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
1.서명:
호세아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 란 뜻으로 ‘여호수아’ ‘예수아’ 같은 이름이다. 호세아에게는 ‘헤세드=자비’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호세아는 브에리의 아들(1,1)로 8세기의 예언자이며 북왕국 출신 예언자이다. 아모스 미카와 동시대에 활동하였다. 북왕국 예로보암 2세의 통치 말부터-아시리아 사르곤 2세의 멸망까지 745~730년 북 이스라엘 왕조에서는 네 명의 왕위 찬탈이 계속되는 극도의 내란 시대였다.(호세아 7,3.6;8,4절 참고)
2.성립시기: 8C말-7C초
호세아는 북왕국 예언자로, 북왕국 멸망 후 그의 제자들이 남유다로 와서 여러 특정 상황에서 선포된 예언 말씀들을 모아 편집했을 것이다. 가령 1,1.7절은 유다땅에서 쓰여졌음을 반영한다. 앞부분 1-3장은 개인적 어조로써, 예후 왕조의 멸망을 예언한다.(1,4참조) 이것은 호세아 활동 초기에 속한 것으로 예로보암 2세 치세에 선포되었을 것이다. 5장의 둘째 부분은 ‘시리아-에프라임’전쟁을 시사한다. 이 전쟁중 남 유다왕국은 북 왕국쪽으로 영토를 확장한다.(5,10참조) 예언서의 끝 부분은 사마리아 멸망이 임박한 것으로 제시한다.(13,9-14,1) 이상의 사항은 호세아서 연대의 틀을 이루는데 이 연대는 8세기의 3/4를에 해당한다.
3.구조
호세아서는 지그재그 구도로 같은 주제를 반복한다.
4.전승
북쪽의 전승들인 야곱 전승. 모세전승, 광야 전승을 활용한다
5.문체
열정적이고 격렬한 어휘. 상징적인 이름 호칭의 변화, 간결하고 축약된 표현으로 난해하고 모호하기도 하다. 히브라말 구약성서에서 가장 난해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6.역사적 배경
6-1.국제 정세>
BC 743년 아시리아 세력이 급부상하면서. 이스라엘(페카왕, 유다, 시리아(아람), 팔레스타인과 같은 주변의 모든 국가들은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쳐야했다. 이 때 시리아(아람)와 북 이스라엘은 동맹을 맺고 앗시리아 제국에 반기를 들면서 남 유다의 아하즈왕(736-727) 동맹제의를 하였다. 그러나 아하즈는 앗시리아에 충성하면서 이 동맹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BC 735년 시리아의 왕 르친과 이스라엘의 페카가 전쟁 동맹을 맺어 유다왕국을 선제 공격 하였다(2열왕 16,5). 유다 왕 아하스는 즉시 (하느님만을 의지하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고) 앗시리아 제국에 뇌물을 바치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앗시리아는 군대를 보내어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정복하였다. 아하스왕은 앗시리아에 잘 보이기 위해 조공을 바치고, 예루살렘에 앗시리아 신들의 우상을 세웠다, 앗시리아 왕 티글라 펠에세르(745-727년)가 죽자, 이스라엘의 호세아 왕은(730-722, 2열왕 17,1-6; 열왕 18,9-12)은 친 이집트 정책으로 돌아서서 앗시리아에 대해 조공을 거부하고 반역하였다. 그러자 그 뒤를 이은 살만 에세르(Shalmaneser V) 앗시리아 왕은 북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3년간 포위하였고 마침내 그의 후계자 사르곤(Sargon II)왕에 의해 북 이스라엘은 BC 721년 멸망하였다.
6-2.국내정세>
1)정치적
북이스라엘 왕국은 예로보암 2세 후 745-730년까지 15년간 네 명의 왕이 교체되는 음모와 내란의 시대였다.(즈카르야-살룸-므나헴-프카흐야) 아모스에 이어 북왕구 예언자 호세아는 이때 활약하였다.
2)종교적*윤리적
호세아는 이스라엘 도덕적 타락(4,1-2;6,7-10;7,1) 곧 온갖 사회 정의의 부재와 그것에 따른 지도층의 책임을 고발한다. 바로 종교적 불충이 온갖 부패의 뿌리이고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유혹중에 가장 역겨운 것은 가나안 신들의 유혹이었다. 가나안의 신들은 비와 뇌우 땅의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농경 생활의 여러 가지 필요를 채워주는 매력적인 신들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한편으로는 조상들의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쉽게 가나안 신을 숭배하는 타협적이며 이중적인 종교생활을 하였다. 가나안 신들을 모시는 산당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유혹에(4,12-13) 호세아는 대담하게 주님의 권능을 대립시킨다.(2,16-25) 그러면서 풍요와 다산을 보장해 주시는 분은 가나안 신들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다.(2,7-11,23-25) 야훼만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요 우주의 신이다.
7.호세아의 신학
1)신론과 인간론
호세아의 하느님 이해인 신론과 인간론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의 대담함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바로 혼인관계 설정이다. 1-3장은 많은 논란을 일으켜왔다. 1-3을 예언자의 혼인을 상징으로만 볼 것인가 역사적 사실로 볼 것인가? 논란에도 예언자의 혼인 이야기의 역사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새 주석서는 사실이라고 하지만) 이 혼인은 예언자들이 흔히 하는 것과 같은 예언적 행동으로( 이사 20,1-6; 사도 21,10-14참조), 호세아서의 경우 본문 전체가 1-3장의 서술된 이 예언적 행동에 대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메르에 대한 호세아의 사랑은 이스라엘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비유이다. 호세아는 아내 고멜(풍산 전례의 신전창녀 2,4,·5.4,13-14등이 암시함) 이 절망적일 정도로 부정하다는 것을 알고도 아내로 맞는다.( 2,4,·5.4,13-14 참조) 이러한 부류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느님의 당신 백성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어리석은 사랑이다. 이런 부정한 아내는 처절한 고통과 시련으로만 반성과 회개로 이끌 수 있다. 모든 복을 완전 박탈당해야만 하느님께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호세 3장은 고멜이 부정을 저지르는 그 시간에도 그 여자에게 애정을 품고 애정을 드러낸 보인다. 고멜이 바로 그렇게 부정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느님은 이 백성에게 사랑과 애정을 품으시는 것이다. 일대 모험과 같은 부부 생활을 하는 호세아에게서,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이해하게 해주는 체험을 보게 된다. 고멜이 남편의 사랑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는 순간을 ‘바오로 사도’는 로마 5,6-8절로 표현한다. ‘시간이 찼을 때-kairos’에 로마 5,6-8 ) 호세아는 고메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함으로써‘ 당신 백성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때문에 호세아 예언서에서는 사랑이 증오와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랑이 순진하거나 무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으로 다듬어진 사려 깊은 예지의 사랑이며 어떠한 위험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사랑이다.
2) 사랑
호세아서 신학은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 사랑의 신학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의 신들이 여러 특권과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모든 것이 주님 그분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는 종교의식만이 아니라 어휘와 상징적인 것에도 배타적인 입장을 취한다.(14,9절) 가령 ‘바알’이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바알은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을 지하는데에 이 바알을 쓰는 관례가 자리 잡게 되었다. 호세아는 바로 이 바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도 싫어한다.(2,18-19) 신상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호세아는 조롱조로 송아지라고 부른다. 호세아는 종교가 어떠한 타협도 없이 순수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입장에서 호세아는 외적인 종교와 제사와 제의에 관하여 격렬한 비판을 가한다. 또한 주님의 자비와 자애에 대한 그릇된 앎과 기대심으로 거짓된 불성실한 신앙도 거부한다(6,1-8 14,2-4참조) 불성실한 죄인인 인간이 마침내 진실한 사랑의 진리르 생활하게 해주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2,20-22가 이러한 사실을 선포한다. 주님께서는 옛 계약에서 요구되는 정의와 공정에 애정과 자비를 보태실 것이다. 호세아에게서 영향을 받은 예레미야는 이것이 바로 새계약이며 라고 한다(예레 31,31-34). 호세아의 메시지는 질타와 위협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거의에는 또 하나의 뜻이 담겨져 있다. 바로 자애와 희망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질타는(이것은 실망한 사랑의 질타이기에 그만큼 격렬한 수 밖에 없다) 홀연히 그 무엇도 좌절시킬 수 없는 사랑의 토로로 바뀌게 된다. 시작이 사랑이었던 만큼(9,10;11,1) 끝도 사랑일 수밖에 없다.그리하여 사랑은 분노를 이길 뿐 아니라(11,6-9) 죄까지 없앨 것이다(14,5).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유일하신 분이 되고자 하는 것은 그분께서 진실로 유일하시기 때문이다.
호세아의 신학은 하느님 사랑의 신학이다. 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남녀간 표상 속에 인간적 열정의 언어를 사용한다.(참고=지혜 5,17=이사 9,6=26,11=60,17=63,15=요엘 2,15=나훔1,2=스바 1,8=즈카 1,14;8,2) 이러한 표현을 대담하게 드러냄으로써 이후부터 주님께서는 열정적인 하느님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분께서는 바람 실망 분노 분개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당신의 자애를 말씀하신다.
입력: 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4년 3월 23일 PM 22:38분
참조:가톨릭 주석서;성서백주간 도움책, 예언 교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