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로 李應魯
출생사망국적
1904. 1. 12, 충남 홍성 |
1989. 1. 10, 프랑스 파리 |
한국 |
요약 1923년부터 1989년 죽을 때까지 60년 이상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1967년에는 6·25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일로 인해 국내화단과 단절되었다. 1923년 상경해 서화가 김규진의 문하에서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을 출품하여 입선했고, 1935년 일본으로 가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배웠다.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다. 1958년 프랑스로 가 콜라주 기법을 발전시켰다. 1960~70년대에는 주로 동양의 문인화에서 보이는 사의적 정신성을 국제적인 조형방식인 추상형식과 적극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꾀했다.
호는 고암·죽사(竹士).
1923년 서울로 올라와 당시 유명한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묵죽 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했고, 1935년 일본으로 가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에게 사사했으며, 혼고[本鄕] 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 상을 받고, 이후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화원전에서 입선과 특선 또는 무감사로 계속 출품했다.
1946년 배렴·장우성·김영기·조중현 등과 함께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으며, 1948년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있었다. 특히 1962년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평론가 자크 라세뉴의 주선으로 콜라주전을 열었으며, 1965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주목받았다. 이해부터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묵화·서예 등을 가르쳐 3,0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1967년에는 6·25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 주선으로 석방,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화단과 단절되었으나 스위스와 프랑스에 이어 일본·미국·벨기에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전개했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 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해 백건우·윤정희 부부납치음모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되었다. 이후 1985년 도쿄[東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9년 호암 갤러리에서 초대전이 열리던 중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작품세계
이응로는 1923년부터 시작하여 1989년 죽을 때까지 60여 년 이상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작품 경향은 시기에 따라 몇 단계로 나눌 수 있으나 대체로 동양의 사의적(寫意的)인 서화개념을 서양의 추상적인 표현과 접목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나는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인 1923~34년에는 김규진의 문하생으로 서예와 묵화를 배우고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양화의 필획을 섭렵하던 시기였고, 이것은 그의 이후 작품에 근원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45년까지 일본 남종화의 영향을 받아 간결한 갈필의 묘사와 함께 실경(實景)을 중시하는 사생적인 회화를 남겼다. 1945~58년에는 단구미술원을 조직하는 등 민족적인 한국화를 추구했다. 이때에는 문인화의 전통 속에서 보이는 사의를 바탕으로 일상적인 소재를 힘차고 자유분방한 필획과 발묵의 효과로 표현했다. 이러한 그림을 그는 '반추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서양의 추상적 회화에서 영향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1958년 프랑스에 간 그는 콜라주 기법을 발전시켰다. 이 작업은 1960년대말까지 계속되었으며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물질의 결합'이라는 논리 아래 화선지나 신문, 잡지 등을 찢거나 구겨 붙이면서 나타나는 표면의 색상과 먹물의 은근한 번짐을 조화시키는 것으로 콜라주 기법의 물질적 표현성에 주목했던 시기였다.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말까지는 주로 동양의 문인화에서 보이는 사의적 정신성을 국제적인 조형방식인 추상형식과 적극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서예적 추상' 또는 '문자추상'이라고 부르는 이 시기의 회화들은 한자나 한글의 형상을 자유롭게 나열하여 암시적인 형태를 나타내거나 명확한 윤곽의 선으로 표현하는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이후 1989년까지는 그가 겪었던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 바탕을 둔 문제에 관심을 지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무화(舞畵)에서 보여준 먹과 붓의 용필로 응축된 사물의 표현기법을 발전시켜 대형화면에 인물 군중들의 움직임을 표현한 회화를 많이 제작했다. 이는 사의적인 필법의 세계에서 벗어나 민중들의 움직임을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적인 관심을 화면에 옮기려 했던 시도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