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보제의 역사 룽바오자이(荣宝斋)는 유명한 베이징 류리창시제(琉璃厂西街) 에 있다.
룽바오자이 이야기
그 전신은 송죽재(松竹斋)이며, 청나라 광서 20년(기원 1894년)에 서예가와 화가들이 모여서 교류하고 왕래하는 장소이다. 역사 자료의 기재에 의하면 룽보우자이의 전신은 송죽재이며, 청나라 강희 11년(기원 1672년)에 건설되었으며, 창립한 인물은 저장성 사람(浙江人)이라고 한다. 성은 장(张)씨이고, 처음에는 수도에서 관료를 하면서 녹봉을 모아 작은 "난즈뎬(南纸店, 남 지물포)을 개업하였다고 한다.
지물포의 경영 범위는 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서화용 종이와 각종 부채 표면 종이, 병풍 등등; 둘째는 붓, 먹, 벼루, 먹통, 주발, 인주, 문진, 붓걸이 등 문방 용품이고; 세 번째는 서예가, 화가, 전각가들의 작품 판매 가격을 정하는 것이다.
당시 류리창(琉璃厂)내에서 난즈뎬(南纸店)은 매우 유명했다.
이유는 이곳에서 관가의 서류와 상소 문서 종이를 도맡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태평스러운 전제독재 시대에 조정에는 무위도식하는 관료들이 빈둥대고 있었다. 심지어는 다른 성의 낮은 급의 관리들이 상주를 올릴 때에도 문서에 "속자(破体字)"가 있거나 형식이 부합되지 않는 것을 트집 잡는 것을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신하가 상소문 올릴 때에는 글자가 정연해야 하고, 특히는 역대 황제에 대한 미사여구를 신중하게 적어야 하며 "천변 황(天边皇)" "베이즈(背旨)", 뤄디천(落地臣)" 등 꺼리는 것이 많았다. 조금만 소홀하여도 상주를 검열하는 대신에게 지적당하여 녹봉을 삭감하거나 강등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상소를 선택할 때에는 꼭 순결하고 티가 없는 최상의 상품을 사용해야 했다.
송죽재에서는 상소를 받치는 것이 장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상주를 선택하는 일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하나의 상주는 10여 명의 손을 거쳐 골라낸 것이며, 조금이라도 먹의 흔적이 있으면 바로 불량품으로 분리하였다. 그러다 보니 가격은 다른 것에 비하여 50퍼센트 정도가 더 비쌌으나 판매된 상주는 아무런 흠도 없어서 마음 놓고 사용하여도 되었다. 그리하여 각 지역 사관들은 모두 송죽재의 물건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장사도 잘되었다.
종이장사에서 목각 인쇄기술의 중심지로 허나 송죽재의 주인은 관료집안으로 장사에 능숙하지 못하였고, 아편전쟁 이후 사회경제적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하여 송죽재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주인은 베이징의 많은 유명 인사들을 알고 있는 좡후천(庄虎臣)을 경영인으로 초청하여, 1894년에 가게 이름을 "룽바오자이"로 고쳤다.
"글로 친구를 사귀고, 명예를 보물로 여긴다(以文会友,荣名为宝)" 라는 뜻을 담아 당시 저명한 서예가 루룬샹(陆润庠)을 모셔서 "荣宝斋"라는 편액을 썼다. 당시 룽바오자이의 목각화 인쇄는 국내외에 이름을 날렸으며, 수공업장의 목수는 모두 문학 예술계에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는 현재의 어떠한 인쇄 방법도 비할 수 없는 기술이다.
목각화 인쇄 기술은 중국에서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미 당나라 셴퉁 9년(기원 868년)에 왕제(王阶)라는 사람이 이 기술을 사용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金刚经)》의 속표지 삽화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당나라 시기부터 서적에는 삽화가 많이 추가되었으며, 16세기에는 채색으로 된 삽화도 있었다. 근래 수십 년간 룽바오자이는 이 전통 기술의 기초 상에서 부단한 개선과 창조를 하여 소품문을 인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쇄 작업이 복잡한 비단에 그리는 그림과 편폭이 긴 서예 작품도 만들 수 있다. 모조품이라고는 거의 불가능했다.
룽보우자이에서 목판화 인쇄 기술로 제작한 《72편 시전(七十二候诗笺)》,《24절기 임명 문서(二十四节令封套)》등을 보고, 루쉰(鲁迅)과 정전둬(郑振铎)는 이곳이 류리창의 많은 점포들 중의 "바이메이(白眉, 걸출하다)"라고 하였다.
현재 룽보우자이에는 대량의 고금 서화가들의 작품과 목각화 인쇄 서화가 모여 있으며, 문방사보, 표구 등을 공급하고 있으며, 가공 복원 등 서비스도 있다. 이는 서화가들의 창작에 많은 편리를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화예술 시장의 번영과 국제적 교류를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예전 제백석(齐白石) 선생도 룽바오자이에서 복제한 자기 작품의 진위를 분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현재 룽보우자이의 편액은 궈모뤄(郭沫若) 선생이 쓴 거다.
안내전화: 63034198
주소: 宣武区琉璃厂西街19号
룽바오자이(荣宝斋,róng bǎo zhāi,영보재) 소개 발췌