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산이름은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우리나라는 국토의 64%가 산이다. 그렇다면 전국(남한)의 산은 과연 몇개일까. 산림청 조사결과
모두 4440개의 산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경북이 680개로 가장 산이
많다. 두 번째는 경남이었고 전남이 세 번재순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산 이름은 전국에 47개가
있는 것으로 봉화산 이었다.
고려 이후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국 수백 곳에 봉화대가 들어섰고,이름 없는 야산이라도 봉
화대만 세우면 일단 봉화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서울에는 지하철 6호선 봉화산역이 있다. 비슷
한 이유로 작명된 산으로 부산 가덕도 연대산, 고흥 거금도 적대봉 등이 있고, 정상에는 어김없이
봉화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봉화산이 많다는 사실은 외적의 침입이 많았던 것과 비례한다.
그럼 봉화산 다음으로 많은
산 이름은 뭘까?
국사봉이 2위로 43개, 옥녀봉이 3위로 39개, 매봉산이 32개로 뒤를 이었다.
제일
흔할 것 같았던 남산은 그 다음, 31개로 5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에 북산이 드물고 남산이 많은
이유는 풍수지리적 사고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봉화대가 많은 나라였기에 봉화산이 1위인 것
은 알겠는데, 국사봉과 옥녀봉은 도대체 왜 많은 것일까? 궁금해진다.
먼저 국사봉(國師峰, 國士
峰)의 어원을 찾아보면,
신하가 머리를 조아려 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나온다.
서울
상도동, 문경, 거제에 있는 국사봉의 유래에는 모두 이런 유교적 해석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전국의 모든 국사봉마다 충신열사의 영령이 깃들여 있단 말일까?
좀 더 살펴보면 철원의
국사봉에는 나라님이 제사를 지낸 곳이란 조금 다른 유래가 있다.
그런데 임금님은 무슨 제사를 지
냈을까? 경남 의령 국사봉의 유래에 힌트가 있는데 임금이 내시나 지방관속을 시켜 서낭신에게 치
재를 드렸던 국사당(國師堂)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국사당이 뭘까? 바로 서낭당이다. 다른 말로는 무속신당이라고도 한다.
마을 사람들이 돌
무더기 쌓아놓고 금줄 걸고 치성 드리는 바로 그 서낭당,
전국의 국사봉에는 예외 없이 이 국사당
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와 해방 이후 남북의 정치권력이 제각기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전
국의 서낭당을 불도저로
싹 밀어 버렸다.
도로를 내기 전만 하더라도, 조금만 으슥한 산모퉁이나 마을 초입에는 모두 국사당이 있었다.
그
래서 국사당이 있는 산이란 뜻에서 국사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경남 양산과 전남 진도의
서낭산, 경남 사천의 선황산도 같은 유래에서 나온 이름이다.
하지만 유교적 가르침이 사회를 강하게 지배했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전국의 수많은 국사봉(國
師峰)은 국사봉(國士峰)이나 청계산에 있는 국사봉(國思峰)처럼
나라를 생각하는이름으로 하나
둘 개명되기에 이른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서낭산, 선황산, 국사봉으로 불렀을 것이다.
결국 전국의 저 수많은
국사봉들은 유교관념보다는 무속신앙과 오히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럼 옥녀봉은 어떨까? 산림청에서는 산 숫자만 발표했을 뿐, 봉화산이
든, 옥녀봉이든
이름의 의미에 대해선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옥녀는 대개 옥황선녀, 다른 말로
는 선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럼 이 산들마다 선녀가 내려왔을까? 힌트는 역시 풍수에 있다.
풍수에서 옥녀는 선인과 함께 지
형에 가장 많이 비유되는 형상인데 산 모양이 옥녀가 북을 치는
형상이면 옥녀격고형, 옥녀와 선
인이 조화를 이루면 와우적초형….
이런 풍수의 영향으로 옥녀의 이름이 산에 많이 붙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지형에서 옥녀봉은 늘 주산(主山)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늘 옥녀와 짝을 이루는 선인이나 군자같은 이름이 산에 거의 붙지 않은 이유는 뭘까? 어쨌
든 전국에는 아직도 수많은 옥녀보살과 옥녀봉이 있고, 더 많은 국사당과 국사봉이 있다.
또 서울
의 청계산과 거제도에는 국사봉과 옥녀봉이 함께 나란히 솟아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중에도 국
사봉과 옥녀봉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한국의 산에는 무당과 옥녀가 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산은 왜 불교식 산이름이 많을까
지명 연구가나 역사가들은 땅이름을 가리켜 역사의 지문(指紋)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 만큼 땅이름에는 역사성이 농익게 담겨져 있다.
이와 관련, 지명 연구가들은 우리나라 땅이름
의 작명 특징으로
▶ 표기의 이중성
▶ 두 음절 땅이름이 유난히 많은 점
▶ 변천성
▶ 종교 관련
성 ▶ 지형 관련성
▶ 풍수사상 영향 등 대충 여섯 가지 정도를 거론하고 있다.
밤나무골이 율곡(栗谷), 진고개가 이현(泥峴)으로 변한 경우는 첫번째 사례이다.달구벌(達句伐)
이 대구(大邱)로 변한 경우는 두번째,
한양이 한성, 경성을 거쳐 지금의 서울이 된 것은 세번째
경우에 해당하고 있다. 이밖에 금강산, 문수봉, 관음굴과 같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례는 네번
째 경우, 새터가 신대(新垈)로 변한 경우는 다섯번째 경우에 해당하고 있다.
풍수영향을 받은 지명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국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충북의 지명에서
도 이같은 사례가 다수 관찰되고 있다. 특히 충북의 대동맥인 청주~충주간 36번 국도 주변에서 불
교식 산이름이 집중적으로 산재하고 있다. 충주 계명산, 음성 가엽산, 증평 미타산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충주 계명산
충주시 안림동 뒤쪽에 위치한 이 산은 지금은 충주의 여명을 연다는 뜻의 계명산(鷄明山·해발
774m)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1958년 개명되기 전까지 계족산(鷄足山)으로 불렸다. 계족산
의 문자적인 의미는 닭발을 닮은 산이라는 뜻으로, 충주시는 어감이 안좋다는 이유로 이를 계명
산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원래 이름 계족산을 지형을 반영된 것이 아닌, 불교식 지명으로 보고 있다. 불
교경전에는 석가모니 수제자 가섭이 계족산으로 들어가 입적했고, 이때 갈라져 있던 두 산이 합쳐
졌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리고 미륵불이 다시 먼훗날 이 땅에 출현할 때 합쳐졌던 두 산이 다시
둘로 갈라질 것이라는 내용도 나오고 있다.
음성 가엽산
음성 가엽산(迦葉山·710m)은 음성읍과 충주시 신니면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관련, 두지자
체 주민들은 산이름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신니면 주민들은 한자 표기 그대로 가엽산으
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음성지역 주민들은 가섭산이 맞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 범어식 표현대로 하면 이 산은 '가섭산'으로 부르는 것이 맞아 보인다. 불교 범어는 그것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표기와 읽기가 서로 다른 경우가 자주 등장한다. 가령 절의 또 다른 이름
인 도량은 한자로는 道場으로 적지만 읽기는 도량으로 읽는 경우와 같다.
이같은 사례는 통도사 뒷산을 靈鷲山(영취산·1059m)으로 쓰고 영축산으로 읽는 경우와 같다. 국
립지리원은 이 산의 명칭을 가엽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두 지역민의 다툼을 떠
나 국립지리원 표기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물론 이때 등장하는 迦葉은 앞서 언급한대로 석가모니
수제자인 가섭을 의미하고 있다.
증평 두타산진
천~증평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두타산(頭陀山·598m)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불교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불교 두타행(頭陀行)은 지금도 가장 금욕적인 수행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수행 방
법은 실내가 아닌 나무나 동굴에서 기거를 하고, 옷은 남이 버린 것을 기워 입으며(일명 糞掃衣ㆍ
분소의), 음식도 기름진 것이 아닌 거친 것을 먹는 것 등을 말한다.
이를 가장 모범적으로 수행한 제자가 앞서 언급한 가섭으로, 그는 생전의 철저한 두타행 수행 때
문에 지금도 두타제일(頭陀第一)로 불리우고 있다. 방향은 다소 다르지만 증평의 옛이름인 도살
현도 불교식 지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도살할 때의 살이 보살 살(薩) 자이기 때문이다.
현재 3가지 설 거론돼
이처럼 충북의 등뼈에 해당하는 국도 36번 주변 산에는 불교식 이름이 다수 관찰되고 있다. 그렇
다면 누가, 언제 이런 불교식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가 대중성을 나
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이다.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시기에 불교식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불국화 염원설, 절이름 영향설, 이데올로기 동원설 등 다양한 이론이 거
론되고 있다. 첫번째 설은 당시 민중들이 미륵불의 출현을 학수고대 했고 그 결과, 산이름에도 불
교식 지명이 나타나게 됐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두번째 설은 절이름이 곧바로 산이름으로 변한 사례가 많다는 점이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가령
음성 가섭사가 가섭산에 위치하는 경우가 좋은 예가 되고 있다.세번째 설은 첫번째 설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면서 보다 심화된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설득력이 가장 높은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충북지역은 삼국(고구려, 신
라, 백제)의 최대 세력 각축장이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전쟁의 일상화를 의미한다. 충북을
중원으로 칭할 때, 중원을 둘러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쟁패는 5세기 쯤부터 본격화됐다.
먼저 중원 일대를 차지한 곳은 백제였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시작하면서 백제는 지
금의 금강 이남으로 퇴각하게 된다. 금강 미호천변에 위치하는 부강 남성골산성은 이때의 역사적
인 산물이다. 그러나 삼국의 막내였던 신라도 가만있지 않았다.
한때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었지만 고구려-백제가 다투는 틈을 타 보은-문의를 거쳐 청안·증평 일
대를 장악했다. 백두대간을 넘어 한강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와 거꾸로 남으로 백두대간을 넘으려
는 고구려, 그리고 고토를 지키려는 백제가 중원 일대에서 강렬한 파열음을 냈다.
이른바 삼국시대 150년 전쟁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리도 가능해지고 있다. 삼국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전쟁을 치뤘다. 이와 동시에 중원 지역의 민심을 얻기위해 불교라는 종교 이
데올로기를 동원했다. 그 불교 이데올로기가 산이름에도 반영됐다.
학자들은 중원지역이 다시 전쟁터로 후삼국시대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왕
건과 궁예가 자신을 후세 왕림한 미륵불로 자칭, 추종자들을 많이 끌어 모은 것은 이미 널리 알려
진 사실이다. 호족들 역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을 미륵불로 자칭하기도 했다. 역사 전문가들이
충주 수안보면 미륵리사지 입석불을 왕건과 당시 충주 호족인 유긍달의 합작품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혁연도움말 : 장준식 충청대학 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