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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47~56(47) 나의 이 억울함을! 2023.1.28
여러분께서는 법정에 가 보신 적이 있으세요? 저는 죄를 지은 피의자로서 법정에 서 본 적은 없지만, 재판과정을 구경하는 방청객의 입장에서 몇 번 재판을 지켜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재판 과정을 방청하였던 것이 78년도 대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당시 시국 사건 법정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교회 대학부 선배 한 분이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기소돼서 재판을 받았고, 마지막 선고 공판에 갔습니다.
그때는 군사 정권시절이라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많이 시국사범으로 재판을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그 선배를 좋아하였고 많이 따랐기에 참 암울한 마음으로 갔었는데, 그날 제가 그 법정에서 선배로부터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판사가 선고 직전에 피고였던 선배에게 마지막으로 진술할 기회를 주더군요. 그런데 그때 그 선배가 했던 말 딱 두 문장이 생각납니다. 물론 다른 얘기도 더 했던 것 같은데 그 두 마디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말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저는 범죄 사실이 없으므로 이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아야 되는 이유가 애시당초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저의 담당 검사님! 고생하셨구요. 감사드립니다. 이상입니다.”
그때 저는 정말 짧은 말도 천둥처럼 크게 들릴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범죄사실을 심문한다고 자신을 그렇게 괴롭혔던 검사까지도 다 용서한다는 얘기 아닙니까? 재판이 끝나서 보니까, 선배는 수갑을 찬 체 방청석을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교도관에 의해 퇴정을 합니다. 그런데 재판부의 검사나 판사들은 오히려 얼굴이 굳어져 퇴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그 선배는 2년형을 선고 받았고, 분노하면서 화를 폭발하여도 무관한 그 자리에서 웃으면서 담담했던 그 선배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보를 펼쳐 들고 설교 제목을 보시고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나의 이 억울함을!”혹시 “이야! 이것 내 얘기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살다 보면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내가 뭘 잘 못해서 그렇게 됐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정말로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억울하게 얽혀서 고생할 경우가 있습니다. 억울해서 억장이 무너지고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내가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는 행동을 보면 대개가 비슷합니다. 주변의 친한 사람들을 찾아서 자기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그들에게 어떤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함께 자신의 분노에 동참해 주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여러분! 혹시 그런 때에 여러분은 주님께 물어보신 적이 있으세요? 예수님께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요?” 구해 보신 적이 있으시냐 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가롯 유다와 연관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가? 그것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며, 또한 내가 그 일로 인해 내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신년 초에 하는 설교는 다분히 교훈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또한 한 해를 시작함에 있어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지침을 알려 주는 내용의 설교가 많이 등장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024년 교회 표어가 “오직 나는 주만 바라보리라”라는 말입니다.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고, 속이 미어터지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주만 바라보는 모습으로 성도는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기도하다가 성경을 읽는 중,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2024년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하고 풀어 나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024년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내 인생이라고 해도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이 풀려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세상에서도, 가정에서도, 내가 억울함을 느끼고 당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으로 승리하시길 소망합니다.
1. 칼을 칼집에 도로 꼽아야 한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번째 모습은, 빼든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요하기만 한 겟세마네 동산에 횃불과 몽둥이를 든 수 십명의 낯선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순간적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이때에 가장 먼저 나서서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51절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렇게 성질 급하게 칼을 빼어서 휘두른 사람이 누구에요? 베드로입니다. 스승이었던 예수님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행동한 모습입니다. 이런 행동 때문에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 한 쪽이 떨어져 나갑니다.
베드로가 왜 이런 과격한 행동을 했을까요? 아무 유추해 보면 “여기서 밀리면 안 되지, 선제공격을 해서 기선을 잡아야 해!”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행동을 보고 어떻게 행동합니까?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아니고 저 같았으면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즉각적으로 칼을 휘두르며 나서서 행동하는 베드로를 보고, “그래. 너 밖에 없구나, 믿을 제자는 너 하나 뿐이구나, 이 결정적인 순간에 네가 나를 위해 나서주는구나. 고맙다” 그랬을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 말을 합니다. “네 칼을 도로 칼 집에 꽂으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과 행동이 바로 잊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모습입니다.
“네 칼을 도로 칼 집에 꽂으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꼭 기억해야만 하는 인생의 황금률 같은 말씀입니다.
살다 보면 분명히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닥칩니다. 근거도 없는 일로 인해서 내가 공격당하고 비난 받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주변 사람, 내 팔처럼 여겼던 사람, 내 입의 혀처럼 믿고 여겼던 사람이 내 앞에서 내 목을 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나도 베드로처럼 칼을 빼 들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 이 놈아, 너가 감히 내 뒤통수를 쳐. 내가 너 약점을 알고 있는데, 이 놈아. 너도 한번 호되게 당해봐라”그러면서 칼을 꺼내어 단칼에 찌를려고 하는 충동이 있다는 거에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콱 찔러 한 번에 숨통을 끊어 버릴까요? 아니면 그냥 찌르는 것으로 모자란다고 생각해서, 흠씬 두들겨 팬 후에 찌르는 더 잔인한 행동을 해야 할까요?
이런 얘기 들어 보셨나요?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듯이 가끔 새도 땅에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새가 떨어진 곳이 운 없게도 진흙탕일 때, ‘새들이 어떻게 거기를 벗어나는가?’하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진흙탕에 빠진 새들은 놀라서 더 파닥거리며 날갯짓을 합니다. 그러면 거기를 빠져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진흙탕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새 중에도 지혜로운 새가 있는데, 그런 새들은 죽은 듯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얼마간 가만히 있다 보면, 새의 깃털에는 방수 기능이 되어 있어서 새의 몸을 뒤덮고 있던 진흙물이 아래로 흐르면서 빠진다는 거에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묻었던 진흙도 적당히 마르게 되고, 그 상태에서 한 번 힘차게 날갯짓을 하면, 공중으로 날아올라 위기상황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흙탕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정말 분하고 더러운 상황 가운데 분노가 하늘을 찌를 때, 내가 그걸 어쩌지 못해서 내 분노의 감정으로 화가 나서 날갯짓으로 파닥거린다면,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꼴은 더 우스꽝스럽게 되고, 그 억울함의 진흙탕을 빠져나가기는커녕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진흙탕에 빠진 새를 노리는 들짐승들의 밥이 되거나, 나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가만히 나를 뒤덮고 있는 감정의 진흙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인내하면, 그것은 어느 순간 다 빠져 나갈 것이고, 그때 우리는 다시 날갯짓을 하면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상황을 한 번 보시지요. 정말 상대방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총선을 몇 달 앞두고 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거짓말들이 난무합니다. 추악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말들이 진실인 것처럼 포장해서 정의를 공격합니다. 가짜가 진실을 위장해서 진짜 진실을 공격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자주 등장하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냥 자신의 기분 조금 나쁘다고,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문자를 익명으로 보내서 함부로 말하고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대구 지역에서 나름 큰 교회를 목회하는 제 친구 목사님은 이 문제로 애간장을 다 녹입니다. 한주간이라도 마음 편하게 넘어가는 주간이 없다는 점입니다. 권사가 권사를, 권사가 집사를, 그리고 집사가 집사를, 집사가 권사를 얼마나 물고 헐뜯는지 스트레스로 피가 마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이 받는 피해는 생각지 않고, 자신이 당한 것만 억울하다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정작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분은 교회 안에서 힘 없는 분이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 눈물만 흘립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24년 여러분 앞에 어떤 억울한 일이 번개처럼 다가와서 여러분들을 힘들게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가슴 억장을 무너지게 만들고, 교회를 옮기고, 신앙생활 자체를 포기하게끔 유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울러, 우리 모두에게는 “내 속에 숨겨 놓은 날카로운 칼이 있다”는 점을 절대 잊어서 안 됩니다. 날이 시퍼렇게 서서 그냥 살짝만 휘둘러도 상대방에게 중상을 입히고, 한순간에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서슬 퍼런 칼이 우리 모두 속에 하나씩 간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칼을 끄집어 내어 신나게 휘두르고 싶은 충동을 자제해야 합니다. 애시당초 칼을 빼지 말아야 합니다. 행여나 성질 급해서 칼을 뺏다면, 바로 칼집에다가 도로 꼽아 넣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 칼을 칼 집에 도로 꽂으라 칼로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잠잠히 인내하며 기다리면서 그 시간을 이겨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순순히 붙잡힌 주님의 모습
본문을 보면, 제대로 대항한 번 하지 않고, 큰 소리 치면서 저항 한번 하지 않은 체, 너무 무기력하게 붙잡혀 가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순순히 붙잡히셨을까요?
주님이 힘이 없어서 잡혔을까요? 패싸움 할 때에 가장 큰 주도권을 잡게 되는 숫자가 많은 쪽입니다. 그래서 싸움질하는 아이들은 ‘너희 숫자가 많냐? 우리 숫자가 많냐?’ 쪽수 계산을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이 흔히 말하는 쪽수계산에 밀려서 주님이 고분고분하게 잡혔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53절을 보면 주님 스스로도 힘이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53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12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당시 로마 제정시대의 군대편제를 예로 들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로마의 일개 군단의 병력은 보통 5,000명 내외입니다. 그러니까 열 두 군단이라고 하면 대략 6만 명 내외가 됩니다. 예수님은 당장이라도 6만 정도 엄청난 숫자의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을 상대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냥 순순히 당하라는 말인데,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냥 바보처럼 당하면서 맞고 사는 게 나아, 때리면 맞고, 누르면 밟혀서 찍소리 하지 말고 살어. 참는 게 이기는 거야!”이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참된 모습일까요? 예수님은 이런 뜻으로 그냥 참고 견디고 인내하라고 말씀하였을까요?
오늘 예수님은 그 답을 54절과 5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냥 맞서 싸워서 그들을 무찌른다면 어떻게 된다는 걸까요? 54절,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또 56절 보면, (다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고, 무슨 뜻이에요? 바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이것을 더 잘 설명한 말씀이 빌 2:6~8 사이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런 싸가지 없는 놈들, 그래 한 번 붙어보자. 내가 힘이 없어서 참는 줄 아느냐? 내가 오늘 본 때를 보여주마! 이놈 들 어디 혼줄 한번 놔봐라” 하고 그들과 거룩한 맞장을 뜨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우리가 보기에 “와우! 우리 예수님이 정말로 남자야, 남자! 파이터의 근성이 있어, 예수님 맘에 들어!” 그렇게 얘기할 수는 있을까요? 그렇게 싸워서 주님이 잡혀가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심지어 가정에서든 참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내가 바보라서요? 내가 말을 잘 못하니까, 내가 능력이 없으니까, 봉변당하느니 차라리 참는 게 낫지 그러는 건가요? 이런 소극적이고 패배자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이 억울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참는 것입니다.
내가 참는다고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냐구요? 당장에 오늘 한 번 시험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집으로 돌아가시기 전, 어떤 일을 꼬투리 잡아서 다른 성도 분들을 비난하고 그분들에게 화를 내어 보십시오. 꼬치꼬치 따지고, 혼내고, 화를 폭발시켜 보시지요. 내 기분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엉망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 모두가 화목하기를 바라시고, 그 교제 가운데 천국을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참고, 내가 조금 더 양보하고, 내가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판단되어도,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냥 넘길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절제되지 못하고 표현하는 나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절대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2024년의 모든 시속에 내 칼을 칼집에 도로 꼽고, 나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