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믿음의 길. 히11:1-3.
생산적 믿음, 18과 조용기
https://cafe.daum.net/rnjstlgur/DhRo/4 권시혁
오랫동안 우리들은 믿음이란 말을 오직 종교적 도덕적 내세적인 의미에서만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세계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현실적인 창조적 생산적 힘(power)이요. 우리의 운명을 개조하며, 환경을 변화시키며, 어둠을 광명으로 무질서로 파괴를 건설로, 절망을 소망으로, 궁핍을 부요와 생산으로 변화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믿음의 위대한 권능과 역사가 꽉 들어찬 성경 중 믿음이란 실제적인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짧은 성구를 한번 인용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히11:29-35
이 얼마나 장쾌한 믿음의 증거입니까? 이 얼마나 믿음이란 자연과 환경과 생활과 운명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위대한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성도들에게 예외 없이 분량대로 나누어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12장 3절에 기록한 말씀을 보면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주를 믿는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나눠주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면 자기가 느끼든 아니 느끼든 간에 이미 분량대로 믿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믿음을 사용치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태도로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무슨 겸양지덕이나 되는 것처럼 시인하고 다닙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성도의 생활 속에 믿음이 산출하는 위대한 승리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긍정적인 시인을 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함께 “나는 믿음이 있다. 나는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은 내게 믿음을 주셨다”라고 힘차게 시인합시다.
물론 믿음의 분량에 있어서는 큰 믿음, 작은 믿음,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잘 활용하여 개발한 사람은 크고 연단되어 강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요. 믿음이 있음에도 그것을 그대로 두고 활용치 않을 때는 작고 약한 믿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눅 17: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제자들에게 오직 의미 있는 믿음을 활용하기 시작하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저는 몇 개의 겨자씨를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겨자씨가 얼마나 작던지 마치 먼지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활용하면 큰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게 된다는 것이니 우리는 모두가 겨자씨보다는 큰 믿음을 갖고 있는 줄 확신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이 믿음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알아야 할 기술적인 면이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막연한 허공을 향하여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위대한 힘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생산하고 창조할 분명한 목표와 대상을 가져야만 합니다.
일반적인 신앙도 목표도 없이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생활 중에서는 뜨거워지거나 강해지지 않습니다. 굳세고 뜨거운 신앙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교회와 연관성을 가지고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분명한 목적이 있는 일에 참여해야 비로소 뜨거워지고
기도하게 되고 장성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의 위대한 힘이 우리의 마음에서 나타나기를 원하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생활을 하는 중 내가 원하는 바 분명하고 명쾌하며 흔들리지 않는 결단적인 목표가 정해져야만 합니다.
둘째로 이와 같은 분명한 꿈, 즉 목표가 정해졌으면 이제는 전 생명을 불태우는 뜨거운 열정적 소원이 그 목표를 부여잡아야만 합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놀라운 삶의 목표를 정하여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저 그것을 구경꾼처럼 관망이나 하고 냉정한 태도로 요행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믿음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분명한 것들 (Things)에 대한 뜨거운 “바람”이 없이는 생산과 창조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언제나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광신자 혹은 괴짜로 오해를 받기가 일쑤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도 예수님께서 동일한 진리를 파헤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 중 기도하고 구하기 전에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분명한 그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과 그것을 실현시킨 기도가 구함(desire)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구함이란 말은 소원이란 말입니다.
시편 87편 4절에도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분명한 목적에 대한 열화같은 소원과 바람은 믿음의 창조적, 생산이 일어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셋째로 이와 같이 하여 앞선 두 조건이 구비되었으면 이제 내 중심의 마음에서 믿음이 발생하여 구하는 바가 마음에 이미 소유되었다. 혹은 이루어졌다는 확신이 오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확신은 어떤 사람에게는 일시에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좀 더 긴, 시간 동안을 기도할 때 얻어지게 되는 보화입니다.
이와 같은 확신을 성경은 실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실상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휘포스타시스" 라고 하는 말로서 그 뜻을 풀이하면 쉽게 증서, 문서라는 의미입니다. uJpovstasi" (5287, 휘포스타시스) 본질, 실체, 확신, 계획
다시 말하면 우리가 땅이나 집 등 부동산을 매매할 때 그 동산을 떠 매고 다니며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부동산을 표기한 법적 증서 또는 문서를 가지고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합니다.
그와같이 우리가 일단 우리의 뜨겁게 소원하던 분명한 목표가 기도를 통하여 마음에 확신하게 되면 이미 우리는 우리의 목표에 대한 실상 즉 법적 문서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실상이 이제 현실화 되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가 활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그 시와 때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네째로 우리는 일단 마음에 생겨난 믿음의 확신 즉 실상은 그것이 현실적인 환경에 나타나게 될 때까지 놓지 말고 잡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놓지 않고 잡고 있는 비결이 바로 입으로 그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롬4:17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으로 소유한바 확실한 실상(비록 아직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일지라도)을 현실적으로 이루실 때까지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는 입술의 긍정적인 시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속에 담은 믿음의 위대한 힘을 개발하여 우리의 생활에 의와 성결, 정의와 질서, 건강과 부요 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든 것을 생산하고 창조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