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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상의 신비
76.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전통에서 말하는 ‘창조’는 자연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는 계획‥. 곧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것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연은 인간이 분석. 이해. 통제하는 체계로 여겨지는 반면에. 창조는 모든 것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손을 내미시어 주신 선물로, 우리가 함께 보편적 친교(universal communion) 를 이루도록 요청하는 사랑으로 비추어진 실제로 이해될 뿐입니다.
77.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 만들어졌네” (시편 33〔32〕.6). 이는 세상이 결단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지 혼돈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며, 세상을 더욱 찬미하게 합니다. 창조의 말씀은 선택을 나타냅니다. 세상은 자의적인 전능, 곧 힘의 과시나 자기 과시의 욕망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창조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근본적 동력입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지어 내신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 11,24).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그 각자의 자리를 세상에 마련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온유함의 대상입니다. 가장 하찮은 것의 덧없는 생명조차도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며, 아주 잠깐 살아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심니다, 대 바실리오 성인은 창조주를 “무한한선”으로 묘사하고, 단테 알리기에리는 “태양과 별을 움직이는 사랑” 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된 것들에서부터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넘치는 자비”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78. 또한 유다―그리스도교의 사유는 자연의 탈신화화를 이끌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언제나 찬미하면서도 자연안에 신성이 깃들여 있지는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이리하여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책임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자연을 이처럼 새롭게 보는 것이, 이 세상의 일부로서 자연을 보호하고 그 잠재력을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잃어버리는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자연의 가치와 취약함을 깨닫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깨닫는다면, 무한한 물질적 발전이라는 근거 없는 현대 신화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보호에 맡기신 취약한 세상은 우리의 힘을 이끌고 발전시키고 제한하는 현명한 방법을 찾을 것을 요청합니다.
79. 열린 어사소통 체계로 구성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형태의 관계와 참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초월성에 열려 있고 그 안에서 발전한다는 생각으로 이끕니다. 신앙은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것의 의미와 신비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느 자유롭게 우리의 지성을 사물의 긍정적 발전에 쓸 수도 있지만,새로운 악, 새로운 고통의 원인, 실직적인 퇴보를 가중시키는데 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역사를 긴장되고 극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인간 역사는 자유, 성장, 구원, 사랑 안에서 전개되거나 타락과 상호 파괴의 길로 전개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활동으로 자연 보호의 의무를 상기시켜 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류가 자멸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80. 그러나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바라시며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서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거룰한 정신에 합당한 무한한 창조력을 소유하시어 가장 복잡하고 풀 수 없는 인간 문제의 매듭을 푸는 방법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발전해야 하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어느 정도 자제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악이나 위험 또는 고통의 원천으로 여기는 많은 것들은 사실 우리가 창조주께 협력하도록 이끄는 산고의 일부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으시면서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현존하시어 현세 사물의 합당한 자율성을 가져옵니다.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은 모든 존재의 생존과 성장을 보장해 주며, “창조 사업을 계속 이어 나갑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이 세상을 가능성으로 가득 채우셨기에 사물의내면 깊숙한 곳에서 언제나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습니나. “자연은 사물 안에 새겨진 어떤 예술, 곧 하느님 예술의 이성에 다름 없습니다.이 이성을 통하여 사물은 특정한 목적을 항해 나아갑니다. 이는 마치 배를 만드는 사람이 나무에 스스로 배의 형상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부 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81. 우리가 진화 과정은 추정할 수 있지만, 인간은 다른 열린 체계들의 진화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격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하느님과도 직접 대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찰, 논증, 창의성, 해석, 예술 활동 능력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다른 능력들과 더불어 물리학과 생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고유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물질세계 안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데에 다른 질적인 새로움은 하느님의 직접적 행위를 전재로 하고, 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하느님이신〕 ‘당신’(Tu)과 〔 인간인〕 ‘너’(tu)가 맺는 관계로 이끄시는 특별한 부르심을 전제로 합니다. 창조에 관한 성경 이야기는 모든 인간이 객체의 지위로 격하될 수 없는 주체임을 알게 해 줍니다.
82. 그러나 다른 생명체들이 인간의 자의적인 지배 아래에 놓이는 단순한 대상이라고 한다는 생각도 그릇된 것일 수 있습니다. 자연을 단지 이윤과 이익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이는 사회에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강자의 자의를 옹호하는 관점은 대부분의 인류에게 엄청난 불평등, 불의, 폭력을 낳습니다. 이 경우에 자원은 먼저 차지하거나 가장 힘이 센 자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승자가 모든 것응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조화, 정의, 형제에, 평화의 이상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83. 이 세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의 충만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충만은 모든 보편적 성숙의 중심이 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인간의 모든 무책임한 전제적 지배에 대한 또다른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품으시고 비추시는 초월적 충만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공동의 도착점, 곧 하느님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성과 사랑이 부여된 인간은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이끌려 모든 피조물을 그들의 창조주께 인도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4. 창조의 조화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전하는 메시지
84.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내세울 때에 모든 피조물이 각기 기능이 있고 그 어느 것도 필요 없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질세계 전체는 하느님의 사랑, 곧 우리에 대한 무한한 자애를 나타냅니다. 흙과 물과 산, 이 모든 것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우정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개인적인 의를 지니는 특정 장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추억이 깃든 장소를 마음에 담아 둡니다.산속에서 성장하거나 어릴 때 냇가에 앉아 물을 마셔 본 이들, 또는 동네 공터에서 놀아 본 이들이 그 추억의 장소로 돌아가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되찾으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게 됩니다.
85. 하느님께서는 소중한 책을 쓰셨습니다. 이 책의 “글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조물들입니다.” 캐나다 주교들은 하느님의 이러한 계시에서 배제된 피조물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가장 뛰어난 장관에서부터 가장 작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경탄과 경외의 끊임없는 원천입니다. 이는 또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계시입니다.” 일본 주교들도 매우 시사하는 바가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은 하느님 사랑과 희망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조물에 관한 이러한 관상은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르침을 발견하게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피조물에 관한 관상은 메시지를 듣고, 역설적인 무언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담겨 있는 고유한 계시와 더불어, 작렬하는 태양과 드리워진 어둠 안에도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이 있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계시에 주의를 기울이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이루는 관계 안에서 자신을 깨닫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나는 세상을 표현하면서 나 자신을 표현합니다. 나는 세상의 거룩함을 헤아려 보면서나 자신의 거룩함을 살펴봅니다.”
86.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세상 전체는 하느님의 다함없으신 풍요를 보여 줍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다수성과 다양성이 “제1원인의 뜻”에서 나온다고 현명하게 강조하였습니다. 그 제1원인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시고자 각 사물 안에 부족한 것이 다른 것들로 보충되기를 바라신 분 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은 “단 하나의 피조물이 적절하게 반영될 수 없기” 때문입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다양한 관계 안에서 피조물의 의미와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이 서로 의존하기를 바라신다. 해와달, 전나무와 작은 꽃 한 송이, 독수리와 참새, 이들의 무수한 다양성과 차별성의 장관은 어떠한 피조물도 스스로는 불충분함을 의마한다. 이들은 다른 피조물에 의존하여 서로 보완하며,서로에게 봉사하면서 살아간다.”
87.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피조물과 함께 주님을 흠승하려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러한 찬미와 흠성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름다운 노래에서 나타납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특히 형제인 태양으로 찬미받으소서.
태양은 낮이 되고 주님께서는 태양을 통하여
우리에게 빛을 주시나이다.
태양은 아릅답고 찬란한 광채를 내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달과 별들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달과 별들을
맑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지으셨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바람과 공기로,
흐리거나 맑은 온갖 날씨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피조물들을 길러 주시나이다.
저의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물로 찬미받으소서.
물은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고 순결하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불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불로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불은 아름답고 쾌활하며 활발하고 강하나이다.”
88. 브라질 주교들은 자연 전체가 하느님을 드러내 보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현존의 자리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살아 계시며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십니다. 이러한현존의 발견은 우리가 생태적 덕목을 키워 나가게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충만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 세상 만물과 하느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피조물들을 잘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 적합한 고유한 자리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피조물들이 워낙 작아서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을 무리하게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5. 보편적 친교
89. 이 세상의 피조물에 주인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지혜 11.26). 이것이 한 분이신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일부로서 우리는 모두 서로 보아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일조의 보편 가정,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며 겸손한 존중으로 우리를 채우는 숭고한 친교를 함께 이룬다는 확신의 근거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긴밀하게 결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토양의 사막화를 마치 우리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90. 이는 모든 생명체를 동일한 수준에 두는 것도,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빼앗는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결국 새로운 치우친 생각을 낳아 우리에게 당면한 현실에서 도피하도록 이끌게 됩니다. 때때로 인간의 그 어떤 뛰어남도 부인하려는 강박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누리는 존엄을 수호하는 것보다 다른 생물종들을 보호하는 것에 더욱 열정을 쏟습니다.분명히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을 무책임하게 다루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들 가운데 존재하는 엄청난 불평등에 분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어떤 이들이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존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묵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비참한 곤경에 빠져 거기에서 헤어 나올 방법이 없는 반면에, 또다른 이들은 자기의 재산을 주체할 수 없어 하며, 허영에 빠져 잘난 척합니다.그리고 만약 이런 일이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면 지구를 파괴하는 엄청난 쓰레기를 만들어 냅니다. 신제로 어떤 이들이 자신을 마치 더 많은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 다른 이들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여전히 묵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91. 인간에 대한 온유, 연민, 배려의 마음이 없다면 자연의 다른 피조물과도 깊은 친교를 올바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인신매매에 완전히 무관심하며,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을 해치려는 마음을 지니면서, 멸종 위기에 놓여있는 생물종들의 매매와 맞서싸우는 것은 분명히 모순입니다. 이는 환경 보호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피조물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용서하는 이들로 찬미받으소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 보호는 인간에 대한 참된 사랑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92. 또한 보편적 친교에 마음을 열면, 이러한 형제애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잔혹함은 언제나 어느 모로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여서 동물을 학대하도록 이끄는 비열함은 곧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어떤 피조물에 대한 것이든 모든 학대는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 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그 어떤 측면이라도 소홀이 한다면, 우리가 큰 사랑을 한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평화와 정의 그리고 피조물 보호는 서로 철처하게 연결된 주제입니다. 이를 분리하여 개별 주제로 다루면 결국 환원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됩니다.모든 인간은 하느님 사랑으로 서로 엮여서 형제자매로 일치되어 멋진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으로, 우리를 형제인 태양, 자매인 달, 형제인 강, 어머니인 대지와 온유한 애정으로 하나가 되게 해 줍니다.
6. 재화의 공통적 목적
93. 오늘날 우리는 신앙인이든 아니든 모두, 지구가 본질적으로 공동 유산이므로 그 열매는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이는 창조주에 대한 충실의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생태적 접근은 가장 취약한 이들의 기본권을 배려하는 사회적 관점을 포함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유재산이 재화의 보편 목적에 종속된다는 원칙, 그리고 이에 따른 공동 사용 권리는 사회 활동의 ‘황금률’이고 “윤리적 사회적 질서 전체의 제1원리” 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유 재산권을 절대 적이거나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한 적이 없으며, 모든 형태의 사유 재산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 가르침을 강조하시며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땅을 주시어 아무도 제외되거나 특권을 누리지 않고 그 모든 성원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셨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매우 의미 있고 강력한 말씀입니다. 교황께서는 인격적 사회적 권리, 경제적 정치적 권리, 그리고 국가들과 민족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신장시키지 않는 개발 유형은 진정 인간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 못된다. 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교회는 사유 재산의 합법적 권리를 옹호합니다. 그러나 또한 분명히 모든 사유 재산에 대한 사회적 부패가 있다는 사실도 언제나 가르칩니다. 재화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보편적 목적에 이바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이 선물을 소수를 위하여 사용한다면 하느님의 계획에 맞갖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일부 불의한 이들의 습관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94,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는 동등한 존엄을 지닙니다. 이들을 모두 지으신 분은 주님(잠언 22,2)이시기 때문입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지혜6,7),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마태5,45) 하십니다. 이는 파라과이 주교들의 말처럼 실질적인 결론을 낳습니다.“모든 농만에게는 땅을 적당히 분배받아, 그 땅 위에 자신의 가정을 꾸미고, 가족을 부양하며 생존을 보장받아야 하는 자연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권리는 허상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적으로 행사하도록 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농만들은 땅문서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기술 훈련, 대출, 보험 가입, 시장 거래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95. 자연환경은 모든 인류의 유산이며 모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공공재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사유화해도,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하여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생종을 부인하며 우리의 양심을 거스르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뉴질랜드 주교들이, “세계 인구의 20퍼센트가 가난한 나라와 미래 세대의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훔치면서까지 자원응 소비하고 있을” 때,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은 어떤 의미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7. 예수님의 눈길
96.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성경의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근본적인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아버지시라는 진리입니다(마태 11.25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아버지로서 맺으신 관계를 깨달으라고 권유하시며,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들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감동적인 온유함으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1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마태 6,26).
97. 주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다른 이들에게 권유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자연과 관계를 이루시면서 큰 사랑과 경탄으로 자연에 관심을 기을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사시던 지역의 구서구석을 다니시다가 잠시 머무시면서 당신의 아버지께서 심어 놓으신 아름다움을 음미하시고는,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메세지를 이해하도록 당신 제자들에게 권유하셨습니다.“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할때가 되었다”(요한 4,35).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반,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된다”(마태 13,31-32).
98. 예수님께서는 피조물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사셨기에 다른 이들이 놀라워하였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8) 그분께서는 세상과 떨어져 사는 금욕주의자의 모습을 하지도 않으시고 삶의 즐거운 면을 적대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9참조). 예수님께서는 육신과 물질과 세상현실을 경멸하는 사상들과는 매우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불건전한 이원론은 역사를 통하여 일부 그리스도교 사상갈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쳐 복음 마져 왜곡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에 당신 손으로 날마다 장인의 기술을 발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일, 전혀 경탄할 것도 없는 단순한 일로 보내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마르 6.3)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만드시어 우리가 성숙하는 데에 노동이 특별한 가치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 참아 냄으로써, 인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협력하고 있다.”
99.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따르면, 한처음부터 계셨던 그리스도의 신비에 모든 피조물의 운명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요한 복음의 머리글(1, 1-18)은 그리스도의 창조 활동이 하느님의 말씀(logos)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머리글은 놀랍게도 이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의 한 위격께서는 피조 세계에 오셔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운명을 이 세상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세상의 시작에서부터, 특히 강생을 통하여 자연계 전체에서 감추어진 방식으로 이루어져 자연계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습니다.
100.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지상에 계셨던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이 세상과 맺으신 구체적인 사랑의 관계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시어 당신의 보편적 주권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도 보여 줍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일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9-20), 이는 성자께서 만물을 성부께 데려가실 때, 세상의 마지막 때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것입니다”(1코린 15,28), 이라하여 이 세상의 피조물은 더 이상 단순한 자연의 형태로만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이 모든 피조물을 신비롭게 간직하시며 그들의 목적인 충만으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감탄하셨던 들판의 바로 그 꽃들과 새들은 이제 그분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