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항쟁 사건이다.
배경 -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에 한계에 이르렀다. ‘백두진(白斗鎭)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어 유신 정국은 긴장을 더해 갔다.
더불어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는 한국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갔고, 결국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1979년 4월 긴축 등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정부는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더욱 부채질하여 기업의 부도율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고 가뜩이나 어려운 도시하층민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됐던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이런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연관되어 있었다. 1979년 당시 부산의 산업별 생산구조는 광공업 비중이 42.1%인데 비해 전국의 경우 23.7%로 광공업취업구성비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부산은 신발, 의류, 합판 등 영세한 자본과 낮은 수준의 기술이 결합한 저부가가치 제조업이 주를 이뤘으며, 1966년 부산 내 제조업 종사자의 비율은 73.3%, 1975년에는 77.3%, 1980년에는 73.5%로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1979년에 들어서 부산지역 경제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배, 서울에 3배에 달했고, 수출증가율 역시 전국증가율인 18.4%에 훨씬 못 미치는 10.2%로 하락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은 이런 정치, 사회경제적 모순이 모여 일어난 학생·시민들의 반정부 민중항쟁이었다.
결과 -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들은「애국가」·「선구자」·「통일의 노래」등을 부르는 한편,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민주선언문」이란 이름의 유인물은 학원의 민주화, 언론자유, 인권보장에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고 선언하였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 나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사건이 발발하였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평가 -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을 둘러싸고 민주화 운동의 성격, 지도세력 등 여러 평가들이 있으나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 사건과 함께 유신체제를 아래로부터 붕괴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울산성 전투
1597년(선조 30)과 이듬해 정유재란 때 울산 도산성(島山城)을 중심으로 조선 · 명나라 연합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전투이다.
제1차 전투는 1597년 12월 22일부터 다음해 1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1596년 왜와의 화의교섭이 깨어지자, 도요토미(豊臣秀吉)는 이듬해 1월 재침하게 하였다. 그 때 아군은 적의 재침에 대비해 군을 정비하고 있었다.
적군은 좌군·우군으로 나누어 경상도를 침략하고는, 전라도를 제압해 충청도 방면으로 북상하려 하였다. 적의 침입이 있자 명군도 와서 지원하였다. 아군이 각지에서 분전하는 가운데, 왜군은 직산(稷山)전투에서 조선·명나라 군에게 대패 당하였다.
제2차 전투는 1598년 9월 22일부터 25일까지 전개되었다. 제1차 전투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는 2만 4000여 명의 동정군(東征軍)을 인솔하고, 별장 김응서(金應瑞)는 5,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21일 경주에서 출발하였다.
김응서는 먼저 동래의 적군을 격파해 울산과 부산간 적의 연락선을 차단하였다. 명나라 해생(解生)의 군사가 먼저 도산성을 공격하고, 이어 마귀가 2만 명의 군사로 도전하였다.
쌍방의 유인 기습 등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아군측은 25일에 이르러 적에게 크게 타격을 주고 조선 사람으로 적중에 잡혀 있던 1,100여 명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마귀는 이 때 명나라군이 사천성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군사를 철수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