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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5장1-11절 예루살렘회의 복음과 문화01 240921 원주희목사
2024.09.21 토 오전 7:52 ・ 23분 38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서 또 이 땅 전 세계 가운데 또한 펼쳐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믿는 구조,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라고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문화적 토대가 너무 달랐습니다. 문화적 토대가 신앙적 전통도 너무 달랐습니다.
이방인들은 불신의 세계, 믿지 않는 세계에서 주께로 들어온 사람들이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신앙의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유대 율법 모세 5경에 나오는 율법의 조문들을 해석한 그 엄격한 율법주의들이 횡행해가고 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문화적 배경, 혈통적 배경, 종교적 배경 너무나 다무나 다릅니다.
근데 이 배경 다른 것들을 유대인들은 뭐라고 믿느냐 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이 지켜오던 긴 세월 동안 지켜오던 것들을 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믿는 사람들은 성경적 가치관 안에 집어넣어야 됩니까?
안 집어넣어야 됩니까?
그들이 믿고 있는 성경적 가치관에 집어넣어야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대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이 모세의 법대로 뭘 받아야 된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
아니하면 능이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구원받지 못하리라 하려면 그렇겠습니까?
유대인의 음식 규정 비늘이 있는 것은 먹고 없는 것은 먹지 못하고, 돼지고기는 안 되고, 소고기, 양고기는 되고, 유대인의 음식 규정 다 지켜야 된다 이런 겁니다.
음식만 그렇겠습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그리고 절기 유대인의 3대 절기를 다 지켜서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가 유대교의 한 종파로 있어야 된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자들, 이방인 중에 종교로서 유대교를 택했던 경건한 자들처럼 되어야 된다.
단지 하나 믿는 차이는 예수를 믿는다. 이 차이 외에는 모든 것을 유대교에 입교했던 종교로서 유대교를 택했던 경건한 자들처럼 살아야 된다.
이거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대표적인 모습이 할례를 받아야 된다라는 것이에요.
이때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무엇이 일어난지라 변론이 일어난지라 결론이 일어났는데 이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과 바나바 및 그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그 장로들에게로 보내서 예루살렘 교회 모교회로부터 이것에 대해서 판결을 받기를 원했고, 교통 정리가 되어지기를 원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각자 도생, 각자 도생하기 더 쉽습니다. 신앙의 전통 안에서 각자 도생할 것인가 예루살렘 교회는 어땠냐?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 문화적 배경이 유대인입니다.
바리새파의 양식을 따라서 음식 규정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안식일날 회당에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회당에 모였습니다.
또는 성전에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주일날 되면 집에서 떡을 떼며 이랬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날 모이고 주일날 또 모이고 하는 이중 구조를 가졌어요.
이방 땅에 흩어진 교회들은 안식일날 모이고 주일날 모이는 그룹도 있고 두 번 모이는 그룹도 있고 주일만 모이는 그룹도 있고 안식일에만 모이는 그룹 없습니다.
그건 회당에 유대교인들이 하는 겁니다. 유대교인들, 유대교에 입교했던 경건한 사람들 출신들은 안식일날 회당에 모이고 주일날도 집에서 모이기도 하고 안식일날 주일날도 회당은 쉬니까 서로 얘기가 잘 되어지면 회당에 모일 수도 있고 그런 구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교회가 이방인 중심의 교회로 넘어가면서 안식일날 모이지 않고 주일날 모이는 곳으로 바뀌었어요.
그게 이제 안식일과 주일의 변화된 전성들입니다.
유대교로 돌아가야 되느냐 돌아가야 된다라고 하고 돌아가면 복음과 함께 율법주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갑니다.
안식교인들을 만나보면 착해요. 사람들이 굉장히 강한 율법주의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냥 안식일 지킨다. 금요일 저녁에 토요일 저녁까지 안식일 그것도 유대주의처럼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 것 같아요.
안식일을 지킨다 이거 하나 차이만 있는 게 아닙니다.
율법주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주의 그래서 자유함을 좀 구속하는데 대신에 그 틀 안에서 이렇게 자라다 보니까 굉장히 착해요.
사람들이 죄 안 짓고 이슬람 지역에 가보면 이슬람 무장 세력을 엄격하게 막 그런 거 그래이 자꾸 나와서 그런데 무슬림들이 착합니다.
종교적 능력만 빼고 나면 엄격한 율법주의가 있기 때문이에요.
율법주의는 굉장히 강한 윤리적 면들을 나타내기 때문에 매력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 그런데 복음에 대한 자유함이나 이런 것들과 멀어지게 되죠.
어쨌든 지금 그것이 안디옥교회의 논쟁이 되니까 사도와 장로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직제자들에게 보내기로 사람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가서 교회 전송받고 베니게 사마리아 베니게와 사마리아는 유대와 접전 지역인 그런 교회들이 있는 곳입니다.
사마리아에 가니까 빌립이 전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했던 형제들이 다 기뻐하더라 이랬어요.
예루살렘까지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갔더니 사도와 장로들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말하였더니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 그 당시 대 예루살렘의 인구가 10만 명 정도로 보는데 손승무 목사님은 그중에 반 정도가 그리스도인이었다라고 봅니다.
근데 조영기 목사님은 한 20% 그래서 2만 정도가 10만 명 중에 2만 명 정도가 그리스도인이었다라고 봅니다.
근데 반이든지 반은 엄청나죠. 근데 5분의 1이라도 대단한 숫자입니다.
5분의 1이라도 대단한 숫자입니다. 5분의 1이지 그래야 20%지 5분의 1이죠.
10분의 2이고 5분의 1이죠. 제가 수학을 조금 조금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굉장한 영향력이 있는데 유대에서는 유대에서는 바리새파의 의식과 사도계파의 종교 예전과 이걸 다 지키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그들의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성전에 가면 번제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속건제를 드리면서 예수님 앞에 회개 기도하고 이게 이중 구조가 익숙해요.
그리고 유대인 율법을 따라서 먹으라는 음식, 먹지 말라는 음식, 이슬람 사람들이 할랄 음식 얘기하듯이 소고기를 소를 먹을 때도 그냥 소가 아니고 할랄 인증을 받은 도축 과정에서 율법주의적인 규정을 따라서 그렇게 손을 잡아야 돼요.
그러니까 그런 규정을 지킨 그런 음식을 먹는 것들이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아왔던 삶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까? 어떻습니까? 문화니까 우리는 그렇게 보지 이 당시의 사람들은 우리는 그것이 유대의 문화라고 얘기하지만 그들은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오랫동안 문화와 진리와의 갈등들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화권으로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이 갈등이 재현되어 왔고 이 갈등들 속에 전의 문화 속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것을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고 성경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문화에서 헬라 문화로 넘어가는데도 성경적이냐 이게 문화냐 이 갈등이 일어났고, 이 갈등의 중재자로서 베드로가 나서고 야고보가 나서서 예루살렘 교회를 정리합니다.
근데 헬라 땅에서 이방 땅에서 복음이 이렇게 풀어지고 세워지고 2천년 2천년을 보냈습니다.
그들의 문화 게르만 민족이나 그 백인들의 문화와 복음이 이렇게 믹싱이 되고 만나면서 그들의 문화 속에 녹여진 기독교 기독교가 그들의 문화를 변화시켜서 기독교적 가치가 그대로 투영되어지면서 백인들의 문화가 재편되었습니다.
그 문화적 토대는 유목 문화예요. 유목 문화는 수평적 문화예요.
땅을 기반으로 살아온 농경 문화는 수직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영어를 보면은 그냥 높인 말 낮춤 말이 별로 없습니다.
영어는 그냥 히 히즈 그냥 넣어 놔 이래 갑니다. 한국말은요.
님의 해가지고 높은 말 낮춘 말 남을 높여주는 말도 있고 나를 낮춰서 남을 상대적으로 높게 보여주는 그런 말도 있고 그렇게 높인 말 낮춘 말들이 굉장히 엄격합니다.
이게 왜 그렇게 그런 높이말 낮춘 말이 없냐 신분의 차이가 극심한 거예요.
사농공상의 차이가 극심하고 땅을 가진 지주와 소작과의 사이 과이가 절대적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그 조그마한 자기보다 어린 도련님이라도 소장 주인의 아들이면 굽신굽신거려야 되는 게 우리나라의 문화예요.
동양 문화의 특성과 서양 문화의 특성 안에서 복음이라는 것이 들어가서 이렇게 뿌리내려갈 때 동양적 전통과 서양적 전통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서양적 전통이 성경적입니까? 성경적 가치 복음의 가치가 서양 문화와 만나면서 어떤 것은 양보하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절제시키고 어떤 것은 패하고 그러면서 깎여서 2천 년 동안 형성된 게 서구의 가치관이에요.
그래서 그 안에서 복음이 역사한 굉장히 좋은 면들이 있고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지만은 그 자체가 성경적이지는 않아요.
성경적 가치가 투영된 거죠. 복음이 이렇게 다른 문화권으로 펼쳐갈 때마다 이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전에는 지역과 지역 안에서 타문화로 갈 때의 문제였지만은 오늘날의 시대에는 세대와 세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전 세대와 지금 세대는 완전히 다른 종족들이에요.
세계관 다르고 가치관 다르고요. 그냥 쌀밥 먹는 것 밖에 외에는 다 달라요.
한국말 쓰고 있다는 거 외에는 다 달라요. 서부 사회도 새로운 세대에 대해서 복음을 풀어낼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잃어버렸더니 전통을 고수하던 교회들이 그만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유럽 교회가 무너지고요. 미국 교회가 무너지고 한국교회를 벗어내다가 지금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타문화의 사람들입니다.
복음이 다음 세대에 타문화로 전파될 때 재해석이 필요하고, 복음적 가치가 있는 옛 문화 속에서 좋은 업적을 내었던 것이라도 버려야 될 건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지킬 것은 지켜 나가야 됩니다. 따라 합시다.
변화한 세계에 변치 않는 복음을 변치 않는 복음을 변화하는 세계 세계는 변화예요.
시대도 변화합니다. 변화하는 세계 계속 변화합니다.
시대가 달라지고요. 다른 지역으로 가면 확실히 확 느껴지고요.
우리는 가정 안에서 그런 세대를 그렇게 극심하게 느낍니다.
근데 한국인들의 기질 안에서는 이게 내가 옳다가 죽어도 내가 옳다 니가 쳤다 내가 안 간다 하는 게 한국인들의 기질이에요.
그래서 이 싸움이 피가 튀깁니다. 국회의에서도 종교를 떠나서 그 일은 그냥 여당과 야당이 서로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극자와 거구는 유럽은 서로 통한다 하는데, 극자와 거구가 지금 우리는 극단적으로 싸우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이것을 복음 안에 빨리 극복해야 될 그건 정치적인 문제이고, 근데 복음 안에서 교회도 지금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과 우리와 꼬맹이들과 우리와 세대가 달라요.
다른 세대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복음의 재해석들이 오늘날도 필요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어 나갑니다.
오늘 베드로 가장 보수적일 수 있는 사람, 시골 천떡이 못 배웠던 사람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되 7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나를 택하시고 마음을 아시는 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나님이 하지도 않은 일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맺지 못하던 율법의 그 모진 멍예들을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하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주를 믿노라 이렇게 선언합니다.
베드로의 선언에 예수님 형제 야고보가 화답을 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 결론 안에서 몇 가지 지침을 내려서 이 일을 끝을 내었습니다.
회의는 끝났는데, 계속해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 회의 결과에 상관없이 논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논쟁 때문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라고 하는 성경을 써서 율법주의와 기독교, 예수 믿는 믿음의 도리와 은혜의 구원과 율법주의적 세계관의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변증하는 책을 저술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진리를 전한다고 사도바울은 저건 사도도 아니야 왜 예수님 제자도 아니잖아 하면서 사도꾼에 돈에 대한 도전을 계속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것을 쉽게 포기해버리면 안전지대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새로운 세대가 있고 새로운 민족이 있고 복음의 땅 끝까지 풀어져야 될 때, 사도바울은 이 계승된 안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해 나가는 우주적 기독교의 면모는 너무나 필요했고, 시간이 지나서 에이디 70년에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교회의 중심이 이방도 다 흩어집니다.
그리고 흩어졌을 때 그들은 신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회당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받지 않기로 결의했습니다.
에디 90년에 그래서 그때부터는 흩어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도 못 갔습니다.
회당에 가면 유대교로 돌아가야 됐습니다. 이방 땅에 흩어져서 그들은 각 교회 교회,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 교회, 사도바울이 씨앗을 뿌려놓고 복음이 자라나서 복음 안에 세워진 교회들의 그들의 삶을 의탁해 하는 뜻입니다.
그게 초대교회에서 이방인 교회에서 유대인의 교회로 넘어올 때의 현상들이 이렇습니다.
문화권이 바뀔 때마다 교회는 이 진통을 겪었습니다.
이 진통 중에 진보적이 될 것이냐 보수적이 될 것이냐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존의 문제였어요. 기독교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가 만약에 발빠르게 이렇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방 땅에 교회들이 전혀 세워지지 않았을 테고, 세워지지 않았다면 유대인에서 쫓겨난 그들이 곳곳에 이방 땅이 흩어지면서 다시 모든 교회를 개척해야만 되는 그런 상황이 됐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요셉처럼 미리 보내서 예비하시는 일들에 그들은 도장을 찍어줬습니다.
도장 하나 찍어준 것이 후일의 아름다운 열매들로 복음을 떠나서 복음의 놀라운 열매도 되었지만 그들의 삶을 의탁하는 놀라운 열매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복과 은혜가 우리 한국 땅에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전 세계 교회 안에 복음과 문화에 대한 재해석이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민족들 속에서 예수 복음의 역사가 풀어져야만 합니다.
그 복과 은혜가 함께하게 되기를 소망하며 오늘 이 제목 놓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복음과 문화 변하는 세상 안에서 변치 않는 복음을 들고 나가는 믿음의 세대들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삼아주시어서 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피, 모든 복음이 전 세계에 편만이 퍼져나가고 생명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여정에 쓰임 받기 축복하여 주옵소서 우리 내담자를 위해 다음 세대를 세워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다음 세대를 세울 선생님도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함께 팀이 되어서 이 교회를 세워나가고 또 함께 성김 선생님도 아름답게 세워지는 기회와 은혜가 있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5장1-11절 예루살렘회의 복음과 문화02 240922 원주희목사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은혜로 구원받는가, 행위로 구원받는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취지를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유대 문화와 이방 문화 속에서 복음이 가야 될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그 고민에서 결론이 예루살렘 경우 바른 결론을 내었습니다.
바른 결론을 냈는데 베드로가 말문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보세요.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무엇을 행하고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랬어요.
모세의 율법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율법 중에서 여러 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행위법이 있어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행위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다음 그 행위법 안에 각주가 달려가지고 안식일을 지키라.
그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의 내용이 뭔가 안식일 동안 몇 몇 km를 갈 수 있는가?
사람이 기본적인 일상생활이 가려면 안식일날도 움직여야 되는데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는가 이런 것들입니다.
레위기서에 나온 음식에 관한 규정들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고, 비늘 없는 것은 먹을 수 없고, 그리고 짐승들 중에서 발굽이 있는 짐승은 먹을 수가 있고, 발굽이 없어서 발이 갈라진 짐승은 먹을 수가 없고, 이런 것들이 되새김질하는 짐승은 먹을 수 있고, 되새김질하지 못하는 짐승은 먹을 수 없고, 그런 주장 피를 먹을 수 있고 피를 먹을 수 없고 이런 규정들, 음식에 관한 규정들 이런 것들이 모세의 율법 규정 안에서 몇 가지 법이 있는데 따라서 행위법, 제사법, 전리법 그렇게 3개로 크게 나눌 수 있어요.
행위 행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가는 삶의 행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행위법에 관한 규정들 제사법, 제사,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근제 이런 제사에 대한 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세 번째 마지막 뭐라 그랬습니까?
행위법 제사법 절지법, 절지, 안식일 그다음에 안식년, 그다음에 유월절, 맥추적 초막절 이런 유대인의 절대 절지에 해당되는 절지에 관한 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했습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정신은 가져오고 규정은 형식은 바뀌어집니다.
구약의 율법에 나오는 할례를 행하라 하는 것들이 갈라디아 주요 논쟁이 되지만은 그것만이 아니에요.
모세 율법에 있는 모든 법전들에서 그 정신은 신약 시대에 가져오고 그다음에 행동 양식과 그런 것들은 다 바뀌어집니다.
바뀌어지는데 제사법은요. 제사법은 그것이 번죄든지 화목제든지 무슨 제사든지 간에 따라서 예배와 십자가로 정리합시다.
제사법은 예배와 십자가로 다 정리해버린 예배와 십자가 우리가 오늘 드리는 예배할 때 그 예배 안에 중심을 깊이 들여 나갈 때 예배 속에 성령님의 임재가 있고 그리고 피모데 십자가가 꽉 부딪힐 때에 그때 구약의 제사에 본 정신이 다 이루어집니다.
속죄제가 이루어집니다. 속건제가 이루어집니다.
함목제가 이루어집니다. 소재가 이루어 번죄가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과 제사법들이 바로 우리 예배와 예배 속에서 피 묻은 십자가의 은혜에 깊이 있을 때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할렐루야 행위법은요. 행위법은 정신은 가져오는데 행동하는 양식에 관해서는 시대와 문화를 고려해서 계속 바뀌어 왔습니다.
행위법 안에서는 할례를 행하는 것, 음식을 어떤 것 먹고 안 먹고 이런 것들에 관한 규정들입니다.
이런 규정들에 대해서 15절에 보면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이 말했다 했어요.
바리새파인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주장하겠습니까? 할례를 행하는 그것은 참 의미가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부터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간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는데 이방인들은 그런 문화가 없는데 지금 나이가 든 성인 할 일을 지금 다 해가지고 중심 요지가 뭐냐 하면 유대인을 만들어라는 겁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태어난 대로 모양대로 예수 믿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 그대로 중에서 죄된 것은 죄하고 그리고 예수를 믿어라 그게 사도바울의 언정이에요.
이방인들은 이방인들처럼 유대인들의 유대인들처럼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서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가서는 자신이 혈통적 유대인인 그 정체성을 가지고 접근했어요.
그리고는 이방인들에겐 이방인들처럼이라는 그런 말들을 가지고 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연성을 가지고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논리예요.
그래서 할 일을 꼭 해야 되느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굳이 이방인들에게 안 해도 되는 것을 가지고서 백을 쌓을 필요가 뭣이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 율법 중에서 안식일 안식 계명 그 절기 맥주들, 초막절 절기를 다 지켜라.
그거 이방들 어떻게 지키느냐 안식일 그런 절지들의 규정들이 우리에게 큰 유익함이 있습니다.
봄 절기, 가을 절기 두 번의 큰 절기를 유대인들은 지키면서요.
1년에 두 번 큰 부흥회를 합니다. 유월절로 시작해서 무교절로 시작해서 초실절까지 이어지는 유월절의 절기를 이렇게 지키는데 유월절 하루 딸랑 찍히는 게 아니에요.
일주일간의 무교절부터 시작해서 초실절까지 이어지는 이 절기를 이렇게 지키면서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머무는 시간을 가집니다.
신앙의 과정을 이렇게 가지면서 믿음을 회복하고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져요.
가을 절기도 마찬가지예요. 7월 1일부터 시작해서 7월 10일까지 지켜지는 열흘 동안의 큰 기간들입니다.
그래서 그 긴 시간을 꽤 긴 시간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일상 속에서 무너졌던 것들을 회복하는 그런 시간을 가져요.
그 정신은 우리가 가져와서 우리가 어떤 시간 동안에는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그렇게 자신을 깊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그러한 시간도 필요해요.
하지만 굳이 그것이 유대인의 전리일 필요는 없다.
할렐루야 그게 사도바울의 논리입니다. 바리세파는 무슨 소리냐 그 절기를 지켜야 된다.
할례를 해결해야 된다. 성전에서 지금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 이것도 절기 때 와서 예루살렘에서 지켜야 된다 이거 주장하는 겁니다.
옥신각신 다툼이 펼쳐질 때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변론들 중에서 여러분 이런 변론할 때 그리스도인이 조심해야 될 게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를 존중해야 됩니다. 많은 변론을 할 수 있는데 서로를 존중해서 계속 당신의 의견을 수평관계라도 계속 이 얘기를 계속 믿도 끝도 없는 얘기 같은 얘기를 계속해 나가는 거 그게 존중과 인격이에요.
많은 변론이 있는데 그 존중주에 들어 공격적인 말들이 나왔을 수 있어요.
그럴 때 그것을 너무 흥분하지 말고 좀 좀 마음 좀 내려놓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다독다독이면서 그 많은 변론을 지나갑니다.
그 많은 변론을 지나가고 결론적인 부분으로 다가서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벌떡 일어서서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로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누구를 택하시고 나를 택하시고 베드로는 키맨니에 열쇠를 여는 사람입니다.
이방 선교의 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시작됐는데, 고넬루에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하나님이 굳이 꼭 찍어서 베드로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보고 너가 가서 복음을 전해라 하면서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했어요.
키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누구 무엇을 주어 성령을 주어서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뭐 하지 않았다 차별하지 않았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다음 9장 10절부터는 우리도 우리 조상들도 그 율법의 명령을 다 짊어지지도 못했고, 우리도 다 짊어지지 못했던 율법의 교문과 정신들을 다 지키라고 지금 하느냐라고 말할 때 그들의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앞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역사의 방향성들 속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주장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집과 아집들을 내려놓았어요.
이게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루어진 결론적으로 가는 여정들입니다.
여러분 만약 이 여정에서 어리석은 결론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역사의 방향이라고 하는 것은 참 무효예요.
역사의 큰 소리 바퀴가 움직일 때 그건요. 사람이 인위적으로 막을 수가 없어요.
막을 수가 없고 그 방향의 흐름을 역천자 거역하는 사람은 망해버려요.
하나님이 온 세상 가운데서 복음을 풀어나가려고 하는 놀라운 계획과 승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섭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들이었습니다.
그 전통들은 복음이 올 때까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경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적이라는 말들에 속으면 안 돼요. 성경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돼요.
그런데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 속에 자기의 문화적 전통과 이런 것으로 아즙을 삼아놓은 집단들이 대한민국 교회 안에 전 세계 교회 안에 널렸어요.
그들의 해석들은 성경적입니다. 이 성경적인 것들이 성경의 본래 정신을 해산해버리는 거, 복음의 본래 정신을 훼손해 버리는 겁니다.
대한민국 교회에 찬양 운동이 이렇게 펼쳐질 때 여기에 드럼이 올라갔습니다.
드럼이 지금은 드럼 위에 올라간 교회가 오히려 부러운 대상이지만 청년들이 이렇게 드럼을 치 이런 교회가 무슨 딴따라냐 하면서 얼마나 비난을 받았는지, 제가 찬양팀 활동할 때 찬양팀 리더가 기타를 쳤는데요.
너무 찬양의 의미가 돼서 눈을 감으면서 기타를 치면서 예수 사랑하심을 본인의 은혜가 충만해서 기타 치면 예수 사랑하심은 치고 있는데 목사님이 와가지고 이 가슴팍을 다 들어버렸습니다.
이 친구는 졸도했습니다. 그 친구 원래 심장이 약한 친구였거든요.
심장 판박증입니다. 졸도했습니다. 곧바로 병원의 중환자실에 실려갔습니다.
근데 사모님은 와서 손이야 발이야 아이고 박형 박광수 형제인데 박광수 형제 미안하네.
미안하네. 사과를 하는데 목사님은 끝끝내 사과하지 않아요 목사님 왜 사과하지 않습니까?
때린 것은 잘못했지만은 교회에서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말이야 기타 치고 말이야.
여러분 기타 치는 게 복음입니까?
문화니까 문화인 겁니다. 할렐루야 복음입니까?
문화입니까? 문화인 것이 문화는 세대와 세대가 다르고요.
한국인과 일본 사람이라고 한국인과 중국 사람이 달라요.
문화적 차이를 수준 차이다. 문화적 차이를요. 옳다 그르다 참과 거짓이다 이렇게 접근하면 대단한 큰 오산을 빚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가치들을 놓쳐버리게 돼요. 징키스간의 군대가 유럽을 돌이켜 나갈 때 유럽의 기사들도 굉장히 강력한 그런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들이 왜 그렇게 판판이 나가떨어졌느냐 유럽의 기사들은 신사들을 지키자 칼로 싸움을 하는데 정당한 대결을 해야지 결투하자 결투하고 룰을 따라 지키는 그런 싸움이었습니다.
징기스칸의 군대는 룰이 어딨습니까? 이기는 놈이 법이지 그래서 그리고 그들은 반을 도 팔이 휘어진 칼을 가졌어요.
그래서 이렇게 베는 게 이 말을 타고 가면서 확 베버리는 거예요.
근데 유럽의 칼들은 책선형입니다. 찌르는 칼이에요.
찌르는 칼을 들고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징키스카는 배는 걸로 와서 쓱 하는데 이놈아 기사도를 지켜.
그래서 증키스카는 군대 야만이라고 부르 비난했어요.
전쟁에서는 이기는 놈이 장땡입니다. 그게 법이에요.
룰을 따라 싸워라. 그 룰은 서로 합의했을 때 그게 룰인 겁니다.
좀 비에서 그렇지만 복음 안에서는요.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서 이 시대 속에서 오늘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갑니다.
엠제트 세대라고 하는 전혀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서 살아가요.
이 신세대들 새로운 세대들에게 복음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무엇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느냐 따라 합시다.
복음과 문화, 복음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복음에 대한 확실한 깊은 그냥 뿌리 깊은 정통성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문화에 대해서는 융통성을 가져야 돼 융통성을 가지고 그렇게 접근할 때 우리는 복음 안에서 아름답게 문화를 넘나들면서 복음의 꽃을 피워가는 하나님의 역사들을 다시 한 번 이 땅 가운데 이루어 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는 우리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시대와 역사와 달라지는 이 많은 변천사 속에서 복음의 진리가 제대로 풀어지는 우리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피묻은 십자가의 은혜가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우리의 귀에 들려지며 우리의 마음에 들려져서 우리의 지나간 인생을 십자가로 정리하고 남은 인생을 복음으로 살아내며 아름다운 열매 맺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주장하여 주시고 영광 거두어 주시옵소서 여호와께서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5장7-22절 예루살렘회의 복음과 문화03 240923 원주희목사
2024.09.23 월 오전 8:20 ・ 22분 56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충만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변론하고 있지만은 그 배후에 사실 여인이 있습니다.
부인의 영입니다.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하는 악한 영들의 역사가 이렇게 역사하고 있는 것이죠.
영적 지능이 사실은 치열한 겁니다. 사람은 서로 달라요.
다른 것이 신앙 안에 들어오면 이게 고집스러운 교리화됩니다.
고착화돼요.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다툼의 영이 역사하면 분열의 영이 역사하면 그게 있고 뭐가 뛰고 뭐가 뛰고 하면은 자존심 끼고 민족주의 끼고 하면 굉장한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변질되어서는 안 돼요.
변질되어지면 안 되지만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신 하나를 이루어 가는 그러한 교회여야 합니다.
할렐루야 세계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늘 실패하곤 했어요.
어쨌든 여기에 예루살렘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하는 결정적인 인종적인 차이 그리고 문화적인 차이, 그리고 그들이 영적인 우위에 있다고 하는 자존심 이런 것들 그다음에 나름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 성경이 구약 성경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모든 얘기들이 구약 성경 얘기예요.
그래서 신약 성경 사도바울을 통해서 바울 서신이 쓰여지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성경에 제일 먼저가 아니에요.
신약성경에 오히려 사도바울의 소신들이 가장 먼저 쓰여진 성경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수신이 쓰여지고 그리고 복음서가 쓰여지고 신약 성경이 한 번도 안 나왔을 때입니다.
구약 말씀 붙들고서 성교하고 말씀 나누고 했기 때문에 구약 전통을 지키는 것이 옳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만약 그렇게 결정 나게 되면 복음은 굉장히 협소화되었습니다.
지금 전 세계 가운데 의식주의 기독교로 남아 있는 데가 몇 군데 있습니다.
히랍 전교회 그다음에 이집트의 곱틱 교회 이런 데는 종단이 있어요.
그 교회에 출석하는 분이 있습니다. 의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복음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복음의 내용 그분이 부활하셨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 우리 인생에 죄를 사하고 실제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가 경험하고 영원히 거듭나고 이런 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고 그냥 가문 대대로 코디 교회를 믿는 그런 종교로서의 기독교로만 남아 있어요.
물론 그 안에서 진실한 성도도 있을 수 있지만은 만약에 유대 율법주의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이방 땅에 복음이 그냥 풀어지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문화에 맞는 기독교로 바꿔져야 되는 겁니다.
한국의 네스토리우스라고 하는 경교, 네스토르 스파라고 하는 종단에서 기독교 한 분파입니다.
신라시대 때 복음을 전했습니다. 경교입니다. 당나라에서는 꽤나 큰 경교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 경교가 경교가 사라졌어요. 한국의 지역 종교 불교 무속이나 이런 것들하고 섞이기도 했지만은 복음의 본질성들을 놓쳐버리게 되면 그냥 형식적 기독교가 되어버리면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명맥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명맥은 어디 가 있냐 불교에 가 있습니다.
네스토리프스파의 교리들하고 불교의 교리가 대승불교의 교리하고 짬뽕이 돼가지고 불교에 어디 유해가 있고 불교에 어디 지옥이나 극락이나 이게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원래 스카모니 불교의 불교에는 없습니다.
소송 벌기에 없어요. 원래 대성 불교에도 없습니다.
없는데 이게 짬뽕이 돼가지고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의 교리가 거기에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극락이라든지 지옥이라든지 그런 개념들이 불교에 있습니다.
불교의 한 종파처럼 그래 됐어요. 그리고 그 안에 섞여가지고 그러다가 불교가 좀 흡수돼 버렸습니다.
근데 복음이 복음다운 것 그리고 그 문화 속에서 복음이 풀어질 때 그때 복음은 폭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이방 땅으로 이렇게 넘어갈 때 이방인 땅에 복음을 풀어 나갈 때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처럼 믿으면 되고, 이방인들은 이방인들처럼 믿으면 되는데 이방 문화 안에서 죄된 것들이 있으니까 그것은 끊어야 되고, 근데 할례를 받고 안 받고는 죄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아라 받지 마라. 이방인들은 이방인으로 예수 믿으면 되지 왜 그들을 유대인화시켜야 되느냐라고 하는 그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이 예루살렘 유대교의 본산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그 본산에 가서 지금 유대교 그리스도인들하고 논쟁이 붙는데 지금 이쪽에는 바울과 바나바 두 쪽이 2명이고 저쪽에는 전부 다 바리새파 유대인들입니다.
바리새파 그리스도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 논쟁이 많은 변론이 있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그런 상황이에요.
근데 그때 예루살렘교회 지도자가 베드로와 야고보 중심 지도자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무슨 말을 시작하느냐 하나님이 복음을 나를 통해서 풀어놓으신 것을 쭉 얘기하고 베드로가 이야기하니까 그들이 마음을 열어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노라 고백했더니 온 무리가 이제 가만히 있어 잠잠해서 숙연해져서 그리고는 바울과 바나바에 언권을 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서 말하는 것을 듣기 시작합니다.
차근차근 들으면서 말을 마칠 때 됐을 때 야고보는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야고보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모온이 말했는데, 이 시모온은 예수님이 태어나서 성전에 올라가지도 안나와 신모원 그것이 모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어릴 때 행적을 알고 있는 사람, 어릴 때부터 형형하며 따라다니면서 어머니로부터 야야 너 희 데리고 성전에 갔더니만 심모원이라는 그 할배가 이 카더라 카던 그 심모원입니다.
그 심모원이 말하였으니 예루살렘 교회 야고보가 아마 어렸을 때 예수님의 행적들을 설교할 때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겠죠.
그때 시몬이 말하기를 다윗의 장막을 짓고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킨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에 관한 얘기예요.
일으키리니 그때 그게 이루어지면 이는 그 남은 사람, 유대인들 중에서 남은 사람 끝까지 믿음 버리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과 이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남아 있는 우리들과 그다음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모든 이방인들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라고 선포합니다.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럴 때 그리고 의견을 제시합니다.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멍하게 하지 말고 괴롭게 하지 말고, 괜히 올무와 멍예를 둬 가지고 그냥 문턱을 자꾸 세워서 그냥 그렇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겠다 했습니다.
우상에 들어 우상숭배하지 말자. 또는 우상에 들어진 재물을 먹는 문제도 더 갑니다.
음행은 여러분 이방인 중에 음행이 아주 난무했습니다.
그래서 음행을 피하는 것이 옳겠다. 이건 윤리에 관한 문제예요.
신앙과 윤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먹매어 죽인 거 도축을 할 때 목을 메어서 죽이게 되면 짐승을 죽이는 방법 가운데 칼로 찔러서 죽이는 방법도 있고, 동맥을 따는 방법도 있고, 그다음에 정수리를 쳐서 땅 쳐서 기절 시키듯이 죽이는 방법도 있어요.
근데 그 도축하는 방법 가운데서 목을 메어 죽이는 방법도 도축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을 메어 죽이면 피가 온 살 속에 이렇게 박혀 들어갑니다.
그렇게 죽이는 것과 피 생명은 피에 있으니까 짐승의 피를 피째 먹는 것을 구약성경 검하고 있는데, 목매어 주기 위해서 잡은 도축한 짐승과 피 피 먹는 것은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에 두 가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은 신앙과 윤리의 문제입니다.
근데 멍매어 죽음과 피는 문화의 문제예요. 뭐 문제라고요?
문화 이 말씀대로 하면 목매어 죽여서 도축한 짐승은 먹으면 안 됩니다.
옛날에 우리 요즘 식용하는 개 문자가 사라졌지만은 개를 잡을 때 이럴 때 목을 매서 그렇게 죽였어요.
목을 매 죽이는 게 죽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제일 쉬워요.
닭이라도 한번 잡아봤습니까? 닭을 목을 쳐보세요.
얼마나 그게 발악을 하는데요. 날개죽지를 잡고 목을 치는데 그 반쯤 쳤으면 얼마나 퍼덕거리는지요.
어렸을 때는 목이 반 떨어진 닭이 아버지가 잡다가 잘못 잡아가지고 온 마당에 피를 흘리고 다니면서 그래가지고 근데 이게 그게 도착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마추어들은 도착하기 쉽지 않습니다.
근데 목을 매가 질병이 높은 데 툭 떨어뜨려버리게 되면 그거는 줄만 당겨놓고 시간 지나면 2시간 버둥버둥하다가 죽어요.
그러면 이제 도축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줄만 당겨버리면 끝입니다.
칼로 피를 막 따고 막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근데 도축한 방법인데 그렇게 죽이게 되면 유대인의 음식 규정에 따라서 몸속에 피가 베여 있게 되 살 속에 그래서 피를 먹는 것과 목매어 죽여서 살 속에 배인 피를 그냥 낭자 서녀를 먹는 것은 같이 연결돼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문화에 관한 부분이에요.
이 말씀을 그대로 지금 적용하면 60년대 계곡이 한참 먹을 때 개고기 입으면 안 됩니다.
오메가 죽이니까 피를 먹는 선진국 먹으면 안 됩니다.
이거는 문화의 문제입니다. 왜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 이거 다 허용해도 되지 않습니까?
허용해도 됩니다. 복음은 아닙니다. 근데 왜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여지를 두느냐 그것은 따라 합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제하게 하려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예배에 와서 음식을 나누며 애찬을 나눕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음식 준비하면서 몸에 도축한 고기를 가져오고 피 가져와서 선지국 막 찍어 먹고 막 합니다.
맛있다 생간 막 찍어 먹고 이럽니다. 그러면 이 음식 문화가 달라 유대인은 그러면 유대인들은 아무것도 못 먹고 이래 봅니다.
교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식탁에 앉아서 교제하고 있는데 애착을 함께 나누게 되는데 그때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먹는 것들을 가지고 오면 그때 교재의 자리에서 문제가 생겨요.
그리고 우상에게 바쳐진 재물을 가지고 막 신방 갔는데 제사 음식 내놓고 가 참으로 먹자면서 막 이러면 난감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럴 때 그런 것들 때문에 음식에 관해서 문화적인 여지를 둔 겁니다.
복음은 절대적이지만은 문화는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게 복음이 이방 땅으로 완전히 풀어지고 난 뒤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제하지 않아요.
이방인들끼리 식탁의 교재 애찬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 문화에 맞는 음식을 먹으면 돼요.
구름포에 있을 때 어떤 분은 청양고추 너무 좋아하시고 어떤 분은 청양고추가 매운 거 들어가면 전혀 먹지를 못합니다.
그 두 분이 이렇게 음식할 때마다 갈등이 생긴 밥이 쉽습니다.
청양고추 따로 한 종지 내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그분들 것만 따로 들어서 간을 해놓고 나머지 신장고이 팍 넣으면 좋습니다.
매콤하고 칼라 저는 좋아합니다. 그 문화의 차이입니다.
근데 음식 문화는 함께 교제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힘입니다.
교회에서 찬양의 문화 찬양을 선곡하는 데도 나이 드신 분들과 젊은 세대가 곡조의 분위기가 다 달라요.
나이 드신 분들은 박자를 잘 못 따라가기 때문에 선율 좀 느린 성률 위주의 곡들이 좋습니다.
그거는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 선율 쪽으로 가면 좀 느린 곡으로 가면 나이 드신 분도 다 따라올 수 있습니다.
곡이 낯설어서 그렇지 그런데 비트가 빠르고 8비트로 쪼개서 부르는 곡들로 가면 16비트로 쪼개서 그냥 엇박적으로 가는 곡들을 부르기 시작하면 젊은 애들은 그 드럼비트가 들어가서 막 그러면 되게 좋아하지만은 연세 드신 분들은 그걸 못 따라갑니다.
문화의 차이입니다. 근데 문화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이방인 이방인처럼 오늘 시대에는 지금 한 국가 안에 한 민족 안에 세대 문화가 다릅니다.
세대의 가치가 다릅니다. 그 다른 세대 문화 세대의 가치 안에서 복음의 원정신과 문화에 대한 구분점들을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그럴 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 세대까지 전하는 말씀으로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유럽 교회 여기에 실패했습니다. 미국 교회가 여기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차에서 이제 막 예배 계획하고 막 그랬는데 때는 늦어버렸습니다.
근데 그렇게 문화를 따라간다고 해서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놓치면 큰일 납니다.
호지의 힐송 처치 힐송 처치가 찬양 문화로 성장했습니다.
그 컨셉으로 해서 성장했어요. 그 힐송처치를 그대로 따서 하는 교회가 홍대에 있습니다.
유송 처치입니다. 유송 처치, 뉴사운드 처치 2개의 교회가 있는데 두 교회 다 굉장히 찬양으로 뜨겁게 성장해 나가고 있다.
근데 그거 따서 하는 건 좋고 좋은데 그 호주의 힐송 처치 거룩한 노래 교회입니다.
좋습니다. 찬양 문화 좋고 다 좋았는데 복음의 본질적 부분에서 그들이 조금 미끄러지고 나니까 그만 날아가러 가버렸습니다.
동성애 문제 그다음에 그 안에 성 문제 이런 문제가 터지면서 교회가 완전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저는 잘 몰라요. 근데 그 정신 하나님 따야 됩니다.
문화적인 변화 다음 세대에 대해서 거룩한 찬양으로 접근하자 그 좋은 조건입니다.
근데 문화는 문화고 본질은 본질입니다. 본질은 피묻은 십자가 안에 깊이 서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그리고 그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부활하셨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과 오늘도 동행해 나가는 것을 배워가는 것, 그게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될 믿음의 여정입니다.
그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 많습니다. 그분들에 맞는 문화로 주일 예배를 세팅해 가려고 그래요.
그리고 젊은이가 있으면 애들은 애들 문화 속에서 그래서 나름 이렇게 해나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장 선한 길들을 더 열어주시고 더 이렇게 더 아름다운 예배와 정말 영혼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본질이 우리 교회 가운데 더 풀어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만 승리하는 저희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그 충만함을 이루어내는 은혜가 있기에 하나님 주장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5장16-35절 예루살렘회의 복음과 문화04 240924 원주희목사
2024.09.24 화 오전 10:37 ・ 26분 29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초대교회 때 정신을 참 우리가 귀하게 본받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 유대 율법주의에 남아 있지 않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교회가 결정했는데 그 결정에 대해서 베드로와 또 야고보가 얘기했고 그 결정을 결정문을 보낼 때는 만장일치라고 했습니다.
만장일치 그리고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선언했어요.
성령님과 우리는 정말 기도하고서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에 굉장한 권위를 담아서 그렇게 안디옥 교회에 풀어주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그런데도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 2차 전도의 3차 전도의 여절 안에서 계속 사도바울에 대해서 비난이 옵니다.
이방인 중에서 오는 핍박이 있었고요. 동종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는 두 종류예요.
동족 유대인들에게 선 핍박 주에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유대인들의 핍박은 사도 바울이 이란의 개소다 이렇게 하는 거고, 그리고 그냥 유대인들의 핍박은 저거는 돌로 쳐죽이는 차다 이런 부분 그래서 같은 예수를 전하는데 율법주의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을 향해서 저는 사도의 권위가 없다.
자기가 예수님과 같이 다녔나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는 자기의 전통, 교회의 전통 안에서 유대주의를 지켜나갑니다.
할례받고요. 그리고 음식들에서 지킬 거 지키고 절기 다 지키고요.
심지어 번죄나 화목제나 예수님이 다 피하신 제사도 다 지켰을 수 있어 의식으로 그 의식으로 지키는 거고, 실제는 이것은 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냥 문화로 받아들이면 그걸 지킬 수 있는 것이지요.
우상숭배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율법주의, 율법주의 안에서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이 그들이 믿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주의를 벗어나버리거든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지 할례를 받아서 의롭냐 할례를 자랑하는 자라 자들아 그에 사도바울이 아예 베어버리기 원하노라 이런 말을 썼습니다.
갈라디아서에 그 과격한 말이에요. 뭔 말인지 압니까?
잘라보라 이 말입니다. 할례를 자랑하느냐 남성의 성기에 그 표피를 자르는 폭용 수술인데 그거 하지 마 아이가 잘라보지 그러냐 비난하는 굉장히 반발하는 그런 말이에요.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그게 계속 사도바울의 선교사에 관해 세 가지 종류의 결핍박이 조직적으로 나머지 무관심하고 그렇게 핍박이 오는데 그걸 견뎌 나가면서 초대교회 복음의 정수 지킬 것과 버릴 것을 사도바울이 구분해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방 땅에 복음이 부어졌습니다. 이방 땅에 복음이 풀어지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죽고 한 세기 두 세기 지나니까 기독교인의 이단이 등장합니다.
말키온이라는 이단이 등장합니다. 말시온 말시온이 이단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구약 배경론자가 됩니다.
구약 성경 성경에 나오는 구약 성경의 하나님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 야외의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게 보이는 거예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말씀이 보기에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재편해요. 구약 다 빼고 마가복음과 바울 서신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신약 성경 이거다 성경은 이거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지주의가 등장합니다.
영주주의는 헬라 철학 안에서 복음을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헬라 철학에 귀속시킵니다.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론에 복음을 귀속시켜요.
그래서 그들이 해석하기를 예수님 부활은 없다. 육체는 헬라 철학의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한데 악한 육체에 다시 몸이 들어가는 거.
영이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이 죽으면 이제야 영의 세계로 이렇게 가는 것이 구원이다.
육체의 골이 어디 있냐 그럼 우리가 또 육체를 가지고 있는 건 뭐냐 육체를 가지고 있는 감옥에 갇혀 있는 거와 같다.
그래서 우리 육체에서 영원히 빠져나가는 그 구원을 이룰 때까지 있는 거다.
그러면 구원받고 난 뒤 육체를 가진 것은 뭐냐 육의 삶을 사는 건 뭐냐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다라든지 또는 몸으로 살면서 거듭난 사람은 육체로 무슨 죄를 지어도 뭔 일을 해도 육성을 따라 살아도 그것이 영을 더럽히지 않는다 라고 하는 논리를 주장하는 회개망측한 논리를 주장하는 영지주의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방임주의가 돼가지고 복음을 믿으면 무슨 죄를 지어도 괜찮다.
이 영지주의가 한국에 나타나는데 그게 구원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 것이니까 육은 무슨 죄를 지어도 괜찮다.
그리고 회개망척한 교수와 윤리를 파괴하고 복음이라는 중간선 안에서 율법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하는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유대인들에겐 맞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지옥 가느냐 그런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믿으면서 예수를 율법주의적 토대 안에서 예수를 믿어야 된다라는 것이 극단적인 사람이 안식겁니다.
따라 합시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그런데 그 이방인처럼이라는 것으로 나가서 말시온이 된다든지 영주주의가 돼 버리면 이것도 이단이에요.
그들은 율법 안에 지켜야 될 행위 규범들을 제하여 버 복음의 중심에 서서 깊이 깊이 나아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시대에 이런 유혹은 여전히 팽배합니다. 이스라엘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닉 교회, 유대 메시아닉 교회와 연결돼서 같이 활동을 해요.
유대의 절기 다 지키고 날짜도 교회력도 다 바꿔가지고 유대력을 따라서 교회 정치 다시 재편하는 분들이 계셔요.
그렇게 해도 지옥 가느냐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왜 예수가 그리스도인을 믿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복음보다 유대의 문화를 택한 겁니다.
복음보다 유대의 문화를 택한 거예요. 오늘날 드리는 진리는 부활절의 진리는 종교적인 의식을 따라서 유월절, 초실절, 오순절 이어지는 종교개혁을 따라서 정해져 있어요.
근데 주주감사절 주수 감사절은 유럽에 없습니다.
유럽 기독교에 없어요. 추수감사절은 미국 기독교에 있는 겁니다.
없어요. 없어요. 근데 한국 기독교가 한인들이 흘러가서 거기서 하면 모를까 유럽 기독교의 것이 아닙니다.
퓨리한 미국 회사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다시 유럽으로 다시 되돌아가면 미국 전통을 따라 할 수 있습니다.
퓨리탄 초기 미국을 개척했던 천교도들이 영국에서 배를 타고 미국 가서 첫 농사를 지었는데 그 농사 지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어요. 근데 첫 농사를 지으면서 그 땅에 자신의 정착지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들어진 의식이 추수 감사절입니다.
그래서 미국 기독교의 의식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어떤 일들을 경험할 때마다 민족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의식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성경에 나오는 가을 절기는 추수감사절이 아닙니다.
가을 절기는 마지막 재림을 기억하는 종말론적 의식으로 들어진 가을 절기는 7월 1일 날 나팔절이 돼서 나팔을 불고 7월 10일 날 대속제의를 하고 그리고 그 수장절 마지막 가을 추스의 모든 것을 참고해 드리는 수장절로 끝이 됩니다.
가을 절기는 추수의 절기와 구원의 서정을 같이 엮여서 그렇게 들려져요.
근데 가을 절기 지키면 지옥 갑니까? 안 지키면 진단 갑니까?
그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에요. 뭐냐 따라서 그것은 문화입니다.
문화 안에 복음을 잘 녹여낼 수 있습니다. 순수 감사들이라고 하는 미국의 절지를 한국은 미국 기독교회가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미국 교회의 전통을 한국 교회를 그냥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게 우리나라의 가을 추수 절기와 맞춰서 그렇게 이렇게 드리면 좋은데 미국 절기를 그냥 가져오다 보니까 11월 셋째 주에 합니다.
너무 늦어요. 지금 언제나 맞아질지 모르겠습니다.
기후 변화가 생겨서 11월 셋째 주에 가을 추수가 맞을지 모르겠어요.
적정한 날짜를 정한다면 10월 말이나 10월 중순이나 이때가 출수 감사들을 하면 우리한테 맞을 거예요.
근데 이게 표준 미국 절기를 따라가다 보니까 11월 셋째 주로 지냅니다.
셋째 주를 지내면 지옥 가고 첫 주로 지내면 천당 갑니까?
아니면 거꾸로 셋째 주로 지내면 천국 가고 첫 주로 지내면 지옥 갑니까?
이거 문화예요. 이 문화를 복음으로 오해하면 이단 소리 듣습니다.
안식교가 이단 소리 듣는 것은 그것 때문에 그래요.
안식일날 주일처럼 지내면 어떻습니까? 지옥 갑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안식일을 주일처럼 지내야 된다라고 주장하며 복음에서 회개하고 남을 비난하고 다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면 그분들을 기성교회는 이단으로 낙인을 찍을 수밖에 없어요.
이제 이 예루살렘교회 첫 번째 논쟁에서 그들은 문화보다 복음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문화보다 복음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야 되는 데 있어서 유대 문화가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들이 유대 문화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냐 그건 아니에요.
문화라고 하는 건 어려서부터 계속 그 바운더리 안에 살아왔기 때문에 삶의 양식이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그런 사람들은 유대 문화의 범주에서 살아왔습니다.
음식 먹는 거 한국 사람들은 김치 먹지 말라 하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한국 사람은 된장, 고추장 부지, 옛날에 버터 발라서 잼, 빵 드세요 하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그들의 문화 안에서 이걸 살아가는 삶의 양태를 바꾼 건 아니에요.
하지만 복음을 위해서라면 복음보다 문화라고 문화보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물골을 더 좋아한 겁니다.
할렐루야 이방 선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물꼬를 터준 것 그리고 지킬 것은 지켜야 된다 하는데 그 지키는 것도 찍히는 것도 보세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 이것도 우상에 더러운 그 은행은 윤리의 문제, 신앙의 문제입니다.
목매어 죽인 것 피 이것은 문화의 문제예요. 음식 규정에 관한 문제예요.
이방인들도 교회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 당신 집에서 뭘 먹을지 모르지만은 교회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함께 교제해야 되니까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절제해주면 좋겠습니다.
안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함께 식탁의 교재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거 안 들어가고도 맛있는 음식이 세상에 늘렸다 안 늘렸다.
네 많습니다. 굳이 강아지 고기를 안 넣어도 영양 보충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안 먹는 음식을 문화적 이질감이 있는 음식을 차려서 교회 애창 성령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애 자녀의 걸림돌이 제에 대한 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한 겁니다.
이건 서로에 대한 배려의 문제입니다. 할렐루야 이게 초대교회가 정한 규율이었습니다.
이 규율을 따라서 그들은 바나바, 바사바라와 유다, 유다와 신라를 함께 이를 증인으로 보내었습니다.
바 바울과 바나바만 보낸 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인도자인 유다와 신라를 함께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 땅에 내려가서 문하고 그리고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해서 만장일치로 보냈다고 하고, 유다와 신라가 말로 전하는데, 성령과 우리는 이 욕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다라고 선포합니다.
이 복음과 문화의 갈등은 계속 복음의 다른 세계, 다른 세대로 전파될 때마다 계속 넘어야 될 산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문화를 변화시킵니다. 변화된 문화 안에서는 그것이 다시 복음의 틀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게르만 민족에게 복음이 그렇게 많이 풀어지고, 중세 교회가 게르만 민족을 복음화할 때는 얼마나 순교자가 많이 나오고 헌신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게르만 민족을 복음하고 난 뒤에는 글을 모르니까 그림 그려서 복음을 전하는데 성경을 번역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게르만인들의 언어로 바꾸지 않아요. 성경을 라틴어로 써놨습니다.
성경은 원래는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고 히브리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을 로마가 국교화되면서 라틴어로 다 바꿔놨습니다.
라틴어로 다 바꿔서 로마 언어로 다 바꿔놨고 그 언어를 쫙 풀어놨는데, 근데 복음이 유럽 세계에 풀어지면서 게르만 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다시 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영어로 독일어로 프랑스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거 번역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중세의 우미나 신앙의 우미나가 시작된 겁니다.
모든 의식을 로마의 의식을 따라서 교회 예배와 모든 것을 정리합니다.
목회자들이 까운을 입는데 이 가운은 왜 입느냐? 지금은 우리가 안 입지만은 로마의 그게 관리들의 복장입니다.
로마의 관리들이 근무복이에요. 국교가 되고 나니까 교회의 목회자들도 공무원이 돼버린 겁니다.
공무원이 됐는데 어쩌다 공무원 어공이 됐습니다.
공무원이 됐는데 공무원으로 입어야 될 제복을 내려준 게 그게 로마의 공무원 의복에다가 스토 하나 붙여서 기독교적 의미를 붙여서 입은 게 까운입니다.
그게 그게 문화예요.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복음을 풀어놓은 복음을 의식화시켜놓은 문화입니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문화가 복음을 표현하는데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가 사라져버리는 그런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한번 따라 합시다. 날마다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담은 그릇도 필요하고 진정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그때 낡은 가족 부대는 버리든지 재생해야 됩니다.
낡은 가죽보다는 다 부풀어 올라가지고 그 옛날 문화가 복음의 족새가 되어버립니다.
그게 세계 교회사 안에서 그 일들 때문에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습니다.
피아노가 교회에 들어올 때 이 피아노가 원래 술집에서 쓰는 악기였거든.
오르간처럼 장엄하게 꾹꾹 눌러가면서 한 악기가 아니고 땅땅땅땅땅땅땅 따가면서 대중음악의 리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악기입니다.
오르간 치면서 락 음악 하는 거 봤습니까? 오르가는 느린 곡들에 특화돼서 꾹꾹 늘어가면서 피아노는요.
땅땅땅땅땅땅땅땅 비트가 빠른 음악들, 락이나 이런 음악들의 대중 음악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르간이 교회에 들어올 때 어디 술집에서 들어온 악기를 교회에 하면서 이거 못 들어오게 하려고요.
예배당 문을 요만하게 만들어 이거 못 들어오게 한다고.
근데 이 아기가 교회에 들어왔어 기타가 교회에 들어온다.
드럼이 교회에 들어올 때 이거 다 문화입니다. 지문도 관치면 어떻습니까?
시골교회는 할 수 없이 반죽기를 쓰는데 반죽기가 서는데도 필요에 의해서 들어서는데도 이것도 문화거든 문화는 따라 합시다.
상호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넘어갈 때는 문화는 포기해 버려야 돼.
문화는 박살내버려야 돼. 왜요? 복음이 장애물이 되니까 예루살렘은 이 결정을 했고, 이 결정을 함께 이루어 갈 유다와 신라를 보내었고, 안디옥교회는 이 말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위로와 말로 기뻐했다 했어요. 그리고 유다와 신라가 선지자가 돼서 함께 권면하고 굳게 하고, 하지만 유다와 신라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율법주의적 삶을 훈련받은 분이기 때문에 여기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고는 자신을 보내준 사람에게 돌아갔다 했습니다.
후에 신나는 바울 사도와 함께 선교팀이 되어서 그렇게 이방 선교회 팀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과 문화 정리합시다. 복음은 보다 문화보다 복음입니다.
한국인들은 한국 문화 안에서 복음 받아들입니다.
근데 한국인과 다른 이질적인 종족이 대한민국 땅에 지금 많이 있습니다.
엠제트 세대 그리고 다문화 가정들 이런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정수가 또한 풀어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킬 것은 지키고, 그다음에 문화는 상호 존중, 서로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십자가, 날마다 부활의 주님 의지에서 믿음의 승리를 이루어내는 저희들 되게 인도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그 충만함 가운데서 온전하게 속에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행15장35-41절 분열인가 파송인가 240925 원주희목사
2024.09.25 수 오전 9:01 ・ 17분 34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또 이 말씀에 나오는 모습들 속에서 아름다운 경계를 받을 것들이 우리가 잘 새겨지는 은혜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복음과 문화의 갈등 문제 때문에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얼마나 헌신하고 얼마나 애썼는지가 나옵니다.
초대교회 선교에 큰 이렇게 획을 이방 선조의 물꼬를 터가는 데 있어서 지도자들이 물꼬를 잘 터주었고 아름다운 결과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속에서 안디옥에 유용하며 수당한 다른 사람과 함께 이제 평화롭게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는 은혜가 있게 되었어요.
할렐루야 행정은 이렇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이렇게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하신 일들을 물꼬를 잘 열어주고 그래야 되지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 있는데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주관합니까? 바울 사도가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성향과 바나바의 성향은 사실은 함께 가는 게 참 좋지요.
바울은 좀 도전적입니다. 그리고 직선적이고요.
그리고 돌파력이 강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요 잘 다독이는 사람입니다.
두가의 기질이 목양의 은사가 강한 사람이 바나바라면 선교적인 능력이 강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나바 들어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라고 권합니다.
핍박지에 그냥 두고 온 제자들 그들에게 그래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성령과 능력 안에서 복음이 들어가는 것과 그래서 예수님의 영이 함께하는 것과 그들이 유대교 배경 안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성경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건한 생활의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복음만 잘 가미가 되면 돼요.
근데 이방인 생판 이방인들은 달라요. 생판 이방인들은 경건생활의 습관이 전혀 안 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경건 생활에 습관이 돼 있는데 코드 몇 개만 바꿔주면 돼요.
그리고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이 경건 생활을 지어 나갈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바르게 이렇게 잡혀가는 겁니다.
양육이 빨라요. 근데 유대인의 의식을 유대교의 의식을 극복하는 데 이게 문제가 있는 거죠.
사도바울은 악성으로 방문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진 결과들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그들도 유대인으로서 지켜야 될 성과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가야 될 걸음들에 대해서 나누고 확정해 주어서 더 아름다운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고 싶은 그런 마음들, 또 지나간 날 동안에 흔들렸던 상황들을 붙잡아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귀한 마음이지 않습니까? 이 일의 주동자가 누구냐?
바울입니다. 왜요? 부르심이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다른 거예요.
서로 다른 부르심이 원 팀 한 팀이 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할렐루야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뒤에 잘 케어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두개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함께 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여기에 뭐가 끼어드느냐 표면적으로는 마가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라고 했습니다.
마가라 불려지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라고 바나바는 말했는데 조카거든요.
근데 바울은 반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서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하고서 그냥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이야기하고 오븐 텀 말고 다음 틈에 들어가면 어떨까요?
미룰 수도 있는 것이고, 지혜롭게 거절하는 법들을 좀 배우면 될 수도 있습니다.
근데 가까운 사람일 때 이게 잘 안 돼요. 가까운 사람들일 때 지혜롭게 거절하는 게 아니고 직선적으로 니하고 내 사이 그냥 터놓고 말하는데 안 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더 큰 상처를 주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목양을 잘하고 양육을 잘하고 권위의 아들이라 불리어지는 바나바와 사랑장을 쓴 사도 바울이 다투는데 서로 심히 다투어서 피차 뭐하였으니 갈라섰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단의 역사 안에서 분열의 영은 잘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역사합니다.
기질과 성향이 다른 것들이 서로 모여서 누가 앞쪽 앞서가고 뒤에 케어하고 이렇게 붙기도 하고, 니가 좀 앞서가고 내가 좀 뒤에 가기도 하고, 이렇게 원팀이 되어져야 될 서로 다른 성향을 하나님은 교회에 불러 모아놨습니다.
그런데 이 다르다는 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성향이 다르다. 바나바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누구를 목회하려고 하냐 마가를요 사도 바울은 선교를 하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현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력이 더 강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목회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있습니다.
부르심이 달라요. 부르심이 달라서 이 마가를 데리고 가면 지난번에도 도망쳤는데 이게 오히려 긁어칠 수 있다는 거지 또 바울 사도는 마가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되게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마가가 1차 선교 여행 중 열병에 걸렸는데 열병에 걸린 마가를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간호하고 돌보고 기도해주고 병 낫기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했는데 그리고 나왔습니다.
낳고 난 뒤에 자신 안에 있는 부잣집 샌님이니까 두려움들 속에서 그만 도망가버린 사람이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마가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너무 많습니다.
섭섭할 수 있죠. 윽섭한 마음 때문에 사도바울은 데리고 갈 수 없다라고 하고 바나바는 그래도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 된다라고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선교지에 가서 선교사들을 때로는 케어해 줘야 될 필요가 있죠.
후회 선교사를. 그런데 주 타깃은 누구냐 그 선교지에 있는 현지인들이에요.
사도바울의 관심은 그쪽에 있는데 이 갈등들, 이것이 의견이 서로 선한 의견인데 선한 의견들이 다툼의 소지가 되었습니다.
피차 갈라졌습니다. 이 다툼의 형이 어디서부터 한 겁니까?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를 하나 되게 하려고 하는 몸부림들 속에서 그냥 이것을 연합시키고 그냥 하나 되게 했는데, 그 영적 전투를 그렇게 치르고 난 뒤에 거꾸로 오히려 이들이 다툼의 대상이 되어져 버린 겁니다.
다툼의 영은 이렇게 들어붙게 되는 것이지, 근데 이렇게 헤어지게 된 것들이 마가와 이렇게 헤어지게 된 것, 이렇게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사도 바울이 마지막 그가 임종을 맞이할 때 디모데에게 권하기를 마가를 데리고 와라.
이 마가가 바나바를 통해서 함께 선교에 구부르러 다니다가 베드로 사도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차근차근 받아서 기록한 성경이 마가복음입니다.
베드로전서 후서도 아마 마가가 대피를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또 다른 사도의 제자가 돼서 이렇게 자라가는 겁니다.
여러분 내하고 안 맞는 사람이 내하고 안 맞는 거지 하나님한테 안 맞는 건 아닙니다.
사람이 자랑하는 수 없는 과정들이 있고 그 과정들 속에서 때로는 배신도 때로는 서러움도 아픔도 눈물도 막 그렇게 지나가는 거예요.
윤수희 목사님이 그 얘기를 하십니다. 사람 하나 길러내는 게 얼마나 많은 과정을 지나가는지, 얼마나 많은 과정을 지나가는지, 멘토가 되어서 멘토링을 하는 과정이 얼마나 많이 손을 재어가고 얼마나 많은 참마음과 인내의 시간이 지나가는지 또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분의 지도를 다 받지는 못했지만 또 그분이 하는 흐름들 속에 내가 제자가 된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한마디가 참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사람 하나 길러내는 것 많은 과정을 지나가는 겁니다.
바나바가 넘어진 것도 덮어줘야 되고, 그리고 또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또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고 하는 사바나바의 마음도 귀한 거고요.
그것을 선조지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크기 신경 쓸 만큼 중심을 둘 수 없으니 오븐 뒤에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사도바울의 단호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다툼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 큰 아픔이지요.
그리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아픔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와 바울은 나누어졌고요.
바울은 함께 동역할 신라를 택해서 떠나서 수리야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굳건하게 견고하게 세우는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의 일을 해나갈 때 수많은 과정들을 지나갑니다.
때로는 마가의 배신도 지나갈 수 있고 때로는 이런 상처 저런 상처를 지나갈 수 있고 함께 동역했던 사람들과 갈등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때에도 또다 또 다른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내 생명 붙들고 끝까지 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들 속에서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바울 사도의 갈등은 갈등이고, 그는 또 그의 부르심을 따라서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부르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마가를 잘 케어하는 채 시간을 꽤나 많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마가를 또 더 좋은 사도인 베드로 사역의 사도에게 전가해서 베드로 사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그 여정을 걸어봤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베드로 사도가 길러낸 제자가 된 마가와 바울 사도가 빌러낸 제자인 디모데가 서로 의 형제 지간을 그렇게 맺고 바울 사도 임종의 마지막 여정에 함께 저에 대해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나눌 대상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길러가시고 세워가시는 여정인 것입니다.
그 여정의 모퉁이에서 우리가 때로는 바나바일 수 있고 때로는 바울일 수 있고요.
때로는 우리의 멘토들에게 때로는 거역하기도 하고 순종하지도 못했던 마가일 수도 있고요.
마치 아들처럼 순종했던 디모데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 모든 것을 디자인하시고 그 모든 관계들 속에 끌어가시는 이가 하나님인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안디옥에서는 바나바가 리더이고 선교지에 나가면 바울 사도가 리더이고 리더십이 서로 체인지 되어지는 누가 리더가 되느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그것이 우리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얘기하십니다.
내 모든 일의 리더는 누구십니까?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위대한 원팀을 만들어 가고 그 속에서 바나바를 마가를 길러낼 수 있고 그 속에서 디모데를 길러낼 수 있는 그러한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마가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것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위대한 사도들이 다투고 갈라서고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들을 보면서 주님 우리가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이 얼마나 갈등이 있고 얼마나 다툼이 있고 얼마나 서열 문제가 있고 얼마나 분열될 수 있는 수많은 아픔들과 눈물들을 지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교회를 이끌어가신 이가 주님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이 대안의 교회 안에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교회의 역사가 다시 세워지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함께해 주시어서 이 마지막 때에 다시 한 번 복음의 불길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 땅 가운데 펼쳐낼 수 있는 위대한 교회들이 이 대한민국 땅에 한없이 한없이 세워지게 축복해 주시고, 아버지 전 세계적으로 그 어려운 고비들을 지나가고, 기후 위기 속에서 우리의 때가 어느 때인지를 우리가 모르는 때를 살아갑니다.
궁금한 때를 살아갑니다. 깨우쳐 주시옵고 우리의 때에 맞는 헌신들을 하며 그 믿음의 여정을 걸어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열매를 이네난 땅에 이루어 낼 수 있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함께해 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