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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1장 1-17절
찬송가 363장 ‘내가 깊은 곳에서’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1-4절)
‘하박국’은 ‘포옹하는 자’ 또는 ‘포옹 받는 자’라는 의미인데, 선지자가 풀리지 않는 문제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내용과 잘 연결됩니다.
하박국은 B.C. 612-605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B.C. 612년은 아시리아 제국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무너진 해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바빌로니아)을 일으켜 쳐들어오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서, 바빌로니아가 니느웨를 점령한 이후의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갈대아 사람이 유다를 쳐들어와 유다의 여러 성을 점령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B.C. 605년에 있었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제1차 침략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B.C. 612-605년 사이에 이 책이 기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실 때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와 같이 큰 도시에서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모레셋에서 미가 선지자를, 엘고스에서 나훔 선지자를 부르시는 것처럼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도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요나 선지자는 가야 할 니느웨로 가지지 않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요나 선지자를 돌이키시기 위해서 바다에 풍랑이 휘몰아치게도 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다가 선지자를 삼켰다가 3일 후에 뱉어내게도 하시고 다시 소명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박국의 특이한 점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질문에 자세하게 대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지자의 질문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상세하게 답변해 주십니다.
하박국은 총 세 장으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이 2번 반복되어 있고,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가 찬양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 1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첫 번째 질문과 하나님의 첫 번째 대답,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의 2번째 질문에 대해 증거합니다.
1-4절이 하박국 선지자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경고’는 ‘말씀’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좀 더 문자적으로 가까운 의미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래서 여러 외국어 성경은 ‘신탁(神託)’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짐(burden)’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즉 하박국 선지자가 전해야 하는 말씀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전해도 되고 전하지 않아도 되는 말씀이 아니라 반드시 전해야 하는 말씀이며, 그 말씀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고 아주 무겁다는 의미입니다.
(2상)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하박국은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해야 하는데,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의미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라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또 선지자가 기도한다고 해서 다 응답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참 솔직합니다.
또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는데, 언제까지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오랫동안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해 왔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와 같은 기도는 오랫동안 드렸던 기도의 마지막에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전에 그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더 이상 내려놓을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이제 무엇을 더 내려놓으면 되겠습니까? 말씀하시면 그것도 내려놓겠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항의하듯이 질문하는 것 같지만, 그는 진정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하)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강포’는 ‘폭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때의 유다는 극심한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유다의 16번째 임금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세우고, 온 나라를 말씀으로 세우려고 애를 썼던 왕이었습니다. 아시리아 제국과 애굽 사이에 갈그미스에서 전쟁이 있었는데, 요시야는 아시리아 제국의 편에 서서 애굽 왕 바로느고의 진군을 막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했습니다. 그 이후 유다는 애굽의 세력 아래로 들어가 늘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애굽 왕이 유다의 왕의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세웠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유다 백성들은 각자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힘이 최고라고 생각하여,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을 착취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짓눌렀습니다. 온 나라가 힘의 논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서로 상대에게 갑질을 하려고 했습니다.
(3-4)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힘의 논리가 판을 치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습니다.
특히 ‘율법이 해이해졌다’라고 합니다. 우리말 ‘해이하다’는 ‘긴장이나 규율 따위가 풀려 마음이 느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의미는 ‘마비되다’입니다. 팔과 다리가 움직이는 것은 뇌가 내리는 명령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뇌가 내리는 명령에 손발이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이 마비 상태가 된 것입니다. 당시가 율법(말씀)이라는 머리가 명령을 내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사니, 그들은 이방인과도 같았습니다.
또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거나, 시행되어도 왜곡된 형태로 행해졌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정의’는 대부분 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올바르게 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역사(행하심)를 세상에 보여주는 통로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 사회의 재판은 공평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비롯하여 ‘뇌물무죄’ ‘무뇌물유죄’, ‘악인무죄 의인유죄’, ‘권력무죄 무권력유죄’ 등 하나님의 공평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토로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는 의미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을 포기한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그가 늘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살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을 찾는 사람이 적은 것은 하나님 밖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하나님 안에서 질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5-11절)
5-11절은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하나님께서 부패와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를 향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심-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해서 “주변 나라를 보고 놀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한 가지 일’을 행하신다고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유다를 향해서 하실 말씀이 너무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일을 ‘너희의 생전에’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100년 또는 200년 후에 행하실 것이라고 하면 별로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전에 행하시면, 그 일을 고스란히 겪어야 합니다. 그러니 충격이 됩니다.
그 한 가지 일은 바빌로니아 제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가 6-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6-7)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갈대아’는 ‘바빌로니아’의 별칭입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이 갈대아 지방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사납고 성급하며, 두렵고 무서운 백성이라고 합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참 잔인하였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소년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바빌론의 가치관을 주입하여 유다와 같은 피지배국을 바빌로니아화 하는데 매개체로 삼았습니다. 또한,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고, 쇠사슬로 묶어 끌고 갔고, 수많은 유다 백성들도 끌고 가서 노예살이를 시켰습니다.
(8)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낢과 같으니라
바빌로니아 군대의 주력은 ‘기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군대는 빠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표범’에 비유합니다. 표범은 빠르기도 하지만, 사냥 능력이 지상에 있는 그 어떤 동물보다 뛰어납니다. 또한, 그들은 ‘이리(늑대)’와 같다고 합니다. 늑대와 같은 개과의 동물들은 지구력이 정말 좋습니다. 그래서 먹잇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추격합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또한 독수리는 창공 2000m 지점에서 들판을 지나가는 쥐가 보일 정도로 시력이 좋습니다. 그리고 먹이를 발견하고 높은 창공에서 바닥까지 낙하비행속도는 시속 250km가 넘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군대가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9)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갈대아 사람들이 오는 목적이 ‘강포(폭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는 ‘동풍이 불어’라고도 번역할 할 수 있습니다. 사막같은 곳에 심한 바람이 불면 이쪽에 있던 모래가 반대편으로 몰려가서 언덕을 만들곤 합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사람(‘포로’를 뜻함)을 잡아서 모래 언덕처럼 쌓아 놓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10-11)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 안에 있으면, 적들이 쳐들어와도 안전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해발 800m나 되는 곳에 세워진 고원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사람들은 ‘흉벽_성벽과 같은 성벽’을 쌓아서 그것을 성벽에 붙여서 뛰어넘음으로 점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자신만만해 하며, 교만하게 행할 것을 예언합니다.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12-17절)
12-17절은 하박국 선지자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갈대아 사람들이 유다를 칠 것이라는 응답에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질문합니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 유다가 아무리 악을 많이 행했다고 해도, 더 악한 사람이 그들보다는 의로운 유다를 삼키는데도 가만히 계십니까?”의 의미입니다. 또 다시 길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14-17)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유다 백성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벌레처럼 취급하여서, 낚시(갈고리)로 잡고, 그물과 투망으로 잡아서, ‘그물에 제사하고 투망 앞에 분향(풍어 제사)’을 해도 됩니까? 라고 절규하며 질문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내일 본문 2장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눈 앞에 펼쳐지는 일들이 답답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 질문했고, 하나님은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잃은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분이시고, 진리와 생명의 비질을 해서라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내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하박국은 선지자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하나님께 처절한 질문드리는 것을 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의롭게 살려고 했었고,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음도 확인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참 많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씀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질문을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내게 하시고, 어떤 문제나 상황도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으려고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신앙의 연륜이 길어질수록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질문의 깊이가 더 깊어지게 하시고, 질문의 폭이 더 넓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