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막이옛길
산막이옛길은 자연미를 보존하기 위해 여기저기에 튀어나온 곁가지도 모퉁이 돌도 그대로 둔 좁은 오솔길이다. 올 적마다 느끼지만, 숲이 뿜어내는 향기가 좋고, 강에 그림을 그려주는 바람이 있어 좋고, 어릴 적 뛰어놀던 동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이곳이 좋아 자주 찾는다.
공중에 놓인 출렁다리에 다다랐다. 숲길을 마다하고 무서워 비명을 지르면서도 재미 삼아 걷는 사람이 눈에 뜨인다. 산을 찾는 묘미가 저런 건가 보다. 걷다 보면 심심찮게 발길을 멈추고 웃을 수밖에 없는 볼거리도 있다. 또 자연경관에 걸맞은 볼거리를 설치해 놓아 지루하지도 않다. ‘옷 벗은 미녀의 엉덩이를 살짝 만지라’는 팻말이 있다. ‘옷 벗은 미녀가 이 산중에?’ 둘러보니 참나무 두 가지가 꼬였고 불쑥 튀어나왔다. 여자의 엉덩이라 생각하고 만졌는지 반질반질하다. 또 얼마를 걸었다. 산 국화차 한잔 마시고 가란다. 갈증이 나는 터라 시원한 약수 한잔을 마시니 카페에 앉아 마셨던 레몬차보다 더 상큼하고 시원하다.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한곳에 다다르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나무들이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마음껏 뻗어 자신의 자태를 자랑한다. 아침 햇살이 영양제 역할을 톡톡히 했기에 이런 곡선미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또 아래로 흐르는 물속에 자기를 닮은 자신을 보며 우리가 거울 앞에서 미운 부분을 화장으로 감추듯 “요렇게 휘면 더 멋지겠지.”라며 좀 더 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매일 아침 나는 네가 있어 참 좋다고 말했을 것 같다.
한 곳에 이르니 선조들이 짐을 운반할 때 사용하던 지게가 산막이옛길 시가 새겨진 목판을 지고 이웃하고 있다. 자연에 문학을 첨부하니 예술 작품이 따로 없다. 이 풍경은 자연과 풍류의 조화라 하고 싶다. 아니 맛깔스럽다 표현하고 싶다. 옛 정취와 정서를 그대로 보여줌이 멋스러워 가슴이 두 방망이질 한다. 나는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아예 그늘진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지게가 업고 있는 시 한 수를 택했다.
산막이옛길 -- 이 정식
‘팔 벌린 산이 물을 막아⁄ 어깨동무 한 새로 오솔길⁄ 다람쥐 길 안내하고⁄ 연리지 사랑 키워 가는 곳⁄ 이곳이 지상 낙원일세 내 고향 칠성 산막이옛길’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을 낭송하니 우리의 삶이 예술이란 생각이 드는 반면, 6•25 피난살이 하다 해 질 녘 고향 집 가던 길이 보인다. 내가 살던 고향길은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 걷고 또 걸으면 징검다리가 놓인 내를 건너야 동네로 접어든다.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 서당에서 글 읽는 구성진 소리가 들렸지. 소학을 뗀 형님의 음성을 확인하려고 담장 밑에서 서성이는데 그 소리가 그 소리라 확인이 안 되었었다. 밤인데도 낮같이 환해 한걸음에 달려가 대문 앞에 서니 대청마루에 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아버지가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시인님도 우리가 방금 걸어온 이 길을 박힌 돌을 캐내지 않아 걸리적거리는 좁은 길임에도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을 향해 가는 발 길이라 춤을 추듯 가벼워 이런 심오한 글을 낳지 않았나 싶다.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만난 듯 가슴이 벅차 강을 마주 보고 있노라니 많은 인파가 모이게 된 이유를 생각하게 한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로 수력발전소를 칠성면에 설립하기 전에는 벌목하는 이가 모여 사는 몇 가구 안 되는 하늘만 빠끔한 말 그대로 산이 막힌 끝 동네가 아니었나 싶다. 현재는 등산객이 매일 찾는 천혜의 관광명소로 변했다. 올 적마다 조형물이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것이 등장하기도 한다. 오늘은 호수 위에 나무로 만든 뗏목도 떴다. 흥이 오른 여행객의 목소리가 물갈이를 만들고 있다. 다음에 오면 또 무엇이 등장하려나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여든의 시니어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새해를 맞이하면 젊은이와 아이들은 설빔을 입고 웃어른을 찾아가 절로 만수무강과 공경을 표하며 인생의 지혜를 배웠다. 세배를 받은 어른은 덕담과 세뱃돈을 아이에게 준다. 이 풍습은 오늘까지 이어져 어린이를 만나면 용돈을 주는 건 어른이 할 도리고, 어른을 뵈러 갈 적에는 봉투가 아니면 맛난 음식을 손에 들고 다님을 젊은이들이 할 도리로 알고 요즘도 몸소 실천한다.
요즘같이 강박한 세상에 이 미풍이 사라지지 않음이 다행이라 여기는 여든의 시니어 앞에 젊은 지인이 세 살 된 손녀를 생활 한복을 입혀 나타났다. 자락 치마 끝에는 레이스를 달았고 주머니도 달렸다. 저고리는 턱받이가 저고리를 대신한다. 어찌나 앙증맞게 꾸몄던지 보는 이마다 인형 같다는 말을 한다. 환영하는 인사를 치마 주머니에 지폐 한 장을 넣는다. 아이의 할머니 아직 돈을 모른다. 사양하는데 아이는 지폐가 빠질세라 주머니를 다독인다.
아이의 모습을 본 여든의 시니어는 며칠 전 자신의 생일날을 떠올린다. 사 남매 자녀가 엄마의 형제들을 모시고는 사촌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그리고는 준비해온 케이크 위 초에 불을 붙이고 축하 송을 부르고 케이크 절단이 끝나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느지막이 또 하나의 케이크와 작은 왕관이 들어온다. 왕관을 머리에 얹어주고는 케이크 상자를 연다. 윗면에 면사포 쓴 여든의 시니어 결혼사진을 담았다. 오십오 년 전 흑백 사진이다. 그 옆에는 “김은혜님의 산수를 축하드립니다. 꽃보다 예쁘신 신부의 모습으로 항상 저희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오래오래 저희 곁에 있어 주세요. 사랑합니다. ~ 사랑하는 조카 해준 이가 ~ ” 자신의 결혼사진을 보고 글귀를 듣자. 여든의 숫자에 공 하나를 떼어낸 여덟 살 난 아이처럼 기뻐서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좋아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주인공의 자녀들도 여세를 몰아 부모의 형제들에게 함께할 수 있어서 고맙다며 오늘 여든의 시니어가 아이의 주머니에 지폐를 넣어주듯 지폐로 인사를 한다. 지폐를 받은 그분들도 본인의 숫자에서 공 하나를 떼어낸 아이로 변해 지폐가 든 봉투를 흔들며 좋아라 기뻐했지. 그 모습에 취한 조카들도 생신을 축하한다며 주머니를 채워준다. 그러자 또 여덟 살 여자아이가 되어 앞서 세 살 난 아이처럼 빠질세라 주머니를 다독인다.
여든의 시니어 형제는 칠 남매였는데 현재는 세 여인만 이 땅에 존재한다. 하여 세 집 자녀들은 특별한 날이 오면 세 늙은이를 함께 모신다. 조카가 여행 가자는 제의를 한다. 세 명의 시니어는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쪼로로 차에 오른다. 어김없이 “고모님, (이모님, 외숙모님) 즐거운 여행 하세요. 제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인사와 지폐가 든 봉투가 온다. 문자로 “나이 듦이 이렇게 좋을 수가. 고맙네, 맛난 거 사 먹을게” 인사한다.
두 형님을 만나면 조심스레 “우리는 이렇게 대우를 받지만, 요즘 젊은이들의 상식은 일 순위는 부부, 이 순위는 자녀, 삼 순위가 부모라 한다네요. 밀리고 있음에도 부모는 일 순위로 착각하고 미쳐 봐주지 않으면 토라져 말도 거칠게 내뱉고 눈물을 훔치기가 일수라지요. 그러니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젊은 세대와 그 이상의 세대 간의 협력을 존중히 여기며 살아감이” 필요하다고 어른스럽게 다독이면서도 아이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아침 이슬
필리핀 바기오에 두 달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우리 부부는 산책했다. 산책길 옆 풀밭에 온통 동그란 이슬방울이 맺혀 있다. 아침 햇살이 내려앉으니 우리에게 윙크하듯 오색빛깔로 깜빡인다. 반겨줌이 고마워 동그란 이슬방울에 손가락을 내밀어 살며시 대면 찰싹 달라붙는다. 몇 번이고 반복해 보지만 한 번도 내 손가락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 모습은 꼭 사랑에 굶주린 아기가 엄마 품이 그리워 울다 엄마를 보는 순간 달려와 찰싹 안기는 모습 같다고나 할까.
가녀린 풀잎도 찾아와 준 이슬이 고마운지 감당할 만큼의 무게를 달고 힘을 과시한다. 그러다 힘이 들면 보이지 않는 잎자루의 진동으로 또르르 굴려 떨어뜨리면, 키 작은 둥근 풀잎은 깨질세라 물방울을 잽싸게 받아 머리에 인다. 그러다 자기도 힘들면 대지 위로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아침이슬의 생명은 애석하게도 참 짧다. 알알이 맺힌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햇살이 퍼지기 전 우리는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이슬의 삶은 불과 몇 시간뿐이다.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의 인생보다도 더 짧다. 물방울은 자기 인생이 짧다는 걸 인식해서인지 아침 햇살을 맞이하면 곱디고운 빛깔로 해맑게 반짝이기도 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고운 무지갯빛도 만드나 보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들의 삶이 마냥 행복하게 보인다.
풀잎 끝에 연 이슬은 가득하지만 넘치지도 않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이지만 떨어지지도 않고 줄줄 흐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주 작은 이슬방울 속에는 내가 사는 세상도 나도 들어 있다. 이토록 아리따운 이슬방울은 한낮의 따가운 햇볕이 온 누리에 내려앉으면 미련 없이 햇살 등에 업혀 투명한 공기 속으로 기화하여 어디론가 소풍을 떠난다.
문인들과 양수리 두물머리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곳에는 관광객을 위해 커다란 비닐하우스 속에 작은 자연의 계곡을 만들어 놓고 그 동산에 풀잎이 작은 풀을 심었다. 풀잎마다 이슬을 맺히게 하려고 호수로 물을 뿌렸다. 그리고 햇빛을 대신해 전등을 켜놓았다. 송골송골 맺혀 있는 이슬방울이 전등 불과 마주치니 빛을 반사한다. 흡사 은방울같이 보인다. 잎도 이슬도 작아 은가루가 반사하는 빛 같아 멀리 퍼져 나가진 못해도 연한 무지개까지 만들어 보여준다. 오색 유리구슬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 같다. 또 어찌 보면 밤하늘 별들이 땅으로 내려왔나 할 정도로 보는 이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 누가 별을 보고 하늘빛이라 표현한다면, 나는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햇빛을 만나 반사하는 빛을 땅의 빛이라 말하련다.
아침마다 천지에 저뿐인 양 풀잎에 요염하게 앉아 온 우주를 닮고도 흐르지 않는 바기오 이슬방울처럼 나도 이 땅에서의 삶을 이웃이 원하면 언제든 어디든 그들 속으로 들어가 더불어, 아니 아름답게 살다가 저 이슬처럼 바라보는 이에게 기쁨을 선물하고 싶다. 그러다 햇살이 가자고 하면 투명한 공기 속으로 조용히 돌아가듯 나도 미소를 띤 얼굴로 행복했었노라며 내 본향으로 떠나야지. 마음을 다독이는데 무의식중에 입에서는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빛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노래가 흐른다. 소녀가 되어 자연을 찬양하는 아내의 노랫소리를 듣는 남편도 소리 없이 사색에 잠기는 듯 보였다.
김은혜
문학미디어 수필 등단
푸른솔문학 소설 등단
정은 문학상, 송강문학 작품상, 문학미디어 작가상
문학미디어 충북지회장(역임) 청솔 회원, 충북문미회원
현재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연재 중
저서 수필집《세월을 담은 바구니》《글꽂이》《한 길을 걷다》 다수
첫댓글 감사합니다다~ 고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