실하라'는 조언을 하셨고, 나 또한 신입 첫 해에 겪은 충격적인 업무량과 직장문화에 놀라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의 마음으로 워라밸을 꿈꾸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인권’,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많아서 이와 관련된 일을 하며 이쪽 업계(?)에서는 워라밸이 잘 지켜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 헌법재판소에 전입할 기회를 계속 노렸고, 감사하게도 그 기회를 얻어, 지금은 9년째 이 곳에서 재판부의 심리를 돕는 행정처리들을 하고 있다.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헌법시간에 헌법재판소의 판례들을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기본권 의식이 자라온 과정을 보았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기관에서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나의 우물’이다.
‘인간은 모두 각자의 우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세상은 그런 우물들의 총합’이라고 홍은전 작가는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우물’을 우물 밖에 서서 들여다 보았다.
지금까지 우물을 파 온 과정에서 어떤 지점은 홍은전 작가님과 통하는 면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제3자의 관점으로 평가해 보자면, 나의 우물은 얕았고, 우물을 판 마음은 약았다. 어떤 마음인지 나도 알겠다고 맞장구를 치다가도 그 깊이에서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자꾸만 ‘스리랑카’가 떠올랐다. 그 때 느꼈던 부끄러운 감정이 다시 솟아 오르고, 내가 하는 말들과 생각에 대해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라는 말이 내 귓가를 맴돈다.
감히 내가 어떻게 공익을 추구하노라고 이야기를 했을까?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허울 좋은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내 욕심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 하는 이율배반적인 사람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쾌락독서, 문유석)이라는 책 속의 문구는 나같은 사람을 향한 저격이었다.
박종필 감독,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세월호 유가족들, 매일이 크고 작은 싸움인 장애인들을 생각하면 나는 삶의 최전선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최전선을 떠올려 볼 기회조차 없을 만큼 나를 둘러싼 환경은 완벽하고, 풍요롭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던 현장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 장면을 구성하는 인물들은 고 백남기 농민, 함께 연대하여 참여한 운동가들, 시민들, 강제진압을 위해 물대포를 쏘는 경찰들이다. 나는 이 장면 어디에도 서 있지 않았다.
2015헌마1149, 직사살수행위 위헌확인 등 사건(2020.4.23)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피청구인들이 2015.11.14. 19:00경 종로구청입구 사거리에서 살수차를 이용하여 물줄기가 일직선 형태로 청구인 백남기에게 도달되도록 살수한 행위는 청구인 백남기의 생명권 및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서 헌법에 위반됨을 확인한다.”
청구인이 사망한 경우, 심판절차는 종료하게 되지만, 해당 기본권 침해행위의 반복가능성과 그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적 해명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심판의 이익을 인정한다. 헌법재판소의 재판부는 고 백남기 사건을 이에 해당하는 사안이라고 판단하여 본안 판단 후, 직사살수행위가 위헌임을 확인하였고,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이 사건의 장면을 그리며, 고 백남기 농민의 자리에, 운동가들의 자리에, 시민들의 자리 등에 나를 놓아 보았다. 현장에 가까울수록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멀어져 왔구나. 마음은 그 곳에 있다고 하지만 몸은 계속해서 도망갈 길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의 치부가 너무 대놓고 까발려지는 기분이었다. 노들야학에 처음 가서 버스를 못 타면 지하철을 타면 되지 않냐고 물었던 홍은전 작가님은 ‘몰랐기’ 때문이었지만, 나는 ‘알지만’ 눈을 감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였다.
스리랑카에 다녀와서는 한 때 꿈이 긴급구호활동가여서 월드비전 채용공고에도 지원을 했었던 사람인데 그 세계를 ‘몰랐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움만 느끼지는 않기로 했다.
얼마 전, 마음을 터놓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던 중 이런 대화가 오갔다. 교육문제를 위시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나에게 그 친구는 물었다.
“그래서, 어떤 나라가 완벽한 것 같은데?”
그 친구가 그것을 물은 의도는, 완벽한 나라는 없고, 또 내가 제기한 문제들에 답도 없으니 그냥 적응해서 살아야하지 않겠냐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려는 것임을 안다.
“내가 이렇게 안티코리아처럼 이런 저런 문제를 이야기하면 다들 어쩔 수 없다, 방법이 없지 않냐고 해. 그래서 나도 투덜이 스머프짓 그만하고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지 말까하는 생각도 했거든. 그런데 그냥 계속 하기로 했어. 왜냐하면, 해결되지 않아도 누군가는 문제라고 이야기를 해야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도 알고, 언젠가라도 변하고 해결이 될 수 있잖아. 그래서 그걸 내가 계속 하려고.”
이렇게라도 현재, 내가 있는 곳에서 싸울 수 있는 싸움을 해나가려고 한다.
내가 지금 당장 장애인분들의 투쟁 현장에 나가 함께 어깨를 걸고 운동해 주지 못하더라도, 철거민들 농성현장에 들어가 보지 못하더라도, 동물 도축현장에 찾아갈 용기를 못 내더라도, 그 문제들을 ‘마주하고 배워나가겠다’는 다짐과 행동으로 함께 해드리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표현해 보려 한다.
첫댓글 결기가 느껴져요.
마주하고 배워 나가요, 우리 함께
명희님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찬찬히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오신 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